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45. 삶의 의미에서 갈라지는 니체와 나

사유 #45. 삶의 의미에서 갈라지는 니체와 나

2022-04-02 0 By 커피사유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Cafe 커피사유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차라투스트라 ― 아니,
니체는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이 글은 2022. 3. 20. Chalkboard에 작성한 글 〈삶의 의미에서 갈라지는 니체와 나〉를 다듬은 것임을 서두에 알립니다.


#1.

니체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차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너의 삶이라면, 너의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는 약 2년 전부터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답을 다듬어왔다.

 “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바로 내 삶의 의미를 구성한다.”

 이 대답은 니체가 도출한 대답과 유사한 것 같다. 그러나 니체의 대답은 삶의 매 순간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진 반면, 나의 대답은 그렇지 못하고 있다.


#2.

 니체의 대답은 〈영원회귀사상과 운명애〉로 요약할 수 있다. “영원히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똑같은 삶을 산다면,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스스로의 삶을 긍정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 〈영원회귀〉의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절망이나 체념에 쉽게 빠져들곤 하지만, 니체는 오히려 스스로의 삶을 긍정하는 태도, 즉 〈운명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니체는 진정으로 위대한, 또는 바람직한 인간 ― 즉 〈초인〉은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들마저도 긍정하며 스스로의 성장에 이용하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매 순간마다 인간 스스로를 엄습하는 것이 고통이지만, 이 고통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고통 뒤에 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결과’ ― 이를테면 ‘유토피아’니 ‘내세’와 같은 하나의 ‘소망’ ― 을 기준으로 삶에 의미를 부여할 것이 아니라 고통 자체, 그리고 그 고통이 가져다주는 스스로의 변화를 긍정하면서 삶의 매 순간에서 존재의 충만과 영원을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 바람직한 삶의 태도이며, 이 태도 속에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삶의 의미라고 니체는 말하는 것이다.

 즉 ― 니체는 죽음 앞에서 무의미해 보일 수 있는 인간 삶의 의미를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찾을 것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는 것이다. ‘결과’를 보았던 이들은 삶의 종국적인 결과는 죽음이라는 점에 주목하기 때문에 삶의 의미는 상실되며 체념이 만개하는 염세주의적인 관점으로 빠져들지만, ‘과정’을 보았던 니체는 삶의 매 순간이 가져다주는 ‘변화’, 즉 자신의 ‘살아있음’ 그 자체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통스러운 삶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체를 긍정하는 태도의 필요성을 일찍부터 강조해온 것이다.


#3.

 ‘살아있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언제 우리는 사물이나 존재가 ‘살아있다’라고 말하는가? 내가 내린 결론은 ‘변화’의 유무가 어떤 존재가 살아있다고 표현하기 위한 조건의 핵심에 있다는 것이었다. 흔히 어떤 대상이 ‘죽어있다’라는 표현을 우리는 그 대상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거나 변화하지 못할 때에 사용한다. 이를테면 죽은 꽃과 살아있는 꽃을 판가름하는 핵심은 다름 아닌 그 꽃이 다음 해에 다시 꽃을 피울 수 있는가 없는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꽃이 이듬해에 꽃을 피우지 못하고, 그 뒤로도 계속 꽃을 피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꽃이 ‘죽어있다’고 결론짓고 또한 그렇게 표현한다. 그러나 만약 꽃이 이듬해에 꽃을 피우며, 겨울을 지낸 이후 다시 꽃을 피우게 된다면 우리는 꽃은 ‘살아있다’고 표현한다. ‘변화의 유무’야말로 ‘살아있음’을 정의하는 핵심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기는 하던가?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한다. 다만 그 속도가 얼마나 느린지 그리고 빠른지 ― 오직 그것만이 다르다. 사실 우리가 ‘죽어있다’라고 표현하는 것들마저도 변화하기는 한다. 오래전 자연과학은 이미 답을 도출했다. 죽은 유기체는 부패하고 분해된다. 무생물로 간주되는 것들도 물리학과 화학의 법칙들에 따라 운동하거나 녹이 슬어 다른 물질로 변화한다. 따라서, 만약 ‘변화’의 유무야말로 어떤 대상이 ‘살아있다’고 표현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건이라면 ― 세상의 모든 사물은 마땅히 ‘살아있다’고 표현되어야 한다. 세상에 ‘죽어있는 것’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만물은 ‘살아있다’ ― 니체의 결론을 여기에 적용하면 바로 만물의 이 속성이야말로 모든 사물에 의의를 부여하는 원천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은 이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 아니,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니체 사상의 확장 하에서는 더 이상 세상이란 고통으로 가득 찬 ‘죽음’의 세계로 해석될 수는 없다. 오히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들로 가득 찬 것이 된다.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그리하여 오직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고 여겨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과거의 것과는 다른 존재로서 현재에 실존하는 사물들로 가득 찬 것이 바로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살아있음’으로서의 세계, ‘살아있음’ 그 자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4.

