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답록 #4. ‘살인자’와 ‘영웅’

문답록 #4. ‘살인자’와 ‘영웅’

2021-08-05 0 By 커피사유

문답록(文遝錄)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작성한 글에 대한 주석과 그에 대한 답글을 갈무리하는 공간이며, 동시에 그러한 주석과 답글 사이의 동형성 혹은 차이점을 발견함으로써 글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확장하는 공간입니다.

들어가며

이 문답록(文遝錄)은 필자의 친구가 2021. 7. 30.에 Facebook에 작성한 아래 ‘원문(原文)’에 해당하는 글을 공개한 이후, 해당 글에 대하여 필자와 필자의 친구가 Facebook을 통하여 답글을 서로 남기면서 의견을 교환한 과정을 기록해두기 위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문답록(文遝錄)은 그 특성상, 문답(文遝)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주고 받은 글들을 모두 기록하여야 하므로, 이 글에는 필자 친구의 원문과 이에 대한 필자의 답문, 그리고 그 이후로 이어진 모든 답문들에 대한 답문들을 모두 싣습니다.

원문(原文) – 2021. 7. 30.

한명을 죽이면 살인자고
열명을 죽이면 연쇄살인자다.

그러나 천명을 죽이면 맹장(猛將)이 되고
만명을 죽이면 영웅이 되며,

백만명을 죽이면 정복자가 되고
그 이상의 모두를 죽이면 신이 된다.

그저 죽인 횟수만 다를 뿐인데 왜 대접은 다른가.

답문(答文) #1 – 2021. 8. 2.

최근에 읽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동형성이 느껴지는 대목이 떠올라 옮김.

“… 나아가, 제 기억으로, 제가 그 논문에서 개진하는 바에 따르면, 모든…… 뭐, 예컨대, 아주 고대부터 리쿠르고스, 솔론, 마호메트, 나폴레옹 등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입법자나 제정자라 할지라도 모두가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범죄자였다, 새로운 법률을 내 놓고 그럼으로써 사회에서 신성시되고 자자손손 대대로 전해져 온 오랜 법률을 파괴하고, 유혈 사태가 (때로는 오랜 법률을 지키기 위해 그야말로 아무 죄 없이, 떳떳하게 행해진 유혈 사태도 있지만) 자기들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물론 그 피 앞에서도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도 범죄자였다, 라는 겁니다. 이런 인류의 은인과 제정자들 대부분이 유달리 소름끼치는 살인마였다는 사실은 일로 주목할 만하죠. 한마디로, 저의 결론인즉, 위대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궤도에서 조금이라도 일탈한 사람들, 즉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말할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그 본성상 반드시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어쨌거나 그렇다, 라는 겁니다.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는 궤도에서 일탈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궤도에 머물러 있는 것도 그 본성상 동의할 수 없고, 제 생각으론, 동의하지 않을 의무마저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보시다시피, 지금까지는 여기에 특별히 새로운 건 전혀 없습니다. 이런 내용은 천 번은 족히 쓰였고 또 읽혔지요. …”

답문(答文) #2 – 2021. 8. 3.

이전에 사람을 죽인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질수록 살인을 저지른 자는 영웅시된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수백만명을 죽인 일본 장교는 한국 입장에서는 죽일 놈이고, 이토 히로부미 한명을 사살한 안중근은 한국 입장에서는 의사(義士)라 불리며 영웅시된다.

즉, 단순히 죽인 사람만이 아니라, 그 죽인 사람과 죽은 사람의 상대적인 위치, 그리고 그들이 사회에 끼친 영향도 포함된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의 생명이 사실 같은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란 뜻 아닌가?

단순한 구성원 사이에서는 가치가 비슷하지만, 그 계층 간에는 그 가치가 달라지며, ‘얼마나 많은 양의 가치를 훼손했는가’에 따라 살인자에 대한 대접이 달라지는 것은 아닌가?

즉, 일반적인 사회 구성원 10명을 죽인 사람은 그저 단순한 연쇄살인마가 되고,
국가 수뇌부 10명을 죽인 사람은 사회를 뒤흔들 테러리스트가 되며,
적군 10명을 죽인 사람은 맹장(猛將)이 되고,
적군 장교(지휘관)을 10명 죽인 사람은 영웅이 된다.

사람들은 말만 하면 모든 사람의 생명의 가치는 같다고 하는데
사실 이들도 마음속으로는 계속해서 그들의 가치를 저울질 한다.

만일 진짜로 동등한 가치라면, 적군 장교 10명을 죽인 사람도 영웅이 아니라 연쇄 살인마지 않은가?

그도 아니라면, 사람들의 생명의 가치는 그들이 있는 장소와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가?

