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답록 #3. 그릇의 크기는 바뀔 수 있습니까

문답록 #3. 그릇의 크기는 바뀔 수 있습니까

2021-08-02 0 By 커피사유

문답록(文遝錄)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작성한 글에 대한 주석과 그에 대한 답글을 갈무리하는 공간이며, 동시에 그러한 주석과 답글 사이의 동형성 혹은 차이점을 발견함으로써 글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확장하는 공간입니다.

들어가며

이 문답록(文遝錄)은 필자가 2021. 8. 1.에 작성한 「사유 #27. 그릇의 크기는 바뀔 수 있습니까」를 공개하였을 때 Facebook을 통해 필자의 친구 중 한 명이 답글로 작성한 것과 필자의 이에 대한 답글을 기록해두기 위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문답록(文遝錄)은 그 특성상, 주고 받은 글들을 모두 기록하여야 하므로, 이 글에는 필자의 원문과 이에 대한 필자 친구의 답글, 그리고 답글에 대한 필자의 주석과 답글을 모두 싣습니다.

+ 2021. 8. 4. 추가: 필자와 필자의 친구가 Facebook을 통해 의견을 교환하던 중, 필자의 예전 선생님께서 견해를 달아두신 것이 있어 선생님과 필자, 필자 친구의 의견 교환 과정도 여기에 모두 싣습니다.

원문(原文). 「그릇의 크기는 바뀔 수 있습니까」

“… 선생님, 그릇의 크기는 바뀔 수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여쭈자 식탁 위, 초밥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앉아 계시던 선생님께서는 흠칫 놀라신 눈치셨다.

“… 아니, 바뀔 수 없지.”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곧 그러한 기색을 온데간데없이 훌훌 털어 버리시고 이렇게 단언하셨다.

“… 그렇군요.”

그리고 그 말은 이 며칠 전의 나를 교단에서 한 때 가르치셨던 중학교 선생님과의 만남에서 계속 기억에 남아 되풀이되는 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 그러고 보니 나는 선생님께 그릇의 크기가 바뀔 수 있는지를 여쭈어보기 전에 먼저 이렇게 질문을 드려야만 했다. 그릇이란 무엇입니까? 물론, 후회하고 있는 지금에서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선생님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가 선생님의 입장이 되어 예상되는 대답을 도출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대답이란 그릇은 일단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며 채워질 수 있는 어떠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을 도출하던 중에 나는 문득 얼마 전에 읽었던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사물」을 떠올렸다. 그는 그 글에서 “텅 빔이 그릇의 잡아 담는 힘”이라고 말한 바가 있었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여쭈어 볼 수 없음을 알면서도 기억 속의 선생님께 다시 여쭈어보았다. 그렇다면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이 그 그릇이 ‘텅 비어 있음’을 지시합니까?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릇이란 통상 우리가 지칭하는 일상적 용어에서의 그릇은 아닐 것이므로 반드시 이 그릇의 ‘채워질 수 있음’이라는 속성이 ‘텅 비어 있음’이라는 속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기억 속의 선생님께서 지금 대답을 해 주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릇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를 당시 나는 의도적으로 피했었다. 반대편에 앉아 계시던 선생님께서 ‘그릇’이라는 단어를 처음 언급하셨을 때, 나는 무언가 꺼림칙함을 직감적으로 느꼈으나 차마 그러한 견해 차이를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 앞에서 밝히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의 맥락으로부터 ‘그릇’이라는 추상의 의미를 추출하려고 노력했으며, 그 의미가 점차 밝혀짐에 따라 점차 그 직감적인 거부감이 즉각적으로 점차 고조되는 내적 긴장을 해결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그릇을 가지고 있다.”

“그릇은 크기가 바뀔 수 없다. 즉, 그릇은 선천적(先天的)이다.”

“그릇을 채우는 자는 그 그릇의 크기에 맞게 그릇을 채워주어야 한다.”


