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파록 #3. 니체와 오사무의 ‘합’

논파록 #3. 니체와 오사무의 ‘합’

2023-03-05 0 By 커피사유

논파록(論破錄)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지적 동반자들과 함께 어떤 주제에 대하여 토론 혹은 토의하면서 완성시켜가는 생각들을 기록해두는 공간입니다.

이번 논파록은 카카오톡을 통하여 필자의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과 야마다 무네키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그리고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대하여 나눈 이야기를 보존을 목적으로 정리하여 옮긴 것입니다.

메신저 앱을 통한 채팅의 특성상, 시간차에 의해 이야기의 엇갈림이 몇 번 발생하였으며, 또한 몇 가지 문법이나 어순에 맞지 않은 표현들이 있었으므로, 이 부분들은 순서에 맞게 교정하였음을 서두에 밝힙니다.



야마다 무네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마츠코’와, 니체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

필자: 선생님, 여쭈고 싶은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선생님: 무슨 일이지?

필자: 문학 작품 (또는 철학) 이야기가 될 듯 합니다.

선생님: 말해 보렴.

필자: 첫 번째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 관련된 질문입니다. 혹시 선생님께서는 원작 소설을 보신 적이 있으세요?

선생님: 아니. 그냥 영화만 봤음. 그 작품이 드라마도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그 영화 봤다고 너한테 말했나?

필자: 예. 예전에 독서 모임 전 대화에서 한 번 소개하시지 않으셨나요?

선생님: 그랬군. 내가 그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남.

필자: 저는 선생님과 정확히 반대 상태가 얼마 전에 되었거든요.

선생님: 내 ‘상태’가 뭐지?

필자: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영화로는 봤지만 소설로는 보지 않은 상태”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아, 넌 영화 말고 소설을 봤구나?

필자: 예. 선생님께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말씀하신 날에 바로 샀습니다.

선생님: 아. 책이 있는지도 몰랐네. 드라마가 있다는 말은 들었으니, 책도 있었겠지. 재미났을 것 같다.

필자: 사실 거의 다 읽지 않다가 개강 전날과 전전날에 단숨에 다 읽어버렸습니다.

선생님: 영화랑 많이 다른가? 소설이 어땠는지 궁금. 혹시 소설에서는 설마 〈뮤지컬〉 느낌은 안 났겠지?

필자: 뮤지컬보다는 그리스 비극에 가까운 느낌이랄까요. 소설이 영화랑 많이 다른지는 모르겠습니다만(영화를 보지 않았으므로), 적어도 제가 읽은 소설 중에서 다음 장으로 넘기기 싫은 때가 그렇게 많았던 소설은 처음이었습니다.

선생님: 다음 장에서 전보다 더 나빠지는, 더 불행해지는 주인공의 모습?

필자: 불길한 전주 같은게 들리면 다음 소절을 듣기 싫어지는 그런 거죠. 우울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음악에서 상승이 매번 두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냥 시중에 돌아다니는 시덥잖은 3류 소설이지는 않을까 걱정을 좀 많이 했습니다.

선생님: 그런데도 단숨에 다 읽다니! 영화는 경쾌해. 그런 면에서 나는 영화가 더 좋네.

필자: 소설이 그리스 비극 느낌이었으니 영화는 경쾌해야 하겠죠. 그리스 비극이 경쾌하니까요……. 영화를 언젠가 꼭 보고 비교해보고 싶습니다.

선생님: 꼭 그래라. 기대되는군. 다만, 그리스 비극이 경쾌하다고? 대체로 장중하거나 장엄한 느낌 아닌가? 진지하고.

필자: ‘니체’적인 관점에서 말이죠.

선생님: 비극을 경쾌하게 대하는 그 영화가 더욱 니체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필자: 예. 결국 삶에 대한 긍정이니까 말입니다. 음, 계속 소설을 읽으면서 저는 이상하게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가 계속 떠오르더라고요.

선생님: 어떤 점에서?

필자: 주인공 ‘마츠코’가 혹시 니체와 오사무의 변증법적 합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요. 조금 더 확장해서, (검증해야 하긴 하지만) 모든 인간이 또한 그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요.

선생님: 니체는 〈긍정〉, 오사무는 〈부정〉인 게지?

필자: 삶의 고난 (또는 절망) 앞에서의 두 태도인 셈이죠. 니체는 〈하강 이후의 상승〉이라면 오사무는 〈상승 이후의 하강〉이라고나 할까요.

선생님: 모든 인간이 기꺼이 그럴 수 있다면 성인의 경지일 테고,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그럴 것이니 결국 모든 인간의 성인에 가까워진다? 쯤으로 정리가 가능할 듯.

필자: 〈성인〉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인간다운〉 가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오사무가 잘 나갈 때 죽음을 생각했나? 〈상승 이후의 하강〉이라고 해서….

필자: 아뇨, 삶은 상승과 하강의 반복이니까요. 상승은 긍정적인 경험을 대표할 수도 있지만, 상승할 때마다 그 밑에 있는 것들이 더욱 잘 보이게 된다는 점도 있죠. 가장 잘 보이는 〈정상〉에 도달하고 나면 항상 내려가야 한다는 점이 문제지만 말입니다…….

선생님: 〈인간다운〉이라는 말에는 ‘인간은 이러하다’라는 말이 전제되어 있는데, 〈인간은 비극 앞에서 살아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이겠지. 맞아. 그런 면에서 〈인간다운〉 가설이야.

필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오사무에 대해 조금 더 보충하자면, 그는 유년기에 ‘잘 나갔’습니다. 학업 성적도 거의 1등이었죠. 문학에 빠지면서 말년에 가족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좀 긍긍했다는 평가도 있긴 합니다만, 그건 말년의 ‘하강’이겠지요. 어… 정신적으로는 ‘상승’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지금 막 들긴 합니다만.

마츠코, 그리고 죽음 앞에서의 인간

선생님: 상승과 하강의 반복, 성공과 실패, 웃음과 울음의 반복. 자꾸 반복하다 보면 그 둘이 실은 비슷한 거란 생각도 들고. 그래서 반복을 많이 하게 된 나이가 되면, 좀 심드렁해지나봐. 좋다고 우쭐해지지도, 나쁘다고 의기소침해지지도 않아져.

필자: 저도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선생님: 일종의 〈평정심〉 같은 게 생기는 거지. 저절로 그렇게 돼. 어떤 능력의 획득이라기보다, 그저 시간의 변화인 셈.

필자: 마츠코의 경우에는 일종의 평정심이 생겼다고 볼 수 있을까요?

선생님: 그런 것 같아. 그런데 그게 더 가슴이 아프지. 얼마나 〈비극에 치였으면〉 저렇게 될까 싶어서…… 존경스럽기도 할테지만…… 안쓰러운게 더 커.

필자: 작중 그녀의 삶이야말로 상승과 하강의 극적인 반복인데, 그녀는 오히려 그 반복에 적극적으로 흔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선생님: 맞아. 요새 나도 그런 생각을 하는 중. 그러니까 쇼펜하우어가 삶은 〈알멩이가 아니라 변화무쌍한 껍데기, 허상〉이라고 했는데……

자: 그게 사실 제 두 번째 질문으로 연결되는 거긴 합니다만… 지금 동시에 논의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그래서 흔들림 없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껍데기인 줄 알면서도 속아넘어가 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

필자: 〈삶〉이 〈껍데기〉라고 보는 시각을 저는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선생님: 그러니까 소위 〈평정심〉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가여워보이고, 삶의 상승과 하강에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 휘둘리고 넘어지고 아파하고 기뻐하는 게 제대로 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표현을 달리하면, ‘삶은 허무하다, 그렇지만 허무한 줄 알면서도 상승과 하강의 파도에 몸을 맡겨야 한다’ 정도가 되겠군.

필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정심〉이란 일종의 〈무화〉 또는 〈체득〉에 가까운 건지요, 아니면 정확히 그 반대의 가까운 건지요?

선생님: 〈평정심〉이란 아픈 일에도 아파하지 않고, 기쁜 일에도 기뻐하지 않고, 그것이 모두 쓸모없는 허상임을 아는 자의 마음 상태. 그런 〈평정심〉을 득도한 거라 하여 성도 내지 않고, 눈물도 흘리지 않지.

필자: 〈불교〉적인 〈평정심〉이란 말씀이신 거죠?

