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28. 살인자에게 붙는 ‘관계’라는 이름의 변호사

사유 #28. 살인자에게 붙는 ‘관계’라는 이름의 변호사

2021-08-07 0 By 커피사유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Cafe 커피사유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생명’의 가치에 관하여


어떤 살인은 변호된다.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틀린 말은 아니다.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의 생명을 해하려고 할 때에, 그에 대항할 수단이 피해를 입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개인에게 있어 오로지 상대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 뿐이었다면 그 살인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감면하는 「정당방위」라는 조항이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형법 속에 있기 때문이다.

… 그런데 왜, 지금의 형법에서 이러한 「정당방위」라는 조항은 유효성을 가지는가?

고전적 형법론, 즉 내가 최근 들어 취미삼아 조금씩 공부하고 있는 체사레 베카리아로 주로 대표되는 형법론에서는 ‘형벌’이란 각 개인이 최소한의 자유를 내 놓아 이룩한 사회의 자기방어 수단으로 정의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형벌’은 어떤 개인이 사회의 존속을 위협할 수 있는 행위를 하였을 때, 사회가 그 ‘행위’에 대한 벌칙으로서 부과하는 어떠한 구속 행위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형법에서는 「정당방위」라는 조항과 같이 어떤 범죄에 대한 형벌을 결정할 때에 동기적 측면을 고려하여 양형한다. 이것은 행위 자체만을 보고 형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의 동기적 측면, 즉 그 범죄를 행한 이에 대한 판단 또한 형벌의 산정에 고려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늘날의 형법에서의 실정(實政)이란 고전적 형법론과 합치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를 고전적 형법론이 맞기 때문에 오늘날의 형법은 전적으로 틀렸다고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하여 소리 높여 고전적 형법론으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이러한 합치되지 않음이 어쩌면 오늘날 이기적인 사람들 속, 인본주의 사회의 실현에 대한 근본적인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해볼 뿐이다.


흔히 ‘인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칭하는 어떠한 추상, 혹은 가치가 언급되었을 때, 그러한 언급을 들은 사람들이 주로 떠올리는 것이란 ‘사람’, ‘평등’ 등과 같은 추상 혹은 실체들이다. 실제로 ‘인본주의’ 하에 구축된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을 실체가 아닌 그림자로서 동일하게 환대한다. 여기서 ‘실체가 아닌 그림자로서’라는 말은 그 환대가 개인에 따른 차이를 고려한다기보다는 각 개인을 하나의 동일한 형태로 간주하고서 환대한다는 의미를 지칭한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이러한 ‘인본주의’라는 추상, 혹은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 대표적인 명제 중 하나인 “인간의 생명은 모두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오늘날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런데 현실은 이 보편적인 하위 명제와 모순인 듯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떻게, 어디에서 현실과 이 명제 사이에서 모순이 발생하는가를 질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묻자, 과연 현실의 모든 모습이 이러한 ‘인본주의’의 ‘실체가 아닌 그림자로서’라는 정신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굳이 ‘어디에서’, ‘누가’, ‘어떻게’, ‘왜’라는 의문사들에 대한 대답이 상이함에 따라 달라지는 살인자들의 호칭을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우리는 단지 ‘어떤 죽음은 잊혀진다’는 명제가 현실의 증거들에 의하여 참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는 불편한 감각에서 앞선 질문에 대한 대답이 명백히 “아니오.”인 것 같다는 직관의 지시를 마주할 수 있는 것 같다. 아주 단순한 것인데, 만약 ‘인간의 생명은 모두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라는 명제가 나에게 있어 참이며 하나의 규칙으로서 간주되었다면, 내가 모르는 어떤 한 구성원의 죽음이 알려졌을 때, 나는 그 죽음에 대한 애도를 적어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한 사람의 죽음과 동일하게 했을 것이다. 한 개인이 ‘인간의 생명은 모두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라는 명제에 동의하며 이 명제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는 사랑하는 연인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가 느끼는 슬픔과 동일한 슬픔을 그와 인연이 전혀 없는 한 개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마찬가지로 느껴야하고 우리는 이러한 목격을 할 때에서야 비로소 응당 이 명제에 따라 그가 행위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가? 우리 옆의 가족이 세상을 떠난다면 우리는 이로 인하여 주로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년 아니 수십년의 시간 동안 슬픔에 잠긴다. 반면 나와 인연이 없는 한 사람의 죽음이 매스 미디어(Mass Media)를 통해 보도되면 우리는 그 죽음을 지나가듯 받아들인다. 아니, 정확하게는 지나가게 내버려둔다. 이 관찰을 다시금 상기할 때마다, 나는 ‘죽음’에 대한 우리들의 ‘값어치 매김’이란 자명하게 그 ‘죽음’의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 명백히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 어쩌면 이것은 ‘죽음을 맞는 이’와 ‘죽음을 목격하는 이’ 사이의 ‘동시공간상 공통 경험’의 부재에서 기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보통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바로 그것의 부재, 바로 그 부재야 말로 이러한 경우, 죽음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을 구별지을 수 있게 하는 근본 원인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주장해보고도 싶다. 즉, 어쩌면 이 부재는 사실 모든 죽음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 차이를 유발하는 원인일지도 모른다고.

전쟁 중에 적군을 죽이는 군인의 살인이 변호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죽인 적군이 사실 우리와 ‘인연’이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만약 그 군인이 죽인 적군이 사실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그 군인의 살인을 변호할 수 있을까?

또한, 그렇게 중대하지 않은 업무상의 과실로 몇 명을 죽음으로 이르게 한 관리자가 있을 때, 그 관리자의 살인 행위로 인하여 목숨을 빼앗긴 사람이 우리가 모르는 사람인 경우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인 경우, 두 경우 모두 우리는 동일하게 그 사람을 바라볼 수 있을까?

결국은, 인간의 생명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존재란 인간일 수밖에 없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인간과 가치를 부여받는 인간 사이의 관계에 따라 그 가치의 정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느냐, 이것이 바로 죽음의 가치를 판단하는 가장 원초적인 기준이 아닌가, 우리는 의심해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살인은 변호된다.

이것은 단지 그 살인의 행위에 대한 정당한 근거가 있을 경우만 해당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살인의 행위가 아무리 정당하지 못하였더라도, 그 살인자와 살해당한 자를 바라보는 이가 그 살인에 얽힌 이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에 따라서도 살인에 대한 변호의 정도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이러한 불편한 모순은, ‘인본주의’에 관한 우리의 꿈을 좌절시키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결국은 또 한 편의 글을 쓸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