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6. 성찰 – 3 –

탐서일지 #6. 성찰 – 3 –

2021-03-27 0 By 커피사유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개요

이번에도 결국 빨리 다 읽어야지라고 생각하지만 계속 늘어나는 코멘트와 분량으로 인하여 결국 빨리 다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데카르트의 ‘성찰’에 관해 다룬다. 여전히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고전의 세계 시리즈의, 양진호 역의 2011년 초판 인쇄, 2019년 개정 1판 2쇄한 데카르트의 ‘성찰’이지만 정말, 진짜 나에게는 이제 남은 시간이 별로 없으므로 빠르게 읽어야 한다. 그리하여 종합적 사유의 장에 도달할 때, 나는 비로소 이 책에 관하여 논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과 답, 주석들

제4성찰. 참과 거짓에 관하여

먼저,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신이 나를 속이는 일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모든 기만이나 속임수에는 어떤 불완전성이 있다. 속일 수 있다는 것은 똑똑함이나 능력 있음의 증거처럼 보이지만, 사실 속이려 하는 것부터가 악의나 연약함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이것은 신에 속하지 않는다.

제4성찰. 참과 거짓에 관하여. 92p.

… 그러나 신이 반드시 완전하여야 할 것이라는 생각은 강박 관념의 연장선일 수도 있다. 신이 왜 굳이 완전해야 하는가? 그것은 신을 그렇게 정의하였기 때문인가? 신은 반드시 ‘완전한 존재’로 가정될 수 밖에 없는가? 그것이 신이여야만 하는가? 또한, 선을 완전에 가까운 것으로 정의하는 것도 꽤 이상한 생각이다. 악의나 연약함이 왜 불완전함을 상징하며, 왜 선만이 오로지 완전함과 대응될 수 있는 용어가 되는가? 굳이 왜 그래야만 하는가?

이로부터 ‘그러므로 나는 결코 잘못할 수 없다’는 것이 귀결되는지 몰랐다면, 나는 이 전제에 관해 아무 의심의 여지도 남기지 않을 뻔했다. 물론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신으로부터 얻었고 신이 내게 잘못할 만한 능력을 주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잘못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오직 신만을 생각하고 온통 그를 향해 있는 한, 내가 오류나 잘못의 원인을 품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잠시 뒤 나 자신에게 돌아서면, 나는 무수히 많은 오류에 얽매여 있음을 경험한다. 이러한 오류의 원인을 고찰하는 동안 나는 깨닫는다. 내게는 신 (곧 가장 완전한 존재자)에 관한 실재적이자 긍정적인 관념뿐 아니라, 이를테면 아무것도 아닌 것 (곧 모든 완전성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것)에 관한 부정적 관념 또한 나타난다. 나는 신과 아무것도 아닌 것 사이, 곧 가장 높이 있는 것과 헛것 사이에 이른바 중간자처럼 놓여 있다. 따라서 내가 최고의 존재자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점에서는 내 안에 나를 속이거나 오류로 끌어당기는 것이 결코 없겠지만,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곧 헛것에 일정 정도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시 말해 나 자신이 가장 높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많은 것들이 부족하며, 그런 만큼 내가 잘못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확실히 인식한다. 오류는 어디까지 오류로서, 신에 의존하는 어떤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결함일 뿐이다. 그러니 내가 잘못하는 데에는 신이 오류를 위해 쓰라고 정해놓은 능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잘못하는 일은 내가 신으로부터 얻은, 참된 것을 판단하는 능력이 내 안에서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4성찰. 참과 거짓에 관하여. 92-93p.

그냥 위 문단을 기억해두고 싶었다. 오류라는 것이 결코 자연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지는 않다고 그는 말했고, 오류는 전적으로 신으로부터 얻은 ‘판단 능력’으로부터 기원하지도 않으며, 단지 그 능력이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에서만 기원한다고 하였다.