선생님: 맞아. 그런데 그런 평정심이 시간의 변화만으로 얻어지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

필자: 그러한 〈평정심〉은 삶과 일종의 〈거리두기〉 아닌지요?

선생님: 맞아, 거리두기.

필자: 그렇다면 〈평정심〉은 삶을 사는 것에 가까운 게 아니라 삶을 거부하려는 태도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서 말입니다…….

선생님: 그래서 요샌 그런 평정심보다는 기꺼이 삶의 파도에 흔들리는 게 맞다 싶은 거지. 그렇게 산 사람이 마츠코.

필자: 그렇다면 아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마츠코’가 평정심을 가진 인물이다는 부분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것과 이율배반적으로 들립니다.

선생님: 마지막에 마츠코가 거의 두문불출하는 상태, 그게 일종의 〈평정심〉인데…… 그게 안쓰러워 보인다는 말이었고. 마츠코의 상승과 하강은 기꺼이 삶을 즐긴 데서 비롯한 것. 기꺼이 삶의 파도에 몸을 내맡겨서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아파하고 하는 모습들, 즉 비극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그 삶의 모습들은. 마츠코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다 〈껍데기〉임을 아는 자의 〈용기〉 같달까?

필자: 아, 그렇다면 〈평정심〉이 맞군요. 다만 ‘말세적’인 방식으로 표출된 〈평정심〉인게 문제였지만 말입니다……. 마츠코는 죽음에 대해서는 작중에 딱 한 번 ‘자살’하려고 한 적이 있었죠. 그러나 적어도 제가 읽은 소설에서는 마츠코가 죽음을 매번 생각하는 ‘오사무’적인 인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신기하죠, 소설 안에서는 다자이 오사무를 따라서 마츠코가 죽으려고 하거든요.

선생님: 하강(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음, 혹은 두려움조차 맞닥뜨리는 그 모습.

필자: 그게 정확히 ‘제가’ 원하는 것이고, 그게 제가 마츠코를 흥미롭게 여기는 이유 중 하나를 구성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와 소설의 비교 · 대조, 그리고 마츠코

선생님: 영화에서 죽으려하는 건 마지막에 강을 바라보며 친구가 건넨 명함을 들고서…….

필자: 앗, 그렇나요? 대학생들에게 맞아 죽는 게 아니고요?

선생님: 그때 친구와 자신이 비교되어서 그 명함을 구겨버리고 죽으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되돌아가서 명함을 찾아 주워들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야구하던 중고딩한테 맞아 죽지. 〈일찍 집에 들어가라〉고 충고했다가.

필자: 학생들에게요?

선생님: 어, 중고딩처럼… 중학생처럼 보였어.

필자: 조금 원작과 다른 부분들이 있군요.

선생님: 그나저나 명함… 성공한 친구가 마츠코를 불쌍히 생각해서 찾아오라고 준 명함이었거든.

필자: 맞습니다. 둘 다 교도소 동기였죠. 친구의 성공은 물론 에로 기획사로서의 성공이었습니다만…….

선생님: 그랬던 것 같아. 맞아.

필자: 그 학생들 말인데요, 원작은 17세에서 21세 사이의 남녀 5인(남성 대학생 3인, 여성 아르바이트생 2인)이라고 하더군요.

선생님: 꽤나 상세하네. 영화에선 모두 남자 아이들이었음.

필자: 때려 죽인 것은 남대학생 3인이긴 했습니다. 재판도 그들 3인이 받았고요.

선생님: 소설이 훨씬 구체적이다.

필자: 때려죽인 이유가 뭐였는지에 대해서는 ‘역겨워서’, 조금 더 정확히는 ‘내가 쓰는 비누와 같은 냄새가 나는 비누를 써서’ 였고요.

선생님: 역겨워서가 맞고, 뚱뚱하고 노숙자처럼 보였던 거지.

필자: 마지막 재판 장면 때에 쇼가 격분하는 장면까지 영화에 그대로 나오나요?

선생님: 아… 재판도 영화 끝에 있었나? 그랬던 듯. 쇼가 그 조카, 서술자이자 관찰자, 맞지? 나왔던 것 같아.

필자: 예. 원래는 고모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가, 우연히 고모 사후 뒷정리를 맡은 그 조카요.

선생님: 그렇지만 짧게. 맞아, 맞아.

필자: 굉장히 아쉽네요. 소설은 마츠코의 분량이 더 많기는 합니다만, 쇼의 탐문으로 완성되는 구조입니다.

선생님: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 영화에선 짤막한 재판 장면 바로 뒤인지, 앞인지에서 쇼의 애인이 어디 해외여행 간다는 장면이 있음. 처음엔 여자친구와 지루해하다가 헤어지고…….

필자: 그건 원작과 다르군요. 원작은 쇼의 여자친구는 자신이 개인 사정으로 포기했던 ‘의대 진학’ 때문에 쇼와 헤어졌습니다. 어, 그리고 여자친구에 대해서는, 쇼는 맨 처음에 여자친구와 아파트에서 〈유희〉하는 것으로 등장하더라고요.

선생님: 맞아, 그 장면이 맨 처음인데, 〈유희〉로 나오진 않고 시시껄렁한 말들을 주고받아. 전하려던 내용은 쇼와 그 여자친구가 둘 다 생을 지루해하던 청년들이었는데, 쇼는 고모의 죽음 탐문, 여자친구는 의대 진학과 해외 봉사활동으로 각자 자신의 삶을 시작하게 되는 이야기.

필자: 둘 다 생을 지루해하던 청년이었는지는 소설을 읽고서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말씀드렸던 〈유희〉는 조금 더 성인적 의미에서의 〈유희〉입니다.

선생님: 그런 것 같아서 한 말이야. 영화엔 없거든.

필자: 나이 제한이 있었나 보네요.

선생님: 맞네……. 이건 12세인가, 15세인가 그랬어. 아, 15세.

필자: 그렇다고 하기엔 소설에 성적인 이야기가 좀 많이 나오긴 합니다만…….

선생님: 그런데 워낙 마츠코의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그런 성적인 장면들은 모두 약간은 코믹하고, 원색이 난무하는 장면이라던가 춤과 노래로 대체됨.

필자: 그렇죠. 교사에서 사창가, 미용실 조수, (죄수?), 미용사, 그리고 마지막의 그 모습에 이르기까지요. 그리고 그러한 ‘대체’는 필히 심의를 어떻게든 준수하려는 노력이겠지요.

선생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청중의 폭을 넓히겠다는 의도라기보다는 그냥 마츠코의 그런 직업들도 수많은 직업들 중 하나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

필자: 예, 마츠코도 〈인간〉이었으니까요.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영화적 표현법이 〈니체〉스러웠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군요.

선생님: 매우 동감. 마츠코의 그런 삶도 수없이 다양한 삶의 양상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 다양한 삶은 성과 속의 위계가 없이 다 그냥 삶인 것이지.

필자: 정확히 그 점을 지시하는 부분이 소설 중에 나옵니다.

선생님: 오, 반갑네! 그렇다면 영화 감독은 진짜 대단함. 뮤지컬이라는 표현법, 그리고 분위기까지 모두 마츠코의 일생을 표현하는 데에 아주 적절했다는 게 내 평가. 마츠코의 일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 또는 분위기가 잘 말해주고 있음.

필자: ‘그리스 비극’으로서의 표현법이니까요. 소설 중의 대목은 대략 다음과 같은 대목입니다:

 나는 마츠코 고모가 외진 곳에서 고독하게 살았고, 생의 마지막에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불쌍한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츠코 고모 자신이 살인자라니.......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살인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다. 초라한 집에서 살해당한 것도 고모가 저지른 살인과 뭔가 관계가 있는 것일까?
 마츠코 고모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더욱 좋지 않은 모습을 들추어내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츠코 고모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마음이 왠지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교도소에서는 성실하고 조신했지. 다만 교도관을 의식했는지 철저하리만큼 규칙을 지켰어. 더운 날 제초작업 같은 것도 정말 열심히 했지. 다른 사람들은 교도관의 눈을 피해 적당히 쉬엄쉬엄 했는데, 마츠코만은 아니었어. 하긴 그런 우등생을 싫어하는 족속들이 어디에나 있듯이 가끔은 해코지하는 수감자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마츠코는 묵묵히 견뎌내더라고. 내가 기억하기로는 싸움을 하거나 규칙을 위반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왜 그래? 갑자기 조용해졌네."

 "설마 마츠코 고모가 사람을 죽였다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충격이었어?"

