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2′. (번외) 루이스 캐럴의 거북과 아킬레스

탐서일지 #2′. (번외) 루이스 캐럴의 거북과 아킬레스

2021-01-18 0 By 커피사유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서론

2021-01-18. 月의 독서회에서 뜨겁게 논쟁된 부분이기도 하고, 스스로도 논의 중에 약간 헷갈리기도 했기 때문에 다시금 정리해두고자, 탐서일지 #2. 괴델, 에셔, 바흐 – 제2장과 제3장호기심을 향한 문(問)과 답(答)들에서 정리해둔 내용을 다시금 정리하여 번외로 올리고자 한다. 일단 현재까지 드는 생각은 나의 최초의 해석이 맞다는 것인데, 물론 완전히 내가 옳게 이해했다는 확신은 아직까지는 없다.

이 글은 다음의 두 인터넷 문헌을 참고하기는 하였지만, 주로 첫 번째 문헌을 거의 그대로 옮기고, 여기에 내 스스로의 해석을 단 주석서의 성격에 더욱 가깝다고 생각된다.

루이스 캐럴과 <영리한 악어>

우선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 사람은 우리가 잘 아는 – 어릴 때에는 그냥 뭔가 이상한 동화인 줄 알고 읽었다가 커서는 무언가가 이상하고 추상적인 어떤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작품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이름은 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작가 실제 이름이 아니다. 실제 작가의 이름은 찰스 도그슨(C. Dodgson)이라는 사람이며,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이라는 이름은 이 사람이 그가 문학 작품을 출간할 때 사용한 필명이다.

하지만 찰스 도그슨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작품을 쓰기는 했지만 본 직업이 동화책 작가는 아니다. 1832년부터 1898년까지 세상을 살아간 이 사람은 사실은 사진가를 겸업한 수학자이다. 그는 수학자답게, 당시 19세기를 뜨겁게 달군 논리학에 관한 수학적 논쟁에 뛰어들며 높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그가 집필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내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관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는 일례의 삼단 논법의 실 적용 사례 중 하나인 <영리한 악어>라는 논증이다.

영리한 악어

– 영리한 모든 동물은 사람이다. … (1)
– 모든 악어는 영리한 동물이다. … (2)
– (그러므로) 모든 악어는 사람이다. … (3)

이는 흔히 우리가 옛날 우스갯소리 삼단 논법 시리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흔한 구조이다. 무언가 결론을 제외한 두 전제의 진술들은(영리한 악어에서는 (1), (2)) 참으로 생각되지만, 이들이 함께 나열되어 연결 관계가 파악되고, 우리가 잘 아는 삼단 논법의 규칙으로써 최종적 결론(영리한 악어에서는 (3))을 도출하였을 때, 이 결론이 우리의 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으로부터 오는 인지부조화의 우스꽝스러움을 노리는 이러한 구조의 내가 알고 있는 대표적 예시로는 다음이 있다.

오래된 인지부조화 삼단논법 개그 I

–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이다. … (1)
– 보배는 금은방에 팔 수 있다. … (2)
– (그러므로) 어린이는 금은방에 팔 수 있다. … (3)