… 선생님께 그릇이란 지난 수십 년의 교단에서의 세월을 견뎌 오시면서 정립된 하나의 추상이었을까? 아니면 하나의 가치관이었을까, 결심이었을까? 어쩌면 처음에 교단에 올라서시던 시절의 선생님께서는 ‘모든 사람은 선천적인 그릇을 가진다’라는 지금의 명제에 동의하시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지금의,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많은 것을 알아야 할, 그리하여 스스로의 앞에 놓인 그 압도적인 광활함에 늘 주눅이 들어버리곤 하는 나 자신이 그러하듯 말이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텅 빔이 그릇의 담아 잡는 힘”이라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분명 일상적인 그릇에 관하여 고찰해서 이러한 말을 도출했겠지만, 분명히 이 말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 때 그 ‘그릇’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비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담아 잡으려고’ 한다. 비어 있는 것을 채우려는 욕구는 과연 ‘진공을 싫어하는 자연’만큼이나 매우 당연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릇이 분명히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그릇의 크기가 변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욕구는 언젠가는 분명히 중단되고 말 것이다. 자신의 그릇이 점차 채워짐에 따라 그 그릇을 가진 자는 포만감을 느낄 것이며, 그릇이 다 채워진다면 그는 그릇을 채우는 것을 중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그릇을 더 채우려고 한다면 그릇이 넘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릇에 채워질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광활하고 무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이 없고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은 나에게는 ‘나 자신의 그릇이 존재하고, 그러한 그릇의 크기는 변할 수 없다’라는 명제는 일종의 공포스러운 속삭임으로 다가온다. 사실상 매우 긴 시간을 투자해도 내가 그 모든 채울 수 있는 것들을 다 그릇에 담아 갈 수 없을 뿐더러 그릇이 담을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음이 명백하다는 것이 아마 이러한 불안감의 이유일 것이다. ‘그릇은 유한하고, 그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무한하다!’ 이러한 선언이 명백한 참으로 밝혀진다면 오늘날의 많은 시도들, 이를테면 그러한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더 많은 발견과 발명을 탐하는 인간의 대표적인 노력들이란 이미 결정된 것이며 한 개인의 노력으로는 그렇게 이미 선택된 누군가를, 더 큰 그릇을 가진 자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한한 그릇을 탐하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릇의 크기가 바뀔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야만 하는가?

… 선생님께서는 아마도 수십 년 동안의 교단에서의 관찰에 근거하셔서, 귀납저긴 추론으로 ‘그릇’이라는 추상을 확립하셨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릇을 가지고 있으며, 그 그릇의 크기는 불가변(不可變)이라고. 그러나 나는 오래된 논리적 반증 기법 중 하나를 다시금 회상할 수 밖에 없으며, 그 기법 때문에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싶다. 그 기법의 이름은 ‘반례(反例)’인데, 선생님의 귀납적 결론이 틀렸기를 간절히 바라는 나로서는 그러한 반례적인 인간이, 즉 자신의 그릇을 부술 수 있으며 새로운 그릇을 자유로이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이, 또는 그릇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어딘가에 존재하기를 바랄 뿐이다.

아직 나에게는, 나 자신이 그러한 반례적인 인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가슴 한 켠에 있고, 다른 가슴 한 켠에는 그러한 반례적인 인간들의 집합이 모든 인간들의 집합이 아닐까라는 희망이 남아 있는 것이다.


“… 선생님, 그릇의 크기는 바뀔 수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여쭈자 식탁 위, 초밥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앉아 계시던 선생님께서는 흠칫 놀라신 눈치셨다.

“… 아니, 바뀔 수 없지.”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곧 그러한 기색을 온데간데 없이 훌훌 털어 버리시고 이렇게 단언하셨다.

“… 그렇군요.”

나는 “아니요.”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답문(答文)과 주석

한때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그릇을 가지고 있다.
다만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릇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걔는 그릇이 그것밖에 안 돼’의 그릇이 아니다.1

단지 지식을 담는 그릇이다.
그리고 평범한 그릇은 아니다.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밥공기나 반찬 그릇 같은 모양은 아니다.2

일반적인 모양은 대부분 3차원 구이다. 그것도 속이 빈 구.
사람들은 대부분 이 안에 자신이 여태껏 배워왔던 것을 채워넣는다.
가끔 속이 꽉 찰 때가 있는데, 그럴 경우 일반적인 그릇은 그냥 넘처버리거나 농축되지만, 여기는 들어가지 않는다.
아예.
그렇기에 기존의 물을 조금 빼고 새로운 것을 집어넣는 것을 반복한다.3

다만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나이별로 차이가 있다.4

보통 생각이 굳는다고 할 시점에 이 3차원 구는 크기가 고정된다.
처음엔 점으로 시작되었다가 후에 안에 계속 넣으면서 부풀어 오른다.
다만, 무한히 부풀어 오르진 않고, 공기를 너무 많이 넣은 풍선이 터지듯이, 이 그릇도 가끔 무너지곤 한다.5

무너지기 직전부터 오는 경고가 가벼운 두통과 엄청난 귀차니즘이고, 이를 넘어섰을 때도 사람마다 다르지만,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있고, 정신이 붕괴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극과 극이며, 매우 희소한 경우다.6

그리고 이러한 그릇의 크기를 바꾸는 법은 간단했다.
말 그대로 계속 배우면 된다.
끊임없이.
이 3차원 공이 고무공처럼 하염없이 늘어나도록.7

정신은 육체와 달리 매우 긴 시간 노동해도 그렇게 지치진 않는다.8
물론, 잠이라는 휴식이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 약간의 잠과 계속된 배움이 있다면, 이 구는 계속 늘어난다.
한계치에 도달했을 때, 다시 줄어들긴 하지만.9

다른 방법도 있다.
더 이상 들어갈 공간이 없는 공에 공기를 계속 집어넣는다.
십중팔구로 매우 나쁜 경우가 되지만, 가끔 크기가 다시 늘어나기도 한다.

