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나 #1. 카프카

글과 나 #1. 카프카 <법 앞에서>

2021-03-02 0 By 커피사유

글과 나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짧은 글을 읽으면서 연상한 것들, 생각한 것들, 느낀 것들을 갈무리해두는 공간입니다.

글과 나 시리즈의 포스트는 서울대학교 인문 교양 강좌 ‘문학과 철학의 대화’의 강의에서의 제시된 글을 보고 작성한 글임을 서두에 밝힙니다.

카프카, <법 앞에서>

법 앞에 한 문지기가 서 있다. 이 문지기에게 한 시골 사람이 와서 법 안으로 들어가도록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입장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시골 사람은 곰곰이 생각하고 나서 그러면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가능하오.” 문지기가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안 된다오.”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언제나처럼 그렇게 열려있고 문지기가 옆으로 비켜서 있어서 그 시골 사람은 몸을 굽히고 문으로 그 안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그것을 본 문지기가 큰소리로 웃으며 말한다. “그렇게도 끌린다면 내 금지를 어기고 들어가 보오. 하지만 내 힘이 장사라는 걸 알아두시오. 게다가 난 말단 문지기에 지나지 않소. 그러나 홀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문지기가 서 있는데 갈수록 힘이 센 문지기가 서 있다오. 나조차도 세 번째 문지기의 모습을 쳐다보기도 힘겨울 정도라오.” 시골 사람은 그런 어려움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법이란 정말로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피 외투를 입은 그 문지기의 모습, 그의 큰 매부리코와 검은 색의 길고 가는 타타르족 콧수염을 뜯어보고는 차라리 입장을 허락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결심한다. 문지기가 그에게 의자를 주며 앉으라고 한다. 그 위에 그는 여러 날 여러 해를 앉아 있다. 그는 들어가는 허락을 받으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자주 부탁을 하여 문지기를 지치게 한다. 문지기는 가끔 그에게 간단한 심문을 한다. 그의 고향에 대해서 자세히 묻기도 하고 여러 가지 다른 것에 대해서 묻는다. 그러나 그것은 지체 높은 양반들이 건네는 질문처럼 별 관심 없는 질문들이고, 문지기는 마지막엔 언제나 그에게 여전히 들여보낼 수 없다고 한다. 그 시골 사람은 여행을 위해서 많은 것을 장만해 왔는데, 문지기를 매수할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용한다. 문지기는 주는 대로 받으면서도 “나는 당신이 무엇인가 소홀히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려고 받을 뿐이오”라고 말한다. 수년간 그는 문지기를 거의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다. 그는 다른 문지기들은 잊어버리고, 이 첫 문지기만이 법으로 들어가는데 유일한 방해꾼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는 처음 몇 년 동안은 이 불행한 우연에 대해서 무작정 큰 소리로 저주하다가 후에 늙자 그저 혼잣말로 투덜거린다. 그는 어린애처럼 되었고 문지기에 대해서 수년간이나 열성적으로 관찰한 탓에 모피 깃에 붙어있는 벼룩까지 알아보았으므로, 그 벼룩에게 자기를 도와서 문지기의 마음을 돌려 달라고 부탁한다. 마침내 그는 눈이 침침해진다. 그는 자기의 주변이 더 어두워진 것인지, 아니면 그의 눈이 착각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 어둠 속에서 법의 문에 꺼질 줄 모르는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오래 살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가 죽기 전에 그의 머릿속에서 그 모든 시간에 대한 모든 경험들이 여태까지 문지기에게 물어보지 않았던 단 하나의 질문으로 모아졌다. 그는 문지기에게 눈짓을 한다. 이제 굳어져 가는 몸을 더 이상 똑바로 일으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문지기는 그에게 몸을 깊숙하게 숙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키 차이가 그 시골 사람에겐 매우 불리하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아직 뭘 더 알고 싶은 거요?” 문지기는 묻는다. “당신은 만족할 줄 모르는군요.” 시골 사람은 말한다. “모든 사람들은 법을 절실히 바랍니다. 그런데 왜 지난 수년간 저 말고는 아무도 입장을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문지기는 그 시골 사람이 이미 임종 가까이 왔음을 알고 희미해진 그의 귀에 들리도록 소리친다. “이 곳에서는 당신 말고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 받을 수 없다오. 왜냐하면 이 입구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것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오. 이제 가서 문을 닫아야겠소.”

