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준위

2022-03-06 0 By 커피사유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에게는 보어의 〈수소 원자 모형〉에서 등장하는, 〈에너지 준위〉와 닮은꼴의 기분 준위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된다.

즉, 나는 지금 나 자신의 감정의 상태가 연속적으로 변화한다기 보다는 불연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에 차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와 같은 〈기분 준위〉의 설정이란 연속적인 데이터들을 내가 분류해놓는 과정에서 데이터의 연속성을 불연속성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한 결과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내 〈기분 준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상세 설명은 평소 내 급격한 기분 변동을 꽤나 잘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관찰에 의하면 나의 〈기분 준위〉는 총 4단계로 나누어지는 것 같다. 첫째. 이른바 바닥 상태. 보어의 수소 원자 모형에서 바닥 상태는 가장 안정한 상태를 말하지만, 동시에 전자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가장 적은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나는 나의 〈기분 준위〉에서, 바닥 상태란 가장 우울한 상태로 정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 달에 몇 번씩 때때로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무력감과 우울감에 지배되는 때가 있다. 이런 때에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극도로 꺼리며, 나의 무지와 무능에 대한 극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히거나 허무감에 허덕이며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시간을 멍청하게도 낭비한다.

그러나 가끔 나의 〈기분 준위〉가 바닥 상태인 날의 다음 날에, 또는 내가 선약이 있어서 나의 친애하는 지적 동반자들과 토론을 벌이는 경우, 나는 그 행위로부터 모종의 동기나 에너지를 얻는 것인지 조금 들뜨게 된다. 나는 조금은 우울하지만 적절한 활기, 또는 지적 탐구심이나 토론의 열기가 나의 우울한 생각과 충동을 막아주는 때 나의 〈기분 준위〉는 제2단계에 있다고 표현하고, 바닥 상태는 제1단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한편, 모종의 이유로 토론이 과열되거나 나의 지식의 지평선이 조금 넓어지는 느낌이 드는 경우, 나는 조금 더 들드게 되는데 나는 이 때 나의 〈기분 준위〉는 제3단계에 있다고 표현한다. 제3단계의 준위에서 나는 조금 흥분하여 말이 빨라지고, 나의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하기 시작하며 굉장히 활기찬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우울한 생각이나 충동은 마음속 한켠으로 사라지게 된다. 어떻게 보면 지적 호기심에 불타올라야 할 대학에서 가장 권장되는 〈기분 준위〉가 바로 이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 제3단계의 준위에 이르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가끔, 아주 가끔 나는 극도로 흥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내가 어떤 이유로 분노에 휩싸이거나 혹은 아주 강력한 지적 희열을 경험한 경우에 도달하는 〈기분 준위〉의 상태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 같다. 나는 이 광적인 기분 상태를 표현할 때, 나의 기분 준위는 들뜬 상태에 있다, 또는 제4단계에 있다고 정의하려고 한다. 나는 분노에 휩싸인 상태와 지적 희열로 광적으로 들뜬 상태를 사실상 구분하기 어려운 것 같다. 이 상태에서 나는 상당한 미치광이나 정신병자처럼 행동하며, 마치 귀신이 들린 것 마냥 글을 써 내려가거나 무언가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위의 각 문단을 통해 나는 나의 기분에 대한 이론으로서 〈기분 준위〉의 네 단계를 설정했는데, 나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고 싶다. 즉, 나는 나의 이론에 다음의 추론을 추가하고 싶다:

나의 〈기분 준위〉는 매일 밤, 숙면을 취한 뒤 일어났을 때 〈통제된 임의적 과정〉을 거쳐 위 4단계 중 하나로서 결정된다.

이 때, 위에서 내가 사용한 〈통제된 임의적 과정〉이란 임의적 과정은 임의적 과정이되, 그 과정이 전날의 나의 행위와 경험, 잠자리의 편안한 정도, 그리고 일어났을 때 내가 처한 상황 등에 조금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을 말한다. 나의 기분이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인데, 그러나 나의 기분은 외부 환경이 어느 정도 바뀌더라도 대체로 자고 일어났을 때 무작위적으로 결정되는 경향이 더 커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나의 감정 상태를 분석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마침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감정과 행위가 어떤 식으로 날뛰는지, 어떤 식으로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는지를 목격하는 것을 설명하는 이론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지난 대학의 1년 동안 나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질문이란 ‘나 자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지금 그저 그 질문에 충실하게 답하려고 하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