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답록 #6. 혐오의 기원

문답록 #6. 혐오의 기원

2021-09-18 0 By 커피사유

문답록(文遝錄)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작성한 글에 대한 주석과 그에 대한 답글을 갈무리하는 공간이며, 동시에 그러한 주석과 답글 사이의 동형성 혹은 차이점을 발견함으로써 글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확장하는 공간입니다.

들어가며

이 문답록(文遝錄)은 필자가 2021. 9. 12.에 Facebook에 이 블로그의 「사유 #18. 혐오사회(嫌惡社會, Hatred: A Twisted Society)」의 일부 교정본을 공개한 이후, 해당 글에 대하여 필자의 선배이신 포항공과대학교의 손탁일 선배와 필자가 Facebook을 통하여 서로 이 글에 대하여 토론한 과정을 기록해두기 위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문답록(文遝錄)은 그 특성상, 문답(文遝)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주고 받은 글들을 모두 기록하여야 하므로, 이 글에는 필자의 원문과 이에 대한 손탁일 선배의 답문, 그리고 그 이후로 이어진 모든 논의 과정의 글들을 싣습니다.

필자는 모든 기록된 글들을 Facebook에 게재된 원문 그대로 옮겼음을 밝혀둡니다.

원문(原文) – ‘사유 #18. 혐오사회’. 2021. 9. 12. Facebook에 필자가 작성.

최근 일명 ‘편의점 GS25의 이벤트 홍보 포스터의 남성 혐오’ 논란이 커지고 있습니다. 관련 포스터 내용이 남성 비하 목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입니다. 최근 인터넷 중심으로 다양한 정보가 짧은 시간에 확산하면서 여론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GS25는 지난 1일 전용 모바일 앱에 캠핑용 식품 구매자를 대상으로 경품 증정 이벤트를 홍보하기 위해 포스터를 하나 올렸습니다. 당일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포스터의 손 모양이 남성 비하 목적의 그림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포스터 하단의 달과 별 디자인은 한 대학의 여성주의학회 마크라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포스터에 적힌 영어 표현인 ‘Emotional Camping Must-have Item’의 각 단어 마지막 글자를 조합한 ‘메갈(megal)’이 남성 혐오 커뮤니티 ‘메갈리아’를 암시한다는 지적도 제기됐습니다.

늦은 오후였다. 라디오 뉴스에서는 또 그 이야기였다. 며칠 전에 또 한 번 대한민국의 오랜 젠더 분쟁의 역사에 도화선을 당긴 사건. 그러나 나는 그날따라 몹시 피곤하였고, 너무 많은 젠더 분쟁과 모두가 서로를 혐오하고 있다는 식의 뉴스를 들어온 터였으므로 투덜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뉴스를 들을 때마다 나는 굉장한 피로감을 느꼈다. 내가 이러한 젠더 갈등이라던가 혹은 세대 갈등, 또는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수많은 집단 간 갈등에 대하여 아는 바가 그리 많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굳이 그들의 소중한 시간을 다른 사람과 집단을 혐오하는데 사용하고 있다는 보기에 분명한 사실은 시간 효율을 중시하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자, 끝없이 나를 피곤하게 할 뿐인 것이었다.

