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32. 라디오와 함께 몰락하는 것

사유 #32. 라디오와 함께 몰락하는 것

2021-10-08 0 By 커피사유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Cafe 커피사유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몰락하고 있는 것은 라디오인 것만은 아니다


I’d sit alone and watch your light
My only friend through teenage nights
And everything I had to know
I heard it on my radio

You gave them all those old time stars
Through wars of worlds invaded by Mars
You made ’em laugh, you made ’em cry
You made us feel like we could fly

So don’t become some background noise
A backdrop for the girls and boys
Who just don’t know, or just don’t care
And just complain when you’re not there

You had your time, you had the power
You’ve yet to have your finest hour
Radio (radio)

Queen – Radio Ga Ga의 가사 중 일부.

텍스트 위주의 정보 전달 방식 속에서 등장한 라디오의 발명은 획기적이었다. 음성, 즉 소리를 통한 정보 전달의 방식이 본격적으로 마련된 이후, 곳곳에 전파탑이 세워지고 집집마다 라디오가 설치되면서 한 때에 라디오는 말 그대로 사람들의 삶의 일부로 녹아 들어갔다. 사람들은 자신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세상에 관한 정보를 말해주는 이 작은 기계에 그토록 열광했다. 대중은 진행자가 선곡하는 넓은 스펙트럼의 음악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감정선에 젖어들기도 했고, 방송국에 편지나 엽서를 보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또한 진행자의 목소리로 그 편지의 내용을 비롯한 다른 수많은 이들의 소소한 일상을 엿볼 수도, 누군가의 고민을 들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라디오의 시대는 이제 한물갔다. 라디오의 뒤를 이어 등장한 TV, 그리고 여기서 한 발자국 더 진보한 인터넷 방송 등이 시각 정보와 같은 더욱 다채로운 자극으로 무장하고 라디오를 밀어낸 끝에 오늘날의 수많은 대중들의 일상 속에 자리 잡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라디오를 듣고 누군가의 이야기 혹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접하던 때를 이야기하면 졸지에 옛날 사람이 되어버린다.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화면을 몇 번 톡톡 두드리면 그러한 이야기들은 누구나 손쉽게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눈으로 그리고 동시에 귀로 살펴볼 수 있게 된 덕분에, 이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점차 희미해질 뿐인 것이다.

이와 같은 라디오의 몰락을 아예 완전히 확정하기 위해서는 단지 젊은 세대들이 주로 어떻게 세상에 대한 정보를 접하는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최근 방송사들의 라디오는 젊은 세대들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오늘날의 청년 세대들에게는 오히려 음성적 청취 위주의 라디오보다는 시각적 자극이 동반되는 Youtube나 Twitch, 아프리카 TV 등과 같은 인터넷 플랫폼들을 매개로 각종 영상과 인터넷 방송을 보는 것이 더욱 익숙하다. 하지만 이것 외에도, 최근 초등학생들을 비롯한 어린 학생들의 장래희망 조사에서 그 등장 빈도가 높아진 ‘크리에이터’라는 단어가 이제 오늘날 다양한 매체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 그리고 그러한 ‘크리에이터’라는 단어가 가진 파급력으로 인하여 오늘날 많은 이들이 영상을 녹화 · 편집하고 또한 배포하는 방식을 배우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 더욱 라디오가 이제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설 수 있는 자리는 거의 없어져가고 있다는 결론은 더욱이 피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라디오의 몰락이라는 시대의 흐름과 정반대로, 나는 라디오를 듣는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12시 정각 뉴스, 그리고 각종 음악들을 듣는다. Youtube를 비롯한 각종 플랫폼에서도 동일한 정보를 더 자세하고 풍부하게 접할 수도 있지만, 나는, 라디오의 전성기 때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나는 구태여 라디오를 고집한다. 개인적으로 TV나 Youtube와 같은 영상 매체들보다는 오히려 음성 정보만을 접할 수 있을 뿐인 라디오가 스스로에게 더 많은 것을 전달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더 자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바로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화면을 몇 번 두드리기만 하면 될 뿐인데, 왜 굳이 라디오를 고집하는 것이냐고. 그러나 이런 이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 자신의 몰락에 대한 진혼곡이, 즉 그 모든 소리들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날 우리에게 중대한 의미를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듣는 것은 라디오의 몰락만이 아니다. 라디오의 소리와 함께 또한 어떤 중요한 사실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음을 나는 들을 수 있다.