세 번째는, 충격을 가하는 것이다.
이도 특이한 경우다.
다른 사람들은 고무공인데, 혼자 사기그릇이다.10
다시 불에 구워서 물에 녹인 후 재반죽하면 크기를 더욱 키울 수 있다. 물론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다.11

하지만 크기를 키우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대부분은 어느 정도 크기에서 멈추고, 단단해지는 것을 더욱 중요시한다.
외부의 충격에 맞서 내부의 것을 지키기 위해.
간혹 그릇이 다 안 찼는데도 외부의 것을 거부하는 이들이 몇몇 있지만, 그릇의 경질화 자체는 필요한 과정이다.12

그리고 이를 무효화시키는 것이,
나는 참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릇을 매우 얇게 만들어, 외부와 거의 구별되지 않게 되는 경지, 그것이 참선이라고 생각된다.

아마도.

물론 다 그렇진 않을거다.
아예 그릇이 없는 사람도 있을거고.
가끔씩 그릇이 없는데
지식이 혼자서 응집되서 구를 띄는 경우도 있어보인다.
물론 그릇이 매우 큰 경우에도 그렇게 보인다.13

시간이 늦었으니 나머진 다음에
어쩌면 잊어먹고 안 쓸 수도 있고.

재답문(再答文). 「그릇이란 무엇인가」

… 여전히 우리에게는 질문이 남아 있는 듯 하다. “그릇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한 용어를 정의하는데 있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란 그 용어가 지시하는 추상 혹은 실체가 가지는 속성들의 집합을 만들어 그 용어를 정의하는 것이므로 (무정의 용어) ‘그릇’의 속성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과정으로 가장 적절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초 첫 번째 질문이었던 “그릇의 크기는 변할 수 있는가?”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질문은 결국 “그릇은 불가변적(不可變的)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인데, 이는 또한 “그릇은 선천적(先天的)인가?”라는 질문과도 분명히 맞닿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나에게는 자료와 경험이 너무 부족하므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직관이 가리키는 바, 그리고 나의 믿음이 분명히 가리키는 바는 이 모든 질문 즉 “그릇은 불가변적인가?”와 “그릇은 선천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동일하게 “아니오.”로 하고 싶음이다.

우리는 어쩌면 ‘그릇’의 또 하나의 속성을 놓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릇’ 자체를 부정하고 있으므로 ‘그릇’이 부정된 이상 이것의 속성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그러므로 ‘그릇’이 존재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잠시 나의 믿음은 치워두고 ‘그릇’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두어 보도록 하자. 우리의 ‘그릇’과 현실의 그릇은 분명 어떤 동형성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므로, 현실의 그릇에 대한 어떤 관찰을 생각해보도록 하자.

질문은 이것이다. “그릇은 혼자서 만들어질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다르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릇은 자기-지시적(self-directed)인가?” 그런데 현실의 그릇을 생각해보면 분명히 혼자서 그릇이 만들어질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릇의 발생을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담아 잡는” 어떤 것을 만들어 주어야 하고 그 “담아 잡는” 것의 존재로 인하여 “텅 빔”이라는 속성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릇은 그제야 ‘그릇’이라는 추상을 획득하게 된다. 그릇은 그릇이 아닌 다른 존재의 개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릇은 주체가 아니며, 오직 어떤 주체의 행위들에 의하여 형성된 자연의 어떤 한 부분이 “담아 잡는”이나 “텅 빈”이라는 속성을 가질 때에 형성되어 그 부분으로 간주되는 어떤 것이다. 즉, 그릇은 자기-지시적이 아니다. 곧 그릇은 혼자서 만들어질 수 없고 그릇을 형성하는 누군가, 그릇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그릇’과 현실의 그릇 사이에 형성된 동형성이 이 경우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다면,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실질적 추상인 ‘그릇’도 형성을 위하여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나는 이 다른 누군가를 흔히 현실의 그릇을 만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낱말인 ‘도공’이라는 말로 칭하고 싶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우리의 ‘그릇’에 대한 ‘도공’은 무엇인가? ‘도공’은 (만약 존재한다면) 신(神)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나는 신에 관한 한은 불가지론자이므로 사실은 둘 중 어느 결론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신(神)이 존재하는 것보다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경우에 따라 누군가 보기에는 불경하다고 할 수도 있을) 어느 직관에 따라, 나는 ‘도공’의 후보 중 전자(前者)는 탈락시키고 후자의 후보로서 ‘도공’을 확정하고 싶어진다. 즉, 개인에게 ‘그릇’이 존재한다면, 차이가 있다는 것은 어쩌면 그 개인의 ‘그릇’을 빚는 ‘도공’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주장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여전히 이것은 나의 어떠한 주관적인 믿음이 개입된 도출 과정에 따라 나온 결론이므로, 여전히 정답은 알 수 없다.