 "네......."
 
 "하긴 살인은 나쁜 거지. 그렇지만 쇼 군, 마츠코에 대해 알고 싶어서 여기 온 거지? 이해해주고 싶어서 그런거 아니야? 그러면 왜 그녀가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지만 살인은 살인이죠. 그리고 도대체 마츠코 고모는......."

 "그럼,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겠다는 거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쇼 군, 혹시 마츠코가 청렴하게 살다 간 수녀님이라도 되는 줄 알고 있었어?"

 "......."

 "마츠코는 한낱 인간에 불과해. 섹스를 하기도 하고 똥을 싸기도 하는 인간.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상처를 주기도 하지. 쇼 군도 거짓말도 하고, 가끔은 가볍게 법도 어기잖아?"

 "그렇지만 살인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혹시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어?"

 "......."

 "마츠코가 살인을 저지른 건 사실이야. 하지만 힘없는 여자가 남자를 죽인 데에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법이야. 알아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마츠코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는 건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게다가 이렇게 나까지 끌어들였으니,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지는 마. 여기까지 왔으니, 이번 일을 철저하게 조사해서 그녀의 삶을 나름대로 이해해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와무라 사장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마츠코가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또르르.

 그때 마츠코 고모의 유골함에서 들렸던 희미한 소리가 귓속에서 되살아났다. 마치 마츠코 고모의 혼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호소하는 것 같았다.
 여기까집니다. 사와무라 사장의 끝에서 2번째, 4번째 대사가 핵심인 듯 합니다. 영화감독이 이 대사를 놓치지 않은 것 같군요.

선생님: 맞아, 그런 대목이 영화에 나와.

〈불교〉와 마츠코의 일생

선생님: 저 유골함의 ‘또르르’ 소리는 뭐지? 영화에도 있었나? 있었던 것도 같은데… 기억이….

필자: 물리적으로는 〈유골함〉에서 마츠코 고모의 화장된 재가 굴러가는 듯한 소리였고요. 좀 더 높은 층위에서, 그러니까 저 마지막 문장에서의 의미는 〈마츠코 고모의 혼〉 정도가 될까 싶긴 합니다.

선생님: 맞아, 있었어. 유골함의 또르르 소리가 그러니까…… 사리가 나왔다는 뜻이군.

필자: 예. 맨 처음에 쇼의 아버지(마츠코의 남동생)이 들고 들어오면서 시작되었고, 중요한 순간마다 〈유골함〉의 소리가 들리니 완벽한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선생님: 그러네…. 알고 있지? 〈사리〉는 득도한 사람을 화장하면 나온다는 불교 쪽의 이야기…….

필자: 예. 일본 문학이니 아무래도 그러한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이 책에 깔린 밑바탕 사상이 불교적 사상이구나.

필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알지? 아까 말한 쇼펜하우어의 그 생각들이 불교에서 나온 거.

필자: 예.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 다음에 니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도 했죠.

선생님: 절의 초입에 가면 보통 사리탑들이 서 있잖아. 우리 절에 이렇게 훌륭하신 스님들 많이 나왔다고 자랑하는 사리탑들.

필자: 그게 진짜 ‘사리’가 들어있는 사리탑인 건가요?

선생님: 그 사리를 보관하기 위한 탑이야. 실제로 안에 사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자들은 있다고 믿지.

선생님: 유골함에서 또르르 소리가 들린다는 건 사리가 나왔다는 거고, 그만큼 마츠코는 득도했다는 것이지.

필자: 그 〈득도〉의 의미는 〈평정심〉의 의미인지요, 아니면 그 반대인지요? 저에게 있어서 〈불교〉에서의 〈득도〉란 〈평정심〉의 의미에 가까워 보여서…….

선생님: 불교계에서 흔히 말하는 〈올깎이〉, 〈늦깎이〉가 있단다.

필자: 〈올깎이〉는 나이가 어려서 승려가 된 사람, 〈늦깎이〉는 나이가 많지만 승려가 된 사람이라고 나오네요.

선생님: 〈올깎이〉는 세상 풍파 겪어보지 않고, 즉 결혼 한 번 하지 않고 불교에 귀의. 〈늦깎이〉는 결혼도 해 보고, 온갖 풍파를 겪다가 결국 불교에 귀의. 불교계에서는 늦깎이를 더 수준 높게 생각한단다. 그걸 속세의 때가 묻었다고 생각하지 않지. 그러니까 마츠코의 일생은 〈늦깎이〉인 셈.

필자: 동의합니다. 다만 〈불교〉적인 일생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감이 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궁금한 것은 그 ‘귀의’가 〈깨달음〉 때문이거나 혹은 〈깨달음〉을 얻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깨달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인생이 사실은 껍데기라는 것〉.

필자: 그러니까 쇼펜하우어군요.

선생님: 죽음도 사실은 껍데기가 죽는 것이고, 불교에서 가장 높게 치는 해탈(니르바나)는 윤회를 벗어나는 것이지. 윤회는 껍데기를 바꾸어 생이 계속되는 것이고, 윤회를 벗어난다는 것은 드디어 껍데기를 벗어던진다는 뜻.

필자: 윤회 사상에서 생이 계속되는 것은 이전과 정확히 같은 생인지요, 아니면 다르게 되는 생인지요?

선생님: 껍데기가 같고 다르고의 의미가 없는 것이지. 사실 본질은 똑같은 거니까.

필자: 그렇군요.

선생님: 그래서 깨달음이란 모든 게 다 변화무쌍해 보여도 다 쓸데없는 것이란 것인데,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되면 인생의 〈상승과 하강〉 또한 사실은 같은 게 되어버리고, 거기에 흔들리는 이 껍데기 인생 또한 사실은 같은 거라서 그 〈상승과 하강〉, 이런저런 비극과 행복 · 불행 등을 피할 이유가 없어지는 셈이지. 그러므로 마츠코는 아주 수준 높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고, 그것을 인생을 통해 이루었어. 마츠코의 일생은 득도(깨달음)의 수단이자 결과인 것이지.

〈불교〉의 윤회와 〈니체〉

필자: 이제 〈불교〉가 〈기독교〉라던가 〈플라톤주의〉와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맞아. 특히나 그 그리스 시대의 스토아 철학이랑 거의 같더라고.

필자: 저는 〈니체〉의 반대로서, 또는, 〈데카당〉의 의미로 말씀드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 질문이 있습니다. 그 〈깨달음〉 속에서 인생을 이어나가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생길까요?

선생님: 아주 중요한 핵심 질문.

필자: 사실 그게 제가 니체를 읽기 시작한 (혹은 끌린) 이유라서 말이죠…….

선생님: 힌두교가 사실 불교랑 되게 비슷한데, 힌두교에 그 타고난 신분 있잖아… 그래, 카스트.

필자: 네.

선생님: 이 카스트 신분 제도가 인도인들의 인생을 옥죄고 있는데, 타고난 인도인들은 (외부인의 시각과는 달리) 자신의 신분을 아주 마땅히 생각하고, 당연히 생각한대. 기꺼이 최하층 신분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지. 마지못해가 아니라, 기꺼이.

필자: 윤회 사상 때문입니까?

선생님: 글쎄, 내 생각엔 진정한 불교(힌두교) 신자라면… 아마도. 천한 신분이든, 귀족 신분이든, 사제 신분이든, 불가촉이든, 뭐든.

선생님: 껍데기는 달라도, 그 다른 껍데기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본질(알맹이)이 존재한다는 믿음 때문일 거야. 그런 믿음이 스토아 철학이랑 거의 같지.

필자: 그것 때문에 혹시 〈불교〉가 사회의 기성화에 이용된 것은 아닌가 싶어서…….

선생님: 대체로 그렇게 비판 받고, 그 비판은 옳은 측면이 많음.

선생님: 그저 흔해 빠진 관념론으로 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함. (난 불교 신자 아님.)

필자: 그래서 저는, 저는〈불교〉적 의미를 마츠코에게 부여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우리의 삶과 몸뚱아리, 이런 물질적 세계들은 사실 사라지고 나면 끝인 별 의미 없는 껍데기일 뿐이고…… 어쩌면 스토아에서 말하는 〈본질〉 같은 것도 사실은 없는 것이고…… 결국 나는 〈삶의 허무〉, 세상의 허무를 인정할 수밖에 없어.

필자: 오직 무(無)만이 있다…? 아니면 그냥 무(無)인가요?