나는 도대체 사람들이 왜 서로를 미워하는 것을 넘어 서로를 혐오하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최근 들어 우리 젊은 세대들이 이러한 혐오에 많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어른들의 논리에 중독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나 자신이 지금까지 알게 된 정보들에 의하면 서로를 혐오하는 것은 양 당측에 그 어떤 이익도 가져오지 않는 소모전이면서, 그 혐오의 안에 내재되어 있는 근본적인 쟁점과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합리적 의사 결정 방식도 아니었다. 개인 간의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그 어떤 사회의 문제도 원만히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오던 나에게, 뉴스와 주변에서 말하는 우리 사회의 ‘서로를 향한 손가락질’은 신념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문득, 나는 ‘도대체 왜 사람들은 타인을 혐오하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게 되었다. 이 의문에 대하여 잘 알려진 대답 중 하나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개인 모두가 낯선 것에 대한 일련의 ‘자기 방어 기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이를테면 우리가 지금까지의 일상에서 본 적이 없는 어떤 특이한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을 봄으로써 느껴지게 되는 일종의 위화감이나 거부감은 비단 스스로만이 가지고 있는 감각이 아닌 인류 모두에게 보편화되어 있는 감정이기 때문에, 낯선 타인에 대한 자기 방어 기작이 작용하되, 이것이 그 위화감이나 거부감을 증폭시키면 결국 타인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는 것, 그것이 핵심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대답은 여전히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 감정이라고 하는 요소는 이성이라는 훌륭한 두뇌 기작을 통해 어느 정도 통제될 수 있음은 흔히 ‘집단지성’의 결과물이라고 여겨지는 ‘위키백과’를 생각해보면 매우 명백하게 증명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흔히 알고 있듯, ‘위키백과’에서는 그 어떤 인터넷 사용자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문서에 추가, 혹은 새로운 문서를 생성함으로써 백과사전 자체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논란거리가 되는 사건, 쟁점에 관한 문서의 경우는 여러 사용자들 간의 이해 혹은 주장이 충돌하므로 편집 분쟁이 발생하는데, ‘위키백과’에서는 토론을 통하여 양 주장을 대결시키고 합의안을 도출하여 그 분쟁을 해결하게 된다. 가끔 감정적인 요소가 개입하여 토론을 과열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토론은 결과적으로 감정을 개입하고 효과적으로 이성을 통한 주장의 비교와 대비, 그리고 입장 전달과 상호 이해를 통하여 합의안을 성공적으로 도출해왔다. 고로, ‘위키백과’의 토론을 통한 내용 수정 및 합의 도출이라는 규정이 지금까지의 ‘위키백과’를 유지시켜온 유효한 규정으로 존속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여 보면, 감정적인 영역이 개입할 수 있는 갈등을 이성을 통해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따라서 나는 그렇다면 왜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갈등은 이성을 통해 합리적으로 해결되는 방향으로 가기보다는, 감정이 폭주하는 혐오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이어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지만, 나에게 있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세대의 ‘좌절’이었다.

나의 경험을 되돌아볼 때, 이성의 마비를 일으키고 감정이 우선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작에는 이성을 통한 문제 해결 과정에 있어서의 실패의 경험이 필요한 듯하다. 즉, 이성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경험의 누적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당장 우리가 어느 취업 준비생이라고 스스로를 가정하는 상상을 해보면 손쉽게 이를 유추할 수 있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2년 동안 취업을 준비해서, 곳곳의 기업들에 원서를 내고 면접을 봤지만 불합격 통보만을 받았다고 가정하자. 아마도, 처음에 대학을 졸업한 이후 부풀었던 진로에 대한 꿈은 산산조각 난 지 오래되었을 것이고, 이제는 취업만을 바라면서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꿈꾸었던 회사보다는 한참 낮은 회사에 이력서를 보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회사에서까지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면 어떠할까? 자신의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또 한 번 크게 좌절되었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자신이 그렇게 대학에 등록금을 내면서 다녔던 과거 – 자신의 이성이 지시하는 미래에 대한 합리적인 투자는 다시 한 번 무용한 것이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즈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우리의 다음 행동은, 분노에 휩싸이는 것, 또 한 번의 절망에 대한 뒤틀린 표출 뿐이다.

그러므로 이성의 마비를 일으켜 감정적 영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도록 하여, ‘혐오’를 일으키고 합리적 의사 결정 과정을 방해하는 기작은 반복되는 ‘좌절’일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마도 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를 ‘바뀌는 것이 없음에 대한 절망의 뒤틀린 표출’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소리쳐도, 끝없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대로 자신을 계발하고 끝없이 달려도 보이지 않는 ‘달성’이라는 목표 지점의 상태가 계속된다면, 나라도 물론이고 우리 모두가 당연히 ‘혐오’로 전이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소결론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피로감을 안겨준 뉴스의 ‘젠더 갈등’ 이외의 또 하나의 다른 종류의 ‘혐오’가 동반된 우리 사회의 갈등은 조금 더 이 소결론을 파고 들 여지를 제공해주었다. 그 갈등은 ‘세대 갈등’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인데, 어느 날 새벽 아버지와 거실의 식탁에 앉아 논쟁하는 것이 일상인 나로서는, 그 ‘세대 갈등’이 우리 젊은 세대들의 ‘좌절’에 대하여 말하는 주장 중 하나를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 주장은 대략 ‘너무 빠른 해결을 원하는 것 아니냐’라는 것이었다. 그 새벽의 식탁에서 내가 어떤 사회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 나의 아버지께서는 항상 내가 너무 급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곤 항상 뒤에 다음의 말을 덧붙이셨다.