나아가 나 자신에게 더욱 다가가서, (내게 어떤 불완전성이 있음을 입증하는 유일한 것으로서의) 오류란 도대체 어떤 종류의 것인지 탐구할 때, 나는 이렇게 깨닫는다. 오류는 동시에 참여하는 두 가지 원인에 좌우된다. 즉 내가 지닌 인식 능력과 선택 능력, 곧 자유로운 결단, 한마디로 지성과 의지에 좌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오로지 지성에 의해서만 관념들을 지각하고, 바로 이 관념들에 관해서 나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렇게 엄밀하게 고찰해보면 오류는 애초부터 지성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내가 관념을 얻지 못한 사물들이 아마도 무수히 실존할 테지만, 나는 그런 관념을 잃었다고 말해서는 안 되며, 그저 부정적으로 , 나는 그것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이 나에게 준 것보다 더 큰 인식 능력을 주어야 했다는 것을 증명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신을 숙련된 제작자로 인식한다 하더라도, 이 때문에 그가 몇몇에게 넣어두었을 만한 모든 완전성을 자기 작품 하나하나에 주어야만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이 나에게 충분히 막대하고 완전한 의지, 곧 자유로운 결단을 허락하지 않았다며 불평해서도 안 된다. 나는 오히려 의지가 어떤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 않음을 내 안에서 분명히 경험한다. 또 내가 보기에 대단히 주목해야 할 것은, 내 안에 의지만큼 완전하고 큰 것은 없으며, 그래서 나는 의지를 지금 있는 것보다 더 완전하거나 더 큰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식 능력을 고찰해보면, 나는 곧바로 이것이 내 안에서는 아주 작고 유한하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이것보다 훨씬 큰, 즉 가장 크고 무한한 능력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고, 또 내가 이런 능력의 관념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으로부터 이것이 신의 본성에 속한다는 것 또한 인식한다. 같은 방식으로 기억력이나 상상력, 아니면 무엇이든 다른 능력을 검토해보면, 내 안에서는 약하고 제한되어 있는 능력이 신 안에서는 더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알게 된다. 의지 곧 결단의 자유, 이것은 내가 내 안에서 더 큰 것의 관념을 포착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으로 경험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런 한에서 특히 이것은 내가 신에 대한 어떤 그림 및 닮은꼴을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의지는 내 안에서보다 신 안에서 비할 나위 없이 더 크다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인식 능력과 잠재력 때문에 – 이것들은 의지와 결합되어 있고 의지를 더욱 강화하고 작용력을 증대시킨다 – 또 한편에서는 의지의 대상과 관련하여 수많은 대상들로 펼쳐지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엄밀히 고찰해보면 더 크지 않은 듯 하다. 왜냐하면 의지는 오직 우리가 똑같은 일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다는 데에, 즉 긍정하거나 부정하고, 추구하거나 기피할 수 있다는 데에 존립하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의지는 오직 우리가 지성으로부터 제시된 것을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고 느끼면서 긍정이나 부정, 추구나 기피를 취하게 되는 데에 존립하기 때문이다. 내가 둘 중 아무 쪽으로나 이끌릴 수 있다는 것 또한 내가 자유롭다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꾸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질수록 내가 그쪽에서 참되고 좋은 근거를 명백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든, 신이 내 생각 속을 그렇게 설계했기 때문이든, 나는 더욱더 자유롭게 그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신의 은총은 물론이고 자연의 인식 또한 결코 자유를 감소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증대시키고 강화한다. 그런데 어떠한 근거도 나를 어느 한쪽으로 더 몰고가지 않을 때 경험하는 저 차이 없음이란 가장 낮은 등급의 자유이며, 의지의 완전성을 입증하기는커녕 그저 인식의 결함, 곧 어떤 부정을 입증할 뿐이다. 즉 내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 언제나 훤히 알고 있다면, 나는 무엇을 판단하고 선택해야 할지 결코 망설이지 않을 것이고, 그리하여 내가 아무리 자유롭다고 하더라도 결코 차이 없다는 투로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제4성찰. 참과 거짓에 관하여. 95-98p.

오류가 실재에 내재하거나, 지성 혹은 그 판단 능력에 내재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전적으로 오류는 지성이 그 원인이라기 보다는, 지성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의지의 문제이라는 그의 생각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러나 어떠한 근거도 스스로를 한쪽으로 더 몰고가지 않을 때 경험하는 저 차이 없음이 인식의 결함을 입증할 뿐이라는 것은 매우 이상한 논리로 보인다. 흑백 논리의 연장선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세계의 수많은 문화와 경험을 존중하려고 하는 사람이고, 세상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그들 나름대로 인생이라는 문에 대한 최선의 답을 제출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차이 없음을 견뎌할 수 없다는 것,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나에게는 매우 위험한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범주는 이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깨달은바, 신으로부터 받은 내 의지력은 그 자체로 볼 때 내 오류의 원인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더할 수 없이 광대하고, 애초부터 완전하다. 인식력 또한 오류의 원인이 아니다. 다시 말해 나는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바대로 신한테서 얻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 없이 올바로 인식하며 이런 경우에는 내가 그르칠 리도 없다. 그렇다면 나의 오류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물론 이 한가지에서, 즉 의지가 오성보다 더 넓게 열려 있는데도 내가 의지를 지성의 한계 안에 가두지 않고 오히려 인식하지 않은 것들에까지 확장시키는 일에서 비롯된다. 이런 것들에 대해 의지는 차이 없다는 투로 있기 때문에 참되고 좋은 것에서 쉽사리 벗어나며, 그리하여 나는 속기도 하고 잘못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지난 며칠 동안 무언가가 세계에 실존하는지를 검토하고 또 이것을 검토한다는 바로 그 사실로부터 내가 실존함이 명백히 귀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만큼 맑게 인식된 것은 참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내가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그쪽으로 내몰렸기 때문이 아니라, 지성 속의 커다란 빛이 의지를 크게 기울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가 그쪽에 차이 없는 투를 덜면 덜수록 나는 그만큼 더 마음대로 자유롭게 그것을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내가 어떤 생각하는 것으로서 실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떤 몸의 본성에 대한 관념 또한 떠올리며, 또 내가 지닌, 아니 나 자신으로서의 생각하는 본성이 이 몸의 본성과 다른 것인지, 아니면 둘이 같은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나를 둘 중 어느 한쪽으로 설득하는 근거가 아직 내 지성에 떠오르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확실히 바로 이 때문에 나는 둘 중 아무 쪽이나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아니면 아무 쪽도 판단하지 않는, 차이 없는 투가 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차이 없음은 지성이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은 대상들을 넘어, 의지가 숙고하고 있는 바로 그때에 지성이 충분히 명증하게 인식하지 않은 모든 대상들에게까지 두루 확장된다. 다시 말해 아무리 그럴싸한 추측이 나를 어느 한쪽으로 끌고 간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요,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한 추론이 아니라는 것만을 인식한다면, 이런 인식은 내가 다른 쪽을 긍정하도록 설득하기에 충분한다. 이는 요 며칠간 내가 충분히 경험한 것이다. 그동안 나는 전에는 더없이 참된 것으로 믿었던 것이 어찌어찌 의심스럽다는 것을 알아냈다는 한 가지 이유로, 그 모두를 아예 그릇된 것으로 가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이 참인지를 충분히 맑고 또렷하게 지각하지 않을 때 만일 판단을 보류한다면, 명백히 나는 올바로 처신하고 있으며, 또한 속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면, 이때 나는 결단의 자유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나아가 내가 그릇된 쪽을 선택할 경우 잘못을 저지를 것은 뻔하다. 그러나 내가 다른 쪽을 쥐어서 운 좋게 진리와 마주쳤다 하더라도, 이 때문에 책임을 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성의 지각은 언제나 의지의 결정보다 앞서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의 빛에 따라 명백하다. 그리고 오류의 형식을 이루는 저 결여는 이렇게 결단의 자유를 잘못 사용할 때 발견된다. 이르건대, 결여는 내게서 비롯된 바로 이 작용 안에서 발견되지, 신에게 받은 능력 안에서도, 나아가 신에 기대어 있는 작용 안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제4성찰. 참과 거짓에 관하여. 98-100p.