선생님: 무(無)도 없고, 그저 이 세상은 그냥 물질뿐인 것이지. 그 물질이 죽음 이후에도 남고, 그 물질의 〈변화〉만 영원불변.

필자: 그렇다면 윤회 사상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 너머의 것 ― 즉, 〈윤회〉가 일어나는 또 하나의 세상을 상정하는 거 아닌가요?

선생님: 방금 말한 게 윤회. 다만, 실제 불교나 철학, 스토아 학파에서는 그렇게 보지.

필자: 아, ‘물리학적’인 의미군요. 다만, 불교와 철학 그리고 스토아 학파에서 보는 시각만큼은 제가 제일 의문스럽고 또한 거부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선생님: 그렇지. 그래서 관념론 · 형이상학이라고 비판 받지.

필자: 니체가 그렇게나 싫어했고 또한 공격했으며 ‘도끼’로 내리찍었지요.

선생님: 그렇지……. 아마도 해탈이란, 그 변화 자체를 그저 〈무의미〉로 볼 수 있는 힘 아닐까?

필자: 정확히 그 부정 명제가 되어야 하지는 않을까요?

선생님: 무슨 말이지?

필자: “해탈이란, 변화 그 자체를 〈의미〉로 볼 수 있는 힘이다.”

선생님: 〈의미〉로 보면, 그 변화에 집착하게 될 걸?

필자: 물론 저는 선생님의 경고도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원자 단위로 내려가면 그냥 모든 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 물리학의 고찰이었던 것 같아서요.

선생님: 내 생각이 바로 그거야. 그래서 난 종교가 없어.

선생님: 그저 〈무의미〉로 보면 평정심이 가능해지고, 또 수많은 변화에 그저 흔들릴 수 있지. 마츠코처럼.

필자: 변화에 ‘흔들린다’는 말 자체가 ‘흔들리지 않음’을 지향하는 말로 들립니다.

선생님: 흔들리는 것은 〈껍데기〉니까. 사실 본질은 (본질이 있다고 한다면) 안 흔들리는 것이지.

다자이 오사무, 바틀비의 경우와 삶, 그리고 ‘선택’

필자: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제 비판과 같은 비판이 작동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선생님: 동감.

선생님: 그 본질 자체가 아예 없는 거다, 라는 게 아마 〈해탈〉아닐까? 해탈하면 윤회에서 벗어나지.

필자: 그건 저도 동의할 수 있는 명제가 되겠군요. 문제는 ‘본질’이라는 단어가 어디에 사용되었느냐는 부분에 있겠습니다만…….

선생님: 사실 삶이 무의미하다면 〈자살〉까지 할 필요도 없는 거거든. 뭐하러 그 힘든 자살을…….

필자: 바틀비 생각이 슬슬 나네요…….

선생님: 바틀비가 어떻게 죽는지 알지?

필자: 지금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납니다. 다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로 그의 일생이 모두 정리된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동양식으로 말하면 〈곡기를 끊어서〉 죽어. 그 어렵다는 경지.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숨을 안 쉬어서〉 죽는 경지.

선생님: 내가 전에 말한 적 있지? 숨 안 쉬어서 죽는 건 불가능하다고.

필자: 병이 아니고서는 말입니다.

선생님: 당근. 왜냐…… 우린 몸뚱아리라는 물질에 갇힌(?) 존재거든. 그래서 숨을 안 쉬어서 죽을 수는 없어.

필자: 그래서 질식이 사망의 원인이 되게 하려는 이들은 반드시 ‘외부적 요인’을 사용하죠.

선생님: 따라서 그 다음 경지가 〈곡기를 끊어서〉 죽는 건데…….

필자: 〈아사〉 이상의 의미입니까, 아니면 정확히 그 의미입니까?

선생님: 내 기억에 바틀비가 스스로 안 먹어서 그냥 죽었어. 아무것도 안 한 거지.

필자: 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싶어〉 했을까요? 제가 아직도 바틀비에게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선생님: 그게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인데…….

선생님: 아마도 (해석이야 다양하겠지만) 앞에서 계속 말한 그 껍데기의 부질없음을 깨달은 게 아닐까? 이건 내 해석이고, 보통은 바틀비가 저항한 것이라고 이야기함. (내가 이 작품 소개를 처음 접한 게 ‘녹색평론’ 책에서라서…….)

자: 그 〈껍데기〉가 곧 〈본질〉이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그럼 〈본질〉의 거부니까…… 더욱이 이해할 수가 없죠.

선생님: 껍데기를 본질로 착각하는 게 불교에서 경계하는 지점이고. 나는 그 껍데기는 자꾸 모습을 바꾸니까 변화하는 것이고. (원래 본질에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란 속성이 있어야 본질이라 부름.)

필자: 바로 그게 제가 정확히 거부하고자 하는 부분이죠. 그러니까… 저는 〈본질〉이 잘못 정의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선생님: 나는 본질 같은 건 없는 게 아닐까라고 요새 생각함. 물리학의 영향일까?

필자: 여튼, 바틀비가 저항한 것이라는 표준 해석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저도 대학 강의에서 처음 읽었을 때는 그렇게 들었습니다. 결국 동의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선생님: 무슨 뜻이냐면, 어차피 어떤 행동을 해 봤자, 그게 모두 〈저항하고 싶은 대상, 가령 자본〉의 입맛에 맞는 (맞춰지는) 행동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예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선택하는 거지. 그 선택 자체는 적극적인 자신의 것이니까 이건 소극적 저항이 아니라, 차라리 〈가장 적극적 저항〉인 셈.

필자: 그러나 그건 ‘바틀비’가 죽음에 이르는 원인을 전혀 설명해주지 못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선생님: 무시무시하게도 ‘살아있음’ 자체가 〈자본에 복종〉하는 삶인 셈.

필자: 그 체계 안에 있음이 반드시 복종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결국 그리 될 거라는 게 많은 철학자들의 생각이었고, 니체가 그것을 넘어섰지.

선생님: 그나저나, 대학에서 바틀비도 배우고… 좋겠다.

필자: 배운 것인지, 아니면 훑어본 것인지, 어쩌면 ‘주입된’ 것인지 아직도 헷갈립니다.

생님: 하하. 나는 녹색평론에서 소개받고 찾아 읽었음. 아무도 안 가르쳐줬음. 이거 되게 위험한 책이잖아.

필자: 맞죠. 굉장히 위험한 책이죠……. 그래서 해석할 때 골치가 꽤 아팠습니다. 아, 그리고 그 강좌에서도 ‘녹색평론’ 쪽 해석을 인용했었죠.

선생님: 무슨 강의야? 강좌 제목은?

필자: 서울대학교 강우성 교수님 (영어영문학과)의 ‘문학과 철학의 대화’라는 과목입니다. 1학년 1학기 때 들었습니다.

선생님: 음…. 학교에 학생을 앉혀놨더니, 그 학생이 〈아무 것도 안 할래〉.

필자: 제일 골치 아픈 저항 방식이긴 하죠. 😀

선생님: 직장에서 직장인이 〈아무것도 안 하는 쪽을 선택하겠다〉.

선생님: 여기서 〈선택〉이라는 말에 〈적극적〉 의미가 숨어 있음. 어쩔 수 없이 도망치는 게 아닌 것! 신께서 한 번 살아봐… 라고 했더니… 〈아무것도 안 하는 쪽을 선택하겠습니다〉… 바틀비에게 딱 들어맞는 방법은 〈곡기를 끊어서〉 죽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것이지.

생님: 조선 시대 뛰어난 학자 중에 〈곡기를 끊어서〉 죽음을 기다린 (이게 아니라) 맞이한 (기꺼이 선택한) 분들이 있다고 들었음.

필자: 예, 알고 있습니다. 돋양의 이야기 혹은 역사 중에 아사를 선택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죠.

필자: 다만, 〈아무것도 안 하는 쪽을 선택하겠습니다〉는… 그건 ‘삶’에 대한 거부가 아닌가… ‘변화’에 대한 거부가 아닌가… 그러므로 ‘의미’에 대한 거부가 아닌가… 싶어서요.

선생님: 맞아.

필자: 니체라면 거품을 물었을 것 같고요. 저는 여전히 그래서 비겁하다고 느껴집니다. 물론 다른 해석이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선생님: 글쎄, 니체를 만나보고 싶네. 그도 적극적 〈선택〉에는 박수쳤을지도…….

