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孤獨)을 쓰는 시간

고독(孤獨)을 쓰는 시간

2020-11-30 0 By 커피사유

이 掌편소설은 필자가 고등학교 문학 수업 시간 과제의 일환으로, 다른 2人의 친구들과 함께, 과학고등학교에서 조기졸업/조기진학 발표 이후 자기소개서를 쓰는 기간까지 겪었던 실제 사건들을 기반으로 하여 창작되었습니다.

필자가 혼자서 단독 창작하지 않았고, 다른 두 명의 공동 집필자와 함께 저술하였음을 알립니다. 다만, 이 버전의 경우는 필자가 약간 두 명의 공동 집필자의 기술 부분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원본의 경우는, 이 포스트의 최하단에 첨부되는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01. 20XX-XX-XX. 목. 19:14.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분명히 십중팔구 우울증 걸려서 죽을 것이 분명하다. 겉으로는 웃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어도, 발 끝부터 점차 옥죄어오는 어떤 것이 내 등을 타고 올라오면서 곧 내 숨통을 끝내 놓을 것만 같다.

자기소개서를 멋지게 빨리 끝내놓고 독서실에서 수학의 정석이나 좀 복습하려고 했던 내 계획은 완전히 작살났다. 며칠 전에 자기소개서를 쓰기 시작할 즈음에는 금방 끝날 줄 알았더니, 첫 번째 피드백에서부터 완전히 틀어졌다.

– 솔직하지 못해.

선생님께서 내 자기소개서를 읽고 하신 첫 말씀이셨다.

– 네?

– 솔직하지 못하다고. 예전에 말해주었잖니. 모든 글은 솔직하게 쓰라고, 자기소개서도 또한 같단다. 고등학교 때 네가 했던 일, 네가 느낀 것, 그리고 그 속에서 너 자신의 성장의 서사를 담아내는 것이 자기소개서라고. 중간에 네가 예인이와 동아리에서 있던 갈등을 기술하는 부분을 보면, 너는 계속 무의식적으로 네 잘못을 축소하려고 하고 있잖니.

워드 프로세서가 띄워진 눈 앞의 노트북 화면에서 깜빡거리는 커서가 계속 나를 놀려먹는 듯하다. 마치, 검은 선과 하얀 공백이 번갈아가면서 나의 양 귓가에, 한 십오분 전 즈음이었나 – 학년부장 선생님의 고함을 다시금 울리고 있는 것 같다. 어지럽다.

02. 마리와 함께

“자, 활동 승인을 받은 학생들은 이제 자기 자리로 가라. 빨리, 이동!”

학년부장의 이동하라는 고함 소리를 뒤로 하고, 나와 마리는 재빠르게 합강을 빠져나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별로 급할 것은 없었지만 그냥 왜인지 그래야만 할 것만 같았다. 수학3실의 문을 열자, 우리 수학 영재학급 아이들의 특유의 자취와 방정식의 해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어지러이 펼쳐진 혼돈의 방정식과 그 해를 이리저리 건너 뛴 끝에야, 마침내 구석의 한 책상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킬 수 있었다. 과제 연구 집중 기간이 끝난 탓이라, 연구실에는 다른 전람회에 참가하기 위해 보고서를 쓰러 온 나와 마리 외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 것 같았다. 저녁을 먹은 뒤 단골처럼 눈꺼풀을 두들기는 피로 덕에 하품이 피식, 하고 삐져나왔다.

– 마리! 나 오늘 뭐 하면 돼?

– 어… 오늘 예인 씨는 이론적 배경을 마저 써줘. 나는 저기 3D 프린터나 돌리고 있을게.

– 야, 너무 어려운 거 시키는 거 아니야? 원래 이런 건 조장이 하는 거잖아.

– 나도 어려운 거 하는데… 뭐, 정 하기 싫으면 관련 논문이라도 찾아줘. 글쓰는 게 어려우면 같이 하면 되겠지.