혹자는 계속 경험에 근거한 귀납적 추론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마다 선천적인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는 그러한 질문 밑에 깔린 ‘사람의 차이는 선천적인 요소에서 기원한다’라는 명제가 명백히 참인지 의심스럽다. 오히려 나는 이러한 명제에 대한 답이 아마도 ‘전혀 아니다’라고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사실 사람마다의 차이를 ‘선천적’으로 부여된 어떤 것에 의거하여 설명하는 것에는 우리가 현실의 어떠한 모순을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나름의 자기 변명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본다.

… 여전히 우리에게는 질문이 남아 있는 듯 하다. “그릇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아마도 그 대답은 우리 스스로의 믿음에 달려 있을 것이다.

재답문에 대한 주석 (2021. 8. 3. 추가)

정녕 완벽하게 평등한 사회는 만들어 질 수 없는가?

자본주의는 ‘돈’이라는 외적인, 물질에 의해 지배되며, 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지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지만, 인간의 이기적임에 의해 생산률14이 저하되거나, 저하된 생산률을 강제로 상승시키기 위해 독재주의로 변형되는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에 의해 행동하여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만, 완전한 평등은 아니며, 오히려 목소리가 큰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힘이 세지는 문제가 있다.

독재정권, 과두 정권 등은 말 안해도 문제가 매우 많음을 알 것이다. 왕정주의, 봉건주의, 신분제 등도 계급으로 사람을 태어날 때부터 가른다. 그럼, 순수하게, 사람이 태어난 이후의 상태로만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는가?

그 사람의 부모, 환경, 재정 상태, 사회적 이념과 완전히 동떨어지도록, 아예 그냥 태어나자마자 그런 모든 환경에서15 그런 모든 외부적 요인들을 통일시킨 후 나타나는 선천적 요인들 – 재능, 판단력, 집중력, 노력, 운동성, 신체 발달, 체질, 유전적 건강 요인 등, 오로지 그런 것들로만 판단해서, 직장, 교육, 대우가 달라지는.

그러니까, 요리를 잘하면 요리 관련 직장을 우선적으로 제안하고, 탐구력이 좋고 집중력이 뛰어나면 연구 관련 직장을 우선적으로 제안하는, 그리고 단순한 재능만이 아니라 자라는 과정에서 보이는 특정 분야에 대한 열의나 노력 같은 것도 판단에 기여할 수 있는 그러한 제도는 정녕 만들 수 없는가?

아니면 이것도, 결과적 평등이 아니므로 평등이 아닌가?

재답문에 대한 주석의 주석 (2021. 8. 3. 추가)

여전히, 내 믿음과 네 믿음은 반대 관계에 있는 듯. 이전 글에서 나는 “‘그릇의 선천성’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싶다”라고 말했는데, 오늘 네 글에서는 여전히 이전의 글과 동일하게 ‘사람의 어떤 선천적인 측면’을 부정하고 잇는 것은 아닌 듯. 즉, 네 믿음이란 ‘사람에게는 선천적인 측면이 있다’이고, 내 믿음이란 ‘사람에게는 선천적인 측면은 없다. 단지 환경이 그렇게 보이도록 할 뿐이다.’라는 거지.

… 뭐가 맞는 걸까?

위에 대한 답변 (2021. 8. 4. 추가)

그게 결국 ‘모든 환경적/외부적 요인이 단절/통일된 장소’에서 실험이 최소 몇 세대는 이루어져야 밝힐 수 있을 듯.

문제는 이거 시작하고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인권 문제, 윤리 문제거리면서 흐지부지되겠지.

선생님의 주석 (2021. 8. 4. 추가)16

오래 생각하고 깊이 생각하는게 바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절대적 평등이란 문제를 위와 같은 견해로 바라보게 되면, 이미 인간의 선천성을 배제하고 학습된 평등에 기준을 두는 것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지 않을까? 수학 자체가 잘못된 문제에 대하여 올바른 식으로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만약 인간이 개미나 벌처럼 특정 조건에 맞게끔 태어난다면 모든 이에게 절대적인 평등이 가능하겠지만, 인간의 고유성과 독창성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기에 수많은 사상가들과 정치가들이 이미 많은 유토피아적 사회를 꿈꾸고 이론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적용시키면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이 현 사회이고 또한 앞으로 바뀌게 되겠지.

학습을 통해 자연 법칙과 다른 평등의 기준이 생기고,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평등의 모순점이 생기지 않을까?

