인간 실격: 직시하지 못한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직시하지 못한 다자이 오사무

2023-01-17 0 By 커피사유
인간 실격
Category:
Publisher:
Published: 2022
"인간을 정확하게 관찰했지만, 직시하지는 못한 다자이 오사무" - 다자이 오사무의 관찰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의 태도에는 동의할 수 없다. 요조는 스스로의 인간됨을 기각하지만 그것은 '요조 자신'과 인간의 차이,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요조의 '이상적 인간'과 현실 속의 인간의 차이로부터 일차원적으로 기원하는 오류이다. 불행히도 요조는 자신의 존재가 정확히 어디에서 기원하는지를 망각하고 있다. 깊은 회의를 느끼는 자라면, 이상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현실 그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도피이지, 직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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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한줄평 "인간을 정확하게 관찰했지만, 직시하지는 못한 다자이 오사무" 총평 #1. 다자이 오사무는 사실상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인간 실격 人間失格》에서 이렇게 썼다. 밥을 안 먹으면 죽는다는 말은 저에게는 그저 듣기 싫은 위협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 미신은 (지금까지도 저에게는 뭔가 미신처럼 ...

  • 깊이
    4.2
  • 가독성
    4.5

한줄평

“인간을 정확하게 관찰했지만, 직시하지는 못한 다자이 오사무”


총평

#1.

다자이 오사무는 사실상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인간 실격 人間失格》에서 이렇게 썼다.

밥을 안 먹으면 죽는다는 말은 저에게는 그저 듣기 싫은 위협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 미신은 (지금까지도 저에게는 뭔가 미신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언제나 저에게 불안과 공포를 안겨 주었습니다.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래서 일해서 먹고살아야 한다는 말만큼 저에게 난해하고 어렵고 협박 비슷하게 울리는 말은 없었습니다.

즉 저에게는 ‘인간이 목숨을 부지한다.’라는 말의 의미가 그때껏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 불안 때문에 저는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참 행운아라는 말을 정말이지 자주 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저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나한테는 재난 덩어리가 열 개 있는데 그중 한 개라도 이웃 사람이 짊어지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는 충분히 치명타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즉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웃 사람들의 괴로움의 성질과 정도라는 것이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용적인 괴로움, 그저 밥만 먹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해결되는 괴로움. 그러나 그 괴로움이야말로 제일 지독한 고통이며 제가 지니고 있는 열 개의 재난 따위는 상대도 안 될 만큼 처참한 아비지옥일지도 모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자살도 하지 않고 미치지도 않고 정치를 논하며 절망도 하지 않고 좌절하지도 않고 살기 위한 투쟁을 잘도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괴롭지 않은 게 아닐까? 그런 사람들은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한 번도 자기 자신에게 회의를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편하겠지. 하긴 인간이란 전부 다 그런거고 그렇다면 만점인 게 아닐까. 모르겠다……. 밤에는 푹 자고 아침에는 상쾌할까? 어떤 꿈을 꿀까? 길을 걸으면서 무엇을 생각할까? 돈? 설마 그것만은 아니겠지. 인간은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돈 때문에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아닐 거야. 그러나 어쩌면…… 아니, 그것도 알 수 없지…….

pp. 18-19.

그의 관찰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의 태도에는 동의할 수 없다.

#2.

괴로움. 실용적인 괴로움. 물질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그것으로 해결되는 괴로움. 《인간 실격》에서 화자 요조가 지적하는 이웃 사람들의 괴로움은 왜곡되거나 날조된 괴로움이다. 요조의 지적에는 자신이 겪는 괴로움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물질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냉소가 깔려 있다.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한 번도 자기 자신에게 회의를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닌가”하고 요조가 의심하는 것에는 자기 자신은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아니며 ‘자기 자신에게 회의를 느낄 수 있는’ 존재로서 스스로를 분리하는 행위가 깔려 있다.