마찬가지로, 이 예시에서도 각각의 두 전제 문장은 그 자체로만 놓고 보면 합리적이지만(오래된 인지부조화 삼단논법 개그 I에서 (1), (2)), 이들이 동시에 나열되어 있을 때에 도출되는 결론(오래된 인지부조화 삼단논법 개그 I에서 (3))을 보는 순간, 우리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두 예제가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 것은, 이들의 도출 과정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직관적으로는 현실과 이 주장이 전혀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이 주장을 거부하고 싶지만, 논리적으로 보자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받아들여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이들 두 예제이다. 물론, 이상의 두 논의에서 사용된 각 문장(진술)에서의 동일해보이는 사용 범주가 다르다는 점 – 즉, 이를테면 영리한 악어의 경우는 전제 (1)에 대한 영리한 모든 동물과 전제 (2)에 대한 영리한 동물에서의 영리함이라는 의미에 대한 범주성, 영리함이라는 말이 가지는 범위를 혼동하여 사용하여서 맞지 않는다는 점 – 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나, 우리는 여기서 19세기의 논리학의 뜨거운 논쟁으로 뛰어들기 위하여 영리함 이라는 개념이 전제 (1), 전제 (2)에서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고 보자. 마찬가지로, 오래된 인지부조화 삼단논법 개그 I에서도 전제 (1)의 보배 와 전제 (2)의 보배 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하자.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 이상의 두 예제에 대하여 우리는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최종 결론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다. 두 예제의 논의는 결과적으로 내용적으로(절차적으로)는 타당하고 그럴 듯 하지만, 그것이 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경우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논의로부터, 내용적으로 타당하면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논증과 그렇지 않은 논증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들의 구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바바라(barbara)> 삼단 논법 형식과 <영리한 악어>

19세기의 논리학 논쟁 이전, 수학의 논리학은 이른바 형식주의(구조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이 세계에서는 어떤 일상의 예제에든 그들이 만든 어떠한 수학적인 틀에 끼워맞추어서, 이들의 합리적 여부를 검토, 혹은 판단하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수학자들로 가득했다. 그들이 사용하던 틀 중에 하나인 바바라(barbara)라는 삼단 논법 형식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영리한 악어오래된 인지부조화 삼단논법 개그 I의 분석에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형태라는 점에서 살펴볼 가치가 있다.

영리한 악어를 예시로 들어 바바라(barbara) 삼단 논법 형식을 살펴보도록 하자. 영리한 악어를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지만, 무언가 수학적으로 형식화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다. 이 시도를 시작하면, 우리는 영리한 악어를 결과적으로 악어, 영리한 동물, 사람 이라는 세 단어로 대표되는 어떠한 집합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의 단어에서 집합을 떠올린다는 발상이 다소 생소할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영리한 악어의 논의를 생각할 때, 이를테면 첫 번째 문장(전제 (1))을 볼 때, 우리는 모든 영리한 동물 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리한 동물의 집합 을 자연히 생각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사람 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집합 을 자연히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되돌아보자. 이 구조에서 등장하는 단어들은, 사실 하나의 개체를 뜻하기 보다는 이 개체들로 구성된 특정 집합을 지시하는 의미가 더 강하다. 이러한 개체에 대하여 연상되는 특정 집합을 그 개체의 외연이라고 논리학에서는 정의한다. 즉, 이를테면 악어 라는 대상의 외연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어들의 집합 이 되는 것이다.

영리한 악어를 수학적으로 형식화하려는 우리의 본래 시도로 돌아가서, 이제 이 악어, 사람, 영리한 동물에 상응하는 외연들을 각각 X, Y, Z로 대체한다고 생각하자. (이 세 단어를 단순히 문장적으로 X, Y, Z로 대체한다고 생각해도 별 상관은 없다) 이 경우, 우리는 다음의 형식을 얻을 수 있다.

– 모든 $Y$는 $Z$이다. … (1)
– 모든 $X$는 $Y$이다. … (2)
– (그러므로) 모든 $X$는 $Z$이다. … (3)

위와 같은 삼단 논법의 형식을 바바라(barbara) 삼단 논법 형식이라고 흔히 논리학에서 칭한다. 하지만, 바바라 형식을 조금 더 수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분석해보기로 하자.

사실 앞에서 $X$, $Y$, $Z$에 대하여, 굳이 집합에 해당하는 개념인 외연을 강조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바바라(barbara) 삼단 논법 형식이 수학에서 집합의 포함 관계로 기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Y$는 $Z$이다는 위 바바라(barbara) 삼단 논법 형식의 문장 (1)을 떠올려보자. 이러한 형태는 흔히 수학적 집합 개념을 사용하면, 집합 $Y$는 집합 $Z$의 부분집합이다는 말로도 표현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문장 (2)는 집합 $X$는 집합 $Y$의 부분집합이다로, 문장 (3)은 (그러므로) 집합 $X$는 집합 $Y$의 부분집합이다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상의 수학적 표현들을 순서대로 나열하여 본, 바바라(barbara) 삼단 논법 형식에 대하여 이제 완성된 수학적 최종 형식은 다음과 같다.

