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 #6. ‘칼 갈기’가 아닌 ‘칼 맞대기’의 정치

동상이몽 #6. ‘칼 갈기’가 아닌 ‘칼 맞대기’의 정치

2021-11-30 0 By 커피사유

생각을 움직여 다른 꿈을 꾸다. 동상이몽(動想異夢) 시리즈는 커피, 사유의 카페지기 커피사유의 시사 평론 및 생각 나눔의 장이자, 세상을 향한 이해를 표현하는 공간입니다.

정치 무관심을 이끄는
‘판단 중지’의 중지를 위하여


D-100.

다음 대선 이야기이다. 또 무슨 정치 이야기냐고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언론에서는 제6공화국 출범 이래 이 정도로 양극화된 정치 지형과 여론조사를 보이는 대선은 없었다고들 말하고 있는데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아직까지 내 이성이 이 사람이 그나마 적절하다는 명령을 내리는 후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나 자신이 경제니, 안보니, 외교니 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정이란 판단 보류, 즉 판단의 중지 밖에 없다. 중대한 오류를 범하면서까지 굳이 잘 모르는 사항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을 내리고 의사를 강력히 표명하기보다는 차라리 잘 모르겠으면 일단 판단을 중지하고 잘 아는 사람들의 의견부터 듣는 것이 나의 기본 행동 방침이다.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제각각 바쁘게 돌아가는 하위 시스템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한 인간이 그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따라서 어떤 한 쪽의 입장이나 견해만 듣고 확증 편향적으로 나 자신의 견해를 확립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잘못을 범하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런데 대선까지 100일이 남았다는 지금 언론이 돌아가는 형세를 보면 논쟁적인 사안들과 도대체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한 쟁점들에 대하여 두 갈래로 나누어져 싸우고 있는 것만 같다.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면, 한 쪽에서는 차별금지법은 과잉차별의 소지를 낳을 수도 있으니 법제화하지 말고 도덕의 영역에 계속 차별의 문제를 맡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한 쪽에서는 그래도 지금의 고질적인 인종 · 학벌 등의 차별 문제를 극복하여 사회적인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기존의 도덕적 영역에 있던 차별의 문제를 이제는 법의 영역으로 끌고 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한 쪽에서는 현 대통령의 정책 중에 잘된 것은 별로 없으니 정권 교체를 통하여 이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다른 쪽에서는 이에 맞서는 정권 재창출론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누가 맞는지 나는 모른다. 신문사니 방송국들이니 기사든 보도든 모조리 살펴보아도 그 성향과 관점에 따라 제각각 가지는 견해가 다르다. 그러나 더욱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두 견해를 비교해 볼 수 있는 방안이 사실상 전무하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바쁜 일상 속에서 사안의 쟁점을 놓고 다투는 양측의 견해를 내가 직접 찾아다녀야 하고, 비교해야 하며, 이성이 무어라 하는지도 들여다보아야 한다. 인터넷에는 그렇게 많은 댓글들이 돌아다니고 수많은 의견들이 존재하던데, 그분들께서는 도대체 어떻게 그런 시간을 내실 수 있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적인 견해에 관한 뉴스를 잠깐 볼 뿐, 그것을 놓고 깊게 고민할 여유가 사실 거의 없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개인에게 살아남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동하면서 스스로를 상품화하라고 명령하는데, 정치는 그러한 생존 투쟁을 위한 투자를 조금 포기하고서라도 여기로 뛰어들어라는 상반된 명령을 발한다. 이제 물어야겠다. 그래서 누가 뛰어들겠는가? 많은 이들이 자신의 수익을 포기하고서라도 이 복잡한 논쟁의 장으로 뛰어들겠는가? 답은 아무래도 ‘그렇지 않다’인듯하다.

언론은 논쟁적인 쟁점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를 비교하기보다는, 혹은 특정 주장에 대한 본격적인 반박을 게시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논쟁에 대체로 대응해온 듯하다. 그러나 언론은 그렇게 하여서는 안 된다. 내 생각으론, 이제 언론은 주장 강화보다는 상대 주장 비판하기에 더욱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중립적이지 않은 언론이라는 비판이 두렵다는 것은 정당한 반론이 아니다. 그것은 변명이다. 애초에 완전한 중립은 존재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중립을 이루는 것은 성인(聖人)의 영역이지 이해타산을 끝없이 고려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산하의 개인이나 법인의 영역일 수는 없다. 아니지, 변명도 아니다. 궤변이다. 상대의 주장을 함께 다루지도 않는 언론이 뭐가 중립적인가. 자신의 주장만을 강화하는 논변이란 궁극적으로 그러한 논리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수단 이상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론을 통한 건강한 논쟁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중립을 모호하게 지향한다면서 사실은 그렇지 않은 보도를 이어나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상대의 주장을 다루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며,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가를 지적하는 것에서 이루어진다. 언론은 중립적인 시각을 핑계로 자신의 주장이 왜 옳은지 스스로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맞는 것처럼 보이는 견해와 증거들을 긁어모아 나열하는 모습,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중립적일 수 없는 모습으로 일관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에 반대하는 견해들이 왜 잘못되었는가를 낱낱이 따지면서 본격적으로 칼을 맞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칼을 맞대지 않고서 계속되는 고립된 주장 강화는 결국 나 같이 별 전문적인 지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일상도 살아나가기 바쁜 이들에게 그래서 무엇이 보다 적절한지에 관한 그 어떠한 표상이나 사상도 가지지 못하게 한다. 이는 더 많은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대결의 양 진영에게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일이며, 판단 중지라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각 개인에게도 별로 유익한 일도 아니다. 명쾌하지 않은 혼란 속에서 인간은 종종 길을 잃고 무기력에 빠지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보다 나은 미래로 향하는 길인지를 알지 못하면 정치란 이제는 밥그릇 돌리기와 같은 원시적 싸움으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다. 정치에 냉소적인 인간, 판단 중지가 너무 오랫동안 고착화된 인간은 더욱이 피곤해질 수밖에 없으며, 잘못되면 정치에 대한 불신이나 혐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을 설득시키기 위한 올바른 방법은 몹시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제 양 진영은 그만 좀 하시고 서로 칼을 좀 맞부딪혀 달라. 답이 없는 문제라는 것을 나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서로의 견해를 반박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을 강화하는 것은 전혀 모두에게 이롭지 않다. 대중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바람직한 것인지 알게 해 달라. 판단 중지가 고착화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달라. 상대에 대한 근거 있는 비판, 정치의 출발점은 자기 주장 강화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