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율사회 대 성과사회에서 인간과 사물, 노동, 인간의 관계에 대한 메모

2021-06-16 0 By 커피사유

이 메모는 서울대학교 강우성 교수님의 <문학과 철학의 대화>에 대한 기말고사 준비용으로 작성되었음을 서두에 밝혀둔다.

질문

현대사회를 피로사회 혹은 성과사회로 정의하는 한병철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피로사회에서는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일(노동), 인간과 인간의 관계(환대)는 어떻게 이전의 규율사회와 다른 모습을 갖는지 서술하시오.

I. 성과사회의 특징

  • 한병철은 그의 저서 『우울사회』에서 ‘성과사회’는 ‘성과를 중시하는, 성과를 제1원리로 삼는 사회’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다음과 같은 규율사회와의 차이점을 기반으로 성과사회를 정의하고도 있다.
  • “규율사회는 금지가 외적으로부터 오지만, 성과사회는 이 외적인 규율사회의 금지를 개인에게 내면화하여, 개인으로 하여금 ‘성과’를 위하여 스스로를 끝없이 수탈(자기-수탈, 자기-착취)하도록 하였다.
  • 즉, 성과사회는 개인에게 탈성과주체적인 삶에 대한 금지를 내면화시켰다.

II. 성과사회에서 인간과 노동의 관계

  • 윌리엄 모리스는 『쓸모있는 일과 쓸모없는 노역』에서 쓸모있는 일에는 다음의 3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했다.
    1. (동물적인) 휴식에 대한 희망이 존재할 것
    2. 생산물이 유용하다 혹은 그 생산물을 자기가 사용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있을 것
    3. 일 자체, 즉 생산 자체에 기쁨이나 일련의 즐거움이 존재할 것
  • 성과사회는 비성과주체적인 삶을 금지함으로써, 개인이 끝없이 스스로를 수탈하게 만든다. 이러한 영원히 종결되지 않는 수탈은 결국 개인의 자아를 점차 침식시키게 되고, 성과주체는 그 결과 우울의 태도를 보이거나 수탈에 의하여 자아 상실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 적어도 성과사회가 성과주체에게 강요하는 자기-수탈의 논리는 주체에게 긍정적인 감정 요소를 유발하지 못한다.
  • 그런데 성과주체의 자기-수탈의 방법은 일 또는 노동이다. 성과사회에서 주체가 성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은 노동 혹은 노동에 준하는 작업으로써 그의 자기-수탈성을 증명하는 것 뿐이다. (일을 (자신의 여가 시간까지 버려가면서) 열심히 하거나, 혹은 공부를 (자신의 여가 시간까지 버려가면서) 열심히 하거나)
  • 따라서 성과사회에서 일 또는 노동은 우선 성과주체에게 노동의 즐거움을 제공하지 못한다. 성과주체는 노동의 즐거움을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수탈의 구체적 방법 혹은 행위인 노동이 즐거움을 제공할 수는 없다. 설령 주체가 노동을 통한 자기-수탈에서 즐거움을 얻는다고 증언하더라도 그것은 필히 마조히즘으로 얼룩진 거짓된 (혹은 정신병적인) 웃음이다.
  • 또한 성과사회에서는 사회에서 강요되는 더 많은 ‘성과’의 논리로 인하여, 성과주체는 휴식의 기회를 제대로 가지지 못한다. 성과주체에 내재되어 있는 금지와 성과사회의 신조인 일을 해서 더 많은 성과를 올리라는 신성하다고까지 취급되는 명령에 의하여, 성과주체는 바람직한 휴식을 즐기기보다는, 즉 동물적인 휴식을 즐길 수 있다기 보다는 그 휴식 시간 마저도 자기 계발에 쓰게 된다. 즉, 성과주체에게 있어 진정한 휴식을 누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직 진정한 휴식이란 탈성과주체적인 삶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 그러므로 성과사회에서는 윌리엄 모리스의 『쓸모있는 일』의 3요소 중에 ‘휴식에 대한 희망’과 ‘일의 즐거움’이라는 적어도 2개의 요소가 부정된다. 그러므로 성과주체에게 있어 노동이란 더 이상 ‘쓸모있는 일’이 아니고 ‘쓸모없는 노역’으로 인지될 뿐이다.
  • 하지만 적어도 규율사회는 비성과주체적인 삶을 금지하지는 않으므로, 즉 자기-수탈을 강요하지는 않으므로 따라서 앞선 성과사회에 대한 논의가 적용되지 않을 가능성이라도 열려있다. 그러나 성과사회에서는 앞선 논의가 반드시 적용될 수 밖에 없다. 즉 규율사회는 적어도 인간과 일 사이의 관계가 ‘쓸모있는 일’의 관계가 될 가능성이 존재라도 하지만, 성과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III. 성과사회에서 인간과 사물의 관계