위에 대한 필자의 답변 (2021. 8. 4. 추가)

오랜만에 뵙네요, 선생님.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견해도 물론 맞습니다. 평등은 인간의 고유성과 독창성에 의하여 개인차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개념임에는 저도 동의하며, 선천적인 측면이 사람에게 있을 수도 있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저는 답을 모르니까요, 양쪽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견해, 그러니까 인간의 어떠한 ‘그릇’이 선천적이라고 믿고 싶지 않음은 평등에 관한 문제로 확장될 수도 있지만 우선은 ‘교육’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구축된 견해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얼마 전에 뵈었던 중학교 선생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는 ‘그릇’이 있으며 이 ‘그릇’의 크기는 불가변이고, 교육자의 역할이란 이 ‘그릇’에 맞게 물을 채워주는 것이다 –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릇’이라는 것이 불가변이라면 모든 사람에게는 이미 선천적으로 부여된 한계가 있다는 말이 될 것이며, 이는 곧 모든 사람의 발전 가능성의 상한을 긋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의 ‘그릇’이 선천적이지 않다고 믿음으로써, 한 개인의 발전 가능성의 상한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어떠한 선천적인 측면을 평등이라는 개념 하에서 배제하는 경우, 즉 이러한 제 믿음을 평등이라는 개념까지 확장하여 적용하는 경우는 말씀하신 지적이 옳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교육에 관한 한은, 그리고 한 사람의 발전 가능성을 두고 말하는 한은, 아무래도 저는 제 견해를 여전히 지지하고 싶어하는 듯 합니다.

필자 친구의 견해 (2021. 8. 4. 추가)

사실 평등의 모순이 생기는 이유는 평등이라는 개념 자체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에 있다고 봅니다.

말만 평등일 뿐이지 실제로 약자의 입장에서는 강자를 끌어내릴 수 있고, 강자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약자를 겉으로나마 만족시켜 집단의 형성을 막을 수 있으니까요.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을 추구하기에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그저 과정과 결과에 만족하고 평등했다는 인정을 하면 평등해지는 상황에서 과정의 불평등이나 결과의 불평등이라는 일종의 트집을 잡아 더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죠.

가장 간단한 예가 말싸움이고, 규정을 파고드는 편법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싸움이나 편법을 쓰지 않고 그냥 인정하는 사람을 ‘더 할 수 있는데 왜 포기하냐’라고 바보로 취급하는 사람을 여럿 경험했기에 인정함으로써 오는 진정한 평등은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위에 대한 필자의 견해 (2021. 8. 4. 추가)

위와 같은 네 의견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핵심이 하나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평등의 모순’이라는 것은 사실 ‘의사소통의 부재’에서 기원하는 것 아닐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사실에는 너도 동의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평등’의 개념을 이용하여 그 욕심을 실현하려는 사람이 발생하는 것이 있다는 점에서 ‘평등’에 관한 오늘날의 논란과 모순이란 결국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한다고 보는 것이 네 견해인 것 같은데, 오히려 ‘인정하지 않음’ 때문에 그러한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 네 견해와 다른 나의 견해임.

‘인정하지 않음’이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할 때에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보다, 완전히 얼토당토 않아 보이는 주장이더라도 그 사람의 성장 과정, 주변 환경 등을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을 고려할 때, 사실 ‘인정하지 않음’은 갈등의 당사자들의 ‘소통 부재’를 지시하는 신호가 아닐까?

위 견해에 대한 친구의 견해 (2021. 8. 4. 추가)

글쎄, 과연 삼일을 굶은 사람이 먹을 빵 하나를 열흘을 굶은 사람을 이해함으로써 넘겨주는 것이 일반적으로 있을 수 있을까? 적어도 이것 이상이 가능해야 그러한 평등에 다가갈 수 있다고 보는데.

사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으로써 진화된 인간이 그러한 두 개념과 반하는 평등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모순적인 걸.

아마도 단순한 소통의 부재가 원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인간의 심리가 원인이라고 생각함. 이렇지 않은 사람들만 모으면 매우 평등하고 평화로우며 법이 필요없는 세계가 되겠지?

위 견해에 대한 필자의 답변 (2021. 8. 4. 추가)

코멘트를 달고 싶은 내용이 좀 많으니까 분리해서 달겠음.