– 집합 $Y$는 집합 $Z$의 부분집합이다. … (1)
– 집합 $X$는 집합 $Y$의 부분집합이다. … (2)
– (그러므로) 집합 $X$는 집합 $Z$의 부분집합이다. … (3)

이러한 논리는 집합 $X$, $Y$, $Z$의 다음 그림과 같이 도식되는 포함 관계를 생각해보면 매우 합리적이다.

하지만, 앞에서 분명히 우리가 살펴 보았듯이, 이러한 분명히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바바라(barbara) 삼단 논법이라는 체계는 영리한 악어라는 실제 사례에 대한 적용에서는 분명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영리한 악어에서의 이상한 용어 범주에 대한 묵약을 계속 우리가 의식하고 인정하고 있다면) 이러한 한계를 우리에게 보여주기로 작정한 장본인인 찰스 도그슨은, 19세기의 구조주의 사고에 물든 논리학계를 향해 영리한 악어 외에도, 이 글의 소재이기도 한, 그 유명한 거북과 아킬레스의 역설을 완전히 인물만 빌리고 주제를 바꾸어 재구성하여 발표한다.

도식적 사고 방식과 비도식적 사고 방식

하지만 우리가 그의 거북과 아킬레스 이야기를 접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19세기의 논리학계 상황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하여 구조주의라는 용어를 19세기 논리학계 이전 수학자들, 그리고 수학계의 사고 방식을 기술하는데 사용하였지만, 사실 이 자리에 맞는 정확한 용어는 도식적 사고 방식이라는 용어이다.

도식적 사고 방식(schematic thinking)

도식적 사고 방식(schematic thinking)은 결과적으로 이해하자면, 형식적 체계를 보다 기본적인 층위 – 즉 하위 층위로 두고(하위, 상위 층위에 대한 헷갈릴 여지를 방지하기 위하여, 여기서 이야기하는 하위 층위라는 것은 보다 기초가 되는 층위, 상위 층위는 기초가 되는 층위로부터 형성 및 구축되는 층위라고 약속해두자), 이것으로부터 일상적인 사례, 혹은 요소들을 상위 층위로 두는 사고 방식이라고 이해될 수 있을 듯 하다.

일상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떤 진술의 참과 거짓을 판별하는 규칙으로 이용하는 규칙 중 하나인 위의 바바라(barbara) 삼단 논법 체계는 자연히 습득되었고, 이를 통하여 어떤 일상적 진술의 참과 거짓을 판별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거부감이나 거북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이는 상당히 우리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며, 합리적인 일로 느껴진다. 특히, 우리가 합리성이라는 용어를 결론에 대한 적절한 근거 찾기, 근거를 가지고 적합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성향들 을 통칭하는 은유라고 한다면, 바바라(barbara) 삼단 논법 체계라는 형식적 합리성은 분명 영리한 악어라는 비교적 일상적 차원의 합리성의 하위 층위에 있다고 판단된다. 즉, 형식적 층위로부터 일상적 차원의 합리성이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을 내가 참고한 첫 번째 글에서는 ‘규범적 기준’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 형식적 층위로부터 일상적 차원의 합리성이 비롯된다고 보는 사고 방식이 바로 다름 아닌 도식적 사고 방식이다.