지금은 네가 무엇을 해 봐야 바뀌는게 없다. 성장하고, 사회에서 문제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는 위치에 간 이후에 바꿔야지, 지금 이렇게 네가 불만을 터뜨리기만 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나도 물론 ‘너무 빠른 해결’을 내가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리하여 이성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효과적인 전략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도 그러한 ‘너무 빠른 해결’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번번히 사로잡혀서, 그 새벽의 논쟁을 격화시키는데 크게 일조했었다. 그러한 행동은 지금의 나 자신이 생각하기로는 다소 비합리적인 행동이었기에, 나는 문득 그 행동의 원인을 규명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왜 나를 비롯한 청년 세대들은 ‘너무 빠른 해결’을 기대하고 있다고 생각되는가? 그리고 왜 이러한 ‘빠른 해결’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한병철의 ‘피로사회’라는 글로부터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었다.

‘피로사회’라는 글에는 두 가지의 사회상이 대립되고 있었다. 하나는 예전, 쉽게 말하자면 민주화 이전의 규율과 강압으로 금지의 논리가 개인을 크게 지배하는 사회인 ‘규율사회’라 불리는 사회상이며 그와 대조되는 다른 하나는 지금, 쉽게 말해 민주화 이후의 비교적 규제의 철폐, 자유화를 내세우는 논리가 전적으로 우위를 범하는 사회인 ‘성과사회’라 불리는 사회상이었다. 후자가 ‘자유사회’가 아닌 ‘성과사회’라고 불리는 것은 이상해보일 수 있었지만, 자유화를 내세우는 지금 사회의 평가 방식이, 그리고 그런 사회가 우리에게 내세우는 규칙 중 하나인 ‘높은 성과는 높은 보상으로 되돌려받을 것이다’를 생각해보면 전혀 이상해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병철은 이러한 바람직해보이는 ‘성과사회’에 ㅐ한 일련의 ‘우울의 맹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 우울의 맹점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에 대한 자유화와 ‘높은 성과에 대한 높은 보상’의 두 가지가 결합하는 경우, 개인은 항상 더 높은 성과를 위한 목표를 설정하게 되며, 그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에 다음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게 되므로 결코 목표가 전부 완료된 만족의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지금의 ‘성과사회’라는 사회상이 개인의 성과, 그리고 그 성과에 수반되는 각종 보상 – 이를테면 사회적인 인정,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높은 소득과 재원 – 등을 향한 개개인의 욕구를 심각할 정도로 크게 장려한다는 것이었다.

위 ‘성과사회’의 사회상과 개인의 욕구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볼 때 나는 비로소 나를 비롯한 청년 세대들이 왜 ‘빠른 해결의 욕구’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틀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이유란 ‘성과사회’가 우리에게 ‘빠른 해결의 욕구’를 강요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더 높은 성과를 거두고 더 높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이제 나를 비롯한 우리 세대의 내면에 고착되어, 빠르게 변하고 시간에 따라 곳곳에서 다양한 성과들이 보고되고 있는 요즘, 그리고 주변을 따라 스스로도 또한 빠른 속도의 성과를 추구하는 태도로 둔갑한 것이었다.

나는 그 때 또 한 번,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제안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그래서 나는 메모장을 열어 다음과 같이 적어두었다.

‘혐오’는 성과 사회에 의해 내면화되는 ‘빠른 해결의 욕구’에 의하여, 번번히 자신의 욕구가 좌졸되는 경험의 누적으로 인한 우울에 시달리는 개인의 뒤틀린 ‘자기 방어 기작’에 의한 것이다.

