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답록 #5. 진화, 그리고 쾌락추구자로서의 인간

문답록 #5. 진화, 그리고 쾌락추구자로서의 인간

2021-09-08 0 By 커피사유

문답록(文遝錄)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작성한 글에 대한 주석과 그에 대한 답글을 갈무리하는 공간이며, 동시에 그러한 주석과 답글 사이의 동형성 혹은 차이점을 발견함으로써 글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확장하는 공간입니다.

들어가며

이 문답록(文遝錄)은 필자의 친구가 2021. 9. 7.에 Facebook에 작성한 아래 진화적 관점과 관련된 쾌락 및 인간에 관한 ‘원문(原文)’에 해당하는 글을 공개한 이후, 해당 글에 대하여 필자와 필자의 친구가 Facebook을 통하여 서로 이 글에 대하여 토론한 과정을 기록해두기 위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문답록(文遝錄)은 그 특성상, 문답(文遝)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주고 받은 글들을 모두 기록하여야 하므로, 이 글에는 필자 친구의 원문과 이에 대한 필자의 답문, 그리고 그 이후로 이어진 모든 답문들에 대한 답문들과 같이 토론 과정의 모든 글들을 모두 싣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서는 필자 친구의 양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또한 필자는 아래에 기록된 모든 글을 되도록 Facebook에 게재된 원문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하였으나, 오 · 탈자와 문단 작성상의 오류는 부득이 가독성을 위하여 수정하였음을 서두에 밝힙니다. 다만 필자가 잘못된 단어를 사용한 것 같다고 추론한 경우 원문의 단어를 우선 제기하되, 주석으로 필자의 견해를 피력하였음을 또한 밝혀둡니다.

원문(原文) – 2021. 9. 7. Facebook에 필자의 친구가 작성.

생물은 신경으로 들어오는 자극을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다만 자극을 인식하는 방식에 따라 구분하여 감각이라 하고, 자극의 조합과 순서에 따라 서로 다른 느낌이 형성되며, 이 중 느낌과 느낌을 생명과 연관지어 판단해서 고통과 쾌락으로 구분한다.

사실 생존에 방해되면 고통이고 도움이 되면 쾌락인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쾌락도 고통을 느끼는 방법 중 하나이며, 몸에 좋은 고통이기에 쾌락으로 느낀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때, 물질적 자극을 통해 쾌락을 느끼는 우리 모두는, 일종의 마조히스트가 아닌가.

제1답문(答文) – 2021. 9. 7. Facebook에 필자가 덧글로 작성.

반례가 있는 듯. 마약성 성분의 경우는 정상적 판단을 방해하거나 혹은 신체 건강에 좋지 않음이 밝혀졌는데, 그 고유의 중독성은 일종의 쾌락 중추를 자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 분명 너도 알 거고. 이 부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제2답문(答文) – 2021. 9. 7. Facebook에 필자 친구가 덧글로 작성.

우선 그에 대한 반례1는 많고, 그것은 여러 가지 종류로 나뉘는데, 아마 세 가지로 나뉠 것이고 전부 이렇게 답할 수 있음.

첫 번째는 쾌락을 주는 물질과 분자생물학적으로 유사하여 우리 몸이 잘못 인식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쾌락과 고통이 구분된 다음, 그 쾌락을 이용하여 먹이 사슬에서 다시 진화된 개체들(맛있는 극독 같은 것)에 대항할 정도로, 그러니까 그런 쾌락을 다시 고통으로 재분화시킬 정도로 진화하지 못한 것이 있고, 세 번째로, 쾌락 중추를 자극하여 사고하지 못하게 하는 등의 여러 신체적 문제점이, 현실에서는 생존에 그렇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 경우.

첫 번째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문제이고, 아마 관련된 기관이 퇴화하거나 진화해야 할 것임. 대표적인 예는 에이즈, 당뇨병 등이 있을 것.

두 번째는 시간이 충분히 지나지 않아서 발생하는 것임. 『이기적 유전자』에도 나오지만, 뻐꾸기가 탁란을 하는 데도 새들이 반응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아직 대응할 정도로 진화할 충분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됨. 현실에서도 사람을 노린 여러 마약성 약물들이 개발되고 있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결국 사람의 몸이 진화를 이루어, 그런 약물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도록 해야 되는데, 그 시간 비율이 매우 차이남.

그리고 세 번째는, 두 번째와 비슷한 이유지만, 진화가 그렇게 느긋하게 일어나는 이유는, 마약성 물질 복용자 / 중독자들이 자연선택에서 제외될 정도의 급격한 해로움은 끼치지 않아서 그렇다는 뜻임.

제3답문(答文) – 2021. 9. 7. Facebook에 필자가 덧글로 작성.

그건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고 쳐도, 사람이 쾌락을 느낄 수 있는 경로는 물질적 측면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음.

물론 물질적인 측면, 즉 사람의 기본 욕구로 알려져 있는 식욕, 성욕, 소유욕 등에서 쾌락을 얻는 경우도 있지만, 문제는 정신적인 측면 혹은 경로를 통하여 쾌락을 얻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지.

이를테면 자기 자신이 어떤 위기를 극복하였을 때 뇌는 안도감이라는 일종의 쾌락 혹은 보상을 제공하는 메커니즘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음. 너도 여기에는 동의할 것이고. 또한 이것은 최근에 발달하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고 오래 전의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겠지.

그러므로 오래 전부터, 진화의 역사 속에서 물질적 측면만이 아닌 정신적 측면을 통해서도 쾌락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마지막 문단에서 쾌락에 대해 ‘물질적’이라는 단어만을 수식언화하여 언급하는 것을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임.

제4답문(答文) – 2021. 9. 7. Facebook에 필자 친구가 덧글로 작성.

저는 애초에 물질적 자극에 의해 나타나는 고통의 쾌락적 분화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만. 그런 정신적인 쾌락 부분은 내가 쓴 것과 매커니즘이 전혀 다르기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

제5답문(答文) – 2021. 9. 7. Facebook에 필자가 덧글로 작성.

물론 물질적 자극만을 고려하신 것 같기도 하지만, 첫 문단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모든 ‘자극’을 전제하고 있다고 판단했음. ‘자극’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에 의한 것만은 아니지 않느냐, 이것이지. 물론 그 자극의 발화점이 되는 것은 필연적으로 물질적 세계에서 수행되는 것이 맞지만, ‘자극’의 본질은 자극의 발화점과는 항상 같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그러므로 물질적인 자극에 대하여 논의하려고만 하셨다면, 글 초입에 한정을 지시하는 문장을 삽입했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바임.

주석 및 참고문헌

  1. (커피사유 주) 아무래도 필자 친구는 ‘반례’가 아닌 ‘설명’을 의도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