그러나 이 문단들로 인하여 타협이 될 것 같다. 이분법적 사고는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에게 상당한 편의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이분법적 사고는 그 자체로 위험하지는 않다. 그것이 만일 우리의 지성과 결부된 것이거나 지성 그 자체의 본성이라면, 그가 주장한 바와 같이 위험하지는 않다. 문제는 이 충분한 지성의 영역을 거치지 않은 요소에 대하여, 그가 오류의 근원이라고 말한 과정과 같이 의지라는 것이 이 지성이 판단한 듯양 결론을 내려버리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분법적 사고는 그 자체만으로 위험하지는 않고, 단지 그것이 우리의 의지를 통해 충분히 분석되지 않은 것에 내려지는 경우, 즉 우리가 속단하거나 하는 경우에 오로지 중대한 문제를 일으킨다. 항상, 지성의 지각은 의지의 결단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의 말대로 “자연의 빛에 따라 명백하다”. 그러므로 오류의 근원은 “인지의 모자람” 즉 결여에 있는 것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인지 없음으로 발생하는 지성의 참/거짓 판단의 불능 상태에 대해서까지 이것이 나쁘다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나쁜 것은, 이러한 판단 불능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고 의지가 주제를 넘어 결단해버리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오류를 방지하는 데는 내가 숙고하게 될 모든 것을 명백히 지각하는 것이 최선책이나, 이런 식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차선책은 어떤 것의 진리가 밝혀지지 않을 때는 언제나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인데, 이런 식으로는 가능하다. 즉 나는 내 안에 어떤 흔들리기 쉬운 본성을 경험하지만, 주의 깊은 성찰을 자주 되풀이하고 필요할 때마다 그 인식을 떠올림으로써 오류에 빠지지 않는 습관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크고 중요한 완전성은 바로 이런 점에 있기 때문에, 보다시피 나는 오류와 거짓의 원인을 탐구한 오늘 성찰을 통해 적지 않은 수확을 얻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사실 내가 해명한 것이 전부이다. 즉 판단을 내릴 때 지성이 맑고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까지만 의지가 확장되록 묶어둔다면, 우리가 오류를 범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맑고 또렷한 지각은 의심할 바 없이 어떤 것이고, 따라서 어떤 것도 아닌 것으로부터는 비롯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의 작자는 반드시 신이다. 가장 완전한 자로서, 속임과는 모순을 일으키는 신 말이다. 그러므로 맑고 또렷하게 인식된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참이다. 또 나는 오늘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할 것과 더불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내가 완전하게 인식한 것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고, 이것을 헛갈리고 흐릿하게 파악한 것과 분리시키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진리에 도달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 이를 위해 각별히 노력하리라.

제4성찰. 참과 거짓에 관하여. 102-103p.

‘맑고 또렷하게 인식된 것’이라는 것에 관하여 이제 설명을 붙일 수 있겠다. 이것은 지성의 관문을 통과하여 의지에 의해 결단이라는 곳으로 귀결된 것들이다. 즉, (데카르트의 논리 및 내가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일단 그가 주장한 신을 들고 와서 말하자면) 명확히 인지되었고 신이 부여한 명백하고 그 자체로는 오류를 결코 일으키지 않는 판단 능력을 통과하였으며, 마침내는 결단의 자유(=의지)로 인하여 도출된 것이라면 반드시 참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까지는 생각된다. 왜냐하면 나는 지성과 판단 자체의 오류의 가능성을 아예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성과 판단이 기존의 관념이나 참을 새로운 판단 대상과 연관하기만 하는 입장이고, 지성과 판단이 내리는 오류라고 한다면 결과적으로는 그 연관 과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되는 기본 명제들이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지성이나 판단을 완전히 경험하지 않았으므로, 즉 역으로 데카르트의 논리를 적용하여 –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에 관하여 의지를 주제 넘게 적용하고 싶지는 않다)

제5성찰. 물질적인 것의 본성에 관하여, 그리고 다시 신에 관하여 (부: 그는 실존한다)

그러나 어떤 물질적인 것이 내 바깥에 실존하는지를 검토하기에 앞서, 나는 우선 내 생각 속에 있는 물질적인 것의 관념을 고찰하고, 이런 관념 가운데 도대체 어느 것이 또렷하고, 어느 것이 헛갈리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분량을 또렷하게 표상한다. 철학자들은 흔히 이것을 ‘연속적이라고 말한다. 분량은 이런 연속량의 펼침, 아니, 정확히 말해서 길이, 넓이, 깊이로 분량을 지닌 것의 펼침이다. 나는 거기에서 다양한 부분을 셈하여, 각각의 부분에 크기, 모양, 장소 및 위치 운동을 할당하고, 또한 각각의 운동에 지속을 할당한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이것들은 내게 잘 알려지고 훤히 들여다보일 뿐만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면 모양, 수, 운동 등에서도 무수히 많은 개별적인 것들을 지각한다. 이 점에서 이것의 진리는 아주 명중하고 내 본성과도 잘 어울려서, 내가 이런 것을 처음 발견할 때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다기보다는 이미 전에 알고 있었던 것을 되새기는 듯, 다시 말해 진작부터 내게 있었건만 이전에는 정신의 시야로 불러온 적이 없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처음으로 마주하는 듯 여겨질 정도이다.