메모장을 닫은 나는, 이제 나의 욕구 하나를 비로소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러 해결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피곤하였고, 여전히 라디오에서는 계속해서 아까이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므로, 나는 라디오를 끄고 침대에 눕고 싶은 강력한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라디오를 끄기도 굉장히 힘들 정도로 피곤하였으므로, 결국 나는 침대에 쓰러져 하루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몰려드는 졸음과 라디오를 꺼야 할 것 같다는 조금씩 미약해지는 의지의 사이에서, 라디오에서는 여전히 앵커가 뉴스를 읽고 있었다.

편의점 GS25의 이벤트 홍보 포스터에 ‘남성 혐오’ 그림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시작된 논란이 경찰 홍보물로 옮겨붙었습니다.

3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경찰청과 경기북부경찰청 등은 오는 13일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가는 개인형 이동장치 법령에 관한 홍보자료를 지난달 중순께 인터넷에 배포했습니다.

문제는 게시물에 들어간 사람 손 모양의 그림이 인터넷 커뮤니티 ‘메갈리아’ 이용자들이 한국 남성을 비하하는 의미로 쓰는 그림과 유사하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불거졌습니다.

경찰은 전날 입장문에서 ‘손 모양은 카드뉴스 페이지를 넘기는 부분 등을 강조 표시하기 위해 삽입된 것으로 특정 단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음을 확인했다’면서, ‘취지와 다른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어 해당 내용은 시도경찰청을 통해 수정 중’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제1답문(答文) – 2021. 9. 12. Facebook에 손탁일 선배께서 덧글로 작성.

‘빠른 해결의 욕구’ 는 정말 좋은 지적인 것 같은데! 긴 토론과 합의의 과정을 견딜 수 없어서 생겨나는 문제라고 나도 생각했었거든. 근데 나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결코 도달 불가능한 이상적인 목표에 대한 태도의 문제’ 라고도 보는 입장이야. 정의로움과 같은 가치는 결코 절대적 정의를 가질 수 없고, 시대와 사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에도 절대적인 하나의 정의로움이 존재한다는 이상에 집착해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는 행동이 격해지는 거지. 매번 정의로움을 새롭게 정의해야 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주장이 틀린 것이 아니며, 매번 그들과 토론해야 하는 것이 현실적인 정의로움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바보로 취급하며, 나아가 그들과 사회 전체를 계몽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현재 사회의 합의를 무시해도 되는 정당성까지 스스로에게 부여하게 되는 것 아닐까?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비논리적이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들이 너무나 정당한 혁명이라고 스스로 믿는 것에서 혐오가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제2답문(答文) – 2021. 9. 12. Facebook에 필자가 덧글로 작성.

선배 견해를 말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만 선배의 견해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드릴 내용이 있어 다음과 같이 붙이고자 합니다.

우선 선배께서 말씀하신 ‘도달 불가능한 이상적인 목표에 대한 태도의 문제’라는 시각에 전반적으로 동의합니다. 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 그 진리의 실체가 고정이 아닌 가변인, 즉 논쟁을 통하여 방향이 정해지는 형태의 문제라면 매번 새로운 토론을 통하여 자신의 입장을 관철해야 하기 때문에 계속 토론을 거치는 동안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감각을 지속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고, 따라서 결국 ‘빠른 해결의 욕구’가 좌절되는 것이니까요.

다만 그러한 ‘매번 그들과 토론해야 하는 것이 현실적인 정의로움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의 확장선에 있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신 ‘사회 전체를 계몽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대하여서는 저는 조금 견해가 다릅니다. 제 주변에도 이러한 오늘날의 혐오 논쟁에 참여하고 계신 분들이 있는데, 그러한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사회 전체의 계몽’보다는 ‘당면한 문제에 대한 빠른 해결의 욕구’가 더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분들께서는 대체로 ‘사회를 바꾸겠다’라는 생각은 포기하신지 오래이고, 다만 당장의 (주로 경제적 또는 사회적) 생존의 문제를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하고 싶다는 욕구를 강력하게 표출하시더라고요…….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 전체를 계몽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사회 전체로까지 이어질 필요 없이 그저 오늘날의 ‘성과사회’에 의한 ‘당면 문제 해결을 위한 강력한 욕구’가 조금 더 많은 경우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그 어느 경우이든,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한 일련의 방어 기작 구축은 모두 동일하게 관찰되겠지만요…. 아무래도, 현재 이어지고 있는 ‘혐오’라는 현상을 조금 더 관찰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