전쟁중에 적 기지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면 희생적인 영웅이 되고,
단순히 교회에서 기관단총을 난사하면 미친 총기난사범이 된다.

그럼 과연,
인간의 생명은 절대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가진 것이 맞는가?
상대적으로 동등하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답문(答文) #3. 「살인자에게 붙는 ‘관계’라는 이름의 변호사」 – 2021. 8. 3.

어떤 살인은 변호된다.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틀린 말은 아니다. 한 개인이 다른 한 개인의 생명을 해하려고 할 때에, 그에 대항할 수단이 피해를 입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개인에게 있어 오로지 상대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 뿐이었다면 그 살인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감면하는 「정당방위」라는 조항이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형법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지금의 형법에서 이러한 「정당방위」라는 조항은 유효성을 가지는가?

고전적 형법론, 즉 내가 최근 들어 취미삼아 조금씩 공부하고 있는 체사레 베카리아로 주로 대표되는 형법론에서는 ‘형벌’이란 각 개인이 최소한의 자유를 내 놓아 이룩한 사회의 자기방어 수단으로 정의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형벌’은 어떤 개인이 사회의 존속을 위협할 수 있는 행위를 하였을 때, 사회가 그 ‘행위’에 대한 벌칙으로서 부과하는 어떠한 구속 행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형법에서는 「정당방위」라는 조항과 같이 어떤 범죄에 대한 형벌을 결정할 때에 동기적 측면을 고려하여 양형한다. 이것은 행위 자체만을 보고 형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의 동기적 측면, 즉 그 범죄를 행한 이에 대한 판단 또한 형벌의 산정에 고려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늘날의 형법에서의 실정(實政)이란 고전적 형법론과 합치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를 고전적 형법론이 맞기 때문에 오늘날의 형법은 전적으로 틀렸다고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하여 소리 높여 고전적 형법론으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이러한 합치되지 않음이 어쩌면 오늘날 이기적인 사람들 속, 인본주의 사회의 실현에 대한 근본적인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해볼 뿐이다.

우리가 흔히 ‘인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칭하는 어떠한 추상, 혹은 가치가 언급되었을 때, 그러한 언급을 들은 사람들이 주로 떠올리는 것이란 ‘사람’, ‘평등’ 등과 같은 추상 혹은 실체들이다. 실제로 ‘인본주의’ 하에 구축된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을 실체가 아닌 그림자로서 동일하게 환대한다. 여기서 ‘실체가 아닌 그림자로서’라는 말은 그 환대가 개인에 따른 차이를 고려한다기보다는 각 개인을 하나의 동일한 형태로 간주하고서 환대한다는 의미를 지칭한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이러한 ‘인본주의’라는 추상, 혹은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 대표적인 명제 중 하나인 “인간의 생명은 모두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오늘날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런데 현실은 이 보편적인 하위 명제와 모순인 듯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떻게, 어디에서 현실과 이 명제 사이에서 모순이 발생하는가를 질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묻자, 과연 현실의 모든 모습이 이러한 ‘인본주의’의 ‘실체가 아닌 그림자로서’라는 정신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굳이 ‘어디에서’, ‘누가’, ‘어떻게’, ‘왜’라는 의문사들에 대한 대답이 상이함에 따라 달라지는 살인자들의 호칭을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우리는 단지 ‘어떤 죽음은 잊혀진다’라는 명제가 현실의 증거들에 의하여 참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는 불편한 감각에서 앞선 질문에 대한 대답이 명백히 “아니오.”인 것 같다는 직관의 지시를 마주할 수 있는 것 같다. 아주 단순한 것인데, 만약 ‘인간의 생명은 모두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라는 명제가 나에게 있어 참이며 하나의 규칙으로서 간주되었다면, 내가 모르는 어떤 한 구성원의 죽음이 알려졌을 때, 나는 그 죽음에 대한 애도를 적어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한 사람의 죽음과 동일하게 했을 것이다. 한 개인이 ‘인간의 생명은 모두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라는 명제에 동의하며 이 명제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는 사랑하는 연인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가 느끼는 슬픔과 동일한 슬픔을 그와 인연이 전혀 없는 한 개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마찬가지로 느껴야하고 우리는 이러한 목격을 할 때에서야 비로소 응당 이 명제에 따라 그가 행위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가? 우리 옆의 가족이 세상을 떠난다면 우리는 이로 인하여 주로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년 아니 수십년의 시간 동안 슬픔에 잠긴다. 반면 나와 인연이 없는 한 사람의 죽음이 매스 미디어(Mass Media)를 통해 보도되면 우리는 그 죽음을 지나가듯 받아들인다. 아니, 정확하게는 지나가게 내버려둔다. 이 관찰을 다시금 상기할 때마다, 나는 ‘죽음’에 대한 우리들의 ‘값어치 매김’이란 자명하게 그 ‘죽음’의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 명백히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쩌면 이것은 ‘죽음을 맞는 이’와 ‘죽음을 목격하는 이’ 사이의 ‘동시공간상 공통 경험’의 부재에서 기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보통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지는 바로 그것의 부재, 바로 그 부재야 말로 이러한 경우, 죽음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을 구별지을 수 있게 하는 근본 원인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주장해보고도 싶다. 즉, 어쩌면 이 부재는 사실 모든 죽음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 차이를 유발하는 원인일지도 모른다고.