제5성찰. 물질적인 것의 본성에 관하여, 그리고 다시 신에 관하여. 107-108p.

註를 좀 달자면, 데카르트는 앞에서 자신이 덧없이 ‘맑고 또렷하게 인식하는 것’들은 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번 장에서는 물질적인 것들, 그리고 신적인 것들에 관하여 자신이 ‘덧없이 맑고 또렷하게 인식하는가’를 확인하고자 한다. 즉, 지난 4개의 성찰을 통하여 그는 ‘오류를 피하는 방법’과 ‘진리를 확인하는 방법’을 알았으므로, 이를 실제에 적용하려고 한다. 그 중에 하나인 물질적인 것의 경우, 그 물질적인 것에서 인지되는 분량들의 경우는, 즉 우리 스스로가 어떤 공에 대하여, 그 공이 움직이고 있는 방향, 그 빠르기, 공의 크기와 놓인 위치, 그리고 공이 1개라는 사실 등 따위는 매우 또렷하게 인식되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매우 명료하여 무언가 새로운 느낌이라기 보다는 원래 내재되어 있던 어떤 것을 다시금 되살리는 느낌이 든다.

내 생각에 여기서 특히 고려해야 할 것은, 어쩌면 내 바깥 어디에도 실존하지 않을지 모르나,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수많은 관념들이 나한테서 아주 많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것들은 내가 어느 정도 자의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겋다고 내가 지어낸 것들은 아니고, 오히려 제 나름의 참되고 불변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예컨대, 만일 내가 삼각형을 상상한다면, 이 도형은 내 생각 밖의 세계 어디에도 실존하지 않고 지금까지 실존한 적이 없는데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제 본성, 곧 형상이나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본성은 내가 지어낸 것도 아니고, 내 정신에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이는 삼각형의 여러 가지 고유성들이 증명된다는 점에서 명백하다. 예컨대 삼각형의 세 각은 두 직각과 같다. 가장 긴 변은 가장 큰 각을 마주한다 등등, 내가 전에는 삼각형을 상상하면서 이것들에 관해 결코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더라도, 원하든 원치 않든 나는 지금 이것들을 맑게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들은 내가 지어낸 것도 아니다.

‘내가 종종 세모난 물체를 본 적이 있으니 삼각형의 관념은 어쩌면 바깥 것으로부터 감각 기관을 거쳐 내게 왔을 것이다’ 하는 것도 심각한 반론은 아니다. 다시 말해 언젠가 감각을 거쳐 나에게 들어오지 않았을까 하고 의심할 수 없는, 수많은 다른 도형들을 나는 생각해낼 수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낸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들의 다양한 고유성은 삼각형의 것 못지 않게 증명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을 내가 맑게 인식하고 있는 만큼, 이것들은 확실히 참이고, 따라서 어떤 것이며,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모든 참된 것은 명백히 어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벌써 내가 맑게 인식하는 것은 모두 참이라는 것을 자세히 증명한 바 있다. 또 설령 내가 이것을 증명하지 않았더라도, 확실히 내 정신의 본성은 적어도 내가 이것을 맑게 지각하는 동안은 이것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돌이켜보면 나는 감각적 대상에 사로잡히기 전부터 언제나 이런 종류의 진리들, 즉 모양이나 수에 관해서, 또는 대수학이나 기하학, 혹은 추상적인 순수 수학에 일반적으로 속한 것들에 관해서, 내가 명백히 인식했던 진리들을 모든 진리들 가운데 가장 확실한 것으로 간주했다.

제5성찰. 물질적인 것들의 본성에 관하여, 그리고 다시 신에 관하여. 108-110p.

플라톤의 <이데아>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내 바깥 어디에도 실존하지 않을지도 모르나, 그렇다고 아주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한 설명의 예시로 그가 ‘삼각형’의 관념을 들었다는 점에서 <이데아>가 떠올랐다. 다만 이것들의 경우 나의 기존 생각은, 미메시스 능력 등을 통하여 모방의 형태로서, 어떤 실체적 관념들로부터 연상되는 추상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위의 한 논증, 즉 연상되는 것들에서 근거하지는 않고 단순히 나의 상상만으로 만들어낸 <이데아>도 결국 그 고유성을 ‘삼각형’ 만큼이나 충분히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어떤 초월함수들을 다양하게 조합하여 만들어낸 그래프를 도식한다고 하면, 나는 아주 기괴한 이 그래프들을 현실의 어디에서 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물론 내가 이것을 상상할 때에, 현실의 요소들과 이미 경험한 것들을 참고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역으로 현실에서 있었다는 사실은 전무하므로, 따라서 이 관념은 현실에서 직접 모방된 것은 아니다.

