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3

사유 #3

2020-06-12 0 By 커피사유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커피, 사유(思惟)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일러두기

다음 글은, 필자가 고등학교 ‘화법과 작문’과의 조기졸업 수행평가로 작성한 글임을 서두에 밝힙니다. 이 글에서 밑줄이 그여진 부분은 비유, 설의, 도치, 인용, 열거, 예시, 대조 및 비교 등의 다양한 표현 방법이 사용된 부분입니다.


갑작스러운 종이 한 장

어느 여름날, 5교시. 갑작스럽게 회의실 구석에 자리잡은 의자에 앉게 된 나는 내 눈 앞으로 내밀어진 종이에 적힌 글귀를 보게 되었다. ‘화법과 작문’ 조기졸업 수행평가라고 했다. 제시된 주제 4개 중에서 하나를 골라 자신의 자아를 성찰하는 글을 써서 오라고 했다. 다양한 표현 방법을 사용하고, 밑줄도 그어서 표시하라고 했다.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나 자신을 둘러싼 세상은 항상 어지럽게 흔들렸다. 어쩌면 그것은 5, 6교시의 동아리 시간을 기대하던 나 자신의 실망감, 급박한 일정이 닥쳐온 현실, 그리고… 문제의 주제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가 가장 나중 지닌 것’. 길이는 짧았으나 그 여운은 길었다. 처음 이 말을 접하고서 나는 솔직히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마치 나에게, ‘내가 가장 나중 지닌 것’이라는 말은 ‘내가 가장 나중에 지니게 된 것’을 지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가장 끝까지 지니게 될 것’이라는 말로도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곧 알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특별한 경우에 해당해서 그러는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 있어 그 둘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독백

‘내가 가장 나중에 지니게 된 것’과 ‘내가 가장 끝까지 지니게 될 것’ 둘 모두에 해당하는 것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나는 찾을 수 있었다. 그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나의 일상 경험 속에서.

어느덧 1년 반 전의 일이 되었다. 나는 갓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 ‘경남과학고등학교’라는 모순적인 공간에 입성하여, ‘브릿지 교육’이라는 것을 받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다리를 놓는다 – 말은 그랬지, 나에게 느껴진 실상은 선행을 미친 듯 해 온 아이들과 선생님의 공간이자 순간이었다. 나보다도 더 뛰어난 아이들이 나보다도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고 나는 느꼈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알고 있는 것들은 고등학교 교육과정 중에 있는 것들 – 그 중에서도, 중학교에서는 일반적인 방법으로서는 접근할 수 없는 미적분 등에 관한 것들이었기에, 앞에서 어떤 한 친구가, “접선의 기울기를 구할 때에는 그 점에서 미분계수를 구해버리면 됩니다, 선생님.”이라고 어느 날 말했을 때, 나는 나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강력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분노로 인하여 나는 나 자신과 다른 아이들을 수없이 비교하면서 수도 없이 자기 자신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왜 이것을 모르는가, 저것을 모르는가. 누군가는 “모르면 죄가 아니다, 배우면 된다”라고도 말하지만, ‘모르는 것’은 확실히 ‘죄’가 되었기에, 미분계수라는 것을 논한 그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옆의 친구들을 보면서 내가 씁쓸함을 느꼈듯, 나는 ‘그들’에 속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한 없이 원망했다.

그들에 속하고 싶었던 나는 내가 모르는 것들을 알기 위하여 창원에 있는 모 학원에 등록했다. 수학 학원이었다. 학원은 콩나물 시루였다. 콩나물 시루와 다름없는 공간에서, 볕을 쬐지 못해 노랗게 비틀어지고 있는 콩나물들이, 언젠가 자신에게 비추어질 빛을 기대하면서 자신에게 떨어지는 콩고물들을 받아먹는 소리가, 연필이 사각거리고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시루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 공간을 견딜 수 없었다. 앞에서는 강사라는 사람이 들어와서는 많은 내용을 한꺼번에 나더러 머릿속에 빨리빨리 집어넣으라고 야단이었고, 생전 처음 보는 문제를 던져주고서는 풀라고 하더니 못 풀고 있으면 못 풀고 있는대로 야단이었고, 겨우 풀어낸다면 ‘네가 푼 방법은, 쓰레기들 중에서도 분리수거 안 되는 쓰레기들이 푸는 방법이다’라며 야단이었다. 구토가 나왔다. 몇 번 가지 못하고 나는 그 학원에 영원한 작별을 고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나의 분노는 더욱 맹렬하게 타오를 수 밖에 없었고, 나는 주변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하나같이 모두 나를 제대로 벼랑 끝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눈 앞에 까마득하게 펼쳐진 낭떠러지에, 나는 몸서리쳤다. 사교육이 만연한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 ‘이것도 모르냐’라 말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들 속에서 어느새 형성된 지역 감정 – 끼리끼리 모여서 놀자는 느낌.