철학, 그 죽음 앞에서의 인간

필자: 결국 다시 지난 번의 주제로 돌아가네요.

필자: 〈자살〉이 데카당인가, 반-데카당인가 하는 그 주제 말입니다.

선생님: 전에 〈자살〉에 대해 얘기할 때도 말했지만… ‘삶이 힘들어 삶에서 도망가는’ 소극적 자살이 아니라, 그래. 저항으로서의 자살. 적극적 선택으로서의 자살. 이건 아마 니체도 끄덕끄덕하지 않았을까?

필자: 여전히 헷갈리네요…….

선생님: 삶이 껍데기니까, 죽으나 사나 매일반.

필자: 그러나 〈나〉는 중지하지 않는가… 〈나〉는 이제 더 이상 사유할 수도 없고 감각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 때문에 말입니다.

선생님: 감각과 사유에도 별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지. 그런 건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 배가 지나가는 호수의 물결. 이렇게 말하는 게 불교.

선생님: 물결 따라 흔들리며 한 세상 한 번 살아보는 것, 그걸 실천해낸 마츠코…. 살아아고 있는 우리는 흔들리며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지.

필자: 그러니까 불교의 ‘니힐리즘 앞에서 사람들이 죽지 않는 이유’에 대한 해석은 ‘삶은 그저 껍데기이므로 죽음이나 삶이나 곧 동일한 상태이므로’가 되는 건가요?

선생님: 내 생각은 정확히 그래.

필자: 하나의 해석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리고 어쩌면 ‘목적’에 너무 집착하는 제 생각에 대한 정확한 반(反)으로서 가장 소중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받아들이기 힘드네요.

선생님: 우리가 마츠코의 일생을 보고 감동하는 것은 마츠코는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기꺼이 적극적 선택으로 (죽음이 아니라) 삶을 선택한 것이고, 그것이 모든 비극 주인공들의 위대함이지. 적극적으로 삶을 선택해본 자들은 죽음 또한 장엄하지.

필자: ‘삶’과 ‘죽음’이 동일하면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는 것도 ‘적극적’ 선택 아닌지요?

선생님: 그들은 죽음 또한 두렵지 않거든.

필자: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습니다만……. 여전히 모르겠네요.

선생님: 그래서 마츠코의 비극을 〈내몰린 수동적 비극〉이 아니라 〈적극적 선택〉으로 보는 것이고, 그래서 그의 일생이 감동인 것이고, 그것이 그리스 비극을 닮았다고 생각. 실컷, 맘껏 사랑한 사람이 이별 또한 기꺼이 받아들임. 제대로 사랑 못한 사람이 이별 앞에서 낑낑대지. 삶과 죽음 또한 같음. 아마 이게 니체의 생각일 듯함.

필자: 니체의 생각이라는 점에, 그리고 내몰린 수동적 비극이 아니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여전히 ‘적극적 선택’에 결부되는 ‘불교 사상’이 해명이 안 된 듯 합니다.

선생님: 맞아. 이건 불교 · 스토아 · 쇼펜하우어 등에 대한 내 해석(생각)이야.

필자: ‘삶’과 ‘죽음’이 동일하면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는 것도 ‘적극적’ 선택이라 할 만하므로…… 그렇다면 소설 중간에 마츠코가 자살하지 않은 게 설명이 안 됩니다.

선생님: 나도 뭐 읽은 게 많지 않아서 잘 몰라. 그냥 내 생각.

필자: 소설 중간에 마츠코가 자살했다고 해도 ‘불교 사상’의 해석에서는 아까와 같은 결론을 내리겠지요.

선생님: 자살할까 말까라는 선택은 높은 층위의 불교적 선택이 아니라, 그저 물결에 흔들리는 층위의 선택이야. 그러니까 낮은 선택, 수동적 선택.

선생님: 〈수동적 선택〉이라 함은 〈삶이 힘들어서 내리는 결론〉. 수동적 선택에는 힘겨움이 있고, 망설임이 있어. 적극적 선택에는 〈기꺼이 실행하는〉 기쁨이 있지. 마지못해 하는 힘겨운 선택이 아니야.

필자: 그렇다면 삶이 그 어느 때보다 힘차 있으며, 활기찰 때 〈자살〉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나요? 삶의 가장 정점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만약 있다면 그게 내가 말한 〈적극적 선택〉의 실례가 되겠지…… 싯타르타.

필자: 부처인가요…….

선생님: 그 〈행복론〉 쓴 사람. 로마 황제의 스승.

필자: 아, 부처가 아니군요. 처음 듣습니다.

선생님: 아니, 싯다르타는 부처 맞고. 두 번째 예시가 〈행복론〉의 저자 세네카.

필자: 둘 다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선생님: 내가 듣기로 그는 로마 황제의 스승이었는데… 로마 정치사에 뒤얽혀 죽음을 맞이했는데 아주 기꺼이 죽었다고 하더군. 음… 소크라테스도 기꺼이 죽었지.

선생님: 이들은 아마도 스토아 철학 쪽 믿음을 가진 것 같고, 싯다르타는 불교쪽 믿음. 그래, 나도 몰라. 게다가 나는 내 삶의 물결이 가혹하여… 휘둘리고 있어서…….

“모든 인간은 니체와 오사무의 변증법적 합이다”

필자: 그래도 하나의 결론은 제대로 얻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 그게 뭐지?

필자: 제가 맨 처음 세운 가설은 맞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말이죠.

선생님: 그 가설이 궁금.

필자: “모든 인간은 니체와 오사무의 변증법적 합이다” 또는, 니체만의 단어를 쓴다면 “모든 인간은 데카당과 반-데카당의 변증법적 합이다”라는 가설 말입니다. 니체와 오사무는 니힐리즘에 대한 태도가 정확히 반대인 거라 생각합니다.

필자: 물론 니체를 명제 안에서 주장하면서 변증법을 들고 오는 건 좀 배신이긴 합니다만…… 다른 압축적인 표현법은 지금으로서는 떠오르지 않네요.

선생님: 변증법, 참 신통한 방법이야.

필자: 신통하죠. 그러나 그게 ‘모호해서’ 신통한지 아니면 ‘신통해서’ 모호한지는 여전히 헷갈립니다.

선생님: 변증법이 끊임없는 변화를 지향하는 것이라면 그냥 〈끊임없는 변화, 흔들림〉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변증법을 잘은 모르지만,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정-반-합. 합에서 변화가 멈추거든. 그 합이 〈신〉이고.

필자: 그 표현도 괜찮군요. 어쩌면, ‘~ 사이이다’ 라는 표현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병존’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요.

선생님: 그런데 네가 말한 뜻은 아마도 “인간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둘 사이에서.” 이런 뜻으로 쓴 게 아닐까 싶어서.

필자: 아니오, 말 그대로 ‘합’의 본래 의미에 더 가까운 단어로 썼습니다.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이 ‘그런 것’이라고 주장하는 거죠.

선생님: 인간이 〈둘 사이에서 흔들리는 존재〉라는 뜻 아니었어?

필자: 그 표현보다는 “인간은 둘 모두이다”가 더 정확한 뜻이 될 것 같습니다.

선생님: 〈변증법〉은 〈변화〉를 설명하는 방법이야.

필자: 그죠. 그런데 그 산물은 둘의 종합이니까요.

선생님: 너는 변화(통시적 설명)가 아니라, 전체의 모습(공시적 설명)을 말하려고 하는 듯함.

필자: 그리고 인간 그 자체가 변화하는 존재니까…….

선생님: 게다가 그 정-반-합에서 합은 〈정도 아니고, 반도 아닌 것〉이어야 함. 변증법으로 설명하려면 그렇다는 이야기.

필자: 인간 그 자체는 변화하는 존재이므로, 인간은 다자이적 면모(불교적, 죽음과 삶의 동일 가치 부여)와 니체적 면모(반-종교적, 죽음보다 삶에 가치를 더 부여)를 모두 가지고, 따라서 둘 중 어느 것과도 같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필자: 매 순간 꺾이고 ‘껍데기’라고 생각하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껍데기’의 생각을 거부하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존재. 그것이 인간이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선생님: 전자는 아리송, 후자는 동감.

필자: ‘껍데기’의 생각을 거부하고 싶은 게 〈니체〉인 것 같아서요.

니체 대 다자이인가, 니체와 다자이인가

선생님: 니체를 다자이와 꼭 반대편에 둬야 하나? 니체의 뿌리도 쇼펜하우어에 있는데…….

