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4

사유 #4

2020-07-31 2 By 커피사유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커피, 사유(思惟)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일러두기

이 글은 필자가 경남과학고등학교 문학 ‘소설 읽기’ 수업에서 읽은 소설을 기반으로 하여, Jordan B. Peterson이 저술한 ’12 Rules for Life’에 관한 내용과 연관지어 작성한 글임을 서두에 밝힙니다.


우리, 지배 계급, 그리고 소설가 구효서의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번 문학 ‘소설 읽기’ 수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을 하나 말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아마도 소설가 구효서의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를 가장 먼저 말할 것 같다. 그 독특하면서도 생소한 ‘보고서 형태’도 물론 그 이유 중 하나이겠지만, 동시에 기존 사회의 ‘파놉티콘(Panopticon)’적인 측면을 비춘다는 것이 나 자신의 평소 생각과 일치되는 면이 있다는 점이 좀 더 큰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문학 수업 시간에 우리 모두가 이끌어내었던 해석 중 하나이기도 한 이 ‘파놉티콘’적인 측면이라고 하는 것은, 불행하게도 나 자신이 맨 처음에 읽어낸 주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생각해보건데 나에게는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에서 ‘지배’라는 키워드에 초점이 맞춰졌던 듯 싶다.


Jordan B. Peterson의 12 Rules for Life(12가지 인생의 법칙)과 지배 계층

미안합니다. Jordan B. Peterson 교수님. 하지만 저는 당신의 글에 펜을 들일 수밖에 없네요.
출처: https://i.ytimg.com/vi/t-kfIb1dp1w/maxresdefault.jpg

솔직히 말해서,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마음 한 구석이 은근히 불편했다. 그 이유는 소설 대부분이 가지는 사회의 ‘암울한 면’을 비추는 특성에 기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보다 본연적인 이유는 그 즈음에 저번 1학기 1차고사 영어 시험 범위에 들어갔던 Jordan B. Peterson이 쓴 ’12 Rules for Life’라는 글의 내용이 끊임없이 생각났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선 흔히 ’12가지 인생의 법칙’으로 알려진 이 에세이에는, 저자가 ‘어깨 펴고, 똑바로 서라(Stand Up Straight With Your Shoulders Back)’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특유의 화려한 문장으로 영어 수업 시간에 나와 우리 급우들을 한 문장, 한 문장을 해석할 때마다 진땀을 흘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이 저자는, ‘어깨를 피고 똑바로 서서 당당하게 걸어다니는’ 자세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바닷가재의 서식지 분쟁 과정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호르몬의 작용 과정, 그리고 그 호르몬이 바닷가재의 자세에 미치는 영향을 차례로 설명한 이후 사람의 경우에 대해서 호르몬이 자세나 태도 등에 미치는 영향, 호르몬이 지배 계층에서의 생물 개체의 위치(계급) 결정 과정에서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설명한다.

영문학적으로는 별로 흠 잡을 만한 것이 없고 교훈도 어느 정도 훌륭하게 여겨지는 이 글에서의 딱 한 가지 문제는, 이런 문장이 나 자신에게 영 마음에 들지 않던 것에 있었다.

(원문)
And this brings us to a third erroneous concept: that nature is something strictly segregated from the cultural constructs that have emerged within it. The order within the chaos and order of Being is all the more “natural” the longer it has lasted. This is because “nature” is “what selects”, and the longer a feature has existed the more time it has had to be selected – and to shape life. It does not matter whether that feature is physical and biological, or social and cultural. All that matters, from a Darwinian perspective, is permanence – and the dominance hierarchy, however social or cultural it might appear, has been around for some half a billion years. It’s permanent. It’s real. The dominance hierarchy is not capitalism. It’s not communism. either, for that matter. It’s not the military-industrial complex. It’s not the patriarchy – that disposable, malleable, arbitrary cultural artefact. It’s not even a human creation; not in the most profound sense. It is instead a near-eternal aspect of the environment, and much of what is blamed on these more ephemeral manifestations is a consequence of its unchanging existence. We (the sovereign we, the we that has been around since the beginning of life) have lived in a dominance hierarchy for a long, long time. We were struggling for position before we had skin, or hands, or lungs, or bones. There is little more natural than culture. Dominance hierarchies are older than trees.