1. ‘삼일을 굶은 사람이 먹을 빵 하나를 열흘을 굶은 사람을 이해함으로써 넘겨주는 것이 일반적으로 있을 수 있을까’에 대하여

개인적으로는 가능하다고 보는 편임. 그렇다면 자국 문제도 다 해결하지 못하면서 다른 국가에 지원이나 원조를 하는 국가의 행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지? 물론 나는 모든 인간에게는 이타적인 심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음. 오히려 모든 인간의 욕심은 무한하며 이기적이다라는 네 견해에 동의하는데,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도 이 행위가 다음과 같이 설명이 되거든: 즉, “이기적 행위주체는 자신의 추후 이익까지 행위의 손익계산에 포함시킨다”라는 새로운 명제를 도입하면, 자국의 문제도 다 해결하지 못하면서 다른 국가에 지원이나 원조를 하는 국가의 행위는 손익계산적으로 보면 결국 그러한 국가에서 어떤 폭동이나 전쟁 등의 불안한 상태가 발생하지 않게 함으로써 자국이 볼 수 있을 차후의 피해를 줄이려는 시도로 설명할 수 있지. 마찬가지로, ‘삼일을 굶은 사람이 먹을 빵 하나를 열흘을 굶은 사람을 이해함으로써 넘겨주는 것’ 또한, 인간을 철저히 이기적인 주체로 보는 시각 하에서도 ‘열흘을 굶은 사람’이 ‘빵’을 얻기 위하여 ‘삼일을 굶은 사람’을 해하려 할 수 있다는 점을 ‘삼일을 굶은 사람’이 충분히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고려함으로써 파악한다면, 넘겨주는 것이 일반적으로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내 견해임.

2.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으로써 진화된 인간이 그러한 두 개념과 반하는 평등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모순적’이라는 견해에 대하여

오히려 이러한 모순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역으로, 인간이 자연 그 자체를 극복하려고 하는 의미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으로써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서, 가능한 서로의 자유를 지켜보자고 ‘사회’가 시작되었으니까. (루소의 「사회계약론」) 즉, 인간은 이미 ‘사회’의 구축 이후, 프랑스의 계몽혁명 이후로 ‘자연’의 질서를 거부하기 시작하였다는 거지. 그러한 인간의 행위 그리고 행보를 우리는 가치를 높게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싶음.

그리고, 인간이 ‘자연’에 속했다는 것 만으로 인간이 굳이 ‘자연’의 질서를 따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3. ‘스스로와 남에게 동시에 관대한 사람들만 모으면 매우 평등하고 평화로우며 법이 필요없는 세계가 될까’라는 견해에 관하여

…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왜, 역사에 만약은 없다라는 말이 미래에 관한 일에도 적용되는 것 같잖아) 내 생각으로는 아니, ‘이기적 인간’이라는 속성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여전히 스스로와 남에게 관대함이 동일하게 적용되든지 말든지, 개인의 이기심으로 인하여 상대에게 피해를 끼칠 생각은 충분히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의 저지책, 즉 사회 그 자신의 방어 수단인 (형)법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함. (베카리아의 고전주의적 형법론을 참고함)

위에 대한 친구의 반론(反論) (2021. 8. 4. 추가)

2는 제쳐두더라도, 1과 3은 인간은 원초적인 이기적 행위주체라는 것을 깔고 가는데, 나는 인간이 이기적 행위주체가 아니라면 그러한 경우가 나올 수 있다고 말한 것이어서 논점이 어긋난다고 봄.

3번도 모두가 매우 수비적이고, 남과 부딪힌 사실 자체를 스스로의 잘못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모았을때를 말한 것인데,그러한 경우에서 ‘자기 방어적 수단’이라는 것 자체가 남이 자신을 공격할 경우를 상정한것이기에 논점이 어긋났다고 생각함.

그리고, 법 같은 ‘행동이나 의지 등의 자유를 강제적으로 억압하는 수단’이 없어도 유지가 될수 있는 사회에서, 그러한 것이 최악을 대비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전제로 둔 것을 부정한다고 생각함.

위에 대한 필자의 반론(反論) (2021. 8. 4. 추가)

3번의 경우 ‘스스로에게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지 않은 사람’의 부정형이 ‘매우 수비적이고, 남과 부딪힌 사실 자체도 스스로의 잘못으로 여기는 사람들’일 경우는 네 지적이 옳다고 생각함. 애초에, 그 부정형에 관한 논쟁의 여지가 있음. 나는 그 부정형을 ‘남과 자기자신에게 동일하게 관대함’이라고 생각했었음을 부언해두고 싶음.

다만 1에 대하여 ‘인간이 이기적 행위주체가 아니라면 그러한 경우가 나올 수 있었다’라는 지금의 네 주장에 대한 네 정리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함. 네 1의 주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음.

글쎄, 과연 삼일을 굶은 사람이 먹을 빵하나를 열흘을 굶은 사람을 이해함으로써 넘겨주는것이 일반적으로 있을수 있을까? 적어도 이것 이상이 가능해야 그러한 평등에 다가갈수 있다고 보는데.

그런데 1의 이러한 이야기에서 ‘이것 이상’이란 ‘덜 고통스러운 사람이 더 고통스러운 사람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몫을 넘겨줄 수 있는 행위가 일반적으로 있을 수 없음’을 뜻하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나는 1의 주장을, 너는 ‘인간은 이기적 행위주체이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진정한 평등은 불가능해보인다’로 이해했음.