필자: 니체는 끝까지 인정받고 싶어 했고, 끝까지 살고자 했습니다.

선생님: 그런가? 내가 잘 몰라서.

필자: 뿌리는 쇼펜하우어에 있지만 말년에는 쇼펜하우어(그리고 바그너)를 무시무시할 정도로 내리찍었죠.

선생님: 그렇군.

필자: ‘끝까지 살고자 했다’는 제 느낌입니다만, 적어도 ‘인정받고 싶어 했다’는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를 작성한 경위가 추측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차라투스트라인가? 니체 자신인가?

필자: ‘니체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 해석도 그러합니다.

선생님: 니체 말년의 책들이 약간 〈자뻑〉 스타일이었다고 들었음. 자뻑은 확신에서 오고, 확신은 맹목을 낳지.

필자: 예. 자뻑,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를 ‘자랑’하려는, 겸손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스타일이죠. 실제로 《이 사람을 보라》가 니체 말년에 쓰였습니다.

선생님: 앞에서 네가 말한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내리찍은 부분이 궁금하네.

필자: 바그너에 대해서요, 아니면 쇼펜하우어에 대해서요?

선생님: 그 둘은 어떤 점에서 반대했는지, 니체의 생각은 뭐였는지.

필자: 쇼펜하우어는 말 그대로 ‘니힐리즘’적인 인물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반대했고, 바그너는 원래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을 잘 표현해준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부터 ‘독일적’으로 변모했다고 비판하죠.

선생님: 내가 뭐 니체를 모르니…….

선생님: 니체가 삶을 찬양하고 긍정한 것은 맞는데, 나는 이 찬양 · 긍정이 〈죽음에 대한 적극적 선택〉과 마찬가지인 〈삶에 대한 적극적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고, 이 둘 중에서 죽음이 아니라 삶을 선택했다면, 그 점에서 쇼펜하우어와 다른 점이 있으리라 봄. 물론 안 읽어봤으니, 나 혼자 넘겨짚은 것.

필자: “이 둘 중에서 죽음이 아니라 삶을 선택했다면, 그 점에서 쇼펜하우어와 다른 점이 있으리라 봄”. 제가 니체를 읽고 내린 결론이 이것이긴 합니다. 물론 정확한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선생님: 그래. 나도 그 지점이 궁금해. 죽음이 아닌 삶을 더욱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지점.

필자: 제 남은 대학 생활의 숙제가 되겠지요. 니체가 〈자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는 부분 말입니다. 적어도 지금 읽고 있는 들뢰즈의 해석이 도움을 좀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정확하게 하려면 제가 읽어야겠죠.

선생님: 마치 똑같은 결론이지만, 〈결혼 안함〉보다 〈결혼함〉을 선택하는 원리와 같아 보임. 😀

필자: 그런가요. 😀

남은 것. 들뢰즈, 그리고 니체

선생님: 들뢰즈 뭐 읽어?

필자: 들뢰즈의 ‘Nietsche‘를 읽는 중입니다. 한국어 번역판은 《들뢰즈의 니체》, 박찬국 역, 철학과 현실사 정도요.

선생님: 오… 읽혀?

필자: ‘전부 다’는 아닙니다. 여전히 표의가 뭔지 파악이 안 되는 표기들이 있습니다.

선생님: 들뢰즈가 니체에 대해 쓴 글인가?

필자: 예. 들뢰즈가 니체의 일생, 철학에 대해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들뢰즈의 ‘주석서’ 혹은 ‘들뢰즈와 니체의 만남’ 정도가 되겠네요. 책은 두꺼운 편은 아닙니다.

선생님: 기대된다. 네가 들려줄 그 책 내용.

필자: 아마 ‘들뢰즈의 니체’ 외에 한 권 더 읽고 결론을 내려야 해서 좀 시간이 걸릴 것 같긴 합니다.

선생님: 그래. 응원한다…. 😀

필자: 딱 한 가지 질문이 더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괜찮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 뭐, 도움이 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자: 아니오, 선생님. 동양 철학 쪽의 시각 (그러니까 ‘죽음’에 대해서 제가 고집하고 있는 시각의 정확히 반대 시각)은 제 반(反)으로서 변증법적 과정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동양 철학은 공부한 적이 없으니 말이죠.


알베르 카뮈, 《이방인》

카뮈의 문체와 《이방인》

필자: 혹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읽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선생님: 응. 《이방인》. 거기 마지막 장면이 멋지지.

필자: 예. 하지만 가장 인상 깊은 건 그 문체였습니다.

선생님: 딱 그런 대목만 뽑아오네. 🙂 짧은 단문은… 지나친 주체의 간섭으로 인한 오독(세상에 대한 오독)을 막아보자는 뜻이라고 나도 결론내렸어.

선생님: 〈네가 온다고 바람이 분다.〉라는 복문과, 〈네가 온다. 바람이 분다.〉 확실히 단문은 그냥 사실들만을 진술. 복문은 거기에 관찰자의 해석(오독)이 덧붙지.

필자: 그렇죠.

선생님: 이방인 2부의 재판 과정을 보면 알겠지만, 재판은 온통 복문 천지야. 오독 천지. 왜곡을 보여주는 거야. 실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인간들.

필자: 늘 해석이 문제이죠. 그러나 저는 문체에서 뭔가 하나를 더 느꼈습니다.

선생님: 어떤 거?

필자: 문체 하나하나가 기막힌 ‘섬’ 처럼 읽혔거든요.

선생님: 단절? 그렇군. 맞아. 그게 효과지.

필자: 예. 단절은 단절이되 ― 그러니까 문장과 문장 사이에 ‘거리감’이 느껴지는데, 희한하게도 통일성과 연결성은 부여된.

선생님: 카뮈가 노린. 그래서 질문은?

필자: 그래서 저는 주인공과 문체가 같은 것으로 읽혔습니다……. 그 이방인의 주인공은 니체인가, 오사무인가 하는 질문이요. 물론 전제에 동의하시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선생님: “주인공과 문체가 같은 것으로 읽혔다.” 동의함. 뫼르소는 극히 섬이지. 그런 섬이 왜곡 없이 세상을 보는 편이지. 오히려 섬이 아닌 사람들이 왜곡투성이야.

필자: 예, 그렇죠. 그래서 카뮈가 가장 솔직했다고 생각합니다. 문장만이 아니라, 뫼르소가 세상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마저.

선생님: 우리는 뫼르소의 그 솔직함에 〈우리 자신의 거짓〉을 들키고선 부끄러워하지. 세상에 난무하는 거짓 · 왜곡 · 오독을 나무라는 소설이야. 그런 거짓에 합류하지 않는다고 이방인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하고.

뫼르소, 그 솔직한 비주류의 섬

필자: 《이방인》과 《인간 혐오》는 비슷해 보이니까요……. 같은지의 여부가 지금 문제이긴 합니다만. 그리고, 몰아 세웠다기보다는 ‘이미 이방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재판에서의 사형 선고는 이미 선고된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것으로 보였습니다.

선생님: 인간 혐오가 약자 혐오이고.

필자: 니체 용어에서의 ‘약자’인 것인지요?

선생님: 아니. 니체 용어가 아니고, 그냥 비주류. 희생양에 가까운 개념.

필자: 그렇다면 약자가 아니라, 그 반대인 강자 아닌가요?

선생님: 그럴 수도. 자기보다 강해보일 때 (아주 굳건히 혼자일 수 있는 뫼르소) 따돌려서 약자로 만들기 다반사.

필자: 그런 느낌이 〈니체〉를 닮아 있어서 말입니다. ‘기독교적 질서’, ‘주류’에 대한 ‘도끼’의 투쟁. 그 끝이 ‘오사무적’이라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거든요…….

선생님: 〈’기독교적 질서’, ‘주류’에 대한 ‘도끼’의 투쟁〉. 이건 거의 모든 소설들이 그렇지. 당연히 《이방인》이란 소설도 그렇고.

필자: 그렇다면 제가 아는 ‘소설’의 범위가 좀 많이 줄어들긴 하네요……. 아니, 어쩌면 그것들이 ‘소설’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선생님: 사실… 그… 일종의 총기 사고는, 그 해변에서 일어난……. 아마도 아랍인과도 관련되었던 것 같은데…… 내가 기억이 가물가물…….

필자: 아랍인을 쏴 죽였습니다.

선생님: 그 뫼르소의 애인의 오빠들이 아랍인이었지?

