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기 속에서

2023-03-02 0 By 커피사유

대학의 개강을 하루 앞두고 나는 홀연히 덕수궁에 방문하고픈 욕구를 느꼈다. 그것도 나즈막한 오후 중도 아니었고, 저녁을 먹을 시간 즈음이 되어서 든 생각이었다.

사실 덕수궁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내가 도대체 왜 가고자 했는지 알기 어려웠다. 컴퓨터 공학을 이제 추가로 복수전공하는 것에서 나오는 모종의 긴장감 때문인가, 아니면 스스로가 니체 철학에 심각하게 심취한 나머지 그의 주장대로 ‘앉아 있지 않은’, ‘근육이 활발히 움직일 때의’ 생각을 원했기 때문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나마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는 대학을 벗어났던 것이다. 아닌가. 나는 과연 지금 내가 재학하고 있는 이 대학을 ‘니체적 정신’이 발휘될 수 있는 풍토라거나 아니면 니체 식의 표현으로는 ― 〈공기〉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대학이라는 평가를 듣지만 그것은 오로지 뒤틀린 사회적 사다리를 오르려는데 혈안이 된 이들이 시야에서 놓치고 마는 것들 때문에 가능한 평가가 아니던가.

솔직히 대학이라는 공간은 나를 ‘병들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병듦이 곧 나 자신을 ‘생리학적’으로 건강해지게 한다는 사실을 나는 정확하게 알고 있다. 적어도 대학 바깥에서, 학문의 바깥에서 만나게 되는 이들이 내뿜는 공기는 나를 지치거나 질식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았던가. 그 〈더러운〉 공기를 가진 도시이다. 그러한 도시 속에서 그나마 작은 오아시스에서 나는 막 빠져나왔다. 신기루에 불과한 오아시스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덕수궁을 돌아보면서 나는 그곳에 존재하는 3개의 시간선을 보게 되었고, 따라서 대학의 정체성과 그 속에서 나 자신의 방향에 대해서 고민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무엇과 비슷할지 ― 조금 더 기대하자면 ‘같을지’ ― 알 수 있게 된 듯 하다. 그 어떤 이가 과연 어느 저녁에 홀로 산책을 나가서, 그것도 고궁을 방문하여 그 가운데에 앉게 되었을 때, 거기에 존재하는 세 개의 이율배반적인,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시간선을 볼 수 있겠는가? 내가 어쩌면 그러한 모습을 지각할 수 있었던 것은 필히 하나의 행운이었으리라….. 아닌가, 어쩌면 그것은 최근에 읽은 다자이 오사무의 영향일 수도 있겠다. 다자이 오사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쩌면 내가 니체를 선택하고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수도 있으므로.

나는 얼마 전 완독한 야마다 무네키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덮으면서 하나의 가설을 세운 바가 있었다. 어쩌면 모든 인간은 ‘다자이 오사무’와 ‘니체’의 변증법적 합(合)이 아닐까, 혹은 조금 더 ‘니체적 용어’들로만 바꾸자면 ‘데카당’과 ‘반-데카당’의 변증법적 합이 아닐까 ― 하는 그러한 가설. 물론 그 출발점은 나 자신에 대한 고찰이었고, 그러한 고찰의 배경에는 내가 지금 처한 정신적 방황 혹은 일일이 찾아다님이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쩌면 내가 덕수궁의 방문이라는 희한한 선택을 하게 된 계기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는 생각을 산출하게 된, 그러한 가설.

덕수궁에는 세 개의 시간선이 혼재되어 있다. 경복궁, 창덕궁 등의 다른 고궁들에서 마찬가지로 볼 수 있는 조선의 200년 묵은 전통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침전이나 국가 행사를 위한 건물이 오른쪽에 보일 때, 왼쪽에는 격동하는 개화기 속 나름대로 서양 문물이나 문화 양식을 도입한, 자주 근대국가를 희망했던 ‘신-고전식’의 서양식 건물이 있다. 격동기의 혼란과 혼동을 상징하는 이들의 공존을 위로 덮은 이 숨막히는 도시의 현대식 건물 스카이라인이 있었다. 혼란 속에서 건물들은 그렇게 서 있었다.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마치 나에게 정확하게 과시하려고 하듯.

순간 나는 건물들 사이사이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보았다. 그는 이양선과 외세라는 정세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도 끝까지 ‘자주성’을 추구했던 인물이다. 그러한 ‘자주성’에 대한 추구가 과연 효과적인 것이었나 아니면 역사적으로 바른 것이었나의 해석은 역사학자들의 몫이지만, 적어도 나는 그러한 ‘자주성’을 외치면서,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투명함 속에서도 나름의 고민과 개척을 통해 천천히 한 발 한 발 나아간, 어떨 때는 밤을 홀로 보내고 어떨 때는 목숨을 위협할 듯한 주변 환경에 공포심을 느끼기도 하고 상대와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상대를 믿을 수 있는지 모르는 경우도, 자신이 내딛는 발이 과연 정확한 위치에 있는지 아니면 적어도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경우도 겪은 그의 모습이 순간 건물들에 겹쳐 보였던 것이다…… 집무 중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던 그의 모습, 생명을 위협할 듯한 무서움과 낯섬 속에서 겨우내 잠을 청하던 그의 모습. 그것은 어쩌면 나의 최근 가설의 연장선이 아닌가. 고종은 어쩌면 인간의 참된 모습, 주체적인 ‘인간’의, 도전하는 ‘인간’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남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덕수궁 속에서 발견된 것이란 모두 격동기였던 것이다. 1900년대 초 대한제국의 황제로 칭제건원한 고종이라는 한 사람의 격동기, 그리고 새로운 대학의 학기라는 맞이한다는 나의 격동기. 인간은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눈보라 속에서 나아가는 존재. 그 눈보라에 때로는 쓰러지기도 하고 하지만 다시 일어나기도 하면서, 비틀거리지만 천천히 걸어나가는 존재. 삶이 그런 것이다. 인간이 그런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에게도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이 이것이고, 니체에게도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격동기 속의 인간. 나는 대학의 새 학기를 맞이한다. 봄을 맞이한다. 새롭게 태어나는 자정이 넘은 것이다. 해가 떠오르고 내가 다시 뉘였던 몸을 일으켰을 때, 나는 조금 더 용감해질 수 있을까. 이 풍토 속에서, 이 혼란스러운 공기 속에서, 나는 일어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하자. 니체가 있을 것이라 말하자. 원래 인간은 다자이 오사무와 니체의 합이라고 말하자. 그렇기에 니체를 기억하겠노라 말하자. 본래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되새기면서 흔들릴 때 마다 되뇌이자. 그것이 어쩌면 인간이 어떻게든 앞으로 나가게 만드는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