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7. The Devil Inside of Us

사유 #7. The Devil Inside of Us

2021-01-04 0 By 커피사유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커피, 사유(思惟)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이번 글은 경남과학고등학교 문학 2020학년도 2학기 수행평가로 진행되었던 掌편소설들 중, KILL ME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고 든 생각을 기술하였음을 서두에 알립니다. 저작자의 동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소설의 원문을 제공해드릴 수 없다는 점,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세상에 착한 사람은 없어. 다만, 모두가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일 뿐이야.”

개인적으로, 평소에 사색이라던가, 아니면 공상을 좋아하는 한 사람의 사유자(思惟者)로써 생각해오던 문제 중 하나이기도 한, 이러한 인간의 ‘본성’, 혹은 선과 악에 대한 문제는 참으로 그 논쟁의 역사가 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선설과 성악설, 성무선악설과 같은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나는 여기서 그 어느 것도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이야기의 역사에 관한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나 스스로를 다만 성찰하면서 이러한 고찰을 조금 진행해보고자 하는 것뿐이다.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보려면 있는 그대로 상대를 비추어주는 거울이 필수적이듯, 어떤 한 이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고자 할 때에는 거울의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그러한 본보기, 혹은 달리 말하여 일종의 ‘트리거’가 필요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좀 전에 읽게 된 내 친구들이 써 내린 掌편소설, KILL ME가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된 듯하다.

생활을 떠올려본다. 뉴스에서는 ‘어떤 여자 아이가 입양된 이후 부모의 폭행으로 살해당했다’라는 보도가 며칠 연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SNS에는 짧은 생을 못 피우고 떠난 이 아이를 위한 애도의 물결이 해시태그를 타고 이어지고 있고, TV 앞에 모인 사람들은 분노한다. 당장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KBS 뉴스에서 그 여자 아이에 대한 보도가 나오고 있을 때, 내 여동생은 특히나 분노했다. 저 어린 여자 아이의 생을 앗아간 양부모에 대해서 살인죄를 적용해서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저런 사람들을 어떻게 가만히 놓아 둘 수 있겠느냐 – 라며,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편으로는 얼마 전의 한 메신저 방을 이용한 성적 컨텐츠 유통에 관한 사건이 생각나기도 한다. 포토라인 앞에서 기자들은 마스크와 모자를 쓴 채 고개를 푹 숙인 남성을 향해 연신 플래시를 터뜨리고 마이크를 들이대었고, 고개를 결코 들지 않는 남자는 아무 맘도 없이 분명 지방검찰청 앞으로 여러 검은 양복의 남자들에 둘러싸여 들어갔었다. 그 때 국내의 한 포털 사이트에서 연합뉴스의 보도글을 읽음으로써 사건을 처음 접했던 나로써는 그 때의 덧글들이 기억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슨 AI 자동 시스템을 이용한 덧글 클린봇 서비스를 돌린다고 하지만, 그래도 조금 덜 불쾌하거나 해서 아직 걸러지지 않은 덧글들을 우연찮게 볼 수 있던 나 스스로는 뭐, 그 정도 덧글들이면 걸러진 덧글들이야. 분노로 가득 차 있었겠구나 – 하는 확신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분노라. 어떤 불공정함, 혹은 압제나 강압, 혹은 我의 구속, 혹은 기망의 사유로 하여 어떤 이의 가슴 속부터 머리 끝까지 타올라 강렬하게 발하는 이 특유의 감정은 비단 이러한 뉴스를 보는 사람들만이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나조차도 일상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얼마 전에도 동생에게 수업을 해 주다가 그 특유의 태도 덕에 좀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은 경험이 있었기에, 더욱이 그러하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으니, 이들 분노는 압제에 대한 저항, 혹은 해결의 촉구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너무 많은 것들을 놓치게 한다는 점에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분노’ 그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기 보다는 나 또한 종종 이 감정 덕에 저질러버리는 ‘간과’가 문제인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무죄 추정의 원칙의 부정’이다.

얼마 전에 나는 신형철 평론가가 쓴 ‘필사적으로 무죄 추정의 원칙 고수하기’라는 부제를 가진 한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1학기를 끝마치고(였나?) 문학 수업 시간에 보았던 북유럽의 영화 ‘더 헌트’를 보고 난 뒤의 일이었다. ‘이성 또한 결과적으로 항상 옳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선언으로 정확히 나 스스로를 두둔한 이 칼럼에서 내가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라고 하면, ‘착한 사람은 없다. 다만, 모두가 복잡하게 나쁠 뿐이다.’ 라는 문장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 여기였군) ‘더 헌트’라는 영화를 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주인공 루카스는 친한 친구 테오의 하나뿐인 딸 클라라를 성폭행했다는 혐의로 마을 사람들에게 각종 핍박과 의심, 굴욕에 시달린다. 그는 증거의 불충분과 진술의 엇갈림으로 무죄 판결을 받지만, 그는 결코 주변 이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 그가 가장 아끼던 개가 살해당하고, 집 창문으로 돌이 날아들고, 장을 보러 간 마트에서는 출입을 거부당하고 구타까지 당한다.

