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8’에 대한 해제(解題)

2022-03-25 0 By 커피사유

나는 블로그 About 페이지에 프리드리히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의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Section에 등장하는 제8절을 인용해두었는데, 니체가 처음에 그러했듯이 많은 사람들 ― 심지어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까지도 ― 에게 오해를 낳을 수 있을 만한 표현이 많아서, 내가 이 절을 어떻게 생각했기에 인용한 것인지를 정확히 여기에 밝혀두고자 한다.

우선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의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의 제8절 전문을 보자. 필요에 따라서는 내 해석에 따라 주석도 달아두었다:


타인과의 교제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야기시키는 내 본성의 마지막 특징에 대해 운을 떼어도 될까? 나는 섬뜩할 정도로 완벽하게 민감한, 순수에 대한 본능1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영혼의 근접을 또는 ― 뭐라고 말해야 하나? ― 모든 영혼의 가장 내적인 것, 영혼의 ‘내장’을 생리적으로 지각할 수 있다 ― 냄새 맡을 수 있다…… 이 민감성은 내게 모든 비밀을 감지하고 파악해내는 심적 촉수를 제공한다 : 몇 가지 본성들의 밑바닥에는 수많은 은폐된 오물들이 있다.2 아마도 나쁜 피 때문에 생겼을 터이며 교육에 의해 하얀칠이 칠해졌어도, 나는 그것을 한 번만 접촉해보면 곧 의식할 수 있다.3 내가 제대로 관찰했다면, 내 순수함에 해가 되는 본성들도 자기들 쪽에서 내가 구토하지 않으려 조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 그렇다고 그들의 냄새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4 습관적으로 그래왔듯 ― 나 자신에 대한 극도의 순수함은 내 생존 조건이다. 나는 불결한 조건에서는 죽고 만다5 ― 나는 말하자면 물속에서 계속 헤엄치고 목욕하며 첨벙거리고 있다. 어떤 완벽하게 투명하고도 빛나는 요소들 안에서 말이다. 그래서 내게 인간과의 교제는 내 인내심6에 대한 작지 않은 시험인 것이다 ; 내 인간애는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내가 그들과 공감한다는 것을 참아내는 데7 있다…… 내 인간애는 끊임없는 자기 극복이다.8 ― 하지만 나는 고독이 필요하다.9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내게는 회복, 내 자신에게로의 되돌아옴, 자유롭고 가볍게 유희하는 공기의 숨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전체는 고독에 대한 송가이다. 또는 나를 이해할 수 있다면 순수에 대한 송가라고도 할 수 있다…… 다행히도 순수한 바보에 대한 송가는 아니지만. ― 색채를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자는 그것을 다이아몬드라고 부를 것이다. ― 인간에 대한 구토. ‘잡것’에 대한 구토는 언제나 내게 가장 큰 위험이었다…….10 차라투스트라가 구토로부터의 구제에 대해 하는 말을 들어보겠는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떻게 나는 구토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가? 누가 나의 눈을 젊게 만들었는가? 어떻게 나는 그 어떤 잡것도 샘가에 얼씬거리지 않는 높은 경지에까지 날아 올라왔던가?
내 구토 스스로 내게 날개와 샘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능력을 준 것인가? 진실로 기쁨의 샘을 재발견하기 위해 나는 더없이 높은 곳으로 날아 올라야만 했다! ―
오오, 내 형제들이여, 내가 그 샘을 찾아냈다! 여기 더 없이 높은 곳에 기쁨의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그 어떤 잡것도 함께 마시겠다고 하지 않는 생명이 있다!
지나치게 격렬할 정도로 너는 내게 밀려오고 있다. 기쁨의 샘이여! 너는 다시 채우기 위해 잔을 자주 비우고 있구나!
네게 좀더 겸손하게 다가가는 법을 나는 배워야 하리라 : 너무나 격렬하게 나의 심장이 너를 향해 몰아치고 있으니 :
― 짧지만 뜨거우며, 우울하면서도 행복으로 가득 찬 내 여름이 내 심장 위에서 작열하고 있다 : 이 한여름의 심장이 어찌나 너의 냉기를 갈망하는지!
우물쭈물 망설이던 내 봄날의 우수도 벌써 지나갔다! 유월에 날린 내 심술궃은 눈발도 지나갔다! 나는 온통 여름이 되었으며 여름의 한낮이 되었다!
― 차가운 샘물이 있고 행복한 정적이 서려 있는 이 높은 산정에서의 한여름 : 오라, 벗들이여. 그 정적이 한층 더 행복해지도록!
이곳이야말로 우리의 높은 경지이자 고향이기 때문이다 : 더러운 자들이 올라와 갈증을 풀기에는 너무나 높고 가파른 이곳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벗들이여, 맑은 시선을 내 기쁨의 샘 속으로 던져보아라! 어찌 그 샘물이 그 때문에 탁해지겠는가? 샘은 그의 깨끗한 눈길로 너희를 향해 마주 웃어주리라.
미래의 나무 위에 우리는 보금자리를 튼다 ; 독수리가 부리로 우리 고독한 자들에게 먹을거리를 날라다주리라!
진정 깨끗하지 못한 자들이 우리와 함께 맛봐서는 안 될 그런 음식을! 그들은 불덩어리를 씹은 줄 알 것이며, 그들의 주둥이를 불에 데게 되리라.
진정 우리는 이곳에 더러운 자를 위한 어떤 거처도 마련해놓지 않았다! 그들의 육체와 영혼에게 우리의 행복은 차디찬 얼음 동굴이 되리라!
우리는 아주 거센 바람처럼 그들 위에 살고자 한다. 독수리와 이웃하고, 만년설과 이웃하며 태양과도 이웃하면서 : 거센 바람이라면 그렇게 산다.
언젠가 나는 어느 바람처럼 그들 사이를 휩쓸고 지나가려 한다. 그리하여 내 정신으로 그들 정신의 ― 숨결을 빼앗고자 한다 : 그렇게 내 미래가 원한다.
진정 차라투스트라는 온갖 낮은 것들에게는 거센 바람이다 : 그의 적들에게, 그리고 침을 뱉고 토해내는 모든 자에게 이렇게 충고하리라: "바람 쪽으로 침을 뱉지 않도록 조심하라!"......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니체전집 15: 바그너의 경우 · 우상의 황혼 · 안티크리스트 · 이 사람을 보라 · 디오니소스 송가 · 니체 대 바그너》, 백승영 역, 책세상, 2002, 345-348쪽.

