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파록 #1. 이름은 사물의 본질을 지시하는가

논파록 #1. 이름은 사물의 본질을 지시하는가

2021-07-18 0 By 커피사유

논파록(論破錄)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지적 동반자들과 함께 어떤 주제에 대하여 토론 혹은 토의하면서 완성시켜가는 생각들을 기록해두는 공간입니다.

이번 논파록의 경우는 Facebook에 필자의 친구가 올린 짧은 원문이 발단이 되어 필자와 친구 간에 2021. 7. 18. 오후에 진행되었던 Facebook 덧글에서의 논쟁을 보존을 목적으로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다만 덧글란에서 시간차에 의한 덧글의 엇갈림이 몇 번 발생하였으므로, 이 부분들은 순서에 맞게 교정하였음을 서두에 밝힙니다.

발문(發文)

무언가 생각이 떠올랐다. 어떤 단어를 정의내리는 것이 과연 의미있는 일일까. 결국 그 단어를 표현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그 단어 말고는 없다.

태양은 태양이고, 달은 달이며, 사람은 사람이고, 나는 나다. 오히려 어떤 수사들이나 장식을 붙여서 그 단어를 설명하려 할수록 명확해지지 않는 것 같다.

어쩌면 이름 자체가, 그 물체에 대한 명확한 본질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름이 그 물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물체의 특징을 통해 역으로 그 이름을 설명하려는 것이 이상해보이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생겼다.

논쟁(論爭)과 논의(論議)

필자: 예전에 노자의 「도덕경」 중에는 이런 구절이 있더라.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 풀이하자면 “이름이 아무리 이름이라도 항상 바른 이름은 아니다.” 정도가 되는데, 아마도 노자의 생각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음.

친구: 약간 다른 생각이었는데. 노자의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은 이름마저도 그 사물의 본질을 담지 못한다는 것이고, 제 생각은 사물의 이름이 본질을 부여한다는 것.

필자: 그렇군. 그렇다면 노자의 생각도 비슷하지 않았을까라는 코멘트는 취소. 네 생각을 잘못 이해했던 듯. 하지만 과연 사물의 이름이 사물에 본질을 부여하는 것이 맞을까? 왜, 그런 이야기 있잖아. “책상을 이제부터 의자라 부르기로 하겠습니다”라고 제목을 붙여도 될 만한 모 프랑스 구전(口傳).

친구: 그곳에서는 책상 대신 의자라는 단어가 그 물체를 뜻하지. 그 책의 이야기는 단어 교환으로 인한 언어체계의 변화와 그로 인한 소통의 어려움을 주제로 한것으로 아는데. 우리가 책상을 떠올리며 책상을 보는것과 그 책의 화자가 의자를 떠올리며 의자를 보는것은 결국 근본적으로 같지. 다만 우리와 체계가 다르기에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는거고.

필자: 아니, 정확하게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인가 그 부분에 제시되었던 내용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마 내가 이해한 게 맞다면 언어도 결국은 사물의 본질을 가리키는데 부적절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중. 만약 사물의 본질이 언어만을 통하여 충분히 제시될 수 있다면, 어째서 하나의 물체를 가리키는 수백개의 언어가 존재할 필요가 있는거야?

친구: 생각해보면 이름은 본질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이 나에게 가지는 의미를 포함하고 본질을 떠오르게 하는 트리거에 더 가까운 듯. 그리고 하나의 물체를 가리키는 수백개의 단어는 각 문화권에서 중점적으로 보는 성질이 다르고 그걸 표현하는 체계가 다르기 때문일걸.

필자: 그렇겠지. 그러니 이름은 본질을 전적으로 지시하기 보다는, 그저 본질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봐야 할 뿐이라고 생각함. 차라리 그 생각1이 맞을 것 같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연상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친구: 부정할수는 없지. 우리가 각자 차이가 있는 물체를 하나의 관념으로 퉁칠 수 있다는 자체가 그것들의 공통점을 포함한 관념이 있다는 거니까. 플라톤은 거기에 이데아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고.

필자: 그렇지… 그러니까 노자가 名可名非常名 뒤에다가 “無名天地之始有名萬物之母(무명천지지시유명만물지모)”라고 써 놨지. 그게 뜻이 ‘무명’ (즉, 추상. 분명히 있지만 이름붙이기는 참 뭐한 그런 것들)은 하늘과 땅의 기원이고, ‘유명’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실체)은 만물을 기르는 단순한 양육자일 뿐이라는 거니까.

친구: 전적으로 지시하는 것보다는 부분적으로 나타내는 것. 파일이 가득한 폴더도 담긴 파일을 가리키는 폴더로 불리는 것이 아닌 폴더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

필자: 그런데 그 파일이 가득한 폴더의 이름이란 보통은 그 담긴 파일 전체를 지시하는 이름이 붙여진다는 점에서, 오히려 전적으로 지시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데.