그리고, 법과 같은 이른바 ‘폭력’ (모든 자유에 대한 제지의 수단은 어느 정도의 일방성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이렇게 부를 수 있을 듯)의 존재 자체가 네가 전제로 둔 ‘타인과의 마찰도 자신의 잘못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사회에 모순된다는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듯. 논리는 다음과 같음.

– ‘타인과의 마찰도 자신의 잘못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존재함. (전제)

– 법과 같은 ‘폭력’은 어떤 자유의 제지 수단임. (핵심주장 1)

– 그런데 법의 제지 대상에 들어가는 자유 중에는 갈등의 해결에 관한 양 당사자간의 자유가 포함되어 있음. (핵심주장 1에서의 용어의 정의에 의거한 추론)

– ‘타인과의 마찰도 자신의 잘못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전제는 갈등의 부재와 동치는 아님 (핵심주장 2)

– 따라서 ‘타인과의 마찰도 자신의 잘못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도 갈등은 발생함. (핵심주장 2에 따른 추론)

– 그런데 ‘타인과의 마찰도 자신으로 잘못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집합으로 그러한 사회가 구성되어 있으므로, 갈등의 양 당사자들은 서로 자신의 잘못이라고 주장하게 됨. (핵심주장 2에 따른 추론과 전제의 결합)

– 따라서 이러한 사회에서도 갈등의 해결에 대한 제지 수단, 기준이 필요하지 않을 수가 없음. (위 결합에서의 추론)

– 그런데 법의 제지 대상에 들어가는 자유 중에는 갈등의 해결에 관한 양 당사자간의 자유가 포함되어 있음. 따라서 전제에 해당하는 사회에서도 법의 존재가 모순이라고 보기는 힘듬. (결론)

(이상의 논리는 전제에 대하여 핵심주장 1과 핵심주장 2를 결합시켜 전개함)

친구의 답문(答文) (2021. 8. 4. 추가)

이것이 소통의 부재군.

다만,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보다 크게 느낄 수 있는가?”이고, “남의 고통을 나의 이득보다 압도적으로 크게 느낄수 있는가?” 였음.

