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춤 #14. 발터 벤야민, 나의 서재 공개

잠시, 멈춤 #14. 발터 벤야민, 나의 서재 공개

2021-04-07 0 By 커피사유

잠시, 멈춤 시리즈는 필자가 읽은 글 중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일부, 혹은 전부 인용하고, 필요에 따라 주석을 곁들이는 등, 커피, 사유의 글 모음집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로 포스팅되는 모든 글의 경우, 필자가 쓴 글이 아님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글의 출처는 ‘본문’ 단락 가장 밑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본문

일러두기

이번 잠시, 멈춤 시리즈 포스트에서는 글의 전부가 아닌 일부만을 부분 발췌하여 인용하고 있음을 사전에 알립니다.

#1

따라서 나는 다음에서 무언가 좀더 분명하고 구체적인 것을 얘기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나는 여러분들에게 어떤 수집가가 그의 장서에 대해 갖는 관계, 그러니까 어떤 수집의 내용보다는 수집하는 일 자체가 어떠한가를 한번 보여 주고 싶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수집하는 일을 책을 구입하는 여러 가지 종류의 방법이라는 문제와 결부시켜 고찰한다면 그것은 전혀 자의적인 것이 될 터인데, 왜냐하면 수집하는 일을 책을 구입하는 이런저런 방법이라는 식으로 파악하는 것은, 자신이 소유한 장서를 바라볼 때 밀려드는 모든 수집가에 공통된 기억의 밀물을 막아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일체의 정렬이란 혼돈과 접하고 있기 마련이지만, 수집하는 정열은 여러 기억의 혼돈과 접하고 있다. 아니 나는 한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즉 나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일들을 온통 물들이고 있는 우연과 운명은 바로 이러한 책들의 혼란 속에서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낸다고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 까닭은 책을 수집한다는 것은 혼돈 이외의 그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고 또 그것이 질서로 보여지는 것은 다만 습관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2

따라서 수집가의 삶에는 무질서와 질서의 변증법적 긴장관계가 자리잡고 있다. 물론 수집가의 삶은 그 밖의 다른 것과도 관계를 맺고 있다. 우선 그는 소유에 대해 수수께끼 같은 관계를 갖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좀더 얘기가 될 것이다. 다음으로 수집가는 사물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 물론 이때 그가 맺는 사물과의 관계는 그 사물들이 지닌 기능가치, 즉 그것들의 실용성 내지 쓰임새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그 사물들을 그것이 갖는 운명의 무대로서 연구하고 사랑하는 그런 관계이다. 수집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큰 매력은 하나하나의 사물들을 어떤 마력적 범주에 가두어두는 일이다. 이렇게 되면 각각의 사물들은, 그것이 구입되는 순간 이러한 마력적 범주에서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기억되고 생각되어지며 의식되어지는 모든 것은 수집가의 소유재산의 초석이 되고 액자가 되고 원주가 되고 또 자물쇠가 되는 것이다. 시대, 지역, 손재주, 전 소유주 – 사물의 이러한 배경들은 서로 합쳐져서 수집가에게는 하나의 마력적 백과사전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마력적 백과사전의 핵심이 바로 수집가가 소유하는 대상물의 운명이다. 그러니까 이미 그 테두리가 정해진 운명의 영역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 위대한 인상학자가 – 수집가는 사물세계의 인상학자이다 – 운명의 해석자가 되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수집가를 보기만 해도 우리는 어떻게 그가 유리 진열장 속에 있는 대상들을 다루고 있는가를 당장 알 수 있다. 그는 그 대상들은 손에 잡자 말자, 마치 영감이나 받은 것처럼 그것들의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집가가 지니고 있는 마력적인 면 – 아니 나는 그러한 면을 수집가가 가지고 있는 해묵은 이미지라고 부르고 싶다 – 에 대해서는 이쯤 얘기해 두자.

#3

책을 구입하는 일이란 결코 돈의 문제이거나 아니면 전문적 지식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고 이 두 요소가 구비된다고 해서 진정한 서재가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서재에는 언제나 무언가 투시될 수 없고 또 동시에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독특한 것이 있다. 도서목록으로부터 책을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가 조금 전에 언급한 그러한 <특성 외에도> 직감적인 안목과 감식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출판년도, 출판장소의 이름, 크기, 전 소유주, 장정 등과 같은 모든 세부적 사항은 그에게 많은 힌트를 줄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이때 이러한 것들이 함께 어울려 내는 하모니와 이 하모니의 질과 강도에 따라서 그것이 자기 자신에 속할 성질의 것인가 아닌가를 식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이로써 나는 정오부터 시작한 나의 책상자를 거의 다 비우고 자정에 다다르고 있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 말고도 수집과 결부되는 다른 기억들이 나를 엄습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지나 기억 등과 같은 생각들이 아니라 내가 수많은 수집품을 발견하였던 도시들 예컨대, 나폴리, 뮌헨, 단찌히, 모스크마, 플로렌스, 바젤, 파리 등의 도시들에 대한 기억이다. 뮌헨의 화려한 로젠탈의 건물, 이미 죽은 한스 라우가 살던 집인 단찌히의 탑식건물, 곰팡내 나는 북베를린의 취센구트의 도서창고, 이들 책이 쌓여 있던 방들, 뮌헨 학생시절의 하숙방의 기억, 스위스 베른 학생시절의 방, 브리젠즈 호수가에 위치한 이젤트 숲의 고독, 그리고 수천권으로 불어나기 시작한 책중에서 삼사천권이 소장되어 있는 나의 베를린의 어린 시절의 방 – 이러한 모든 것들이 수집과 결부된 내가 살던 도시에 대한 기억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아! 이러한 기억은 수집가의 커다란 기쁨이자 한 개인의 더할나위 없는 행복이 아닌가? <책벌레>라는 이름의 가명을 쓰고 미심쩍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만큼 별볼일 없는 사람도 없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 그 사람만큼 쾌적한 삶을 누리는 사람도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알 수 없는 정신이 깊이 도사리고 있어서, 이 정신에 의해 이 수집가는 – 여기서 내가 뜻하는 수집가는 진정한 의미의 수집가, 다시 말해 응당 그래야 할 수집가이다 – 사물에 대해 갖는 가장 깊은 관계라는 의미에서의 소유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수집가에 있어서는 사물이 그의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그 사물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상에서 집을 짓는 돌로서의 책을 가지고 수집가가 살고 있는 집을 여러분들 앞에서 하나 세워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그가 세워 놓은 집 속으로 사라지려 한다. 그리고 이는 마땅히 그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발터 벤야민 作, 안성환 易, 민음사 (1998). pp. 30-39.

주석

이 글은 서울대학교 강우성 교수님의 ‘문학과 철학의 대화’ 강좌에서 읽게 된 글이다. 몇몇 글귀들을 기억해두고 싶어 이렇게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