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6. 어쩌면, ‘적정 기술’이라는 이름의 폭력

사유 #6. 어쩌면, ‘적정 기술’이라는 이름의 폭력

2020-12-29 0 By 커피사유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커피, 사유(思惟)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일러두기

이 글은 필자가 국경없는 과학기술자회가 저술한 ‘국경없는 과학기술자들’이라는 도서를 읽고 든 생각을 끄적여둔 것임을 서두에 알립니다.


늘 마음 한 켠에 그런 생각이 있었다. 오늘날은 분명히 국경 없는 시대라고들 말한다. 1900년대 산업 혁명과 동반된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전 세계의 인류는 오늘날 마이크로초 단위로 주가가 오르내리는(요즘은 코로나 19 백신 개발 관련 소식과 몇몇 정치인들의 망언 덕에 더 오르내리는 듯 하지만) 세상에 살고 있으며, 비행기와 선박으로 수많은 승객과 물류가 오가는(대부분 코로나 19 때문에 제대로 직격탄을 맞아 국내외로 구조조정과 파산보호 – Chapter 11 등의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으니, 그런 호칭은 보다 친숙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국경이 없는 시대가 과연 교통과 통신에만 국한되는 것인가? 사람의 왕래와 정보의 왕래가 자유롭다는 것이 과연 ‘국경이 없다’를 지시하는 것이 맞을까? 우리가 국경이 없다 –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상 어떤 국경과 관련된 요소를 찾아낼 수 없어 두 지역이 구분될 수 없음을 뜻하는 용어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데,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국경 없는’ 시대에서의 각 국가들의 행위는 일단 지난 2017년의 이민 사태에 대해서 국경을 걸어 잠그고 오지마 – 라고 외치고, 코로나 19 백신이 개발되었을 때 돈이 되겠다고 생각들 하면서 백신을 독, 과점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는 우리들 아니었는가. 세계화에 따른 ‘전 지구적’ 인식을 사실상 강요하는 곳은 다른 분석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개발 도상국이며, 사실상 이는 선진국들이 개발 도상국들의 시장까지 말 그대로 ‘꿀꺽’ 하기 위하여 애써 찾은 핑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들었던 생각도 비슷했다. 물론 이 책에서 Q-Drum이나 라이프스트로우 등, 수많은 잡지들과 인터넷 신문 기사에서 훈훈한 미담의 성격으로 소개되는 이른바 ‘적정기술’ 제품들은 국제 NGO를 통해서, 혹은 UN 등 국제기구의 주도에 의해서 우리가 흔히 지칭하는 ‘후진국’, 또는 ‘개발도상국’의 생명의 위협의 현장, 그 속으로 제공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러한 ‘제공’ 역시도 문제는 ‘동정’의 연장선 상에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니체의 표현에 따르면, ‘동정’에는 ‘세련된 자기 방어’가 존재한다고들 이야기한다. 우리가 TV에서 어떤 (아마도 어느 정도는 의도적으로 불쌍해보이도록 나오는) 아이를 보고 기부금을 내야겠다는 충동에 휩싸이는 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이러한 ‘동정’의 감정 때문이라고들 말하는데, 따지고 보면 우리가 그 상황에서 드는 감정 중에는 ‘나는 저렇지 않아서 다행이다’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하나 있다는 것을 니체는 아프도록 정확하게 집어냈다. 국제 NGO들이 물론 당장의 생명에서의 위협을 퇴출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러한 ‘적정기술’ 제품을 도입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합리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으나, 필자는 이러한 광경을 다른 시각에서 보기를 제안한다. 그 어떤 사람이든 무언가를 받기만 하면 – 즉 ‘수혜자’의 위치가 된다면, 그 ‘수혜자’라 함은 무언가를 주는 사람에게 항상 종속될 수 밖에 없다. 즉, 수혜자를 위해 마땅히 베풀어야 한다는 논리는 필연적으로 수혜자에게 복종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굉장히 굴욕적이다. 만약에 우리가 건넨 ‘적정기술’ 제품을 사용하는 것을 그 사람들이 거부한다고 생각해보자. 우리 입장에서야 물론 우리의 호의로, 무상으로 건넨 제품인데 그들이 받지 않는다고 화가 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그들이 우리가 ‘무상’으로 제공해주는, 어떻게 보면 ‘선물’이라고도 주장할 수 있는 그 제품을 받지 않는 것은 그 사람들의 자유이다. 그 사람들이 도움을 항상 필요로 할 것이므로 그 사람들은 당연히 잘 사는 우리들의 도움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아야 한다는 우리의, 약간 어떻게 보면 강압적이면서도 이상한 논리가 깔려 있다는 점을, 우리는 스스로에게서 발견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위선은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아니, 우리 스스로가 위선이다.

 착각하지는 말자. 필자가 지금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적정 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제목과 글을 의도적으로 약간 도발하는 느낌으로 정하기는 했지만, 필자가 지금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적정 기술’의 도입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인 것이다. 다른 사람을 돕자 – 라고 하는 흔히 말하는 ‘선한 동기’의 이면에는 사실 우리 스스로의 추악한 면이 잠들어 있다고, 필자는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솔직하게 다들 좀 말하자. 우리는 정치인들의 위선을 싫어하면서도 정작 우리 스스로에 내재되어 있는, 당장 ‘적정 기술’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만 놓고 조금만 파고 들어가봐도 나오는 이러한 위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스스로 구세군 돕기나 행복의 열매 나눔 행사 등에 – 특히 이러한 연말에 진행하는 각종 행사에서의 모금 – 에 참여하고 스스로 ‘착한 행동을 했어’라고 느끼는 것의 바탕에, 우리는 사실 스스로에 대한 ‘자만’이나 ‘타인과 자신의 비교, 또는 짐작으로부터 오는 우월감’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모르는 것의 차이는 심각하다. ‘선’이 ‘선’이 아님을, 우리는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