주석 및 참고문헌

  1. (커피사유 주) “그릇이란 무엇인가?” 질문은 여전히 여기에도 남아 있다. 추상으로서의 ‘그릇’이란 능력을 지시하는가, 잠재력을 지시하는가, 참을성 즉 인내력을 지시하는가? 어쩌면 ‘그릇’은 이들 의미가 모두 종합되어 형성된, 복합적인 추상일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릇은 그렇게 복잡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2. (커피사유 주) 과연 모두가 그릇을 가지고 있는가? “그릇이 존재한다”라는 이 문장, 이 문장은 결국 모든 사람의 가능성에 한계를 규명하는 문장이 아니던가? 한 사람의 가능성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그와의 교류의 경험을 통하여, 교류에 실패한 사례들을 근거로 하여 귀납적인 추론을 통해 대략적인 가능성을 어림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가능성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그 양을 가늠할 수 있는 속성을 가지는가? 나에게 ‘가능성’이란 무한의 속성을 지니는 어떤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가능성’의 양을 가늠하는 것이란 곧 ‘유한성’과 맞닿아 있다는 측면에서 ‘가능성’ 자체의 ‘무한성’과 모순을 필연적으로 유발하는 행위로 보인다.
  3. (커피사유 주) 그릇의 모양은 다양할 것이다. 굳이 어떤 사기 그릇을 상상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풍선과 같은 구형을 생각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안과 밖을 구분짓고, “담아 잡는” 어떤 부분이 있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릇이 어떠한 형태이든 ‘그릇이 넘친다’와 ‘그릇에 더 들어가지 않는다’는 동치인 문장일 것이며, 새로운 것이 그릇에 들어가는 것이란 ‘그릇이 넘친다’ 이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 ‘그릇이 넘친다’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 (커피사유 주) 만약 그릇이 존재한다면, 이 그릇은 선천적인가?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나이별로 그릇이 차이가 있는 이유는 그들의 그릇이 태초부터 그렇게 빚어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 그릇을 빚은 도공이 다르기 때문인가?
  5. (커피사유 주) 그릇이 만약 한 사람의 세계관이자 가치관이었다면 ‘무너진다’라는 진술은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릇이 그것이 아닌 경우에는 무너진다는 표현은 부적절해 보인다. 그릇이 무너진다는 것은 그릇에서 “담아 잡고” 있는 부분이 붕괴된다는 이야기이므로, “담아 잡는” 그릇의 속성은 그 때 그릇과 함께 무너져 안에 담고 있던 것이 다 새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말하는 ‘그릇’은 ‘무너질’ 때에는 그 안에 담고 있는 것이 다 새어나가지 않는다. 담고 있는 것은 그 형태야 조금 바뀔 수 있으나 다 새어나가지는 않고, 그 ‘그릇’에서 “담아 잡고” 있는 부분의 경계가 바뀔 뿐이다.
  6. (커피사유 주) ‘그릇’이 한 개인의 가치관 또는 세계관이라는 앞의 가정이 여기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다면, ‘그릇’이 무너진 경우 깨달음을 얻거나 정신이 붕괴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다. 첨언하자면 깨달음을 얻는 경우, 나 자신의 경우는 상당한 쾌감이 동반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릇’이 무너지려는 신호가 가벼운 두통과 엄청난 귀차니즘이라는 것은 나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진술인 듯 하다. 나에게는 일종의 ‘공허감’ 또는 ‘불안감’이 그러한 신호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견고할 줄만 알았던 거대한 댐에 균열이 가서 조금씩 물이 새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 발견자가 느낄 최초의 감정을!
  7. (커피사유 주) ‘그릇은 존재하되 가변적이다’라는 가설이 참으로 밝혀진다면 이러한 방법은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나의 선생님께서는 ‘그릇의 가변성’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으셨고, 나는 ‘그릇’ 자체를 부정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는 이 가설을 부정하고 싶다.
  8. (커피사유 주) 오히려 정신의 노동이 육체적 노동보다 더 고된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아직 나는 경험이 적으므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몇 가지 간접 경험을 생각해볼 때는 그러한 듯 하다.
  9. (커피사유 주) 그러면, ‘그릇’의 크기가 가변적이기는 하지만 어떤 제한이 그 ‘크기’에 존재한다는 것이 주장인 것인가?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릇’ 자체는 무한하다고, 따라서 ‘그릇’이라는 것은 인간이 아(我)와 타(他)를 구분하는 속성 때문에 본연적인 추상으로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애써 믿는 사람으로서, ‘그릇’ 자체의 무한성에 모순을 일으키는 ‘그릇’의 유한성, 한계의 존재 자체에 아무래도 동의할 수 없다.
  10. (커피사유 주) 그러면, 선천적으로 사람들의 그릇의 종류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여전히 꿈꾸고 있는데, 모든 사람에게 그릇이 존재한다면 그 그릇은 동일할 것이며 크기는 가변적일 것이고, 그 크기에 제한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나는 또한 여전히 꿈꾸고 있는데, 그리고 이 꿈을 더 선호하는 편으로, 그릇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11. (커피사유 주) 사기 그릇을 불에 굽는 것은 가역 반응이 아니다. 따라서 깨진 사기 그릇을 불에 구워서 (아마 ‘녹여서’ 일 것으로 추정된다) 물에 녹인 후 재반죽해서 새로운 그릇을 만드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해 보인다. 예시가 적절했는지 잘 모르겠다.
  12. (커피사유 주) 나는 감히 단언하건대, 그릇의 경질화 자체는 필요한 과정이 분명히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해악(害惡)에 가깝다. ‘그릇’의 존재가 전제가 된다면 그릇은 열려 있어야 한다. 닫힌 그릇은 채워질 수 없고 또한 다른 그릇을 채우는 것도 거부할 것이므로 그릇 사이에서 합의안을 도출하는 데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도록 만든다. ‘그릇’의 존재가 전제된다면, 그릇을 서로 채워줌으로서 합의안을 도출하는 것이 오늘날 사회에서 절실히 필요하므로, ‘그릇’은 경질화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릇’은 단단하지 않고 쉽게 무너지거나 허물어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13. (커피사유 주) 이러한 사람에 따른 ‘그릇’의 크기, 존재의 상이함이 진실이라 한다고 해도, ‘그릇’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그릇’은 선천적으로 형성되는가, 아니면 ‘그릇’은 원래 없었고 나중에 단지 ‘도공’이 ‘그릇’을 빚었기 때문에 ‘그릇’이 형성되는 것인가? 이 문제를 논의하지 않고서는 여전히 우리는 “그릇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서 가정한 전제가 진실이라고 해도, ‘그릇’의 선천성을 믿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그 경우 나는 그릇은 ‘도공’이 빚는 것이라는 점에서 ‘도공’의 상이함이 ‘그릇’의 상이함을 만드는 것이라고 추정하며 바로 이것에 주목하고 싶을 것이다.
  14. (커피사유 주) 문맥상, 이 문단에서의 ‘생산률’은 ‘생산성’으로 간주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울 것 같다.
  15. (커피사유 주) 문맥상, ‘모든 환경에서’는 ‘모든 환경으로부터’로 읽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16. (커피사유 주) 선생님의 주석에서 문장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부득이 다듬었으며, 또한 개인정보의 보호를 위하여 실명이 거론된 부분은 실명을 빼고 문맥상 같은 의미가 되도록 수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