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춤 #10. 발터 벤야민,

잠시, 멈춤 #10. 발터 벤야민, <미메시스 능력에 대하여>

2021-03-18 0 By 커피사유

잠시, 멈춤 시리즈는 필자가 읽은 글 중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일부, 혹은 전부 인용하는 등, 이 카페에 모아 두는 포스트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로 포스팅되는 모든 글의 경우, 필자가 쓴 글이 아님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포스팅에 사용되는 모든 글의 출처는 글의 맨 하단에 표시합니다.

이 글의 경우는 상당한 다른 개념이나 문장의 상징을 알고 있어야 이해가 되는 경우가 많은, 다소 난해한 글이므로 특별히 주석을 추가로 달아 둡니다.

본문

자연은 유사한 것들을 만들어낸다. 이는 의태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사한 것을 생산해내는 최고의 능력을 갖고 있는 존재는 인간이다.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유사성을 파악하는 능력은 유사해지고 또 유사하게 행동하려는 예전의 엄청난 강압의 잔재에 불과하다. 어쩌면 인간이 지닌 상위의 기능들 가운데 미메시스 능력에 의해 결정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기능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미메시스 능력에는 역사가 있다. 그것도 계통 발생과 개체 발생 둘 다의 의미에서다. 개체 발생적 의미에서는 놀이가 미메시스 능력의 교본을 보여준다. 어린아이들이 하는 놀이들은 도처에서 미메시스적 태도로 특징지어지는데, 어린아이들의 놀이 영역은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고 모방하는 것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어린아이들은 상인이나 선생을 흉내 내는 것만이 아니라 물레방아나 기차도 흉내 내며 논다. 이와 같은 미메시스적 태도의 훈련이 어린아이들에게 도대체 어떤 이득을 가져다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미메시스적 태도의 계통 발생적 의미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오늘날 유사성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주지하다시피 예전에 유사성의 법칙이 지배한 삶의 영역은 광범위했다. 소우주뿐만 아니라 대우주에도 유사성이 지배했다. 이 자연적 상응물들은 우리가 그것들이 모두 인간이 지닌 메메시스 능력을 – 인간은 이 미메시스 능력을 통해 그에 대답하는데 – 자극하고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식할 때 비로소 결정적인 의미를 얻는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은 미메시스의 힘들이나 미메시스의 객체들 또는 대상들이 수천 년이 흐르는 동안 똑같은 것으로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유사성들을 만들어내는 재능과 – 예를 들어 무희들의 경우 그들의 가장 오래된 기능이 그런 일이었는데 – 함께 그런 유사성들을 인식하는 재능이 역사가 흐르면서 변해왔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 변화의 방향은 미메시스 능력이 점점 쇠약해진 쪽으로 규정된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현대인의 지표세계는 명백하게도 옛날 종족들에게 익숙했던 마법적 상응관계들이나 유비(類比, Analogie)들의 극히 미미한 잔재만을 지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물음은 그렇다면 이러한 능력이 몰락했느냐 아니면 변형되었느냐이다. 미메시스 능력이 그 둘 중 어느 방향으로 발전해왔느냐에 대해 답하기 이해 몇 가지 힌트를 우리는 점성술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얻어낼 수 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아주 먼 과거에 모방 가능하다고 여겨진 과정들 중 천체에서 일어나는 일도 속했다는 점이다. 춤이라든지 그 밖의 제의 행사에서 그처럼 모방이 만들어지고 그처럼 유사성이 다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미메시스의 천재가 옛날 사람들에게 실제로 삶을 규정하는 힘으로 작용했다면, 이 재능을 완벽하게 소유하면서, 특히 우주에 존재하는 형상에 자신을 완전하게 동화하는 가운데 이제 갓 태어난 어린아이를 생각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점성술의 영역에 대한 이상의 지적은 비감각적 유사성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첫 실마리를 줄 수 있다. 물론 우리의 삶 속에는 한때 그와 같은 비감각적 유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특히 그러한 유사성을 불러내는 것을 가능케 했던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비감각적 유사성의 개념이 갖는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해명해줄 한 규준을 갖고 있다. 이 규준은 언어이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미메시스 능력이 언어에 미친 영향을 시인해왔다. 그렇지만 그것은 원칙 없이 이루어졌고, 사람들은 그때 미메시스 능력의 역사는 차치하고 그것의 깊은 의미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미메시스 능력이 언어에 미친 영향에 대한 생각들은 일상적, 감각적 유사성의 영역과 밀접하게 결부된 채로 있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언어 생성에서 모방적 태도에 의성어적 요소라는 이름 아래 자리를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명약관화하듯이 언어가 기호들의 어떤 약속된 체계가 아니라면, 언어의 본질에 접근하려고 시도할 때 우리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의성어적 설명방식으로 등장하는 것과 같은 생각들로 거듭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이 의성어적 설명방식이 더 발전될 수 있고 또 보다 더 나은 통찰에 통합될 수 있느냐이다.