내가 TV와 같은 영상 매체보다 라디오가 더 대상을 가까이서 지각할 수 있도록 한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겠는가? 아마도 대다수의 이들이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시각적 정보가 결여된, 오직 음성만에 대한 청취는 오히려 바로 그 정보의 결여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든다. TV의 저편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비치어지는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의 구체적인 모습, 예컨대 얼굴의 생김새, 키, 풍채 등에 대하여 상상할 수는 없다. TV가 바로 그러한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반면, 라디오를 통해 한 사람의 이야기나 생김새에 대한 묘사를 듣는 경우, 우리는 마치 우리가 책을 읽고서 수많은 시각적 표상들을 스스로의 내부에 떠올리는 것처럼, 일종의 ‘시공간 그림판’ 위에서 그 사람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또한 그릴 수 있다. 라디오가 제시하지 못하는 바로 그 정보들 때문에, 우리는 어떤 대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더 많은 노력과 상상력, 생각들을 동원해야 하는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라디오의 특성이야말로 정보 전달 매체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인 정보 전달의 신속성을 저해하기 때문에, 따라서 라디오가 아닌 TV가 더 멀리 있는 정보들을 단시간 내로 우리 앞으로 가져다 놓기 때문에 라디오가 더 대상을 가까이서 지각한다는 나의 주장에 대하여 반대 견해를 펼지도 모른다. 즉, 라디오의 경우에는 특정 시간에 진행되는 특정 프로그램을 기다려야, 비로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진행자의 목소리가 우리가 원하는 정보와 정서 따위를 제공하고, 그제야 우리는 그 속에 녹아들어가는 반면에, 라디오 이후에 발달한 매체들이 일상화된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손쉽고 거의 즉각적으로 지금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다가 내가 원하는 이야기와 음악을 담은 영상을 클릭 몇 번으로 찾아갈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보통 이들은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오늘날의 정보 전달 매체들은 심지어는 우리가 어떤 것들에 관심이 있는지를 파악하고 함께 보면 좋을 다른 영상들의 목록을 한 켠에 제공해주기도 한다는 사실까지 지적한다. 그러나 라디오의 제한된 정보 전달이라는 속성으로부터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를테면, 어떤 하나의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바로, “가까움이란 무엇인가?”라고 부르는 질문 말이다. 왜냐하면, 나의 주장에 대하여 반대 견해를 피는 사람들의 바로 조금 전과 같은 논증에 의하면, 라디오보다 오늘날의 인터넷 영상 매체들이 세상을 더 빠르고 더 가깝게 이어준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모두가 느끼고 있듯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더 다양한 정보를 더 빠른 시간 내에, 거리에 무관하게 여러 감각 기관을 통하는 방식으로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오히려 ‘가까움’이라는 감각은 그러한 시대의 도래 속에서 퇴장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은 라디오와 함께 점차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어느 때보다도 원하기만 하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또한 서로의 얼굴을 온라인 상에서 볼 수 있는 기술이 발명되었고 널리 사용되고 있는 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유대감의 결여, 그리고 고독하다는 느낌을 곳곳에서 호소한다. 그러한 느낌을 떨쳐버리려고 휴대전화를 꺼내서 SNS 서비스를 실행시킨 후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다 보면, 사람들은 점차 서로를 이해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또한 바로 그 때문에 서로에게 각종 모욕적인 언사와 표현을 서슴지 않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가까움’이라는 감각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 간의 간극은 더욱 멀어지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 어쩌면 라디오는 이러한 우리의 역설 속에서 자연히 태어나는 질문, 즉 “가까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가 라디오를 붙잡고 대답을 요구하면서 뚫어지게 바라볼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것을 권하는 바이다. 그 어느 것도 아닌 라디오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라디오가 어떤 대답을 할지 상상하고 또 생각하도록 하자. 그러면 바로 그 순간에, 라디오에서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사물」의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일부가 흘러나온다는 것에 우리 모두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가까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가까움의 본질을 우리는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 가까움은 직접적으로 발견될 수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오히려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살펴봄으로써 성공할 수 있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것들은 우리가 흔히 사물이라고 이름하는 그러한 것들이다. 그렇지만 사물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사람들은 가까움과 마찬가지로 사물 역시 사물로서 거의 사유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단지가 일종의 사물이다. 단지란 무엇인가? 우리는 일종의 그릇, 즉 다른 것을 담는 것이라고 말한다. 단지에서 담아 잡고 있는 것은 바닥과 옆면이다. 이러한 담아 잡고 있는 그것을 우리는 다시 손잡이로 잡을 수 있다. 그릇으로서 단지는 자체 안에 서 있는 어떤 것이다. 이러한 자체-안에-서-있음이 단지를 자립적인 어떤 것으로 특징짓고 있다. 단지는 자립적인 것의 자립으로서 대상(마주 서 있음, 대립)과는 구별된다. 자립적인 것은 대상이 될 수도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자립적인 것을) 직접적인 지각을 통해서건 상기하는 떠올림을 통해서건 우리 앞에 세울 때 (즉 표상할 때) 일어난다. 그렇지만 사물의 사물적임은 그것이 표상된 대상이라는 사실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대체 대상의 대상성으로부터는 규정될 수 없다.