하지만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 영리한 악어에 대한 우리의 논의의 결론에서 도달한 인지부조화에 의하여, 이러한 도식적 사고 방식에 대한 적절성은 다시금 숙고되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게다가, 만약 도식적 사고 방식이 근본적인 우리의 사고 방식이라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모든 일상적 진술들을 이미 적절하거나 합리적이라고 전제되어 있는 체계 내에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게 하려면 당연히 이러한 형식은 이미 마음과 같은 가장 우리와 가까운 곳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러한 ‘형식’을 발견하는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역사적 사실도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느낌을 유발한 장본인인 찰스 도그슨은 우리가 흔히 연역적 사고 과정 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이러한 방식, 혹은 체계에 의하여 일상적 사례를 분석하는 이 사고 과정이 실제 논증 분석에 도움을 주는 것은 맞지만, 이것이 그렇다고 만물을 해결하는 만능 열쇠가 아니라는 점을 인지한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문제에서 기원하여 도식적 사고 방식에 반하는 다른 사고 방식을 지칭하는 용어인, 비도식적 사고 방식을 옹호하는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비도식적 사고 방식(non-schematic thinking)

비도식적 사고 방식(non-schematic thinking)은 도식적 사고 방식과 달리 형식적 체계와 일상적 진술의 층위가 반대로 되어 있다. 즉, 이 사고 방식에서는 형식적 체계로부터 일상적 진술이 판단된다고 주장하지 않고, 일상적 진술로부터 형식적 체계가 판단된다고 주장한다. 마치 이것은, 흔히 과학고등학교 학생들이 (아마도) 즐겨보는 줌달의 일반 화학 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의 모형 세우기 와 같은 것으로, 실질적인 현상이나 물질에서부터 추상적인 형식을 얻는 사고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비도식적 사고 방식영리한 악어의 역설에 대하여 이렇게 답변한다: 바바라(barbara) 삼단 논법 체계로부터 영리한 악어의 합리성이 판단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바바라(barbara) 삼단 논법 체계를 지지할 수 있는 일상적 진술 사례들 –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일상적 진술:

소크라테스의 죽음

– 모든 사람은 죽는다. … (1)
–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 (2)
–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 (3)

의 경우는 사람, 소크라테스, 죽는 존재 라는 세 용어와 이 용어에 상응하는 외연을 상정할 때, 결과적으로 바바라(barbara) 삼단 논법 체계에 부합하는 일상적 진술로, 다음과 같이 바꾸어 서술할 수 있다는 점:

소크라테스의 죽음

– ‘사람’의 집합은 ‘죽는 존재’의 집합의 부분집합이다. … (1)
– ‘소크라테스’는 ‘사람’의 집합의 부분집합이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집합 ‘사람’의 원소이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긴 하겠지만) … (2)
–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 존재’의 집합의 부분집합이다. … (3)

로부터 바바라(barbara) 삼단 논법 체계의 합리성이 지지되지, 그 바바라(barbara) 삼단 논법 체계를 적용할 수 있는 일상적 진술 사례 바깥의 진술에 해당하는 영리한 악어에 이 체계를 적용하여 그 합리성을 판단하려는 시도 자체가 명백한 오류이다.

다시 정리해두자. 비도식적 사고 방식은, 바바라(barbara)라고 불리는 형식적 체계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비슷한 일상적 진술들의 동형성으로부터 얻어진 어떤 하나의 모델, 혹은 체계라고 주장하는 사고 방식이며, 바바라(barbara)라는 형식 체계로부터 이들 일상적 진술의 합리성이 도출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현실적 요소가 추상화 과정 – 이를테면, 개념을 모임이나 집합으로 대체시키는 것(영리한 악어에서, ‘악어’가 ‘현실 세계의 악어들의 집합이라는 수학적 개념 ‘집합’으로 대체되는 과정), 내용 구성에 내재한 인과 관계나 시제, 가능성, 필연성, 당위성 등의 양상을 제거시키거나 연산자들로 대체시키는 것(영리한 악어에서, 우리가 일련의 나열된 각 문장들에서 집합들의 포함 관계라는 관계를 얻어낸 것), 내용적 연결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접속사들을 논리적 연결사들로 대체시키는 것(이를테면, 언어에서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를 그러므로를 상징하는 수학적 기호 $\therefore$로 대체하는 것) 등 – 을 통하여, 형식적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비도식적 사고 방식에서 형식적 합리성 – 이를테면 영리한 악어라는 일상적 진술이 바바라(barbara)라는 형식에 들어맞는다 – 는 발견은 일상적 합리성 – 즉, 영리한 악어는 일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 를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진술, 혹은 논의가 형식적으로 옳다고 해서, 그 논의가, 그 진술이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도식적 사고 방식비도식적 사고 방식은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형식적 합리성은, 일상적 합리성으로부터 추상화 과정의 특정 조건들을 경유하여 생성되는 것이지,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리한 악어와 바바라(barbara) 형식의 비교를 통한 비도식적 사고 방식의 옹호 한계성