물론 얼핏 보았을 때 이것은 썩 분명치 않으며, 오히려 일종의 궤변에 가깝다. 다시 말해 나는 다른 모든 것의 경우에서 본질과 실존을 구분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실존과 신의 본질이 분리된다고, 따라서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더 면밀히 고찰하면 밝혀지는바, 삼각형의 세 각은 두 직각과 같다는 것과 삼각형의 본질이, 또는 골짜기의 관념과 산의 관념이 분리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존은 신의 본질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런 한에서 신(가장 완전한 존재자)을 실존 없는 것(어떤 완전성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산을 골짜기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못지않게 모순이다.

제5성찰. 물질적인 것들의 본성에 관하여, 그리고 다시 신에 관하여. 110-111p.

대상의 실존과 대상의 본질은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논리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에서 신의 본질과 실존을 연관시키려는 시도는 나에게 상당한 불쾌감을 불러 일으키는 바, 몇 가지 주를 달자면 그가 뒤에 주장하는 것에서 좀 더 보완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신이 실존한다고 생각한다는 것’과 ‘신의 본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연관일 뿐이지, 실제 신의 실존에 대해 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골짜기 없는 산처럼, 실존하지 않는 신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확실히 골짜기 있는 신을 생각한다는 것으로부터 어떤 산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귀결되지 않는 것처럼, 신을 실존하는 것으로서 생각한다는 것으로부터 신이 실존한다는 것 또한 귀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나의 생각은 사물에 어떠한 불가피성도 부여하지 않는다. 또 말(馬)은 날개가 없지만 내가 날개 달린 말을 상상하는 식으로, 신은 실존하지 않지만 나는 아마도 신에게 실존을 부여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여기에 궤변이 있다. 내가 골짜기 없는 산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 귀결되는 것은, 산과 골짜기가 어디엔가 실존한다는 것이 아니라, 산과 골짜기는 이것들이 실존하든 실존하지 않든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내가 실존하지 않는 신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 귀결되는 것은, 실존은 신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신은 참으로 실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내 생각이 만들어냈다거나 어떤 사물에 불가피성을 부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거꾸로 바로 그 사물의 불가피성, 즉 신의 실존이 지닌 불가피성이 내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결정해놓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말이 날개가 있다고 상상하든 없다고 상상하든 그것은 내 자유이지만, 실존 없는 신(최고 완전성 없는 최고 완전한 존재자)을 생각하는 것은 내 자유가 아니다.

제5성찰. 물질적인 것들의 본성에 관하여, 그리고 다시 신에 관하여. 111-112p.

여기에서는 여전히 ‘실존하지 않는 신을 생각할 수 없다’는 명제가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여전히 그가 신의 ‘완전성’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바꿀 수가 없다.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 “내가 ‘신은 모든 완전성을 지니고 있다’고 전제한 뒤에는 ‘실존은 그것들 가운데 하나이므로 신은 실존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앞의 명제를 전제하는 것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즉, 추론 과정은 필연성을 지니나, 추론의 전제 자체에는 필연성이 없다.) 이는 내가 ‘모든 사각형이 원에 내접한다’고 믿는 것이 불가피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내가 일단 이것을 믿는다고 전제하면, ‘모든 마름모는 원에 내접한다’는 것이 명백히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불가피하다.” 다시 말해 내가 언젠가 신에 관한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는 일이 불가피하지는 않더라도, 내가 제일의 최고 존재자에 대해 생각하고 이 존재자의 관념을 이를테면 내 정신의 보고로부터 길어 올릴 때마다 그 모든 완전성들을 – 내가 지금 모두 헤아리거나 낱낱이 집중하고 있지는 않지만 – 이 존재자에게 귀속시키는 일은 불가피하다. 이러한 필연성은 내가 실존이 일종의 완전성이라는 것을 깨달은 다음, 제일의 최고 존재자가 실존한다고 정당하게 결론 내리는 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 마찬가지로, 내가 언젠가 어떤 삼각형에 대해 상상하는 일이 불가피하지는 않더라도, 내가 세 각을 가진 어떤 직선 도형을 고찰할 때마다 세 각의 합은 더도 아닌 두 직각이라고 결론짓게 해준 근거들을 – 내가 지금 이것들을 주목하고 있지는 않지만 – 이 도형에 귀속시키는 일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어떤 도형이 원에 내접할 수 있는지를 고찰할 때, 내가 모든 사각형이 원에 내접한다고 가정하는 일은 결코 불가피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내가 맑고 또렷하게 인식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나는 결코 이것들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그릇된 추론들과 참된 타고난 관념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러한 타고난 관념들 사이에서 으뜸가는 특별한 관념은 신에 대한 관념이다. 다시 말해 나는 신에 대한 관념이 내 생각에 좌우되는 지어낸 것이 아니라 참되고 불변하는 본성의 그림이라는 것을 여러 가지 근거를 통해 인식한다. 예컨대 우선, 본질에 실존이 속하는 것은 신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신이 둘 또는 그 이상이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하나의 신이 실존한다고 전제하면, 그가 영원 전부터 실존했고 또 영원히 머물리라고 결론짓는 것은 알다시피 확실히 불가피하다. 끝으로, 나는 내가 끌어낼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는 많은 것을 신 안에서 지각하기 때문이다.

제5성찰. 물질적인 것들의 본성에 관하여, 그리고 다시 신에 관하여. 112-113p.