하지만 이 루카스는 죄가 없었다. 클라라에 대한 성폭력의 혐의를 받았던 것은 사실 클라라가 자신의 오빠가 자신에게 보여준 ‘그것’의 사진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여린 고백을 부드럽게 거절한 루카스에 대한 잠깐의 꼬마스러운 앙심으로 거짓말을 너무 풍성하게 지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소녀의 거짓말에 대한 결과는 너무나도 처참했다. 루카스가 근무하던 어린이집 원장은 성폭력 상담사에게 전화를 걸고, 루카스의 출입을 금지하며, 학부모들에게 알린다. 뒤늦게 상황이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파악한 클라라는 수없이, 그리고 차분하게 루카스의 죄를 묻는 어른들에게 ‘아니’라고 말하지만,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즉, 루카스는 누명을 썼던 것이었다.

하지만 루카스의 누명보다도 더 억울하게 누군가를 만들 수도 있는 것, 혹은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클라라의 잠깐의 거짓말보다도 훨씬은 나쁘다고 감히 당당히 선언할 수 있는 문제는 우리가 ‘더 헌트’에서 루카스의 ‘무죄’ 여부의 진위를 알기 전의 나의 기술을 보고 흔히 하는 ‘유죄로의 단정’이다. 만약 나 자신이 ‘루카스’의 결백을 결코 알 수 없는 ‘더 헌트’를 보지 않은 한 사람들에게 ‘루카스의 결백’을 제외한, 앞선 기술들만을 보여준다면 그 사람들은 단언컨대 줄곧 루카스에게 이미 ‘유죄’의 선고를 내려버리고야 말 것임을 나는 분명히 안다. 이것은 예외가 있긴 하여도 극히 적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나의 위험한 추론이기는 하지만), 내 주변의 경험이 하여금 너무 많은 ‘유죄’의 단정의 순간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해보자. 앞서 내가 잠시 거쳐 지나온 뉴스들은 비단 나 뿐만이 본 것은 아닐 것이다. 보통 이들 뉴스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언론에서 보도한 내용’, 혹은 ‘SNS에 떠돌아다니는 내용’ 그들이 전부이다. 솔직히 말해서 정확한 수사가 있기 전까지는 그 유/무죄 여부를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우리 스스로를 생각해보건대, 그들에 대한 확실한 1심 재판의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그들에게 우리 스스로가 이미 죄를 언도하고 있지 않았던가.

이것이 내가 지금 지적하고자 하는 ‘분노’ 뒤에 숨은 ‘간과’이며, 내가 생각하건대 우리가 흔히 스스로가 ‘위선’을 행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이다. 그렇다. 우리는 확실하지도 않은,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는 정보로 타인에게 유/무죄를 선고하는 엉터리 판사에 불과할 뿐이었지, 정의와 옳고 그름을 분간할 줄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시민은 아니었다.

나의 친구들이 쓴 이 작품의 내용은 결과적으로 종합하여보면 어떤 한 악마에 잠식된 이들로 일상이 무너지고, 누군가가 살해당하고, 다시 그 영혼이 잠식당하는 이야기들이 크게 되풀이되고 있는 패턴을 가진다. 처음에는 제임스 백작 부인에서부터 그 다음은 고아로 자라 시장인 존 바이든(솔직히 이 시장의 이름이 미국의 모 정치가의 이름과 너무 흡사하여… 아니, 똑같아서 좀 노린 것은 아닌가 – 하는 사념이 들기도 했다) 가의 하녀인 수잔, 그리고 시장인 존 바이든, 마침내는 악마와 얽힌 토막 살인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까지, 악마는 작중에서 살인이라는 비극을 이어내는 연줄이자 직접적인 원인으로 등장한다.

소설에서는 다른 사람에 빙의하는 형태로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이 악마를 나는 위에서 기술한 기나긴 이야기로 하여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되풀이되는 비극, 그리고 수많은 진실의 왜곡을 자행하는 악마는 사실 등장인물들 사이에 전이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미 그 등장인물들 모두에, 즉 제임스 백작 부인, 그리고 하녀 수잔, 시장 존 바이든, 그리고 형사 그 속에 이미 잠재되어 있던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의 속에 자리 잡은 존재가 아닐까. 누군가에게 성급하게 ‘유죄’를 선고하고, 끝없이 오해하는 죄악을 되풀이하면서, 스스로 이것을 자각하지 못한채, 그리고 자신은 결코 결백하는 강박을 고집한채로.

어쩌면, 악마는 우리 스스로에 잠재된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