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15. 사여명(思黎明)으로 정한 호(號)

사유 #15. 사여명(思黎明)으로 정한 호(號)

2021-04-05 0 By 커피사유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커피, 사유(思惟)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어느 새벽에 나는 문득 나의 호(號)를 정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쓸모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굳이 나는 호(號)를 정하고 싶었다.

요즘 사람들은 호(號)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대부분 이제 서양권의 문화들이 들어오고 자리잡게 되면서, 우리의 옛 문화들은 상대적으로 사장되어 버리고 결과적으로는 과학이나 수학과 같은 이성에 천적으로 집착하는 사고 방식이 사회 전반에 도입되는, ‘근대화’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옛 문화들은 구식의 것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의 옛 문화였던 호(號)라는 것은 영어 이름을 정하자는 유행에 휩싸여 상대적으로 경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나 또한 호(號)라는 것을 정하는 것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몇몇 옛 문화들과 관련된 서적이나 온라인 콘텐츠들을 접하다 보니 호(號)라는 것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는데,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호(號)라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의 별명이라는 것이다. 즉, 보통은 아호(雅號)라고 정식적으로 칭하는 이 호(號)라는 것은, 한 사람의 필명일 수도 있으며 혹은 친구들끼리 장난삼아 부르는 별명, 그리고 가명일 수도 있는 그 사람의 참된 이름이 아닌 다른 약속된 다른 이름이다.

호(號)를 왜 굳이 정하느냐라고 나에게 누군가 물을 수 있다. 글쎄, 나도 새벽의 어떤 느낌에 이끌려 정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그 이유를 답하기는 어려운 듯 하다. 그러나 나는 새벽마다 문득 잊고 있던 것들을 떠올리거나, 혹은 문득 무언가 명(明)과 암(暗) 사이의 어떤 것들을 건져 올리고는 한다. 이것들은 가끔 나에게 어떠한 특정 감각을 불러일으켜서, 여기에 글을 쓰게 하거나 때로는 어떤 공상에 잠겨 몇 시간을 잠을 이룰 수 없도록 하고, 또 때로는 몇 주 동안 생각에 사로잡혀 흥분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이것들은 나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영역에서 기원하였는지, 그것들로 인하여 내가 만들어낸 어떠한 것들을 내가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읽을 때면, 나는 과거의 나 자신에 대하여 문득 다른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된다. 아마, 나에게 호(號)라는 것을 일러준 그날의 새벽 또한 비슷한 과정을 겪게 한 것은 아닐지.

그날 새벽의 호(號)를 정해야겠다는 짧은 ‘스쳐 지나감’ 이후로 나는 어떤 호(號)로써 나 자신을 표현할까 생각해보았다. 물론 이 호(號)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지어줄 수도 있지만 (실제 우리가 일상 속에서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친구간의 별명은 내가 지었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붙여준 경우가 많다) 굳이 나는 나 스스로에게 또 하나의 별명을 지어주고 싶었다. 이것은 흔한 기회도 아니기도 하여, 호(號)를 정하기 위하여 나는 몇 되지 않는 나 자신의 몇 가지 다른 별명들을 생각해보기로 하였다.

그 첫 번째가 나 자신이 과거 네이버(Naver) 별명으로 썼으면서도 지금 이 블로그의 필명으로 사용하고 있는 ‘책벌레’라는 별명이다. 이러한 별명을 정한 것이 이제 10년도 더 된 초등학교 저학년 때라 정확한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다만 그 당시의 나 자신이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였고, 그 당시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지금 종합하여보면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도 밖에 나가서 공을 차거나 미끄럼틀을 타는 것 보다는 교실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더 선호하였다고 하므로, 아마 친구들이 나 자신에게 붙여준 별명을 내가 그대로 사용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짐작이 가능할 뿐이다. 다만 최근에는 이러한 별명이 조금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예전만큼이나 나 자신이 책을 읽는 것을 자주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핑계라는 것, 그리고 결코 이것으로 나 자신을 변호할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이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로 바빠진 일상 덕에 학업 이외의 어떤 인문 고전이라던가 소설, 또는 어떤 서적들을 예전만큼이나 많이 읽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러한 별명이 더 이상 나 자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듯 하여, 결국 별명을 수정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떠올린 별명이 바로 나 자신이 이 ‘책벌레’라는 별명을 수정하여 만든 ‘커피사유’라는 별명이다. 지금 나 자신의 Naver를 비롯한 각종 웹사이트의 별명이 바로 이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별명은 솔직히 말하자면 이 블로그 이름과 정확히 동일하다. 그 이유는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나의 별명을 바로 이 블로그 이름으로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 블로그 이름을 정할 때 나는 한 때 내가 Naver 블로그를 운영하던 시절의 ‘책벌레의 과학동산’으로 정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나 자신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촌스러운 이름이기도 하며,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듯 ‘책벌레’라는 별명이 나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기도 하고, 또한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과학에만 지성의 영역을 한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기각하고 다른 이름을 물색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커피를 좋아하고, 그 커피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글을 쓰거나 생각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므로, 스스로를 사유자(思惟者)라고 칭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 그 당시에 읽던 철학 쪽의 서적에서 사유라는 단어에 매료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리하여 ‘커피’와 ‘사유’라는 나 자신을 잘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두 단어를 결합하여 ‘커피, 사유’라고 블로그 이름을 지었고, 그것을 따서 나는 지금의 별명을 ‘커피사유’로 정했다. (알다시피, 쉼표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 별명을 정할 때 허용되지 않는 문자이다)