전쟁 중에 적군을 죽이는 군인의 살인이 변호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죽인 적군이 사실 우리와 ‘인연’이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만약 그 군인이 죽인 적군이 사실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그 군인의 살인을 변호할 수 있을까?

또한, 그렇게 중대하지 않은 업무상의 과실로 몇 명을 죽음으로 이르게 한 관리자가 있을 때, 그 관리자의 살인 행위로 인하여 목숨을 빼앗긴 사람이 우리가 모르는 사람인 경우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인 경우, 두 경우 모두 우리는 동일하게 그 사람을 바라볼 수 있을까?

결국은, 인간의 생명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존재란 인간일 수밖에 없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인간과 가치를 부여받는 인간 사이의 관계에 따라 그 가치의 정도는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느냐, 이것이 바로 죽음의 가치를 판단하는 가장 원초적인 기준이 아닌가, 우리는 의심해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살인은 변호된다.

이것은 단지 그 살인의 행위에 대한 정당한 근거가 있을 경우만 해당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살인의 행위가 아무리 정당하지 못하였더라도, 그 살인자와 살해당한 자를 바라보는 이가 그 살인에 얽힌 이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에 따라서도 살인에 대한 변호의 정도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이러한 불편한 모순은, ‘인본주의’에 관한 우리의 꿈을 좌절시키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결국은 또 한 편의 글을 쓸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답문(答文) #4 – 2021. 8. 4.

근데 어쩌면 사람이 친척관계에 있더라도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이력이 있거나그 외의 다른 ‘나와 그 사이의 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이 없는 사실로 인해 변호되는 경우도 있던데이것도 죽음이후에 나타난 그러한 사실이 결국 관계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라 봐야하나?

답문(答文) #5 – 2021. 8. 4.

그러니까, 그 사람의 과거 이력이나 행실에 의하여 그 사람의 양형이 가산되거나 감산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지? 살인 사건이 났는데, 그 살인자가 예전에도 몇 건의 절도나 강도와 같은 범죄 이력이 있음이 매스 미디어(Mass Media)를 통해 보도되는 경우 이런 것?

… 아마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러니까,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이른바 ‘관계의 거리’에 따라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즉, ‘가까운 관계’와 ‘먼 관계’가 있는데, 이것은 사람과 사람이 얼마나 친밀하냐에 따라 분류하였다기 보다는, ‘동시공간상의 공통 경험’이 양 당사자가 직접 의사소통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면 ‘가까운 관계’, 그렇지 아니하고 양 당사자가 제3의 매체를 통하여 의사소통하는 경우는 ‘먼 관계’로 분류한 것임.

네가 말한 사례는 살인자가 누군가를 죽인 이후에 나타난 그러한 사실이 결국 살인자와 그 살인자를 목격한 이 사이의 ‘먼 관계’를 변동시켰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답문(答文) #6 – 2021. 8. 4.

사실 말하려고 했던 것은 그러한 현실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교통사고가 난 먼 친척이 사실 원한관계에 있었다던가 하는 약간의 드라마틱하지만 그래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음.

이런 경우는 살인이 변호될 정도로 충분히 먼 관계가 되도록 하는 규모가 충분한 충격이었다고 해야 할까나?

답문(答文) #7 – 2021. 8. 4.

아니지, 그러한 경우(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다면, 살해당한 사람이 살인을 목격한 사람과 관계가 좋지 않을 경우를 말하는 거 맞지?)는 이 글에서의 최초의 나의 주장대로, 그저 ‘살인자’와 ‘살해당한 사람’과 그 ‘살인을 목격한 사람’이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는 대표적인 사례에 들어가지 않나? 그러니까 네 예시는 직접적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 변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례는 아닌 것 같은데.

답문(答文) #8 – 2021. 8. 4.

정확히는 살해자와는 상관없이, 피살해자와 관계자(적어도 어느정도는 가까운) 사이의 관계가 특정사실을 통해 변형되는 경우를 말한거지만, 사실 어쨌든 관계에 의한 변호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