 ‘변화하는 것’, 즉 ‘어제의 것과는 달라진 오늘의 것’이 ‘살아있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살아있는 것’에 대한 니체 식의 의미 부여를 생각해볼 수 있다면, 당연히 그 반대도 생각해볼 수 있다. ‘변화하지 않는 것’, 즉 ‘어제의 것과 같은 오늘의 것’은 ‘죽어있는 것’으로 정의될 것이며, 니체의 관점에서 이 사물을 본다면 여기에는 의미가 없다고 결론짓게 될 것이다. 물론 사실 니체의 사상을 만물의 변동성과 연결 짓는다면 세상에 의미가 없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겠지만, 적어도 한 개인의 정신에게 이 결론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에게 있어 오히려 니체 식의 ‘살아있음에 대한 의미의 부여’는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이나 절망의 추상과 여러 변형체들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문제는 다음에 있다: ‘변화하지 않는 것’, 즉 ‘어제의 것과 같은 오늘의 것’이 종종 나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만 같다. 나 자신을 ‘살아있는 것’으로 정의하게 하며,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니체 사상의 확장으로서의 다음과 같은 문장 ― 즉 〈어제의 나 자신과 오늘의 나 자신은 같지 않다〉, 다르게 말하여 〈오늘의 나 자신은 어제의 나 자신과는 달라졌다 / 오늘의 나 자신은 어제의 나 자신에 비하여 발전했다〉라는 진술 ― 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나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상실한다. 오늘의 나 자신이 어제의 나 자신과 견주어 볼 때 변화한 것이 없다면, 나는 스스로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적어도 니체 사상의 확장으로서의) 사실상의 유일한 근거를 잃은 것이다. 나는 종종 이 몹시 중대하고도 유일한 근거를 일상 속에서 잃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 바로 이것이 나에게 있어 니체 식의 ‘살아있음에 대한 의미의 부여’가 니체와는 다른 산물들을 안기는 원인이다. ‘무지’와 ‘무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 ― 이 과정을 나는 생각보다 자주 중단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원인인 것이다.

 ‘무지’와 ‘무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수행하는 다음과 같은 행위의 총합이다: 대학이라는 땅 위에서 끊임없이 각종 논문 · 글 그리고 교과서를 읽으며 이해를 시도하는 행위, 교수의 강의를 듣고 생각하는 행위,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는 행위. 이러한 모든 행위, 호기심 · 무지 · 무능이 나에게 선사하는 강력한 부끄러움과 열등감에 강하게 추동됨으로써 스스로의 안에 강한 저항 또는 열정의 불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릴 때 실행하게 되는 그러한 모든 행위들, 그리고 그 속에서의 모든 생각들의 전개 ― 이것들이야 말로 바로 나의 몸부림이자 비틀거림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 살아있음을 스스로에게 입증하기 위하여 마땅히 행해야 할 이러한 과정 ― 일체는 불행히도 나의 육체 그리고 정신에 동시에 상당한 피로를 부여한다. 무지 그리고 무능으로부터 기원하는 일체의 강력한 추동력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여유나 쉼은 허용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정의 중단 그 자체는 곧 스스로의 변화 · 성장이 중단된다는 것과 동치이다. 이는 곧 ‘죽어있는 것’과 스스로가 같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조건을 성립시키는 것이며 또한 존재 의의를 상실시키는 결과로 향하는 문을 여는 것과도 같다. 한 개의 무지 그리고 한 가지의 무능이라도 이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은 상당히 많은 시간을 요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니체의 질문과 나의 경험으로부터 알게 된 다음과 같은 사실 ― 즉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지만 나의 무지와 무능은 너무나도 많다’ ― 과 이 중대한 관찰이 결합하면 나는 급박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무지와 무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에 의해 불가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며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을 중단하지 않는 것뿐이지 과정의 진행 속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상 속에서 스스로의 일명 〈지적 투쟁〉의 중단을 용납하지 못한다.

 한 개인에게 피로가 누적되면 개인은 어떤 행위를 보이게 되는가? ‘게으름’, 그를 변혁시키는 유일한 과정의 ‘중단’. 이것이 나의 대답이다. 피로가 누적된 나는 종종 게으름에 빠진다. 어떤 하루는 인터넷 영상을 보는데 온전히 날려먹기도 하고, 어떤 하루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침대에서 끝내 몸을 일으키지 않기도 한다.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며, 악기를 다루거나 모종의 생산 활동을 취미로 그다지 즐기지도 않는 것이 나 자신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지적 활동〉은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규명 짓는 거의 유일한 활동이라는 점을 나는 다시 한번 상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나는 ‘중단’으로서 스스로를 죽인다. 그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에 있는 것이다.

 심각한 우울의 기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 활동의 중단이란 곧 나 자신이 살아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증거 자체를 일시적으로 사라지게 만드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있음’과 그것에 결부되어 있는 나 자신의 존재 의의를 주장할 수 없는 모든 시간들은 그 자신에 대해 의미를 주장할 수 없다. 당연히, 의미 없는 활동을 지속하는 ‘죽은 인간’은 나 자신일 수는 없다. 나는 스스로가 살아있는 존재라고, 그렇기 때문에 죽음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인간 그 자신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 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에 아직까지 존재할 수 있는 자격이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라며 거의 광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5.

 “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바로 내 삶의 의미를 구성한다.”

 지난 2년 동안 내가 도출한 위와 같은 대답은 ‘삶의 매 순간에 대한 긍정’이라는 니체의 대답과는 다르게 ‘우울과 절망’이라는 대답으로 나 자신을 이끈다. 사실, 나는 이러한 결과의 배경에는 지나치게 엄격한 ‘살아있음’의 정의에 대한 적용 또는 괴상한 연결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엄격함을 버리기 싫다 ― 아니, 버릴 수 없다. 그래도 이 대학의 땅 여기까지 스스로를 힘겹게 끌고 올 수 있었던 원인이 되는 것이 바로 이 강력한 추동이었으며, 그것은 우울과 절망을 채찍으로 사용하여 스스로를 여기까지 나아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 자신의 철학과 지식이 오늘에 이르게 만들었으며, 나름의 성취감과 만족감을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는 스스로의 ‘살아있음’을 주장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나는 감히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이 사상은 나 자신을 피곤하고 지치게 만든다. 정신적으로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덤이다. 따라서 나는 하루빨리 니체의 대답과 나 자신의 대답 사이에서 모종의 조화점을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살아있음’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다시 검토해야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