여기까지 살펴본다면, 굳이 찰스 도그슨이 비도식적 사고 방식을 옹호하기 위해서 또 다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거북과 아킬레스 역설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가 영리한 악어 만으로 비도식적 사고 방식을 분명히 옹호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분명하다는 점에서, 그는 거북과 아킬레스 역설을 만들어낼 필요가 분명히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비도식적 사고 방식을 받아들이면, 그 어떤 논증 및 추론 형식 – 측 형식적 체계도 그 형식을 만족하지만 타장하지 않은 논증 – 이를테면 바바라(barbara) 삼단 논법 체계에 대해서는 영리한 악어와 같은, 형식을 만드는데 기여하지 않은, 전혀 다른 동형성을 가지는 사례들이 발견되기 마련인데, 영리한 악어바바라(barbara) 형식 사이의 들어맞지 않음이라는 사례 하나로 비도식적 사고 방식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기에는 바바라(barbara) 삼단 논법 체계가 너무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즉, 간단히 말해두자면 바바라(barbara)라는 형식과 영리한 악어라는 일상적 사례의 모순성은 비도식적 사고 방식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누군가를 설득하기에는 너무 제한적이고 빈약한 사례라는 것이다.

바바라(barbara) 삼단 논법 체계(형식)의 틀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이 형식은 세 개의 개념과 그에 상응하는 외연을 요구하고 있으며(영리한 악어에 대응하여 설명하자면, 사람, 영리한 동물, 악어 와 이에 상응하는 현실에 있는 개체들로 구성된 각 집합들), 더욱이 그 중 하나는 두 전제 사이를 이어 주기 위해서 두 전제에 공통적으로 등장해야 하는 구조를 가진다(영리한 악어에 대응하여 설명하자면, 모든 영리한 동물은 사람이다모든 악어는 영리한 동물이다 는 두 전제에서 영리한 동물 이라는 용어와 이의 외연은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이것이 바바라(barbara) 형식이 가지는 제한이기 때문에, 이러한 너무 특이한 형식만으로는 다른 이들로 하여금 비도식적 사고 방식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면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인식한 우리의 찰스 도그슨은 결국 마침내 보게 될, 아킬레스와 거북 역설의 완전 새로운 이야기로 19세기 논리학자들에게 직격탄을 날려버리게 된 것이다. 이 역설에서는, 전건 긍정이라는 좀 더 일반적인 형식 중 하나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점에서 그의 아킬레스와 거북비도식적 사고 방식의 옹호에 대하여 좀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찰스 도그슨의 ‘아킬레스와 거북’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서론이 많이(그리고 아주 심각하게) 길기는 했지만, 마침내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찰스 도킨슨의 아킬레스와 거북 이야기는 원문을 그대로 수록하면 참 좋겠지만, 그것은 너무 길기 때문에 대략적으로 줄거리를 요약하도록 하겠다.

찰스 도킨슨의 아킬레스와 거북

아킬레스는 거북이에게 다음의 세 진술을 보여주었다.