카프카, <법 앞에서>와 나

평소에 나 자신이 워낙 ‘반권위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온갖 종류의 강압적인 ‘시스템’이라면 그 대로 히스테리성 알러지를 일으키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이 글을 읽고도 나는 결국 또 한 번 ‘시스템’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떠올린 시스템은 그렇게 먼 것은 아니었으나, 법과 사회에 대해서 중학교의 경험으로 눈꼽만큼의 친숙함이라도 존재했던 나는 결과적으로는 ‘선별적 복지’라는 근/현대의 복지 제도를 떠올리게 되었다. 갑자기 나에게 시골 사람은 사회적 약자로, 문지기는 그러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선별적 복지 제공 여부를 심사하는 (=법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하고 막는) 관리라는 생각이 훅 하고 끼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해석이 과연 타당성이 있는 해석인지 나는 나 자신으로써 증빙할 길은 없다. 왜냐하면 타당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만을 막기 위하여 타인의 검증이 필수적인데, 나는 타인의 검증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여기에 나의 의견을 기술하여 독자로 하여금 나의 해석에 대한 타당성을 판별해주기를 부탁하는 바이다… 나의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이 짧은 카프카의 에세이에서 등장하는 두 명의 인물에 대하여 앞서 제시한 해석을 고수한다고 하면, 몇 가지 문장들에 대하여 자세한 해설이나 논의를 해볼 만한 가치는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그 중의 첫 번째가 바로 다음의 이 문장이다.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언제나처럼 그렇게 열려있고 문지기가 옆으로 비켜서 있어서 그 시골 사람은 몸을 굽히고 문으로 그 안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처음에 바로 와닿은 문장. 나 자신이 아직 사회의 초년생이라 정확히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 나 자신이 각종 뉴스와 보고 들은 세상이라는 것의 일부에는, 법의 영역으로도 도움의 영역이 닿지 않는 어떤 부분이 사회에는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근대 국가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 하에서 일어나는 불평등과 그 이외 각종 제도로 인해 피해를 입어 구제가 필요한 개인을 위한 각종 법률적 보호 장치를 마련해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문을 만인에게 필요할 경우 개방의 기회를 열어둠을 성문으로 확실히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언제나처럼 그렇게 열려있고) 관리로 하여금 개방하려는 이를 심사하도록 하였는데 (= 문지기가 옆으로 비켜서 있어서), 이상하게 카프카에게 ‘시골 사람’은 법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렇게도 끌린다면 내 금지를 어기고 들어가 보오. 하지만 내 힘이 장사라는 걸 알아두시오. 게다가 난 말단 문지기에 지나지 않소. 그러나 홀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문지기가 서 있는데 갈수록 힘이 센 문지기가 서 있다오. 나조차도 세 번째 문지기의 모습을 쳐다보기도 힘겨울 정도라오.”