필자: 아뇨, 정확히는 뫼르소가 사는 아파트의 이웃인 ‘레몽’의 애인의 오빠가 그 아랍인 무리에 껴 있었습니다.

선생님: 거기가 아마 아프리카의 대륙… 의 윗부분… 어디였지? 알제리?

필자: 아마도요. ‘알제’라고 나옵니다.

선생님: 아… 레몽이 약간 건달 같은 인물인가?

필자: 건달이라기보다는 뭐라고 해야 할까요……. 좀 평판이 좋지 않는 ‘창고지기’가 맞는 표현일 듯 합니다. 실제로 창고지기가 그의 직업이지만, 사창가를 들리고…….

선생님: 그러니까 뫼르소가 어울린 사람들이 반쯤 건달에다… 창녀 같은 애인에다… 아랍인들에다… 그러니까, 뫼르소가 어울리는 사람들이 비주류 · 약자였어.

필자: 애인은 창녀가 아니었습니다.

선생님: 그래, 느낌이 약간 그랬다는 뜻이야. 알제리였나? 그곳이 프랑스의 식민지였는데, 프랑스는 음… 이주정책? 이런 걸 써서 프랑스 사람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어.

필자: 예. 그래서 무어인들도 나오고 아랍인들도 나오고 하더라고요.

선생님: 그곳에선 두 계층이 존재. 프랑스 원주민과 피식민지인. 그러니까 뫼르소는 별볼일 없는 사람인 셈인데, 그런 낮은 계층의 사람들과 건달처럼 몰려다닌 것이지.

필자: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선생님: 심지어 엄마가 돌아가신 날에도 애인과 희희덕거리고…….

필자: 그건 맞죠.

선생님: 그런 왜곡된 이미지를 덧씌워… 그런 총기 사고(?)에 사형을 언도.

필자: 〈사고〉는 확실히 아니었던 것 같긴 합니다. 그러나 〈사형〉은 확실히 아니었고요.

선생님: 1부의 짤막한 단문들은 사실 나열, 이런 사실들이 있었어.

필자: 예, 맞습니다. 2부에서 그러한 모습들이 그의 〈사형〉 선고에 대한 증거로서 이용되기도 하고, 그 반대로서 언급되기도 하죠.

선생님: 2부의 재판 과정은 그런 사실들이 어떻게 왜곡되어 (오해되어) 어떤 편견을 낳아 어떤 결론이 내려지는가를 보여주는 것.

필자: 왜곡의 과정으로도 볼 수 있겠군요.

죽음 앞의 뫼르소, 그의 〈선택〉

선생님: 내가 감동받은 부분은 그… 뫼르소의 어머니 부분이었어.

필자: 뫼르소의 어머니의 양로원 안에서 말입니까, 아니면 뫼르소와 함께 지낼 때 남긴 말 부분입니까?

선생님: 뫼르소가 사형을 기다리며 어머니를 떠올리는데……

필자: 아, 마지막 부분이군요.

선생님: 어머니는 왜 죽을 날이 다 되어서 애인을 만들었을까? 하는 부분 있잖아.

필자: 네.

선생님: 그게 〈니체〉와 맞닿아.

필자: 동의합니다.

선생님: 음… 청춘(뫼르소)이든, 양로원(죽을 날)이든… 인생은 똑같은 거거든. 그게 죽음이든 삶이든.

필자: ‘죽음’ 앞에서 니체 식의 방식을 선택한 장면이죠…….

선생님: 그래, 맞아.

필자: “인생은 똑같은 거거든. 그게 죽음이든 삶이든.” 이것이 바로 뫼르소가 항소를 포기한 이유였고요. 적어도 서술 상으로는.

선생님: 그런 생각을 한 다음, 뫼르소는 항소를 포기하고 자신의 사형을 기다리지.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서 와아아 함성을 지르기를 고대하지.

필자: 예, 그렇습니다.

선생님: 감동이 선사한 기억력. 난 이 대목에서 뫼르소가 멋져보였어.

필자: 그러면 저도 한 10년 후에 《이방인》의 줄거리가 생각나는지 봐야 겠군요.

선생님: 십년 안 됐어. 얼마 전에 다시 읽었거든. 아마 작년에.

필자: 그렇다면 1년 후로 하겠습니다. 😀

필자: 아, 그 ‘뫼르소가 멋져보였다’고 말씀하신 대목, 그런데 저는 나아가 이율배반적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선생님: 이왕이면 내 죽음을 많이 봐 주면 좋을 거라는 대목. 아… 설명하기 힘든데…….

필자: 바틀비의 경우인가요?

생님: 아니, 니체의 경우야. 이왕이면 쓸쓸하게 죽고 싶지 않다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다 죽는데, 같이 사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삶(죽음)을 응원하면서 함께 사는(죽는) 것을 만끽(!) 하는 거지.

필자: 마지막에서 말입니까? 그렇다기에는 항소를 포기했기에…….

선생님: 그 부분에선 바틀비의 경우라고도 할 수 있고. 내가 말한 부분은 〈어머니의 애인(삶)과 장례(죽음)〉, 그리고 나의 〈사형과 구경꾼들〉 부분.

선생님: 모두 적극적으로 삶과 죽음을 만끽하는 장면이고. 나는 니체가, 그러니까 삶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만끽했다고 보는 거야. 그래서 아까 니체를 오사무와 자꾸 대립시키는 게 좀 불편.

선생님: 왜냐하면 죽음 또한 삶의 일부거든. 쇼펜하우어와 불교의 시각이 이래.

필자: 삶이 곧 죽음으로 가는 여정이니까 니체도 죽음을 만끽했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만, 뫼르소의 말처럼 “어차피 누구나 죽는 이상, 어떻게 그리고 언제 죽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가 제기되었을 때, 니체라면 항소를 선택했을 것 같고, 오사무는 항소하지 않음을 선택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선생님: 니체, 그리고 마츠코라면 하는 데까지는 해 봤겠지. 그러다가, 끝까지 싸우다가 결국 죽는 순간에는 죽음 또한 받아들였을 거야.

필자: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

선생님: 그… 《네 인생의 이야기》도 나랑 같이 공부했나? 테드 창 소설. 거기에 그야말로 니체가 나옴.

필자: 기억이 안 납니다만… 줄거리가 혹시?

선생님: 음… 영화 《컨텍트》 (원제: arrival)로 제작된 소설. 영화도 봤는데.

필자: 아. ‘헵타포드’는 기억이 나요. 저는 끄때 유독 ‘언어 구조’에 천착해 있었습니다.

선생님: 거기 주인공 여자가 ‘딸이 죽을 줄 미리 다 알면서도’ 결혼을 해서 딸을 낳아 키우지.

필자: 예, 그건 니체 그 자체이죠.

선생님: 그래, 바로 그래. 그러니까 니체라면 항소가 실패할지라도 끝까지 항소했겠지. 딸의 죽음을 맘껏 슬퍼하는 것처럼, 항소 후 사형을 만끽하겠지.

필자: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뫼르소는 그러지 않았지요. 그래서 뫼르소의 ‘끝’은 오사무였습니다.

죽음 앞에서: 다시 니체 대 오사무

선생님: 왜? 네가 말하는 오사무란, 〈수동적 자살〉을 말하는 것이지? 사형선고를 당해서 죽는다는 지점?

자: 뫼르소는 실패할 가능성이 있음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면서’ 항소하지 않는 부분이요. 더 이상 ‘살지 않겠다’라고 선언하는 부분 말입니다. ‘더 살 수 있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기회가 있음에도 이를 거부하는 것.

선생님: 아, 네가 말하는 오사무가 〈상승의 국면에서 자살하는 것〉을 말하는구나.

필자: 예. 그래서 오사무는 〈상승 뒤 하강〉이고, 니체는 〈하강 뒤 상승〉이죠.

선생님: 이 둘을 그리 구분해야 하나? 상승은 곧 이어질 하강을 다 보여주고 있는데?

필자: 왜냐하면 제 삶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상승 뒤에 하강이 오는 것은 니체와 오사무 둘 다 알고 있습니다. 하강 뒤에 상승이 올 것이라는 사실도 둘 다 알고 있죠. 그러나 둘의 선택은 반대라는 겁니다. ‘더 살지’, ‘아닐지’에 대해서…….

선생님: 상승의 국면인지, 하강의 국면인지를 판별하는 것은 뭐지?