그러나 요조 또한 ‘인간’이 아니던가. 요조는 스스로의 인간됨을 기각하지만 그것은 ‘요조 자신’과 인간의 차이에서 일차원적으로 기원하는 오류이다. ‘요조 자신’과 현실 속의 인간이라는 차이는 더 정확하게는 요조가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과 현실 속의 인간의 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요조는 이상적 인간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요조는 자신의 존재가 정확히 어디에서 기원하는지를 망각하고 있다. 요조의 ‘인간임을 부정하기’는 이 망각에서부터 출발한 죄의식이자 정신병에 다름 아니다.

#3.

그런 사람들은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한 번도 자기 자신에게 회의를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자기 자신과 세상 모두에게 깊은 회의를 느껴본 적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한 투쟁을 지속하는 이웃들이야말로 현명하다.

나는 요조가 느끼는, 나아가 다자이 오사무가 느끼는 바로 그 괴리, 괴로움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명백히 느끼기 때문에 나는 자신뿐만이 아닌 인간의 부정적인 모습 그마저도 모두 인정하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화자가 구역질을 연신 내뱉는 그러한 위선과 거짓말마저,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자 자연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고, 이를 오히려 이용하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 개인이 회의를 느끼는 때는 언제인가? 온전히 현실에 기초한 엄격한 관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 한 개인의 상상력과 창조력이 자그마한 그의 지식을 비틀고 짜집어 만들어낸, 현실과 닮았지만 현실 그 자체가 아닌,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상(狀)과 현실이 충돌함을 확인하였을 때. 바로 그때에만 사람은 회의감에 빠진다. 개인은 무존재, 또는 비존재의 영역인 이상 속에서 살지 않는다. 생리학적으로 물질에 귀속될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은 현실 속에서 산다. 오직 개인은 이상 속에서 살 수 있다거나 산다고 착각할 뿐이다.

인간의 부정적인 모습을 거부하려는 행위는 하나의 정신병에 다름 없다. 그것은 니체 식으로 표현하자면 ‘너무 유약하기’ 때문인 것이며, 나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찰된 사실을 거부하려는 행위, 필사적으로 목격한 사실을 부정하려는 행위야 말로 변화에 대한 가장 크고 어리석은 걸림돌이다. 바꿀 수 있으려면 우선 자신이 존재하는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고 움직이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한 깊은 회의를 느끼는 자라면, 오히려 그러한 이상이란 방향이자 종착지가 되어야 하지, 그것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현실 그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도피이지, 직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억에 남는 문구들

#1.

그러나 이런 것은 정말이지 하찮은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에는 서로 속이면서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저는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저도 익살로 아침부터 밤까지 인간들을 속이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니 뭐니 하는 도덕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그 요령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했더라면 제가 이렇게 인간을 두려워하면서 필사적인 서비스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인간의 삶과 대립되어 밤마다 지옥 같은 괴로움을 맛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즉 제가 머슴과 하녀들의 그 가증스러운 범죄조차 아무한테도 호소하지 않았던 것은 인간에 대한 불신 때문도 아니고, 또 기독교적 박애주의 때문도 아니고, 인간이 저 요조에게 신용이라는 껍질을 단단히 닫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조차도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면을 가끔 보이셨으니까요.

pp. 31-32.

#2.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고 싶어 하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아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다케이치가 말한 것처럼 과감하게 ‘도깨비 그림’을 그려 낸 것입니다. 여기 장래 나의 동료가 있다고 생각한 저는 눈물이 날 정도로 흥분해서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라고 왠지 모르지만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다케이치에게 말했습니다.

pp. 46-47.

#3.

“어, 이런.”

호리키는 진정한 효자처럼 노모를 보고 진심으로 황공해했습니다. 말투도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정중했지요.

“죄송합니다. 단팥죽입니까? 저런, 호사스럽게. 이렇게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 볼일이 있어서 금방 나가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아닙니다. 모처럼 어머니의 자랑거리인 단팥죽을 만드셨는데. 황송합니다. 먹겠습니다. 자네도 들지. 우리 어머니가 일부러 만드신 거라고. 야, 이것 참 맛있다. 야, 참 호사스럽군.”

