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김장하: 줬으면 그만이지

‘어른’ 김장하: 줬으면 그만이지

2023-01-07 0 By 커피사유
줬으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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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2023
"진정한 '어른'이란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임을 선물받는 이야기" - 책 『줬으면 그만이지』는 '선물'에 대한 이야기다. '아름다운 부자'라든지, '미담'이라든지 하는 평가는 이 책에 대한 올바른 감상일 수 없다. 책 『줬으면 그만이지』는 '선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대로 "줬으면 그만이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선물'이 더 이상 "줬으면 그만이지"가 아닌 시대에서 한 사람이 일생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잊고 있는 것인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던지는 강력한 경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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줬으면 그만이지

한줄평 "진정한 '어른'이란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임을 선물받는 이야기" 총평 책 『줬으면 그만이지』는 '선물'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이들은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을 '씀씀이가 이타적인 부자'라고 정의내리고자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름다운 부자'라든지, '미담'이라든지 하는 평가는 이 책에 대한 올바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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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진정한 ‘어른’이란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임을 선물받는 이야기”


총평

책 『줬으면 그만이지』는 ‘선물’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이들은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을 ‘씀씀이가 이타적인 부자’라고 정의내리고자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름다운 부자’라든지, ‘미담’이라든지 하는 평가는 이 책에 대한 올바른 감상일 수 없다. 그 말들 속에는 사실 “나는 저 사람과 달라, 저이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다”라고 하는 선언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씁쓸한 선언이 아니냐고 되묻는 이들도 있을 수 있겠으나, 나로서는 삶의 풍족하지 못함을 곱씹는 쓴맛보다도 이 책이 던지고 있는 핵심을 정확히 궤뚫지 못하고서 걷돌고 있는 비겁함의 맛이 느껴진다. 책 『줬으면 그만이지』는 ‘선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대로 “줬으면 그만이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선물’이 더 이상 “줬으면 그만이지”가 아닌 시대에서 한 사람이 일생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잊고 있는 것인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던지는 강력한 경고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자신의 길에서 빠져나와 시간을 써가면서 타인을 ‘주체’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선물 행위라고 정의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 ‘선물’은 더 이상 ‘타인을 고려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타산(利害打算)이라는 네 글자가 어느 때보다도 가장 날카롭게 세상사를 뚫는 때에, 사람들은 ‘타인’이 아닌 ‘자신’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의 지적대로 “기껏해야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갖고 싶어하는 것, 사실은 그보다 조금 못한 것을” 남에게 선물한다. 타인이 가지고 싶은 것에 대한 진정한 숙고에서부터 출발하지 않고, ‘오고 가는 것’이라는 관념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타인’이 설 공간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 사고할 수 있는 능력, 인간성의 가장 중심이자 소중한 바로 그 능력이 이제 점차 퇴색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것 ―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인물이 살아온 삶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울림 중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의 삶을 살아내기도 벅차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 완전하고 또한 불가역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이 책의 제목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야 할 생각 그 자체를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준 것’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순간 그것은 이미 선물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선물은 오직 ‘타인’ 입장에서 생각하여 준비했을 때, 그 선사 과정에서 ‘나’에 대한 생각이 단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았을 때에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명제야말로 우리가 바로 기억해야 하는 것이며, 이 책의 가치를 논할 때 필시 가장 먼저 나와야 하는 말이이라.


기억에 남는 문구들

#1.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겟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p. 305.

#2.

… 가난했던 한 시민운동가는 아들의 대학 입학금과 등록금을 마감일까지 마련하지 못하자 급한 마음에 염치불구하고 김장하 선생을 찾아갔다. 빌려달라고 했다. 선생의 도움으로 등록을 마치고 전화를 드렸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제가 빠른 시일 내에 갚겠습니다.”

그랬더니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에게 갚을 필요는 없고, 다음에 당신처럼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그때 그 사람에게 갚으면 됩니다.”

p. 155.

#3.