“모든 낱말은 – 그리고 언어 전체는 – 의성적이다”라고 누군가 주장했다. 그러나 이 문장 속에 들어 있을 프로그램이나마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어렵다. 그렇지만 비감각적 유사성의 개념이 모종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즉 여러 언어에서 동일한 어떤 것을 의미하는 낱말들을 찾아내 그 의미된 것을 중심에 두고 주위에 빙 둘러 늘어놓을 경우, 어떻게 종종 서로 하등의 유사성도 보이지 않을 그 낱말들이 모두 그 낱말들의 중심에 놓인 그 의미된 것과 유사성을 보이는지를 연구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종류의 유사성은 여러 상이한 언어에서 똑같은 것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갖는 관계에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숙고를 전혀 발성된 말에만 제한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글로 씌어진 말을 두고서도 아주 똑같이 그러한 숙고를 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글로 씌어진 말이 – 많은 경우 어쩌면 발성된 말보다 더 분명하게 – 그것의 문자상이 의미된 것에 대해 갖는 관계를 통해 비감각적 유사성의 본질을 밝혀준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요컨대 소리로 말한 것과 의미된 것 사이의 결합뿐만 아니라 글로 씌어진 것과 의미된 것 사이의 결합, 그리고 글로 씌어진 것과 소리로 말한 것 사이의 결합도 이루어내는 것이 비감각적 유사성인 것이다.

필적 감정학은 육필로 쓴 글들에서 그 글을 쓴 사람의 무의식이 숨겨넣은 상들을 알아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이처럼 글을 쓰는 사람의 행동에서 표현되어 나오는 미메시스 능력이 글이 생겨났던 아주 먼 옛날에는 글쓰기 행위에 대해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고 상정해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문자는 언어와 더불어 비감각적 유사성, 비감각적 상응관계들의 서고가 되었다.

그러나 언어와 문자의 이러한 측면은 그것들의 다른 측면, 즉 기호적 측면과 무관하게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어의 모든 미메시스적인 것은 흡사 불꽃이 그런 것처럼 일종의 전달자에게서만 현상이 되어 나타날 수 있다. 이 전달자가 기호적인 것이다. 그처럼 단어들 또는 문장들의 의미연관이 전달자이며, 이 전달자에서 비로소 섬광처럼 유사성이 현상화되어 나타난다. 왜냐하면 인간에 의한 유사성의 생산은 – 인간에 의한 그것의 지각과 마찬가지로 – 많은 경우, 특히 중요한 경우에 번득이며 지나가버리고 마는 순간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유사성은 휙 스쳐 지나간다. 글쓰기와 읽기의 빠른 속도가 언어 영역에서 기호적인 것과 미메시스적인 것의 융해 과정을 상승시키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다.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기.” 이러한 읽기가 가장 오래된 읽기이다. 그것은 모든 언어 이전의 읽기, 동물의 내장, 별들 또는 춤에서 읽기이다. 나중에 룬 문자나 상형문자와 같은 새로운 읽이의 매개채들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것들이 한때 신비적 행위의 토대였던 미메시스적 재능이 문자와 언어로 진입하게 된 단계들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가정해볼 수 있다. 이처럼 언어는 미메시스적 태도의 최고 단계가 되었고 비감각적 유사성의 완벽한 서고, 그 안으로 미메시스적으로 생산하고 파악하는 이전의 능력들이 남김없이 전이되어 들어가서 마법의 힘들을 해체할 정도까지 이르게 된 매체가 되었을 것이다.

– 발터 벤야민, <미메시스 능력에 대하여> /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번역자의 과제 외”, 최성만 역, 도서출판 길 (2008).

주석

이 부분에 대한 주석은 내가 작성해놓은 두 개의 강의록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너무 길어서 이 블로그에 옮기기는 분량이 너무 길 뿐더러 과제로 시달리는 나 자신에게도 못할 일이다. 서울대학교 강우성 교수님께서 이 발터 벤야민의 <미메시스 능력에 대하여>에 관해 말씀해주신 내용들을 정리한 강의록을 아래와 같이 pdf로 첨부하니, 참고하길 바란다.

다만 아래의 모든 강의록의 결론은 결국 두 가지인데, 하나는 ‘미메시스 능력’은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능력’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메시스 능력’은 고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며 쇠퇴하였다기 보다는 언어와 결부되어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