(A) 길이, 면적, 무게 등에서 똑같은 것으로 동일한 대상들은 서로 동일하다.
또는, 다른 표현으로 ‘어떤 하나에 대해서 같은 것들은 그들끼리 서로 같다’
(B) 이 삼각형의 양변은 길이에서 똑같은 것으로, 동일한 두 대상들이다.
또는, 다른 표현으로 ‘이 삼각형의 두 변은 나머지 변에 대하여 같다’
(Z) 이 삼각형의 양변은 서로 동일하다.
또는, 다른 표현으로 ‘이 삼각형의 두 변은 서로 같다’

아킬레스는 거북에게 Z를 주장하며, 그 이유는 A이고 B이므로, Z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거북은 AB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Z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그러한 거북을 아킬레스는 이해하기 힘들어한다. 그는 AB를 받아들이면, 내용적으로 자연히 Z를 부정하기는 힘들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거북은 그런 아킬레스에게 다음 명제를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C1) AB가 참이면, Z도 참이어야 한다.

거북은 결과적으로 아킬레스가 Z를 주장한 사고 과정은 C1이라는 명제에 대하여 참이라고 가정하고 있다는 것이 생략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거북은 AB에서 Z를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과정도 하나의 명제로써, 참과 거짓을 명확히 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킬레스와의 대화를 통해, 거북은 C1을 참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AB에서 Z를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아킬레스는 거북에게 다음의 진술을 보여준다.

(C2) A, B, C1이 참이면, Z도 참이어야 한다. 즉, AB가 참이고, AB가 참일 때 Z도 참이라면, Z는 참이다.

거북은 C2의 진술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Z를 받아들이기 거부한다. 그러자, 아킬레스는 거북에게 다음의 또 다른 진술을 보여준다.

(C3) A, B, C1, C2가 참이면, Z도 참이어야 한다.

거북은 C3의 진술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Z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둘의 실랑이는 계속된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도, 거북은 여전히 어떤 자연수 $n$에 대하여, Cn의 진술은 인정하지만, Z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상의 이야기는 19세기의 도식적 사고 과정의 광팬들 – 당대의 수학자들과 논리학자들을 제대로 열받게 하려고 작정한 찰스 도그슨의 의도가 잘 느껴진다. 위 이야기에서는, 아킬레스가 아무리 거북에게 Z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기 위해 추가적인 논의 과정인 C1, C2, C3, …를 도입하여도, 같은 형태의 Cn이라는 참과 거짓을 판별해야 하는 진술이 무한히 계속 생성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유한한 단계 내에 A와 B에서 Z가 이끌어짐을 보이지 못하므로(이를 다른 표현으로 AB에서 Z를 논리적으로 추론한다고 한다) 결코 Z에 대한 증명이 종료되지 않는다. 아킬레스와 거북이 빠지는 ‘이렇게 끝없이 상승하는 무한의 나선’은 Z의 진위를 결정할 수 없는 결정절차 가 없도록 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당시의 사고 방식을 제대로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거북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 당대 수학계 전체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킨 것은 예견된 일이었고,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아니었다. 19세기의 논리학자들은 이 문제로 많은 논쟁을 했고, 이들로부터 주요한 교훈 하나를 마침내 얻는 것에 성공했다. 이 주요한 교훈 하나를 괴델과 다른 몇몇의 수학자가 그들의 논문 중 하나에서 잘 정리된 문장으로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거북은 <추론 규칙의 외적 적용성>을 무시하고 <추론 규칙>과 <논의 내 진술>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그들의 대답을 이해하기 위하여, 추론 규칙추론 규칙의 외적 적용성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하지만, 그 전에 우선 이 찰스 도그슨의 거북과 아킬레스라는 역설을 반박하는데 필요한 논리 중 하나인 전건 긍정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전건 긍정(MP, modus ponens)과 거북의 사고 과정

전건 긍정(MP, modus ponens) 형식은 다음과 같은 형식적 체계, 혹은 명제, 논리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전건 긍정(MP, modus ponens)

$p$, $q$가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진술들이라면, 다음의 사고 과정은 항상 합리적이다. (다음이 성립한다)

1. $p$
2. $p$이면, $q$
3. $q$

전건 긍정 형식이라는 용어는 앞으로 많이 반복될 이 용어를 생각해보면 조금 긴 것이 사실이므로, 편의상 이 글 내에서 앞으로 이 용어는 약어 MP를 사용하여 기술하기로 정하자.