친구: 정리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차이는 언어 체계의 차이와 별 다르지 않을 것이고,실제로 수사가 붙은 물체, 예를 들면 싱싱한 사과, 덜익은 사과, 초록색 사과, 등의 여러 종류의 사과라는 파일이 사과라는 폴더 안에 있는 식인거지.

필자: 하지만 그 모든 사과의 모습들을 종합하여 그 파일을 사과라고 부르는 거 아닌가?

친구: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의 사과들이 각각 하나의 파일로 대응되고, 폴더에 정리하는 사람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 종합하여 사과라는 이데아를 만드는 것.

필자: 따지자면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한 관념과 동일한 거지. 싱싱한 사과, 덜익은 사과, 초록색 사과 등, 현상적인 사과는 무수히 많은 모습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모두 보편적으로 지칭하는 공통 추상인 「사과」가 존재한다, 이 쪽과 비슷한 이야기로 들리는데.

친구: 비슷하지. 다만 순서의 차이라고 생각함. 플라톤은 이데아에서 현실이 나왔다고 주장했으니.

필자: 음, 그러니까 각각의 파일(폴더)안에 정리된 낱장들의 총합으로 한 사람의 이데아가 형성된다는 거네.

친구: 뭐, 결과만 보면 차이가 없을지도.

필자: 그지. 그건 나도 플라톤과 생각이 반대여서 말이야.2 거꾸로인듯. 현실에서 추상으로 가는 방향이 맞는 듯. 그나저나, 차이가 없는게 아니라 중대한 차이가 있지. 무엇이 “본질적이냐”에 관한 중대한 차이. 그러니까 라파엘로의 그림인가 거기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리키는 손가락 방향이 다른 거 아니냐고… 그래서 더더욱 나는 이름에 본질이 있다에 찬성하지 못하겠음. 본질이 나는 현실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리고 네 말대로 그러한 본질들의 종합으로 한 사람의 추상이 구성되기 때문에.

친구: 어쨌든 현재에서는 ‘이데아’와 ‘현실’이 서로 상충하면서 서로를 뜻해주고 있으니까. 생성 초기면 모를까, 지금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 물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이 먼저인지에 대해 싸운거고. 한편, 내 언어 선택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이름에 그 물체의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된 본질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체를 그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본질이 담겨있다는 의미. 정확하게 말하면 본질보다는 특징이 더 맞으려나…

필자: … 적어도 뉴스에선가 멀티버스의 시대가 온다 뭐냐 하면서 VR과 같은 각종 추상적 세계와 현실에 대한 넘쳐나는 혼동이 매스 미디어에 보도되는 시대에는 아무래도 무엇이 먼저냐는 중요한 것 같은데. 게다가 공유한다고 보기는 좀 그렇긴 한데. 뭔가 공유하는 구석이 있다고는 말할 수는 있겠지만 전부 공유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떠올리는 ‘사과’랑 네가 떠올리는 ‘사과’랑 같은 이미지일 확률을 생각해봐.

친구: 선과 악이라는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두 관념처럼, 이데아와 현실도 그런 관계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 무엇이 먼저 생겨났든간에, 그러니까 이데아에서 현실이 분화했든 현실에서 이데아가 응집되었든 간에, 현재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딱히 구별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필자: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추상과 현실 중 무엇이 더 근본적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하여 답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술적 진보의 결과에 직면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친구: 하지만 그것이 특정한 과일 종을 나타내는 것은 분명하지. 사과라는 폴더속에 어떤 ‘사과’파일을 떠올리는가에 대한 것은 다를 수 있지만. 그 폴더의 이름을 ‘체리’라고 붙인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미지를 공유하잖아.3 인류라는 공통된 체계 속에 속한 사람들이 픽토그램이라는 공통된 추상화된 상징을 보고 같은 종류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

필자: 결국 그 말 또한, 전적으로 공유하는 구석이 「있다」일 뿐인 거지… 그러니까 이름은 추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거지. 어쩌면, 이름은 추상과 현실을 잇는 매개채로서 언어에서 기능하고 있는 것일지도. 그나저나, 그 픽토그램 쪽은 뭐, 하긴, 언어를 넘은 어떤 공통적 추상의 연상도 존재하는 것 같기는 하니까.

친구: 언어를 넘어섰다고 해도, 픽토그램을 공유한다는 자체가, 인류의 뇌라는 공통적인 언어해석 체계를 공유하니까. (뭔가 어디서 읽어본거 같은데 몇쪽이더라)

필자: 몰라, 적어도 『괴델, 에셔, 바흐』는 아닐 듯.

주석 및 참고문헌

  1. (커피사유 주) 여기서 ‘그 생각’이란 이름은 본질을 포함하는 것이 아닌, 트리거에 가까울 것 같다는 친구의 생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2. (커피사유 주) 이 부분은 친구가 “순서의 차이라고 생각함.”이라고 진술한 부분에 대한 답변이다.
  3. (커피사유 주) 이 부분은 친구가 필자의 “사과에 대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떠올린 이미지가 동일할 것인가”라는 의문 제기에 대한 답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