꼭 연기만도 아닌 듯 무척 기뻐하면서 맛있게 먹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것을 훌쩍거려 보았습니다만 팥이 적어서 싱거웠고, 새알심을 먹어 보니 새알심이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였습니다. 가난 자체를 경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때 저는 그것이 맛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노모의 성의도 마음에 스며들었습니다. 저한테는 가난에 대한 공포심은 있어도 경멸심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닫팥죽과 그 단팥죽을 기꺼워하는 호리키에 의해 저는 도시 사람들의 조촐한 본성, 또 안과 밖을 딱 부러지게 나눠서 살고 있는 도쿄 사람들의 실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안팎 구별 없이 그저 인간의 삶에서 끊임없이 도망쳐 다니는 바보 멍청이인 저만 완전히 뒤에 쳐져 호리키한테조차 버려진 것 같은 느낌에 당황했고, 칠이 벗겨진 젓가락을 움직이면서 견딜 수 없는 쓸쓸함을 맛보았다는 사실을 기록해 두고 싶을 뿐입니다.

pp. 102-103.

#4.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영에 겁먹는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 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은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스럽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pp. 117-118.

#5.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언뜻 이 생각이 머리 한쪽 구석을 스치자 흠칫했습니다. 만일 저 도스토 씨가 죄와 벌을 유의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의어로 병렬한 것이었다면?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할 수 없는 것. 얼음과 숯처럼 융화되지 않는 것. 죄와 벌을 반의어로 생각했던 도스토옙스키의 바닷말, 썩은 연못, 난마(亂麻)의 그 밑바닥…… 아아, 알 것 같다. 아니야, 아직…… 하며 머리에서 주마등이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pp. 139-140.

#6.

도쿄에 큰 눈이 내린 방이었습니다. 저는 취한 채 긴자 뒷골목에서 여기는 고향에서 몇백 리, 여기는 고향에서 몇백 리 하고 작은 목소리로 되풀이해 중얼거리듯이 노래하면서 내리는 눈을 구둣발로 차며 걷더가 갑자기 토했습니다. 그것이 저의 최초의 각혈이었습니다. 눈 위에 커다란 일장기가 그려졌습니다. 저는 잠시 쭈그리고 앉아서 더럽혀지지 않은 눈을 양손으로 쓸어 담아 얼굴을 씻으면서 울었습니다.

여기는 어디의 샛길이지?

여기는 어디의 샛길이야?

멀리서 어린 소녀의 서글픈 노랫소리가 환청처럼 희미하게 들려왔습니다. 불행. 이 세상에는 갖가지 불행한 사람이, 아니, 불행한 사람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러나 그 사람들의 불행은 소위 세상이라는 것에 당당히 항의할 수 있는 불행이고, 또 ‘세상’도 그 사람들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해 줍니다. 그러나 제 불행은 모두 제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항의할 수 없었고, 또 우물쭈물 한마디라도 항의 비슷한 얘기를 하려면 넙치가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들 전부가 뻔뻔스럽게 잘도 이런 말을 하는군 하고 어이없어할 것이 뻔했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말하는 ‘방자한 놈’인 건지 아니면 반대로 마음이 너무 약한 놈인 건지 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죄악 덩어리인 듯, 끝도 없이 점점 더 불행해지기만 할 뿐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없었던 것입니다.

pp. 150-151.

#7.

이제 저는 죄인은커녕 미치광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아니오, 저는 결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 한순간도 미친 적은 없었습니다. 아아, 그렇지만 광인들은 대개 그렇게들 말한다고 합니다. 즉 이 병원에 들어온 자는 미친 자, 들어오지 않은 자는 정상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지요.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호리키의 그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미소에 저는 울었고, 판단도 저항도 잊어버렸고, 자동차를 탔고, 여기에 끌려와서 정신 이상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나가도 저의 이마에는 광인, 아니 폐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겠지요.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p. 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