근데, 잠깐. 이 MP를 우리는 조금 전에 마치 본 듯한 느낌이 든다. 아까 거북의 논리에서 반복되는 구조가 그러고 보니 정확히 이 구조와 들어 맞는다. 가만히 아까의 거북의 사고 과정을 다시금 되돌아보자.

거북의 사고 과정

(1) A
(2) B
(3) A 그리고 B
(4) C1, 즉 A 그리고 B이면, Z
(5) C2, 즉 A 그리고 B 그리고 C1이면, Z
(6) C3, 즉 A 그리고 B 그리고 C1 그리고 C2이면, Z
(무한 반복)

$\therefore$ Z를 받아들일 수 없음.

거북의 사고 방식에서 특히 C1, C2, C3, … 의 형태로 계속 반복하여 나타나는 진술을 다시 확인해보자. 이들 진술은 정확히 MP 형식에 들어 맞는다. (4)C1을 예시로 우선 들면, C1이라는 진술은 MP 형식에서 p 자리에 A 그리고 B가, q 자리에 Z가 들어간 것 뿐이고, (5)C2를 다른 예시로 들면, C2라는 진술은 MP 형식에서 p 자리에 A 그리고 B 그리고 C1이, q 자리에 Z가 들어간 것 뿐이다. 즉, 거북의 사고 과정에서 반복하여 나타나는 모든 진술들은 MP 형식에 부합한다.

19세기 수학자들의 논쟁은 바로 이 점을 파악하게 되고, 이 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한 가지 장치를 수립하는 데에 이르러 종결된다. 그 장치의 이름이 바로 추론 규칙의 외적 적용성이다.

추론 규칙과 ‘추론 규칙의 외적 적용성’

19세기 수학자들은 반복되는 어떤 논리를 낳는 위협을 만들어내는 요소들 – 마치 어떤 완벽한 수학적 체계가 있어도 그 체계를 완벽하지 않은 것으로 무조건 만들어 버리는 괴델 문장 G와 같은 이들 눈엣가시와 같은 요소를 결국 일종의 논의 바깥의 영역으로 끄집어내기로 결정했다. 위에서 다룬 아킬레스와 거북에서는, 거북의 사고 과정에서 계속 반복되는 MP 형식이 바로 그것이다. 수학자들은, 거북의 쓴 맛을 더 이상 느끼기 싫어서, 이 MP 형식을 아킬레스 – 거북의 논의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것은 결국 19세기 수학자들이 비도식적 사고 방식을 받아들였다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들이 맹신해오던 도식적 사고 방식이 이 반론으로 인하여 실질적 유용성과 효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비록 모든 엄밀함을 보이지는 않더라도 합의된 규칙 내에서 조작하면 괜찮은 논리이자 증명이라고 정하기로 했는데, 이 때 이 ‘합의된 규칙’이 바로 추론 규칙이다.

어떤 논의, 추론에서의 추론 규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하나의 진술에서 다음 진술로 도약할 때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괴델, 에셔, 바흐에서 저자 호프스태터의 말을 빌리자면, 활자형 체계에서의 기호-조작의 규칙이 바로 추론 규칙이다. 추론 규칙은 마치 장기에서의 각 말을 움직이는 규칙과 같다. 장기에서, 왕은 항상 이유를 불문하고 정해진 영역 내에서 선을 따라 1칸씩 움직여야만 한다. 추론 규칙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가 장기에서 왕이 왜 굳이 정해진 영역 내에서 선을 따라 1칸씩만 움직여야 하냐, 이것은 불합리하다 – 라고 주장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듯이, 추론 규칙은 수학적 추론, 혹은 논의에서 기본적으로 약속되는 기호, 주장의 조작 규칙인 것이다.

이러한 추론 규칙은 결코 논의 안에서 그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논의 안에서 적용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논의 밖에서, 사전에 논의에서 합의된 논리 전개의 규칙으로써 작용한다. 이러한 추론 규칙의 논의에 대한 적용 특성을 추론 규칙의 외적 적용성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19세기 수학자들이 거북의 농락에 대하여 도출한 답이다.