(해석)
그리고 이런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세 번째로 오해하기 쉬운 개념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자연은 뭔가 그 속에서 일어나는 문화적 구성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라는 생각이다. 혼돈 속에서의 질서와 존재의 질서는 그것이 더 오래 존재할수록 더 ‘자연스러운’ 것 처럼 보인다. 이것은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선택하는가’라는 물음을 수반하기 때문이며, 어떤 기능이 (자연 선택의 관점에서) 더 오랫동안 선택되면 더 오랫동안 남아있게 되고 – 생명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능이 육체적인지 생물학적인지, 혹은 사회적인지 문화적인지는 상관이 없다. 다윈학적(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지배 계급’은 영구적인 것이다. 사회적이거나 문화적인 것이 생겨나, 긴 기간 동안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지배 계급’은 영구적이다. 그것은 실재한다. ‘지배 계급’은 ‘자본주의’도 아니며, ‘공산주의’도 아니며, 이것은 또한 군사적이거나 산업적인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임의적으로 만들어낸 쉽게 사라질 수 있는 ‘부르주아 사회’ 또한 아니다. ‘지배 계급’은 심지어 인간의 창작물이 아니다. 그렇게 심오하게 들리지는 않지만, 이것은 환경에 있어 거의 영원한 측면이며, 변하지 않는 존재의 결과로 인해 보다 변하기 쉬운 현상들로 인해 지워지는 것들 중 하나이다. 우리(여기서 ‘우리’라고 하는 것은, 최초의 생명체부터 지금까지의 생명체를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는 긴 시간 동안 ‘지배 계급’ 속에서 살아왔다. 우리는 피부나 손, 폐나 뼈를 가지기 전부터 자신의 위치를 두고 다퉈왔다. 문화보다도 보다 조금 더 자연적인 것은 ‘지배 계급’이며, 이들은 ‘나무’보다도 오래된 것이다.

’12 Rules for Life’, Jordan B. Peterson.

저자는 ‘지배 계급(Dominance Hierarchy)’을 현재까지 관찰된 결과에 의하면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현상’으로써, 즉 달리 말하여 가장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 따라 저자는 글의 뒷부분에서는 이러한 ‘지배 계급’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위해 싸우고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도전’ 정신을 강조하고 있는데, 하지만 이러한 저자의 관점이 물론 충분히 어떤 전제 하에서는 훌륭한 것이지만, 불행히도 그 전제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 나의 ‘지배 계급’에 대한 관점과는 일치하지 못했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지배 계급은 저자의 말처럼 가장 오랫동안 현존하고 있는 ‘추상’ 중 하나가 아니었는가? 가장 ‘자연적인 것’으로써 우리는 이 지배 계급에 적응하고 그 속에서 우리의 길을 찾아야 하지 않는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인생을 정말 피곤하게 살려고 하는 나로써는 그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들린다. 그러한 이유는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를 읽으면서 나 자신이 던졌던 어느 한 질문을 통하여 보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 듯 하다.


관계 속 또 하나의 관계, ‘지배'(?)

그 어떤 관계든 반드시 하나 이상의 ‘지배’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출처: https://lawcorner.in/wp-content/uploads/2019/10/Abuse-of-Dominant-Position.jpg

앞서 말한 바 있듯 나에게 소설가 구효서의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라는 소설은 ‘지배’의 관점으로써 읽혔다. 그렇게 읽힌 이유를 설명하자면, 작중 피격자인 정길훈이 군대의 일원인 이병 이두익 등에게 (사고지만) 사살당한 뒤에 작성된 여러가지 보고서, 사고 경위서 등의 문서로써 구성된 이 소설에서 곳곳에 등장하는 ‘엄상사의 메모’가 단연 일등공신이라 할 것이다. 이 장치는 마치 독자로 하여금 ‘군대’라는 조직에서 ‘정길훈’의 죽음을 축소 및 은폐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현대의 군대에서도 뉴스만 보면 알 수 있듯 여전한 이런 문화는(사실 대부분의 관료주의제나 권위주의적 조직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긴 하지만) 사실 ‘권력’의 강조가 유달리 심하고, ‘상명하복’이 강요되는 ‘군대’라는 조직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왜 그 수많은 군인들은 이러한 ‘상명하복’에 강요되고 또 따르게 되는가? 스톡홀름 증후군도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지만, 또 다른 답으로는 법이 그런 식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법은 생각해보면 (적어도 기본적으로는) 민중에 의해 설계되고 제정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멍청하지 아니하고서야 자신에게 불리한 법을 제정할 리는 없다. 따라서 이건 무언가 이상하다.

내가 생각하는 올바른 답은 이러하다. 사실 우리가 지금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민주주의라는 제도로써 어느 정도 나 자신이 그 ‘지배’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은 맞지만, 사실 그 실면은 ‘정권 심판’의 정도에서나 드러나기 십상이며, 사실 우리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솔직하게 까고 말하면 시스템들에게 ‘지배’당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백만, 수억의 ‘알’들이 ‘벽’에게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에 군인들은 ‘상명하복’에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지배’는 누가 구축했는가? 모든 이들은 사실상 시스템의 지배를 받는다. ‘나’는 물론이고, 학생들이 무서워하는 학생 주임 선생님, 가족과 친척, 회사의 중역들, 삼성의 회장, 국회의원과 국무총리, 그리고 대통령까지 우리 모두는 (적어도 명목적으로는) 법에 의한 지배를 받고 있다. 아니, 적어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있으니, ‘타인’에 의한 지배를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듯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질문 한 가지를 던져볼 수 있다. ‘타인’이 존재함으로서 우리가 타인의 ‘감시’를 받아, 타인에 의한 ‘지배’를 받는다면, ‘타인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지배의 존재’를 보장하는가?