타올라 꺼질 줄 모르는 분노는 세상에 대한 저주로, 세상에 대한 저주는 다시 맹렬한 분노로, 그 분노는 다시 나를 삼켰다. 심지어 입학 전의 어느 날 나는 분노를 이기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유서를 쓰기에 이르렀다. 분노 속에서 나는 타 죽어가고 있었다.

굼굼니 여왕, 그리고 가장 나중에 지닌 것

하지만 입학 며칠 전에 우울한 기분을 좀 털어내고 싶어서 펼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 ‘개미’의 한 구절이 그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너무나도 소중한 글이어서, 여기에 그대로 옮긴다.

75. 아침

아주 묵직해 보이는 분홍빛 공이 다가온다. 그가 그 공에게 페로몬을 발한다.

“나는 당신 종족에 대해서 아무런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소.”

그러나 그 공은 멈추지 않고 계속 다가와 그를 짓눌러 버린다.

103683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난다. 늘 악몽에 시달리기 때문에 그는 수면 시간을 줄이고 기온이 조금만 변해도 깨어날 수 있도록 몸의 상태를 조절해 놓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손가락들을 꿈에서 보고 있다. 그들에 대한 생각을 중단해야 한다. 손가락들을 무서워하면 때가 왔을 때 제대로 싸울 수가 없을 것이다. 두려움이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103683호는 옛날에 어머니 벨로키우키우니가 자기와 자기 동료들에게 들려준 개미 전설 하나를 기억하고 있다. 그 전설이 담긴 페로몬은 아직 기억 장치 속에 들어 있다. 약간의 습기를 제공하면 기억들이 온전히 되살아난다.

“옛날에 우리 왕조에 굼굼니라는 여왕이 있었는데, 그 여왕은 마음의 병에 걸린 채 산란실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여왕은 세 가지 문제 때문에 속을 끓이면서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 세 가지 문제란 이런 것이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일까?

살아가면서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행복의 비결은 무엇일까?

여왕은 자기 자매들, 백성들과 그 문제를 가지고 토론했다.

풍부한 정신을 가졌다는 연방의 모든 개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지만 만족할 만한 해답이 없었다. 개미들은 여왕이 병이 났으며 여왕이 골몰해 있는 문제들은 결코 겨레의 생존에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아무도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않자 여왕은 점점 쇠약해졌다. 온 겨레가 근심하기 시작했다. 유일한 산란자인 여왕을 잃는다면 큰일이었다. 그래서 온 도시의 개미들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그 추상적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가장 중요한 일은? 행복의 비결은?

모든 개미들이 대답을 내놓았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먹을 때이다. 왜냐하면 먹이를 먹으면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종족을 유지하고 도시를 방어할 병정개미들을 늘리기 위해서 번식을 하는 것이다. 행복의 비결은 열기다. 왜냐하면 열기는 화학적인 만족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 대답 중 어느 것도 굼굼니 여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여왕은 도시를 떠나 혼자서 위대한 바깥 세계로 나갔다.

바깥 세계에서 여왕은 살아남기 위해서 처절하게 싸워야만 했다. 사흘 후 여왕이 돌아와보니 도시는 온통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여왕은 자기의 해답을 가지고 돌아왔다. 깨달음은 야만적인 개미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격투를 벌이던 와중에 왔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현재에서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에 몰두하지 않는 자는 미래도 놓치게 된다.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것과 맞서는 것이다. 만일 여왕이 자기를 죽이려는 병정개미를 처치하지 못했다면 여왕이 죽었을 것이다. 행복의 비결은 전투가 끝난 다음에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살아서 땅 위를 걷는다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것들이다.

현재의 순간을 즐기는 것.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일에 몰두하는 것.

땅 위를 걷는 것.

그것이 굼굼니 여왕이 남긴 삶의 위대한 세 가지 비결이다.”