필자: 〈생〉에 가까워지냐, 〈죽음〉에 가까워지냐, 라는 쪽이겠지요.

선생님: 쇼펜하우어식 화법이군.

필자: 니체 식으로 표현하자면 〈건강해지냐〉, 〈병이 드냐〉의 문제이고(물론 기독교적으로 〈병이 든다〉가 아닌 실제로 〈병이 든다〉의 의미로요), 제 표현이라면 ‘더 살 만하다고 생각되는가’, ‘더 살 만하지 않다고 생각되는가’ 정도가 되겠군요. 그다지 만족스러운 표현은 아닙니다만.

선생님: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건강할 때 자살하느냐〉, 〈죽을 병 걸렸을 때 자살하느냐〉?

필자: 둘 모두 니체의 반대입니다만, 오사무는 확실히 후자군요.

선생님: 오사무는 상승 국면일 때 자살했다면서? 그러면 전자 아닌가?

필자: 오사무의 자살에 〈죽을 병〉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상승 국면은 그 이전의 유년기와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까지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그러면 왜 오사무를 상승 국면에서의 자살이라고 하는 거지? 상승은 이미 지나간 옛 일이요, 현재 국면은 하강인데? 〈힘들어서 자살했다〉고 오해받기 십상임. 적극적 선택이 아니란 말씀.

필자: 문제는 그가 〈존재 기원〉을 망각했다는 사실에 있었죠. 그의 자살은 그가 실존치 않는 ‘이상적 인간’을 추구하고, 자신이 혐오하는 〈인간〉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죠. 거기서부터가 오사무의 자살입니다. 그 시점부터 그는 자신을 죽였으니까 말이죠.

선생님: 그건 도망치는 것, 비겁한 것, 노예.

선생님: 1. 지나치게 이상적 인간을 추구했다; 2. 자신은 그 이상적 인간이 아니라는 절망에 빠짐; 3. 절망 속에서 자살 선택. 이런 수순이라면 나는 〈도망치는 비겁자〉에 가깝다고 봄. 절대 니체는 아님. 의심의 여지 없는 ‘노예'(니체 용어).

필자: ‘노예’ 이죠. 그리고 저 자신이기도 했고요. (비록 자살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지금도 그럴 수도 있고요…….

필자: 아, 그리고 제가 지향하고자 하는 표현은 ‘절망’보다는 ‘부정’ 혹은 ‘가치 평가의 오류’입니다.

선생님: 무엇을 부정한 것인가? 어떤 것의 가치 평가에서 오류를 저질렀나?

필자: 실존을 부정했습니다. 실존과 비실존 사이의 가치 평가에서 오류를 저질렀고요.

선생님: 비실존이 실존보다 더 가치있다는 오류를?

필자: 예. 비실존이 실존보다 더 가치있다고 생각한 게 문제였죠. 좀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비실존’을 ‘실존’이라고 착각한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선생님: 그 오류가 불교식의 사고 방식에서 왔다는 건가?

필자: 그렇다고 보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는요……. 물론 굳이 ‘불교’가 아니어도 되겠지만요. 모든 〈종교〉가 그렇지요.

선생님: 그렇다고 한다면, 오사무는 명백히 그저 무난한 불교를 한 셈이고… 마르크스가 말하는 종교의 이데올로기에 속은 것이고…….

필자: ‘이원론’이 그렇고, ‘플라톤주의’가 그렇고, 전통적인 ‘서양 철학’이 그렇고…… (‘생성’ 철학 제외)

선생님: 오사무는 ‘오류를 저지르는 이성과 감정의 피해자’이군.

필자: 감성(?)의 피해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성의 피해자인 건 확실해 보입니다. 오사무가 감성, 혹은 욕망에 충실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그것을 누르는 이원론 덕에 결국 이성이 파멸로 그를 이끈 것은 아닌가.

선생님: ‘이원론’, ‘플라톤주의’, 전통적인 ‘서양철학’… 이게 매우 이분법적인 부분인데… 그러니까 네가 쓴 〈이원론〉, 〈플라톤주의〉 등의 용어들은 모두 그런 쪽을 비판하는 편에서 쓴 용어야.

필자: 예. 그것들의 ‘단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실제 플라톤이나 실제 이원론은 그런 게 아니었을 수도 있어. 실제 불교도 그렇고.

필자: 그래서 여전히 읽을 게 많습니다. 플라톤부터, 불교도, 그리고 삶도……. 평생에 걸쳐야 하겠지요. 아마도.

선생님: 오사무가 자살한 속내야 알 수 없겠지만, 정말 그런 것이라면 불쌍하네. 희생자네.

필자: 그렇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다자이 오사무를 따라서 자살한 사람들이 더욱 불쌍해지거든요…….

선생님: 그렇대도 할 수 없고.

필자: 예, 그렇죠.

마츠코, 뫼르소, 니체, 오사무 그리고 우리

선생님: 다만, 네 인생은 누구의 모조품이 아니다. 네 스스로 너만의 인생을 살아라.

필자: 그러겠습니다. 이미 동생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있고요.

선생님: 누구 따라한다고 따라할 수도 없고, 그저 할 일 하면서 그냥 살아보는 거지.

필자: 삶은 〈삶〉 그 자체니까요. 😀

선생님: 나를 태어나게 해 줬어? 고마워…. 그 수고를 생각해서 내가 한 번 살아봐 준다, 정도? 😀

필자: 수고를 생각해서 사는 것보다는, 〈삶〉 그 자체를 생각해서 〈살고〉 싶습니다.

선생님: 한번뿐이라서 매우 소중한 인생이기도 하겠지만, 너무 소중히 다루다가 그냥 보석함 속에 모셔다놓는 우를 범하지 말고, 그냥 가볍게 한 번 살아봐 주는 거지.

필자: 부딪히고, 나아가고 그러는 거죠. 상승과 하강을 즐기고.

선생님: 오케이.

필자: 다만 여전히 오사무와 니체의 대립은 남아 있네요. 그리고 마츠코와 뫼르소가 니체와 오사무 중 어디인지, 아니면 그 둘의 합인지에 대한 질문도. 뭐가 옳은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군요.

선생님: 마츠코처럼 살지는 말자. 그가 대단해보이지만, 나는 그냥 이리저리 요리조리 한 번 살아보자.

필자: 그래도 적어도 제 생각이 꽤 구체화되었습니다.

선생님: 그래도 정말 대단하다.

필자: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이제야 나는 이런 생각이 들고, 마츠코 뫼르소 등등이 보이던데…….

필자: 제가 아는 유일한 사실이란 제가 모르는 게 너무 많고, 그리고 주변 또래들과 대화가 잘 안 통해서 답답하다는 사실 뿐입니다.

선생님: 마찬가지야. 나도 잘 모르겠어.

필자: 저는 대학에서 뫼르소가 된 것 같거든요…….

선생님: 답답해하지 말아라. 내가 말동무 해 줄게. 그것도 성에 안 차면 글을 쓰면 된단다.

필자: 늘 그래서 선생님과의 대화는 즐겁습니다. 글 쓰는 것도 즐겁고요. 다만 제 학업과 이 일들의 균형을 잘 맞춰야 하겠지요. 늘 감사드릴 뿐입니다.

선생님: 어허, 감히 뫼르소랑 비교하다니. 😀 뫼르소에겐 멋진 애인과 해변가로 초대해줄 이웃들이 있었단다.

필자: 아하. 저는 둘 다 없군요. 이런.

선생님: 좀 있으면 그 애인도, 그 해변가도 다 지겨워질 때도 온단다.

필자: 아니죠, 둘 다 있네요. 학문이 애인이고, 초대히줄 이웃들은 선생님과 독서 모임 멤버들이군요. 뫼르소가 맞는 것 같은데요.

필자: 학문이 애인이라니 칸트처럼 될 것 같기도 해서 좀 그렇긴 합니다만…… 그건 나중의 이야기겠죠.

선생님: 애인과 이웃이 싫증날 수도 있으니…… 그때가 되면 또 과감히 버리면 된단다. 두려워 말거라.

필자: 적어도 아직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선생님: 다행이네. 축복인데! 젊음의 축복인 것 같다.

필자: 제가 뫼르소라면, ‘애인’과 ‘이웃’은 모두 〈니체〉로 가는 길의 동반자인 셈이니까요. 혹은, 이끌어주는 이들이기도 하고.

선생님: 나도 너와의 대화가 즐겁다.

필자: 저도요, 선생님. 늦은 시간까지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