  • 마르틴 하이데거의 『사물』에 따르면, 사물이 사물성을 획득하는 순간 혹은 인간에게 사물이 가깝게 다가오는 순간은 인간과 사물이 상호작용하여, 사물의 안에 있는 네 개의 층위 – 하늘, 땅, 신적 존재, 죽을 자들 – 이 서로를 비추며 포개어지는 순간이다. 즉, 인간이 사물 속에서 다른 사물과 연결되어 있음과 세계를 보는 것으로 인하여 사물은 사물성을 획득하고, 인간과 사물은 가까움을 느낀다.
  • 그러나 성과사회에서의 개인인 성과주체는 사물의 이러한 세계를 보는 시각을 가질 시간이 없으며, 애초에 그럴 시각을 가질 기회조차 부여받지도 못한다.
  • 성과사회에서의 관심사란 ‘성과’이지, ‘사물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다. 따라서 성과사회 하에서의 교육은 필연적으로 ‘어떻게 더 많은 성과를 낼 것인가’에 관한 것이지, ‘세계와 사물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나’는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성과사회 하의 ‘성과주체(노동자)’를 생산하는 교육을 받은 성과주체들은 따라서 ‘세계와 사물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고민하지 못한다. 그들은 오로지 ‘성과’를 내기 위한 기술만을 교육받았으므로, ‘사물’에 대하여 사유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과주체에게 ‘사물’은 사물성을 잃고, 성과주체와 사물은 자연히 멀어진다. 그것도 아득히.
  • 따라서 성과사회에서 인간과 사물은 멀어진다. 규율사회에서는 적어도 자기-수탈을 강제하지는 않으므로 인간이 사물에 대하여 사유할 기회를 가질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성과사회에서는 그러할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

IV. 성과사회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 (환대의 문제)

  • 성과사회의 개인(인간)인 성과주체는 자기-수탈을 내면화된 논리에 의하여 강요받는 존재이다.
  • 또한 성과사회는 ‘성과’의 극대화를 제1원리로 신봉하는 사회이다. 그 때문에 개인에게 자기-수탈을 강요한다. 심지어는 나아가 개인이 얼마나 자기-수탈을 잘 했는지 평가하기 시작하고, 그 평가 결과에 따라 개인에게 가치를 부여한다.
  •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는 김현경의 『절대적 환대』에서 사회를 구성한다고 믿어진다고 표현되는 “절대적 환대”의 제1원리인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 김현경은 다음과 같이 쓴다.
    “칸트 철학의 전통에서 사람은 지극히 가치 있는 존재라기보다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존재임을 여기에 부기해두자. 칸트는 가격을 갖는 사물과 존엄성을 갖는 사람을 대립시킨다. 가격을 갖는다는 것은 비교할 수 있으며 대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인 존재이기에 가격을 갖지 않는다. “존엄성의 가격을 계산하고 비교하는 것은 곧 그것의 신성함을 모독하는 것이다.” 타자를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에 대한 질문을 괄호에 넣은채 그를 환대하는 것을 말한다.”
  • 성과사회에서 ‘성과’에 따른 개인의 ‘자기-수탈’성에 대한 평가는 목적으로 대우해야 할 인간 개인에 대한 가치 부여의 행위라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사람의 ‘신성함’을 모독한다. (칸트의 사상과 충돌)
  • 애초에, 성과사회에서의 ‘성과’를 제1원리로 신봉하는 행위 자체는 사람을 ‘성과’를 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성과사회에서 ‘사람’은 더 이상 목적이 되지 않으며, 성과사회에서의 목적은 ‘성과’일 뿐이고 ‘사람’은 수단으로 전락한다.
  • 그러므로 성과사회 안에서의 사람은 타자에게 ‘절대적 환대’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성과주체들은 모두 ‘성과’를 위한 ‘수단’일 뿐이고 ‘노예’일 뿐이므로, 성과사회는 이들을 무조건적으로 환대하지 않는다. 성과사회는 이미 그 존재만으로, 그리고 그러한 사회의 특성만으로도 ‘절대적 환대’의 제1원리: 신원을 따지지 않는 환대 – 를 위배했다.
  • 따라서 성과사회 안에서의 인간과 인간 간의 거리 – 즉 환대의 문제란 절대적 환대가 일어날 수 없다 혹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종착하게 되므로, 인간과 인간은 멀어질 수 밖에 없으며 상호는 모두 성과를 위한 ‘수단’이자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 적어도 규율사회는 성과사회처럼 ‘성과’를 강요하지는 않으므로 위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을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