위 인용문에 대한 나의 종합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다.

위의 글귀에서 등장하는 니체의 〈나 자신에 대한 극도의 순수함〉은 자신의 안으로부터 ‘타인’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으로부터 ‘불결한 것’을 몰아내는 것에 있다. 이 〈불결함〉은 ‘불결한 타인’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니체의 말은 ‘타인 안에서 나 자신이 발견할 수 있는 불결함’ ― 이 ‘자기 자신의 안에서도 발견된다고 판명’되는 경우의 그 ‘불결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니체는 〈나의 인간애는 그들과 공감한다는 것을 참아내는 데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공감의 대상이란 다름 아닌 자신과 타인 안에 공통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그 ‘불결한’ 것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과의 교제는 니체에게 있어 불결한 것들에 대한 구토를 참아내는 것, 불결함에 대한 인내심의 시험으로 승화하는 것이며, 이는 또한 니체와 타인 모두에게 해당하는 ― 그러한 인간 모두의 안에 있는 그 ‘잡것’들에 대한 구토로 나타나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구토의 대상은 ‘사람’이 결코 아니며, 이는 오히려 ‘자신과 타인 모두를 포함하는 그러한 보편적인 인간 안에 있는 가려진 오염’이다. 이들을 솎아내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고독 ― 이 필요하다는 것, 스스로의 안에서 이러한 잡것들을 찾아 솎아내는 작업을 하기 위한 자기 수양이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고독을 통한 자기 수양이란 자신의 회복이기도 하면서 순수한 자신을 되찾는 일이기도 하고, 또한 진정한 자신으로 스스로가 되돌아가는 것이자 자유롭고 가볍게 유희하는 것으로서의 진보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와 같은 나의 해석이 옳은 것인가는 니체를 더 읽으면서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다. 나는 니체는 무엇을 역겹다고 여긴 것인지, 그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주석 및 참고문헌

  1. (커피사유 주) 내가 니체의 순수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다면, 나도 그러하다.
  2. (커피사유 주) 니체는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지금 이해한 니체의 순수 개념에 따르면 이 이후에 설명하는 이 은폐된 오물들은 니체는 물론이거니와 나 자신의 밑바닥에도 있지 않을까 싶다.
  3. (커피사유 주) 니체는 자신이 좋은 피를 물려받은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 나만큼은 니체와 나 자신 모두가, 즉 인간 모두가 여기서의 ‘나쁜 피’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4. (커피사유 주) 내 생각으로 이 역겨운 ‘그들의 냄새’는 자기 자신에게서도 날 수 있는 것으로, 냄새가 역겹다고 여기는 이유는 그 냄새 자체가 역겨운 것도 있지만 그 역겨운 것이 나 자신 안에도 있다는 사실 자체도 역겹기 때문이다.
  5. (커피사유 주) 나 자신 안으로부터 불결한 ‘잡것’들, 즉 그러니까 스스로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 즉,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또는 변화의 잠재태, 변화의 능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 모든 것을 몰아내지 않으면 당연히 자기 자신을 살아있는 것으로 주장할 수 없으니, 이러한 불결한 조건 하에서는 ‘죽고 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 (커피사유 주) 적어도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여기서 인내의 대상은 자기 자신 안에도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러나 현재 발견한 것은 타인 속인 그 은폐된 오물, ‘잡것’, 불결한 것이지 않을까 싶다.
  7. (커피사유 주) 공감은 두 사람이 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타인의 속에서 발견한 ‘불결한 것’에 공감한다는 것은 나 자신 또한 아직도 ‘순수하지 못한 조건’ 아래에 있음을 ―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그 모든 수단과 내적인 요소들로만 스스로를 채우지 못하였음을 ― 증명하는 것이므로, 공감은 자신에 대한, 타인에 대한, 자신과 타인 모두의 안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 불결에 대한 구토의 앞에 있는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8. (커피사유 주) 그러므로 인간애는 끊임없이 타인으로부터 발견한 ‘불결한 것’을 자기 자신 안에서 찾고 이를 다시 솎아내는, 이 불결한 것을 퇴출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거나 그것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끊임없는 ‘자기 극복’인 셈이다.
  9. (커피사유 주) 자기 자신 안에서의 불결의 퇴출은 타인과 ‘같이’ 하는 작업이 아니다. 타인도 자기 ‘스스로’ 할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스스로’라는 말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역시 미루어볼 수 있듯이, 불결의 퇴출은 ‘스스로’ 하는 작업이다. 자기 안에 있는 것에는 오직 자기 자신의 고독으로써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 (커피사유 주) 내가 정확히 이해한 것이 맞다면, 그 구토가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오염되었다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