하지만 데카르트의 위 추론의 전제가 불가피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반박으로 제시한, 현재 생각하고 있는 ‘신’과 신 그 자체에 대한 존재를 결부시키는 것만으로도 ‘신’의 존재가 증명된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지금 그 스스로가 ‘절대적 완전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절대적 완전성의 존재 자체를 보여줄 수도 있겠으나, 그 생각 자체가 착각이라면, 즉 사실은 지성에 의해 충분히 파악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지의 주제넘는 결단이라면 그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그 신에 대한 관념을 스스로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이라고 주장해도 문제가 된다. 신의 관념이 참되고 불변하는 본성의 그림이라고 그가 주장한 근거에서 ‘신의 완전성과 유일성’이 언급되는 것 자체는 이미 ‘신이 완전하다고 생각하자’는 그저 설득과 다름이 없으며, 명백하지 않는 사실에서 기원한 것이고, 또한 이게 타고난 것이더라 하더라도 그것이 또한 ‘오류’가 아닐 가능성은 결코 부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러나 신에 관해 말하자면, 내 정신이 선입견에 의해 흐려져 있지 않다면, 또 감각의 그림들이 내 생각을 온통 사로잡고 있지 않다면, 신보다 먼저 그리고 더 쉽게 인식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최고의 존재자가 있다는 것, 곧 신은 실존이 그의 본질에 속한 유일한 자로서 실존한다는 것보다 더 자명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제5성찰. 물질적인 것들의 본성에 관하여, 그리고 다시 신에 관하여. 114p.

… 그러나 신에 관해 말하자면, 내 정신이 선입견에 의해 흐려져 있지 않다면, 또 감각의 그림들이 내 생각을 온통 사로잡고 있지 않다면, 신보다 늦게 그리고 더 어렵게 인식하기 어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최고의 존재자가 있다는 것, 곧 신은 실존이 그의 본질에 속한 유일한 자로서 실존한다는 것이 착각일 수도 있다는 것보다 더 자명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제6성찰. 물질적인 것의 실존 및 정신과 신체의 실재적 구분에 관하여

… 나아가 나는 내가 이 물질적인 것을 마주하는 동안 상상력을 사용하고 있음을 경험하는데, 보다시피 이러한 상상력으로부터 물질적인 것의 실존이 귀결된다. 다시 말해 상상력이 도대체 무엇인지 더욱 주의 깊게 고찰해보면, 상상력이란, 인식 능력이 제 앞에 친밀하게 놓여 있는, 또 바로 그렇게 실존하는 몸에 특정한 방식을 집중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 점을 밝히고자 나는 우선 상상력과 순수한 지성의 차이를 검토한다. 예컨대, 삼각형을 상상하면, 나는 이것이 세 변으로 둘러싸인 도형임을 인식할 뿐 아니라, 이와 더불어 정신의 눈으로 이 세 변을 마치 눈앞에 놓여 있는 양 응시한다. 이 뒤의 경우를 일컬어 ‘상상하다’라 한다. 반면에 천각형을 상상하려 하면, 나는 물론 삼각형이 세 변으로 이루어진 도형임을 인식하는 것처럼 천각형이 천 개의 변으로 구성된 도형임을 잘 인식하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천 개의 변을 상상하지는 못한다. 즉 천 개의 변을 마치 눈앞에 놓여 있는 양 응시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적인 것을 생각할 때마다 매번 상상하는 습관 때문에 아무리 내가 지금 어떤 도형을 헛갈리게 표상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천각형이 아님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이 도형은 내가 만각형, 아니 원하는 만큼 변이 많은 도형을 생각할 때 표상하는 도형과 전혀 다를 바가 없으며, 또 다른 다각형과 구별되는 천각형의 고유성을 인식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오각형은 어떠한지 묻는다면, 나는 사실 이 도형을 천각형처럼 상상력의 도움 없이 인식할 수도 있지만, 정신의 눈을 이것의 다섯 변과 이것에 둘러싸인 면에 집중함으로써 그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나는 여기서 명백히 깨닫는다. 상상하는 데에는 내가 인식하는 데에 사용하지 않는 어떤 특별한 마음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 새로운 마음의 노력이야말로 상상력과 순수 지성의 차이를 훤히 밝혀주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고찰하자면, 내가 지닌 상상하는 힘은 인식하는 힘과는 다른 만큼 나 자신, 곧 내 정신의 본질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내게 상상력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의심할 것 없이 지금의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머물러 있는 것이다. 보다시피 이로부터 귀결되는바, 상상력은 나와는 다른 것에 의해 좌우된다. 또 만일 정신이 들여다보고자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집중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정신에 잘 결험되어 있는 어떤 몸이 실존한다면, 이것을 통해 나는 몸 있는 것(몸이 있는 실체로서의 나)을 상상할 수 있으며, 이를 나는 쉽게 인식한다. 따라서 이 생각의 양태와 순수한 지성은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서만 구분된다. 정신은 인식하는 동안 일정하게 자기 자신과 마주하여 자신에 내재하는 어떤 관념들을 돌아본다. 반면에 상상하는 동안에는 몸을 마주하며, 거기서 자신으로부터 인식된 관념들, 아니면 감각으로써 지각된 관념들과 일치하는 무언가를 응시한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상상력이 몸이 실존하는 한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쉽게 인식한다. 또 상상력을 설명하는 데에 이보다 더 알맞은 방식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로부터 몸이 실존한다는 것을 그럴싸하게 엮어낸다. 그러나 그럴싸할 뿐이다. 또 이 모든 것을 아무리 더 면밀히 연구한다 하더라도, 보다시피 나는 여전히 내 상상력 안에서 발견되는, 몸의 본성에 관한 또렷한 관념으로부터 몸의 실존을 필연적으로 결론짓게 하는 논거를 얻지 못한다.