오늘날, ‘아킬레스의 반론’

따라서 오늘날, 19세기의 수학자와 논리학자들의 논쟁으로 탄생한 추론 규칙의 외적 적용성이라는 개념을 이용해 완성될 수 있는 아킬레스의 반론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아킬레스의 반론

… 거북 자네는 결과적으로 <도식적 사고 방식>의 틀에 묶여 헤어나오고 있지 못하는 것에 불과한 것일세. 자네는 그저 매 단계에서 발생하는 C1, C2, C3, … 의 진술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네가 그저 각 단계를 형식적으로만 사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 그 이상이 될 수 없네. 자네가 계속 반복해서 고집하는 C1, C2, … 의 진술들의 반복되는 형태는 사실 MP 형식이라는 또 다른 형식의 변형된 형태들일세. 이들은 죄다 사촌이지만 그 어머니는 같다는 거야. 자, 여기 보게. 자네가 C1이라고 나타낸 진술은, 이 MP 형식의 p 자리에 ‘A 그리고 B’, 그리고 q 자리에 ‘Z’를 집어 넣은 것이고, C2라고 나타낸 진술은, 이 MP 형식의 p 자리에 ‘A 그리고 B 그리고 C1’, 그리고 q 자리에 ‘Z’를 집어 넣은 것이고……. 자, 자네도 인정하지? 똑같은 MP 형식이라는 것? 자네는 이 MP 형식에 해당하는 이 모두를 마치 Z를 이끌어내는 데 필요한 근거, 혹은 전제로 취급했어. 그 바람에, 자네의 논리에서는 역시 MP 형식인 C3, C4, C5, … 의 진술들이 계속 발생한 것이고. 하지만 알아 두도록 하게. MP는 우리의 논의, 추론 내의 근거, 혹은 전제가 아닐세. MP 형식은 그 과정의 근거, 혹은 전제들, 즉 우리의 진술들에 작용하되, 그 진술로 취급되지는 않는, 우리 논의 밖의 ‘외적으로 작용하는 추론 규칙’인 것일세. 이것은 체스판을 움직이는 규칙과 같은 것이라서, 우리가 논의하는 과정에서 함부로 체스판 안으로 끌고 들어와 말로 취급해서는 안되는 것일세. 체스의 말과 체스의 규칙은 엄연히 다른 것이지 않나. 자, 이제 인정하게. MP라는 이 형식은 애초부터, 우리가 논의 이전에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서 마련한 규칙이자, 논의 바깥의 약속인 ‘추론 규칙’이고, 내 논리는 맞다고 말이야.

혹여 문학적 표현에 익숙치 않을 이들을 위하여 좀 더 비문학적 표현으로 정리해두자. 거북의 사고 방식은 MP라는 형식을 논의 바깥에 약속된 추론 규칙이며, 이것이 논의 바깥에서 논의에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인 추론 규칙의 외적 적용성을 단지 그 도식적 사고 방식에서 맹신하기 쉬운 기호적 도식에 이끌려, 그 유용하지 않음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이 추론 규칙논의 내 진술로 끌어들이는데서 비롯된 오류이다. 우리가 MP 형식과 같은 일부 형식 체계 – 우리가 일상적 참인 진술로부터 추상화한 어떤 형식 일련들을 추론 규칙으로 지정하고, 이것을 논의 바깥에서 적용하되, 이것을 하나의 논의 내 진술로 보지 않는 추론 규칙의 외적 적용성을 받아들인다면, 거북의 사고 방식은 근거, 혹은 전제(논의 내 진술)과 추론 규칙(논의 외 조작 규칙, 약속)을 혼돈한 것 뿐이다. 애초에, 우리가 ‘증명’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 합리성을 도출해내기 위하여 구축하는 일련의 사고 단계이지, 전적으로 형식상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금 떠올려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