” … 저는 원래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는 오직 가난 때문에 하고 싶었던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한약업에 어린 나이부터 종사하게 되어 작으나마 이 직업에서는 다소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제가 본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욕심을 감히 내게 되었던 것은 오직 두 가지 이유 즉,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가장 좋은 일이 곧 장학 사업이 되었던 것이고, 또 학교의 설립이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전후로 해서 본 명신고등학교는 탄생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유에서 설립된 것이 이 학교이면,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본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교가 공공의 것이 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립화요, 그것이 국가 헌납이라는 절차를 밟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의 본교는 제 전부나 다름이 없습니다. 저의 신조는 앞서 말씀드렸듯, 제가 거둔 금전적 이득은 제 자신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필요 이상은 절대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그 근검 절약의 결과로 쌓이고 쌓인 것이 바로 본교인 것이고 또 그것은 금전적으로도 저의 전 재산이며, 정신적, 상징적으로도 제 전부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내버려두고 떠나는 이 자리에 서고 보니,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라 해서 아깝고 서운한 느낌이 없을 수야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그 마음은 향후의 본교에 대한 더 한 층의 애정으로 키워 나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다시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새로운 것을 쌓아 올려 볼 생각도 해 봅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는 또 반대하고 나무라는 의견이 있음을 저는 알고 있고, 또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의견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학교의 공립화만이 학교의 장래를 위한 최선의 방책인가 하는 것이며, 또 본교가 가졌던 명문 사학으로서의 긍지, 명신인이라는 그 따뜻한 울타리가 엷어지는 것이 아니냐 하는 우려일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능력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아픔이 크다 할지라도 그것은 잠시 뿐인 것입니다. 제가 계속 이 학교를 움켜쥐고, 지원을 나름대로 해 나간다 하더라도 저의 생전이나 또는 사후에 저와 저를 둘러싼 제반 환경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고, 본교의 모습 또한 현재의 발전적인 것을 영원히 지속되리란 보장 또한 희미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공립화의 길을 걸어야 할 수밖에 없다면 시기는 바로 이때가 가장 좋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곧 학교가 완전히 정상 궤도에 들어서 저의 큰 지원 없이도 운영이 되게 되었고, 학교의 발전 또한, 어느 정도 탄력이 붙었기에 이제 제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 시기가 바로 이때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

pp. 198-200.

#4.

‘형평운동’ 절실한 ‘개혁시대’

우리는 흔히 ‘형평의 정신에 비추어…’라는 표현을 쓴다. ‘형평’은 저울(衡)처럼 공평하고 평등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인권이라는 말은 있어도 인권을 지키고 존중하려는 의식은 빈약한 현실에서 ‘형평의 정신’ 하면 잊을 수 없는 단체가 있다. 바로 ‘형평사'(衡平社) 이다.

형평사는 1923년 경남 진주에서 창립되어 1935년에 ‘대동사'(大同社)로 이름과 성격이 바뀌기까지 13년간 활동한, 이른바 ‘백정’을 해방하고자 했던 인권단체이다. 창립 뒤 매우 빠르게 성장하여 1928년에는 전국의 단우조직체가 1백62개, 활동가는 9천6백88명에 이르렀다. 일제는 그 조직이 두려워서 고려혁명당 사건(1927)을 계기로 지도자들을 잡아가두고, 형평청년전위동맹 사건(1933)을 조작해내기까지 하였다. 4월24일은 바로 그 형평사 창립 70돌 기념일이다.

오늘날 형평운동은 두 가지 점에서 큰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우리 근대사상 최초의 인권운동이었다는 점이다. 형평운동은 인권이라는 말부터가 낯설던 때에,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을 집단적인 운동으로 실천하고자 했던 최초의 움직임이었다.

백정이라 불리던 사람들은 지금은 상상조차 힘든 차별 속에서 5백년 이상 천대를 받으며 살아왔었다. 갑오년(1894)에 이르러 차별을 철폐한다는 선언은 있었지만, 호적에서마저 ‘도한'(屠漢)이라 명기하여 일반인과 구별하고 있었다. 그러한 신분차별의 두터운 벽을 허물고 너와 내가 같은 사람이니 다 함께 사람답게 삶이 마땅하다는 주장을 과감히 내세우고 실천했던 형평사원들은, 밝은 세상을 열어젖힌 선구자요 선각자였다.

형평운동이 지닌 또 다른 의의는, 그것이 시민들 자신의 주체적인 자각과 노력에 의해 이룩되었다는 점에 있다. 차별받던 당사자들은 멸시와 천대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뜻잇는 일반 시민들은 과감하게 인습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차별받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었다. 형평사를 창립했던 강상호, 신현수, 이학찬, 장지필, 천석구 등 가운데는 이른바 백정 출신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새 백정’이라는 비난과 반형평운동의 거센 역류에도 굽히지 않고 인간 평등의 숭고한 정신을 위해 헌신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의를 실현하기에 서슴지 않았으며, 일제의 혹독한 식민통치 아래서 민족의 진정한 단결을 추구했던 선조들의 신념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오늘날 이른바 ‘백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도 신분과 직업으로 사람을 차별한다면 구시대의 유물로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여러 모습의 다른 차별들의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그리고 몸이 자유로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등등 사이의 차별과 몰이해가 사람답게 살려는 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에서 방황하게 하고 있다.

형평운동 70돌을 맞아 진주에서는 시민들이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경상대학교의 협조 아래 국제학술회의와 기념식을 가졌고, 머지 않아 기념탑도 세울 것이다. 이런 일들은 모두 광복 뒤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참으로 뜻있는 선조들의 노력이 그토록 오랫동안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기념식조차 열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차별과 억압이 존재하는 사회였음을 뜻한다고 본다. 요사이 나날이 터져나오는 지도층의 비리 또한 그 점을 확인시켜 준다.