제6성찰. 물질적인 것의 실존 및 정신과 신체의 실재적 구분에 관하여. 121-124p.

그냥 위의 내용들은 적어도 ‘상상력’에 관한 한 기억해두고 싶다.

우선, 신은 내가 맑고 또렷하게 인식하는 모든 것을 알다시피 내가 인식하는 그대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이것이 저것과 다르다는 것을 확신하는 데에는 내가 이것을 저것 없이 맑고 또렷하게 인식한다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적어도 신은 이러한 것들을 따로따로 만들어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어느 능력이 이것들을 만들었는지는 내가 이것들을 서로 다른 것들로 간주하는 데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실존한다는 것을 내가 안다는 사실로부터, 또한 동시에 내가 생각하는 것이라는 사실만이 내 본성 곧 본질에 확실히 속한다고 깨닫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나의 본질은 오로지 내가 생각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존립한다고 나는 정당하게 결론짓는다. 그리고 내가 어쩌면 (아니 오히려, 뒤에서 말하는 바대로, 확실히) 나와 매우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몸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이쪽에서 보면 펼쳐져 있지 않은, 오직 생각하는 것으로서의 나 자신에 대한 맑고 또렷한 관념을 지니고 있고, 저쪽에서 보면 생각하지 않는, 오직 펼쳐져 있는 것으로서의 몸에 대한 맑고 또렷한 관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내 몸과는 실제로 구분되며 몸 없이도 실존할 수 있음을 확신한다.

더 나아가, 나는 내 안에서 생각의 어떤 특수한 양태들인 상상 기능과 감각 기능을 발견한다. 나는 이것들 없이도 내 전체를 맑고 또렷하게 인식할 수 있지만, 반대로 이것들은 나 없이는, 곧 이것들이 내재하는 지성적 실체 없이는 맑고 또렷하게 인식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것들은 제 형상적 개념 속에 지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로부터 나는 이것들과 내가, 양태들과 한 사물처럼 구분됨을 지각한다. 나는 또한 어떤 다른 기능들, 이를테면 장소를 바꾸고 여러 가지 자세를 취하는 등의 기능들을 인식한다. 이런 기능들 역시 앞의 기능들과 다르지 않고 이것들이 내재하는 어떤 실체 없이는 인식될 수 없으며, 또 그런 만큼 실체 없이는 실존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들이 실존한다면 인식하는 실체가 아니라 몸 있는, 곧 펼쳐져 있는 실체에 내재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에 대한 맑고 또렷한 개념 속에는 확실히 지성이 아니라, 펼쳐져 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안에는 어떤 수동적 감각 기능, 곧 감각적 사물의 관념들을 수용하고 인지하는 기능이 있다. 그러나 만일 이 관념들을 산출하거나 만들어내는 능동적 기능이 내 안에도, 다른 것 안에도 실존하지 않는다면, 이 수동적 기능은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기능은 전혀 지성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히 내 안에 있을 수는 없고, 저 관념들은 내 협력 없이, 심지어는 자주 내 의지와는 반대로 (어디에선가) 산출되어 있다. 따라서 남은 것은 이 능동적 기능이 나와는 다른 어떤 실체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실체는 이미 위에서 보았듯이 이 기능에 의해 산출된 관념들 속에 표상적으로 있는 모든 실재성을 형상대로 아니면 우월하게 담고 있다. 그러므로 관념들 속에 표상적으로 있는 모든 것을 형상대로 담고 있는 몸, 곧 몸의 본성을 지닌 것이거나, 아니면 확실히 신이거나, 아니면 저 모든 것을 우월하게 담고 있는 몸보다 더 고귀한 어떤 피조물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신은 사기꾼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들을 내게 손수 전하지도 않았고, 이것들의 표상적 실재성을 형상대로가 아니라 오직 우월하게 담고 있는 어떤 피조물을 통해서 전하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만일 이것들이 몸 있는 것들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전해졌다면, 신은 내게 이 감각적 지각들을 인식하기 위한 어떤 기능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이것들이 몸 있는 것들로부터 전해졌다고 너무나 쉽게 믿고 마는 성향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어떤 근거로 그가 사기꾼이 아니라는 것이 인식될 수 있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몸 있는 것들은 실존한다. …

제6성찰. 물질적인 것의 실존 및 정신과 신체의 실재적 구분에 관하여. 129-131p.