… (중략) …

오늘날 현존하고 있는 것은 모두 똑같이 가까우며 또한 똑같이 멀다. 무간격(거리 없음)이 지배하고 있다. 그렇지만 멂을 아무리 축소하고 제거한다 해도 가까움을 데려올 수는 없다. 가까움이란 무엇인가? 가까움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단지에 대해 숙고했다. 우리는 가까움의 본질을 찾아 나섰고 단지의 본질을 사물로서 발견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발견 속에서 동시에 가까움의 본질을 느끼(감지하)고 있다. 사물은 사물로-된다. 사물로-되면서 사물은 땅과 하늘, 신적인 것들과 죽을 자들을 머물게 한다. 머물게 하면서 사물은 그 넷을 그것들의 멂 안에서 서로에게 가까이 데려온다. 이러한 가까이 데려옴이 곧 가깝게 함이다. 가깝게 함은 가까움의 본질이다. 가까움은 먼 것을 가깝게 하는데 그것도 먼 것으로서 가깝게 한다. 가까움은 멂은 보존한다. 가까움은 멂을 보존하면서 그것을 가깝게 하는 가운데서 본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가까움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가깝게 하면서 자기 자신은 은닉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가장 가까이에 남아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 「사물」 中

“가까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마르틴 하이데거는 ‘가까이에 있는 단지에 대하여 숙고하는 것’부터 출발하자고 제안한다고 라디오는 말한다. 그런데 그 모든 중간 과정을 통과한 라디오 속의 마르틴 하이데거는, 비상하게도 바로 그 단지에 대하여 ‘숙고하는 것’에서부터 가까움의 본질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사물은 마치 가까움이 일종의 (담는) 용기이거나 하듯이 (그렇게) 가까움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며, 가까움은 가깝게 함에서 사물의 사물로-됨으로써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물에 대하여 숙고하고 생각하고, 지각하면서 사물이 다른 사물과 맺는 관계라던가, 그 사물의 속성이나 특징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다름 아닌 ‘가까움’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뒤늦게 밝히는 바인데, 사실 라디오를 붙잡고 대답을 요구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 곁에 있는 아무 사물을 붙잡는 것만으로도 사실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을 우리는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물에 대하여, 대상에 대하여, 어떤 것에 대하여 상상하고, 지각하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사실 사물의 가까움의 본연에 있는 것이므로, 모든 사물은 우리에게 오늘날의 역설에 대한 일종의 해답을 제공한다고 이제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라디오도 하나의 엄연한 하나의 사물이므로, 라디오가 “가까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고 부정할 수는 없다. 내가 라디오는 아마도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고 말하면서, 굳이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는 라디오를 붙잡고 대답을 요구하며 뚫어지게 라디오를 바라볼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라디오의 시대는 이제 한물갔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라디오를 듣고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아직 그 ‘한물 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까움’을 듣는다. 라디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도 나에게는 물론 아쉽지만, ‘가까움’의 본질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나로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라디오를 듣는다.

이제 라디오에서는 막 하나의 노래가 흘러나오려는 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에게 친숙한 바로 그 노래, Queen의 ‘Radio Ga Ga’이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Queen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가 점차 퍼져나간다. 라디오의 기구한 운명은 물론 그 목소리가 점차 멀어지면서 희미해지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희미함 속에서도 분명히 무언가 다른 어떤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마도 그것이 또 하나의 내가 라디오를 여전히 들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구성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I’d sit alone and watch your light
My only friend through teenage nights
And everything I had to know
I heard it on my radio

You gave them all those old time stars
Through wars of world invaded by Mars
You made ’em laugh, you made ’em cry
You made us feel like we could fly

So don’t become some background noise
A backdrop for the girls and boys
Who just don’t know, or just don’t care
And just complain when you’re not there

You had your time, you had the power
You’ve yet to have your finest hour
Radio (radio)

All we hear is radio ga ga
Radio goo goo
Radio ga ga
All we hear is radio ga ga
Radio blah blah
Radio, what’s new?
Radio, someone still loves you

We watch the shows, we watch the stars
On videos for hours and hours
We hardly need to use our ears
How music changes through the years

Let’s hope you never leave, old friend
Like all good things, on you we depend
So stick around ’cause we might miss you
When we grow tired of all this visual

You had your time, you had the power
You’ve yet to have your finest hour
Radio (radio)

All we hear is radio ga ga
Radio goo goo
Radio ga ga
All we hear is radio ga ga
Radio goo goo
Radio ga ga
All we hear is radio ga ga
Radio blah blah
Radio, what’s new?
Radio, someone still loves you

You had your time, you had the power
You’ve yet to have your finest hour
Radio (radio)

Queen – Radio Ga Ga의 가사 전문.

추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