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4. 혼란 속의 ‘판단 중지’

부활 #4. 혼란 속의 ‘판단 중지’

2022-01-07 0 By 커피사유

부활(復活)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과거에 써 둔 어떤 글을 다시금 되돌아보고 첨언과 수정을 가함으로써, 과거의 생각을 현재로 다시금 불러오고 되살리며 새로운 해석을 부여해보는 공간입니다.

무지 속에서의 현명한 결정이란 무엇인가


“어떤 공동체에 속한 한 개인이 가장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취해야 하는 바람직한 태도란 무엇일까?”

대학의 가을 학기가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제시된 이 질문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내가 〈심리학개론〉을 들으며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관찰들과 이론들을 살필 때에는 “한 개인이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현명하게 행동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로, 〈서양철학의 이해〉를 들으면서 규범윤리학1과 메타윤리학2의 개념을 조망하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고민할 때에는 “공동체와 공존하는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가?”로, 그리고 잠시 쉬어갈 적에는 “나 자신이 현명하게 행동하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바람직한 태도란?”의 형태로 이 질문은 그 형태를 다채롭게 바꾸어갔다.

그러나 대학에서 내가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보게 된 더 넓은 세계와 미지의 영역 때문에 나는 그렇게 현명하지도 않으며 동시에 합리적이지도 않은 나의 이성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도달하기 위해 나아가야 하는 길은 너무 멀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 올바른 질문에 대한 답을 도출하기 위해서 내가 보고 배우며 고려해야 할 영역이란 단기간에 둘러보기에는 너무 넓었던 것이다. 그 넓음도 상상 이상으로 광대했기 때문에, 질문에 대해 유한한 시간 안에 대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까지 했다. 나는 솔직히 이러한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지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끝까지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을 올바르게 조망하기 위해서는 관찰이 가져다주는 것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이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나는 결국 그나마 확실하다고 생각해오던 어떤 영역 속에서 과감히 뛰어내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광범위한 세계로 스스로의 사상을 경착륙시킬 수 밖에 없었다.


결과는 혼란스럽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광범위한 세계, 지성의 관조를 거치지 않은 광활한 미지의 영역 속에 지금 나 자신이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각하는 순간마다, 나는 스스로가 아는 것이란 사실상 거의 없으며 내릴 수 있는 판단들이란 알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잘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한 섵부른 판단으로 오류를 저지르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판단을 중지하는 것 이들 밖에 없다는 것을 고통스럽게도 계속 떠올리게 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도 너무 복잡하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아니다. 사실은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세상은 원래부터 복잡했고, 나 자신은 그러한 복잡계의 전체 모습과 동작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스스로가 오만과 자만에 휩쓸려 진취는 곧 중대한 정복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어 왔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 미지의 영역 한가운데서 방황하면서 천천히 인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세계를 한 인간의 지성으로 제대로 관조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 것인가. 논평을 발표하는 수많은 칼럼 집필진들, 기고문을 쓰는 수많은 이들, 대학을 거쳐간 수많은 지성 그리고 이들 모두의 사상은 복잡한 세계 속에서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원리와 법칙을 논하던데, 왜 나는 그것들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가지지 못하는 것인가. 혜안(慧眼)을 왜 나는 가지지 못하고 있는가. 왜 나는 통달에 이르지 못했으며 여전히 무지(無知)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무지 속에서도 나는 하나의 가능성을 우연히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의 사상으로부터 본 것 같다.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방법적 회의’를 통해 자신이 그 실존을 의심할 수 있는 수많은 사물과 개념에 대한 관념들이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지만, 동시에 그러한 회의의 과정 속에서 사고하고 의심하는 자신의 존재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는 일명 ‘Cogito 명제’를 도출한 바가 있다. 어쩌면 비슷한 구도로 지난 한 학기 동안 나 자신을 괴롭혀온 질문, “어떤 공동체에 속한 한 개인이 가장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취해야 하는 바람직한 태도란 무엇일까?”에 대한 대답을 다음과 같이 도출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판단 중지’가 필요하지 않을까. 잘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고 혼란스럽더라도 관련된 충분한 지식과 증거들을 갖추기 전까지는 무지의 영역에 머무르는 것이 사실은 가장 현명한 태도가 아닐까. 역사적으로 보아도 무지와 몰이해는 항상 그들이 낳는 오류와 오해로써 공동체를 마비시켰다. 오늘날에도 예외는 없을 것이므로 세상의 복잡한 문제에 대하여 잘 모르는 상태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문제가 있을 때 그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지성을 발휘하여 제대로 탐사하지 않은 채로, 그 문제에 대하여 자신이 드는 느낌과 직감대로 판단하기 시작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것은 아마도 지금 내가 처해 있는 무지 속 방황에서 비롯되는 고통보다도 더 참혹한 결과를 낳지 않을까. 무지 속에서 방황하는 것보다는 사실 무지 속에서 광신에 휩싸이는 것을 더 두려워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은 단순한 틀로 이해될 수 없다. 세상은 복잡하다. 간명하고도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지만 부족한 나는 지금에서야 이를 문장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는 개인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현명한가. 질문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나는 묻고 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복잡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세상 전체를 꿰뚫어보는 눈 하나 가지지 못한 나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앎과 새로운 시각, 그리고 논리를 통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나의 갈망은 아무래도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는 나 자신에만 국한되지 않아야 할 것이기도 하지 않을까.


Resurrected from. 「혼란 속 ‘판단 중지’에 대한 사유」 on 8 Dec 2021.

주석 및 참고문헌

  1. 어떤 행동이 옳고 그른가를 다루는 철학적 분과인 윤리학 중에서도, ‘옳은 행동’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려고 하는 윤리학의 한 분과를 ‘규범윤리학’이라 한다.
  2. 윤리학 중에서도, 도덕 규칙이나 이론들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이들의 적절성 등을 검토하는 윤리학의 한 분과를 ‘메타윤리학’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