위의 내용도 기억해두고 싶은 내용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것들이, 내가 자연적 본성에 따라 배웠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자연적 본성으로부터가 아니라 섣불리 판단을 내리는 어떤 습관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며, 이 때문에 오류에 빠지는 일이 쉽게 일어난다. 이를테면, 내 감각을 자극하는 것이 전혀 없는 공간을 진공이라고 하는 것이나, 물체의 경우 예컨대 뜨거운 물체에는 내가 지니고 있는 열기의 관념과 꼭 닮은 어떤 것이 들어 있고, 희거나 푸른 물체에는 내가 감각하는 흰색이나 푸른색이 들어 있으며, 쓰거나 단 것 속에는 그런 맛이 있다고 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별도, 탑도, 무엇이든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것들도 내 감각에 나타나는 그대로의 크기나 모양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 등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무언가 충분히 또렷하게 지각하지 못한 것이 없으려면 나는 ‘내가 어떤 것을 자연적 본성에 따라 배웠다’라는 말이 본디 무슨 뜻인지를 더욱 주의 깊게 규정해야만 한다. 이때 ‘자연적 본성’은 신이 나에게 부여해준 것의 복합체라는 뜻을 지닌 자연보다 좁은 의미를 갖고 있다. 복합체로서의 자연 안에 속하는 것들 가운데에는, 오직 정신에만 속하는 것, 예컨대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지각한다는 것이라든가, 그 밖에 자연의 빛에 의해 알려지는 것들이 있지만, 이것은 여기서 말하는 자연적 본성이 아니다. 또한 오직 물체에만 관계하는 것, 예컨대 물체는 아래로 움직인다는 것 등과 같은 많은 것이 있지만, 이것 역시 여기서 말하는 자연적 본성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적 본성이란 신이 정신과 신체의 합성체로서 나에게 부여해준 것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물론 이 자연적 본성은 고통의 감각을 일으키는 것은 기피하고, 쾌락의 감각을 가져다주는 것은 추구하라는 것 등을 나에게 가르쳐주지만, 보다시피 지성이 먼저 우리 바깥에 놓여 있는 것들을 검토하지 않은 채로 무엇이든 저 감각적 지각을 근거로 결론 내리라는 것까지 가르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에 대하여 진리를 아는 것은 보다시피 오직 정신에 속하지, 정신과 신체의 합성체에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별이 조그만 횃불의 불꽃보다 내 눈을 더 자극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별이 횃불보다 크지 않다고 믿게 하는 실재적인, 곧 긍정적인 경향성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저 아무 근거 없이 어릴 적부터 그렇게 판단했을 뿐이다. 또 불에 가까이 가면 열기를 느끼고, 더 가까이 가면 고통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이 불 속에 열기나 고통과 닮은 어떤 것이 있다고 설득하는 근거는 전혀 없다. 다만 무엇이 되었든 우리 안에 열기와 고통의 감각들을 일으키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설득하는 근거가 있을 뿐이다. 나아가 어떤 공간 속에 비록 감각을 자극하는 것이 없을지라도, 이로부터 이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귀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알다시피 나는 감각의 지각들을 마치 우리 바깥에 놓여있는 몸들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직접 식별하기 위한 확실한 규칙이라도 되는 양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물론, 다른 많은 경우에도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사실 이것들은 저 본질에 관해 단지 흐릿하고 헛갈리는 것만을 알려줄 뿐이다. (무릇 감각적 지각이란 본디 합성체를 위해 무엇이 이롭고 이롭지 않은지를 그것의 일부인 정신에 알리고자 자연적 본성이 제공한 것이며, 그런 한에서는 충분히 맑고 또렷하다.)

제6성찰. 물질적인 것의 실존 및 정신과 신체의 실재적 구분에 관하여. 134-136p.

이것도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다.

나아가 이런 고찰은 단지 내 본성이 빠지기 쉬운 모든 오류를 알아채는 데만이 아니라, 이것을 쉽게 피하고 바로 잡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 예컨대 나는 신체에 이로운 것에 대해 모든 감각이 거짓된 것보다는 참된 것을 지시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또 이것을 검토하기 위해 거의 언제나 이 감각들 가운데 많은 것들을 사용할 수 있다. 나아가 이를 위해 현재를 과거와 결부시키는 기억력을 사용할 수도 있으며, 오류의 모든 원인을 이미 밝혀낸 지성을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날마다 감각이 내게 보여주는 것이 거짓이 아닐까 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지난 며칠 동안의 온갖 과장된 의심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내던져버려야 할 것이다. 특히 내가 깨어 있음과 구분할 수 없었던 꿈과 연관된 가장 강력한 회의까지 말이다. 다시 말해 이제 나는 이 둘 사이에 다음과 같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깨어 있을 때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기억에 의해 다른 모든 삶의 활동과 결부될 수 있지만, 꿈속에 나타나는 것은 결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깨어 있을 때에 꿈속에서처럼 어떤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져버린다면, 더구나 그 사람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면, 이 사람을 진짜 인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령이나 뇌에서 만들어진 환영이라 판단해도 무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있으며, 언제 왔는지를 또렷하게 알고 있는 것들, 또 이것들에 대한 지각을 남은 내 생애와 아무런 단절 없이 결부시킬 수 있다면, 확신컨대 이런 것들은 꿈속에서가 아니라 깨어 있을 때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내 모든 감각, 기억, 지성을 동원하여 이것들을 검토하고 난 뒤에도, 이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나머지 것과 모순된다고 내게 알려지지 않는다면, 나는 이런 것의 진리를 조금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신은 사기꾼이 아니라는 것으로부터 내가 이런 경우에 결코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 처리에 쫓기는 우리로서는 이런 것들을 주의 깊게 검토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인생은 각각의 경우에 오류에 예속되어 있음을 나는 고백할 수밖에 없으며, 또 우리 본성의 연약함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제6성찰. 물질적인 것의 실존 및 정신과 신체의 실재적 구분에 관하여. 143-144p.

후기

마침내 데카르트의 성찰을 완독했다. 이것이 물론 전적으로 이 책에 대한 고찰을 종결시키는 것은 아니다. 몇 분 후이면, SNU 고전 100선 읽기의 조 Talk가 시작된다. 어떤 책이라고 하는 것의 진정한 가치는, 그 책을 두고 이해하는 여러 사람들의 관점이 한데 모일 때에 비로소 발견될 수 있다. 책이라고 하는 것 또한 감각이나 의지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므로, 여러 사람들이 모였을 때 우리는 감각과 의지의 함정에 주의하면서 지성이 우리에게 보이는 유일한 책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