우리는 지금 개혁과 민주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진정한 개혁과 민주화를 앞당겨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형평정신 곧 평등사상을 바탕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형평사’는 지금 없어도 형평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완전한 평등을 추구해온 발자취가 곧 인류의 역사 아니었던가. ‘형평운동 70주년 기념사업회’가 형평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북돋워서, 우리 사회를 좀 더 따뜻하고 정의롭게 만드는 시민인권운동단체로서 다시 출발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p. 233. 에 실린 1993년 4월 25일자 한겨레 ‘더불어 생각하며’ 칼럼.

#5.

“… 그 다음 하나는 또 스님 이야기입니다. 스님이 그 눈보라가 치는 어느 추운 겨울날, 고개 마루를 넘어서 이웃 마을로 가고 있습니다. 저쪽 고개에서 넘어오는 거지 하나를 만납니다. 곧장 얼어 죽을듯한 그런 모습입니다. 저대로 두면 얼어 죽겠는데~ 그래서 가던 발길을 멈추고 자기의 외투를 벗어줍니다. 자기 외투를 벗어주면 자기가 힘들 것이나 지금 안 벗어주면 저 사람이 금방 얼어 죽을 것만 같습니다. 엄청난 고민 끝에 외투를 벗어준 것인데 그 걸인은 당연한 듯이 받고는 그냥 가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스님이 기분이 나빠진 거에요. 나는 엄청난 고민을 하고 벗어준 것인데 저 사람은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구나 싶은 것이죠. 그래서 “여보시오.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는 해야 할 것 아니오?” 했더니 그 걸인이 하는 말이, “줬으면 그만이지, 뭘 칭찬을 되돌려 받겠다는 것이오?”

그래서 그 스님이 무릎을 칩니다.

“아, 내가 아직 공부가 모자라는구나. 그렇지, 줬으면 그만인데 무슨 인사를 받으려 했는가. 오히려 내가 공덕을 쌓을 기회를 저 사람이 준 것이니 내가 저 사람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했어야지, 왜 내가 저 사람한테서 인사를 받으려 한 것이냐.”

탄식을 하면서 그 고개를 넘어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봉사를 할 때, 어떤 마음으로 봉사를 할 것인가를 느끼게 해 줍니다. 요새 만 원 어치 봉사를 하면서 고아원 앞에서 사진을 찍고 백만원어치 피알(PR)을 한다든지, 그 봉사의 가치를 되받으려 한다든지, 반대급부를 바라고 봉사를 한다든지, 이런 봉사의 개념에서는 정말 맞지 않는 이 스님의 이야기를 우리는 떠올려 봐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p. 328.

#6.

“… 보시를 하는데 엄청난 재산이 필요하고 돈이 많이 필요한가? 꼭 돈이 많아야 봉사를 하고 보시를 해야 보시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러면 돈이 없는 사람은 보시할 자격이 없는 것인가?

이런 문제를 이야기하는 중에, 무재칠시(無財七施)라는 말이 있습니다. 재산이 아무것도 없어도 일곱 가지나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죠.

그게 뭐냐면, 첫째가 화안시(和顔施)라는 겁니다. 얼굴빛을 환하게 해서 상대를 대할 때 이것도 큰 봉사라는 것이죠. 둘째는 자안시(慈眼施), 눈빛을 편하고 부드럽게 해서 상대를 바라보는 것도 큰 봉사라는 겁니다. 이건 재산이 없어도 되거든요. 그다음에 언사시(言辭施), 말씨를 부드럽게 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크나큰 봉사입니다. 그다음에 심려시(心慮施)라고 하죠. 마음 씀씀이입니다. 서로가 마음과 마음을 위로해주는 그런 마음가집이 필요합니다. 그다음에 사신시(捨身施)라고 하지요. 결국 몸으로 때우는 겁니다.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걸 보면 좀 들어주고, 얼마든지 몸으로 때울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는 상좌시(床坐施), 자리를 양보하는 일입니다. 자리 양보하는 일은 큰 돈 안 들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마지막으로 방사시(房舍施)입니다. 요즘 와서는 그런 일이 좀 적겠습니다만, 그래도 방을 빌려줄 일이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나그네가 많이 다닐 때 그 나그네가 집 떠나서 어느 헛간에라도 좀 재워 달라 할 때 방에 재워주는 것, 이것은 정말로 엄청난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일곱 가지를 무재칠시라 그럽니다. 재산이 없이도 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입니다. 어찌 보면 아주 쉬운 일입니다. 쉬우면서도 실천해 보려하면 참 어려운 일이 이 무재칠시입니다. 돈이 없이도 할 수 있으면서도 막상 해 보려하면 가장 어려운 일이 이 무재칠시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보시와 베풂이 큰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만 원 내는 사람이나 일억을 내는 사람이나 그 내는 마음은 똑같다는 얘기입니다. 이래서 재산이 없이도 봉사할 수 있고, 있으면 더 좋고, 그래서 숨 막힐 듯 아귀다툼하는 이 사회에서 우리가 보시를 통해 신선한 공기주머니를 터뜨리는 것과 가뭄 후에 오는 소나기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 이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pp. 329-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