24호가 103683호에게로 다가온다. 그는 ‘신들’에 대한 자기의 믿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어한다.

103683호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더듬이를 움직여 24호의 설명을 제지하고는 그에게 도시 앞을 함께 산책을 하자고 권한다.

“아름답지, 안 그런가?”

24호는 대답하지 않는다. 103683호는 잔잔하게 페로몬을 발한다.

“우리가 손가락들을 만나고 죽이는 임무를 맡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야.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여행하는 것 등도 중요한 일이야. 결국 가장 중요한 순간은 메르쿠리우스 임무를 달성하거나 손가락을 정복할 때가 아니라 아마 우리들이 아침 일찍 동료 개미들에 싸여 있는 지금 이 순간일 거야.”

103683호는 그에게 굼굼니 여왕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4호는 자기 생각엔 마음의 병에 걸린 여왕 이야기보다 그들의 임무가 더 중요해보인다고 페로몬을 발한다. 24호는 손가락들에게 다가가 어쩌면 그들을 보고 만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다른 개미의 페로몬에 더듬이를 기울이지 않는다. 24호가 103683호에게 손가락들을 보았냐고 묻는다.

“그들을 보았던 것 같기는 해. 그러나 모르겠어. 앞으로도 모를 거야. 그들은 우리하고 아주 달라.”

24호가 의아해한다.

103683호는 그 문제를 가지고 페로몬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그는 신들이 손가락들은 아니라고 믿고 있다.

신들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손가락들과는 다른 것이다. 어쩌면 신은 이 빛나는 자연, 저 나무들 이 숲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어마어마하게 풍요로운 동식물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에게는 바로 이 지구의 아름다운 장관에서 믿음을 구하기가 더 쉬울 듯 하다.

바로 그 때 불그스레한 한 줄기 빛이 지평선 위에 드리운다.

103683호는 더듬이 끝으로 그 빛을 가리키며 페로몬을 발한다.

“보게, 참 아름답지 않은가?

24호는 그 감동을 함께 나누지 못한다. 그러자 103683호는 재담 삼아서 이렇게 페로몬을 발한다.

“나는 신이다. 왜냐하면 태양에게 떠오르라고 명령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3683호는 네 개의 뒷다리로 평형을 유지하면서 몸을 세운 다음 더듬이로 하늘을 가리키며 강한 페로몬을 내뿜는다.

“태양아, 너에게 명령하노니, 솟아라!”

그러자 태양이 웃자란 풀 너머로 한 줄기 빛을 내쏜다. 하늘은 갖가지 빛깔의 축제를 벌이고 있다. 황톳빛, 보랏빛, 연보랏빛, 빨강, 오렌지 빛, 금빛의 축제, 빛, 따사로움, 아름다움, 모든 것이 103683호가 지시한 순간에 나타났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지도 몰라.”

103683호가 말한다.

24호는 ‘손가락들은 우리의 신이다’라는 페로몬을 되풀이하고 싶다. 하지만 태양이 너무나 아름다워 그는 냄새를 말하지 못한다.

‘개미’, 베르나르 베르베르 저,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2013), 제2권, 261p ~ 중

그날의 경험으로 나는 그동안 이어져온 분노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행위의 ‘결과’에만 초점을 맞춰오고, 그 ‘과정’에서 내가 배우고 느끼고 사랑하게 된 모든 것들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나는 그 날, 이 글 하나로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가장 나중에 지닌 것이 바로 이것이다. 굼굼니 여왕의 전설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가장 중요한 일’, ‘행복의 비결’ 3가지. 그 동안의 힘겨운 과학고등학교 생활을 그럭저럭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3가지 생각을 잊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휘청거리던 순간 나를 붙들어준 이 글을 아무래도 가장 나중까지 가져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여기, 이 순간

나는 지금, 조기졸업이라는 거대한 벽을 마주하고 있다. 벽이 너무 거대해서, 나는 또 한 번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중심을 잡아야 한다. 벽이 너무 거대하지만 나는 운이 좋게도 ‘가장 중요한 순간’ ‘가장 중요한 일’, ‘행복의 비결’에 관한 어느 한 글을 알고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거라고, 그 과정에서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이 발전하는 것에, 또 하루를 살아서 ‘땅 위를 걷게 됨’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현재의 순간을 즐기는 것.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일에 몰두하는 것.

땅 위를 걷는 것.

그것이 굼굼니 여왕이 남긴 삶의 위대한 세 가지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