이해하기 쉽게 좀 더 자세하게 질문해보자.

서로 상호작용하는 두 개인이 있을 때, 이들 두 개인 사이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지배 관계’를 포함하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떤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도, 동등하게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주의 깊게 듣다 보면 대화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학생과 선생님의 관계에서는 당연히 시험 문제 출제권과 학생부의 작성 권한을 가지고 있는 선생님이 일반적으로 더 ‘센 사람’으로 통하며, 사회 전반에서도 자본주의 사회 덕에 임의의 두 개인을 선택하더라도 ‘경제적 수준’의 차이가 존재하므로 더 ‘센 사람’을 우리는 식별할 수 있으며, 아무리 민주주의, 민주주의 사회를 외치고 수많은 제도와 법을 마련하더라도 ‘대통령’과 ‘나’를 비교해보면 ‘대통령’이 더 ‘센 사람’이지 않던가.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개인 사이의 관계에서는 ‘누가 더 힘이 세고, 누가 더 힘이 약한지’를 판별해버릴 수 있는 셈이다. 마치 이러한 관찰 결과는, 두 개인 사이의 어떤 관계는 반드시 ‘지배 관계’를 포함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보다 더 그럴 듯 하다고 속삭이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선뜻 ‘그렇다’라고 답하면 문제가 하나 생긴다. 그 긍정의 대답은 그 결과로 우리 모두의 ‘유토피아’의 붕괴를 초래하기 때문인데, 나로 하여금 질문에 대답하기 힘들게 만드는 이 ‘유토피아’의 붕괴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할 듯 싶다.


지배 관계의 내포성과 ‘유토피아’

누구나 그랬던 때가 있을 것이다. 뭔가 나 자신은 정작 잘못한 것이 없을 때 나에게 뭔가 불리한 상황이 떨어진다면 보통 우리는 이건 사회의 책임이라고, 부조리한 사회의 책임이라고, 불평등하고 노력한 사람에게 제대로 몫이 돌아가지 않는 세계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고 나서는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은 한 때, 어떤 ‘유토피아’를 상상한다. 이 ‘유토피아’라고 하는 것은 물론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을수는 있겠지만, 추정컨대 (적어도 나부터 출발하여) 모두가 ‘그 어떤 고통도 받지 않는 사회’이거나, 이른바 ‘모든 사람의 관계가 대등한 사회’라고, 흔히 말해 우리가 ‘동화 속의 동심의 세계’라고 묘사하면 대략적으로 맞을 것이다.

나 자신의 ‘유토피아’도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유토피아’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는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인류가 곳곳에서 위원회를 구성하고 각종 국제 기구를 구성하면서까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달려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이른바 ‘가능한 불가능성’ 때문 아니었던가?

사회에서 지배는 자연적(필연적)인가?

만약 우리가 앞에서 논의했던 ‘모든 관계는 필연적으로 지배 관계를 내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의 변형에 대하여 동일하게 ‘그렇다’라는 결론을 내린다면, 사회에서 지배의 등장은 필연적인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지배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우리는 간단하게 도달하게 되는데, 그렇게 도달한 결론에 사람들은 ‘절망’하고 이러한 의지를 끝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정말 우리 모두가 꿈꾸는 이른바 ‘유년기의 세계’는 불가능하기만 한 것일까?
동화 속에서나 꿈꾼다고들 하는 평화로운 세계의 구축, 모두가 평등하며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세계는 불가능하기만 한 것일까?
그런 세계를 쫓는 이들은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이기만 할까?

인류의 힘은 ‘희망’ 속에 있었다. 아무리 불행한 상황이더라도 잃지 않던 것에.
출처: https://wlxaj1j3fea9rr7r20slpixw-wpengine.netdna-ssl.com/wp-content/uploads/2015/03/Interesting-Facts-About-We-Are-the-World.jpg

Jordan B. Peterson의 ’12 Rules for Life’에서 그는 가장 오랫동안 현존하는 것으로 보이는 질서는 ‘지배 계급’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이라는 종족은 자연의 섭리로 생각되는 ‘지배 계급’의 질서에 반기를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무래도 ‘지배 계급’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던 것 같지만, 나는 그의 전제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희망을 가져야 한다. ‘지배 계급’은 우리가 뛰어넘어야 하는 하나의 장벽이다. 인간은 여때껏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왔고, 자신의 위치를 구축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질서와 세계가 무너졌듯이, 마찬가지로 ‘지배 계급’ 또한 인간의 힘으로 무너지게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우리의 의지이고, 우리의 힘이다.

늘 그렇듯,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