들어가라고 만든 문에 당사자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문지기가 막는다면, 이것은 과연 문지기가 무언가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인가? 하지만 지금 ‘시골 사람’을 막는 ‘문지기’도 단지 말단일 뿐이며, 홀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다른 여럿 문지기들에 비하면 그는 힘이 별로 세지도 않다. 물론 그가 ‘시골 사람’에 비하면 힘이 막강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모피 외투를 입은 그 문지기의 모습, 그의 큰 매부리코와 검은 색의 길고 가는 타타르족 콧수염을 뜯어보고는 차라리 입장을 허락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결심한다. 문지기가 그에게 의자를 주며 앉으라고 한다. 그 위에 그는 여러 날 여러 해를 앉아 있다. 그는 들어가는 허락을 받으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자주 부탁을 하여 문지기를 지치게 한다. 문지기는 가끔 그에게 간단한 심문을 한다. 그의 고향에 대해서 자세히 묻기도 하고 여러 가지 다른 것에 대해서 묻는다. 그러나 그것은 지체 높은 양반들이 건네는 질문처럼 별 관심 없는 질문들이고, 문지기는 마지막엔 언제나 그에게 여전히 들여보낼 수 없다고 한다. 그 시골 사람은 여행을 위해서 많은 것을 장만해 왔는데, 문지기를 매수할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용한다. 문지기는 주는 대로 받으면서도 “나는 당신이 무엇인가 소홀히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려고 받을 뿐이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말단임에도 불구하고 ‘문지기’가 아닌 ‘시골 사람’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이러한 난관이 더 없을 수가 없다. 카프카가 1919년에 이 에세이를 썼고, 모피의 대중화는 20세기 후반대에서야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귀중했을 모피 외투, 그리고 보통 자존심이 높고 ‘콧대 높다’라는 수식언으로도 대표되는 큰 매부리코, 그리고 유럽 남성 귀족의 자존심으로 통했던 콧수염을 뜯어본 ‘시골 사람’은 당연히 ‘문지기’가 권위주의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사람에게서, 그리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에 반하여 들어가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금지되어 있는 문을 지나는 것은 ‘시골 사람’에게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문지기가 제공한 의자에 그토록 오랫동안 앉아있으면서, 문지기로 하여금 ‘법’을 통과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저편의 영역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설득하기 위하여 문지기가 그를 판단하기 위해 던지는, 그러나 철저히 형식적이어서 정작 ‘문지기’ 자신은 ‘시골 사람’에게 관심이 없으므로 지체 높은 양반들이 건네는 질문처럼 별 관심 없는 질문들이 되는 질문들에 답하면서 그가 ‘삶’이라는 여행길에서 장만한 모든 것들, 인생과 모든 순간과 노력으로 문지기를 매수하려고 적극적으로 시도한다. 하지만, 참으로 우울하게도 문지기는 단지 ‘시골 사람’이 무엇인가 소홀히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모든 노력을 수동적으로 수용할 뿐이지,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그를 문 너머로 보내주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지기는 과연 ‘시골 사람’이 들어가야 하는 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가? 여기까지만 보았을 때에는 문지기에게 책임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는 ‘시골 사람’에게 정해진 것들, 그리고 자신이 쳐다보기도 힘겨울 정도의 다른 ‘문지기’들과 함께 정해져 있는 어떠한 규칙에 의하여 그의 문을 열어줄 수 없다고, 계속 기다리라고 말하고 있다는 짐작을 또 다른 이 문제에 대한 시각으로 인정한다면, 무조건적으로 ‘문지기’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수년간 그는 문지기를 거의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다. 그는 다른 문지기들은 잊어버리고, 이 첫 문지기만이 법으로 들어가는데 유일한 방해꾼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는 처음 몇 년 동안은 이 불행한 우연에 대해서 무작정 큰 소리로 저주하다가 후에 늙자 그저 혼잣말로 투덜거린다. 그는 어린애처럼 되었고 문지기에 대해서 수년간이나 열성적으로 관찰한 탓에 모피 깃에 붙어있는 벼룩까지 알아보았으므로, 그 벼룩에게 자기를 도와서 문지기의 마음을 돌려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그 동안에 불행하고 억울한 ‘시골 사람’은 계속 문지기만을 보며 문으로 들어가기를 기대한다. 그는 너무 오래 기다린 나머지 첫 문지기를 원망하고, 무작정 큰 소리로 불행한 우연을 저주한다. 시간이 너무 지나버려 늙어버리고 그가 힘이 빠지자, 그는 체념한 듯 그저 혼잣말로 투덜거린다. 그는 문지기 – 그가 들어가고자 하는 법의 문을 지키는 이에 대하여 ‘여행’에서의 모든 것을 이용하여 온 터이므로 그의 모피 깃에 붙어 있는 벼룩까지 알아보지만, 이제는 문지기가 아닌 그 ‘벼룩’에게 문지기의 마음을 구걸해야 하는 시점까지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눈이 침침해진다. 그는 자기의 주변이 더 어두워진 것인지, 아니면 그의 눈이 착각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 어둠 속에서 법의 문에서 꺼질 줄 모르는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 (중략) … 이제 굳어져 가는 몸을 더 이상 똑바로 일으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마침내 완전한 절망과 실낱같은 희망의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그는 혼란스러워서, 지금 자신에게 닥친 거대한 위험이 주변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 안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인지 헷갈리고 있다. 둘 다일 수도 있지만, 그는 그러한 혼란 와중에도 법의 문에서 꺼질 줄 모르는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본다. 그 광채는 헛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나는 문득 들었다. 꺼질 줄 모르는 광채는 그 법이 선전하는 ‘희망’과 ‘구제’이나, ‘시골 사람’, 정작 그것들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제대로 미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신기루와 같이 덧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굳어져 가는 몸을 더 이상 똑바로 일으킬 수도 없는 상태까지 ‘시골 사람’의 운명이 달려가도록, 방치한 것이 그 거짓되고 꺼질 줄 모르는 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글에 대한 다음의 해석을 제안한다: 문제가 있는 것은 물론 ‘시골 사람’이거나 ‘문지기’일 수도 있다. 나는 그러한 해석을 존중한다 – 하지만, 양자 택일의 관점을 버리고 제3의 공통 요인에서 해답을 창출해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무래도 ‘거짓되고 꺼질 줄 모르는, 법의 문에서 흘러나오는 광채’ 아닌가. 그 광채가 흘러나오도록 하고, 문지기로 하여금 문으로 들어가야 할 시골 사람을 막아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는 이 ‘거짓됨’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중간에 아래의 이 문장을 읽을 때 예전에 잠시 만화(그래, 그 유명한 <만화로 보는 서울대 인문고전 50선>이었다)로 보았던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당시 영국 중세를 살았으므로 사상에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가 라파엘의 입을 빌려 그렸던 그만의 <유토피아>에서의 법도, 그리고 20세기 카프카가 지적한 이 모순도, 그리고 지금의 나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 아무래도 다음의 문장이라는 결론만은 확실한 듯 하다.

그는 법이란 정말로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