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38. 고깔 뒤에 숨은 웃음은 즐거움의 증거가 아니다

사유 #38. 고깔 뒤에 숨은 웃음은 즐거움의 증거가 아니다

2021-11-20 0 By 커피사유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Cafe 커피사유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고깔과 그 뒤에 숨은 위선자들에 대하여

이 글은 2021. 11. 19. – 2021. 11. 20.에 진행된 서울대학교 지구환경과학부 MT 이후에 작성된 글임을 서두에 밝혀 둡니다.


어떤 즐거움은 진정한 즐거움이 아닐 수도 있다. 그 어떠한 즐거움이라도 누군가의 슬픔이나 고통을 방조하는 구조를 가진다면 그 즐거움은 진정한 즐거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한다. 많은 횟수로 반복되는 것이 보통인 ‘벌칙을 동반하는 게임’들에서 참여자 각각에 대한 벌칙의 확률은 거의 동등하며, 따라서 모두가 얻는 손해와 이익의 정도는 비슷하다. 누군가의 고통은 잠시일 뿐이며, 일반적으로 그러한 ‘게임’들은 벌칙의 존재로 인하여 좌우간에 즐거운 분위기를 만드므로, 누군가가 슬픔이나 고통을 잠시 느끼더라도 이를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구조의 게임은 합리적이라고. 따라서 개인은 즐거움으로 이어지는 분위기라면 잠시 지속될 뿐인 사적인 불쾌감은 내려두고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 이것이 그들의 주장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념이란 궁극적으로 즐거움의 정반대에 있는 슬픔이나 고통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슬픔은 언제 느껴지는가, 그리고 고통은 언제 느껴지는가? 인간은 자신에게 직접적인 손해가 가해지거나 누군가에게 가해지는 손해를 목격하는 순간에 슬픔과 고통을 느낀다. 전자의 경우는 논의할 것도 없이, 예컨대 자신의 손가락이 누군가에게 물려 손상을 입거나 자신이 지불한 비용에 대한 효용 가치가 상실됨을 느낄 때 그 사람은 슬픔과 고통에 노출된다는 점을 생각해보기만 해도 아주 명백하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종종 사람마다 입장이 다르다. 사람은 그가 성장한 배경과 환경에 따라서 내부에 확립한 표상과 가치관이 다르며, 제각각의 존중받아 마땅할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누군가는 타인이 손해를 입더라도 일종의 슬픔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진술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라도 타인이 고통을 입을 때에 내적으로 고통이나 슬픔의 감각을 자동적으로 유발하는 기작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 사람들에게 부정적 감정의 유발 기작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오히려, 어떤 요인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이 마땅히 타인의 손해를 목격할 때에 자연히 느껴야 할 감정들이 가로막혀지기 때문에 이러한 진술이 발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솔직히 말하자. 우리의 시야는 종종 관습이라는 고깔 때문에 거의 보이지 않는 수준까지 제한된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얼굴에 고깔을 쓰고 오락이라는 명목 하에 시끄러운 군중의 합창 속에 어떤 공을 차도록 요구받는 상황에 다름 아니다. 코끼리 코를 5바퀴 돌았기 때문에 정신은 어지러운 가운데,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시야가 가려진 이들은 정작 정확히 차야 할 공의 위치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비틀린다. 대중의 고함과 왜곡된 환호에 떠밀려 비틀거리는 발걸음 속에서 이들은 종종 다른 사람과 부딪히고 엉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다. 시야가 보이지 않으므로 이들은 누군가를 상처 입혔다는 사실을 잘 보지 못한다. 상처 입은 사람도 그에게 책임을 묻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시야가 가려진 결과였으므로, 고의가 아니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르다.


누군가가 입은 상처에 대한 책임은 고깔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볼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 비틀리며 걸어가던 이들에게도 상처에 대한 책임은 분명히 존재한다. 고깔 때문에 마땅히 보아야 할 타인의 상처를 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지성과 보이지 않는 곳에 집중할 수 있는 인간적인 시선이 있었다면, 어쩌면 그들은 고깔과 얼굴 사이의 약간의 틈으로 누군가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 그들은 고깔에 남아 있는 아주 작은 구멍을 통해서 누군가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붕대로 전신을 칭칭 감은 후 얼굴에 감은 붕대 위에 기여코 매직으로 억지로 웃는 표정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수도 있다. 인지하기 어려운 것에 마땅히 집중할 줄 알았다면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분명히 발견할 수 있었을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오직 위선자들만이 있었다. 목격자들 모두가 고깔을 핑계로 붕대와 상처를 외면함으로써 방관자가 되었던 것이다. 늦게라도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잘못을 속죄하며,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할 책임을 그들은 고깔 뒤로 숨겼다.

왜 우리는 고깔의 존재가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깔을 벗어버릴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고깔을 던져 버리고 올바른 시각으로 타인을 대하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고깔의 뒤에 숨어서 그 웃기게 생긴 원뿔 깔때기가 마치 자신의 최선의 방패라도 되는 양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알고 있는 우리들은 고깔을 벗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고깔을 벗지 않는 것이다. 비겁하게도 우리는 관습 뒤에 숨어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즐거움의 표정이 고깔 뒤의 만인의 얼굴에 떠올라 있어도, 고깔이 존재하는 한 누군가는 몸싸움에 베이고 찢기고 씹혀서 종종 피를 흘리게 된다. 우리는 고깔을 벗어야 한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해결책이 명백하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깔 그 자체가 너무 편하다는 이유로 그것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그러한 종속에 대한 용인이란 도의적인 책임을 버리는 일에 다름 아니다. 만인은 마땅히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멈추어 서서 공감하고 함께 해결책을 찾는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것은 고깔 뒤에 숨긴 채로 두어야 할 능력은 분명히 아니다. 고깔 뒤에 우리가 숨어 있는 일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상처받는 이는 증가할 것이다.

과연 누가 이 고깔의 소용돌이 속에 위치한 웃음을 즐거움의 증거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니, 아무도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