세 번째로 떠올린 것은 나의 영어 이름으로 정해둔 Stephen이라는 이름인데, 그 이름은 내가 정확히 그 이유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예전에 나의 관심이 한창 우주와 천문 쪽으로 향했던 적이었다. (지금은 그 관심이 다른 곳으로 돌려져 있다) 그 당시 나는 어떤 책에서 스티븐 호킹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 병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우주에 관한 식을 줄 모르는 탐구에 대한 열정은 그 당시의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나는 그에 감명받아, 당시 영어 이름을 정할까 생각하고 있던 찰나라 내 영어 이름을 그 박사의 이름을 따 Stephen으로 정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정확하게 Stephen이 아니라, Steven으로 정하고 말았는데, 당시 나는 영어에 대하여 정확히 모르던 시절이라, 집에 굴러다니던 전자 사전을 꺼내서 ‘스티븐’ 이라고 발음이 나는 이름을 찾았었다. 근데 문제는 스티븐 호킹 박사는 영국인이라 영국식 이름을 사용하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전자사전은 미국식 기준으로 이름이 등재되어 있어서, 미국식 이름인 Steven으로 정해버리게 되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서야 나는 그 이름이 잘못된 것임을 알아차리고, 뒤늦게 Stephen으로 수정하기는 했지만 이미 미국식 이름을 기준으로 정해버린 내 이메일 주소는 바꿀 수 없었다.

이상의 단 세 개의, 다른 사람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 아닌 나 자신이 정한 별명과 이름을 살펴봄으로써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어떠한 자화상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전까지의 나의 모든 별명들은 나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 혹은 나 자신의 취미, 혹은 좋아하는 일과 같은 ‘나의 현재’를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들 세 개의 이름들을 살펴봄으로써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유명한 사람들의 호(號), 이를테면 이황 선생의 퇴계, 이이 선생의 율곡, 송시열 선생의 우암, 시인 이원록의 육사, 김구 선생의 백범 등의 호라는 것이 자신에 대한 기술이거나 혹은 자신이 사는 지역을 따서 지은 것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자신의 미래상, 가치관을 투사하여 짓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호(號)에 대한 나름의 조사를 하다가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별명을 스스로의 미래를, 스스로의 가치관을 투영하여 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 자신이 호(號)로 불릴 적마다, 스스로가 항상 잊지 않고 싶은 어떤 것을 호(號)를 통하여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나 자신이 무엇을 과연 잊고 싶지 않은지를 그 새벽에 침대에 누워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았다. 스스로는 그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그저 몸을 뒤척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 새벽 자체는 나에게 어떠한 대답을 제공해주었다. 그 대답이라고 하는 것은, 잊고 싶지 않은 것이란 나 자신이 무언가를 잊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다시금 되돌아볼 수 있게 허락해주는 순간, 또한 나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꿈꾸게 해주는 순간인 새벽 그 자체였다.

… 그러하므로 결국 나는 나의 호(號)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새벽의 막 밝아오는 빛, 그리고 새벽 그 자체를 나는 계속 살아가면서 다시금 떠올리고, 또 잊지 않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이 호(號)를 정한 나 자신이 새벽의 어떤 감성에 상응하여 대답한 것일 것이다.

思黎明

‘사여명’
– 새벽의 막 밝아오는 빛을 생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