마리는 1학년 때부터 같이 과제 연구 활동을 해 오던 녀석이다. 얼굴이 유명 축구 선수 파블로 마리를 닮아서 나는 그를 매번 ‘마리’라고 부르고 있다. 매정할 정도로 축구에 일말의 관심도 없기 때문에 분명 파블로 마리가 누구인지도 모를 터인데, 마리라고 해주면 그는 은근 좋아하는 듯한 미소를 종종 짓는다. 마리도 질수가 없었는지 요즈음 그는 나를 가끔씩 ‘고라니’라고 부르는데, 이게 도대체 나에 대한 애칭인지, 아니면 나를 놀려먹으려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뭐, 내가 예쁜 건 알지만 그래도 고라니라는 별명은 별로 마음에 안 든다.

– 마리야, 혹시 그 얘기 들었어? 우리 학교 뒤뜰에 멧돼지 출몰했대.

– 그래? 근데 멧돼지는 됐고… 혹시, 고라니는 안 나오나?

– 야, 나보다 못생긴 게 누구보고 고라니-고라니거리냐? 너 내가 편하게 느껴지나봐? 여튼, 은근히 귀엽다니까.

– 너보고 고라니라고 한 적 없는데? 아, 혹시 고라니라고 하니까 찔리는거야?

– 아니야! 치, 진짜 못됐어 너.

 장난이 선을 넘기 전에 이 부근에서 정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여튼, 이제 빨리 원래 하려던 일이나 해야겠다. 이제 그 유명한 ‘환영합니다’라는 스크린이 떴으니, 이제는……. 어?

 바탕화면이 바뀌어 있었다. 원래는 그냥 평범한 Windows 기본 하늘색 바탕 화면이었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어떤 축구 선수를 클로즈업한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화면 속에서 그는 녹색 그라운드에서 골을 넣고 세레모니를 하고 있었다. 그가 치켜든 양 손을 뒤로 해서, 흐릿한 초점 속에 환호하거나, 야유하는 군중들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 했다.

– 이거 바탕화면 혹시 네가 바꾼 거야?

– 아니, 내가 한 게 아닌데?

– 근데 왜 바탕화면이 축구 배경 화면이야?

– 축구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는 내가? 어찌 됐든, 내가 한거 아닙니다-.

– 근데 도대체 이거 무슨 팀이지? 파란색이랑, 검은색이랑… 뭐, 축구 잘하게 생기기는 했네.

– 나에게 그런거 물어보지 마시라니까요? 아무것도 모른다구요, 고라니 아주머니.

– 아, 고라니 하지 말랬지! 에잇, 짜증나. 너 진짜-진짜 못돼먹었어. 아주 그냥.

 사실 이 정도가 평소 R&E를 할 때 하는 평범한 대화라서, 어느새 일상으로 자리잡은 것이기에 우리들은 이렇게 투닥거리면서도 사실 서로가 뭔가 악감정이 있어서 그러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만, 선을 넘는 짓 – 즉, 대화 중 그놈의 고라니만 안 꺼낸다면… 아니, 하나 더 있지. ‘고라니’와 ‘그 새끼’만 안 꺼내면 우리들은 별 문제가 없다.

– …근데.

– 어.

– 요즘 K랑은…

 아 씨, 진짜. 또 이런다 또. 저놈의 성격.

– 어우, 제발 K 이야기는 안 꺼내면 안돼? 걔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진짜 하는 짓거리는 죄다 꼰대 그 자체인데, 도무지 다른 애들 생각이라는 걸 안 하는게 되게 진상이라니까. 그자식은 친구가 있기는 있을까?

 – 그래도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 뭐래, 걔 매번 밥도 혼자 먹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작년에 룸메이트랑 말을 한마디도 안 섞었다던데? 도대체가, 얼마나 심각하면 룸메이트랑 대화 한마디도 안 섞을 수 있을까?

– 음… 미안하다. R&E에 집중하자. 괜히 그 얘기를 꺼냈구만.

03. 과거

 조기졸업을 못 하고 3학년으로 진급하게 된 지금, 나는 1학년 때 내신 관리를 소홀히 했던 나 자신이 원망스럽고, 한심하다. 2학년 때부터라도 열심히 공부라는 것을 하겠다고, 내신이 좀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 친구에게 너 무슨 학원 다니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엄마 주선으로 과외도 몇 개 알아보기도 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어떻게든 설득시키면서, 쉬는 시간에 독서실에서 다른 애들의 웃음 소리를 뒤로 하고서 의자에 앉아 각종 참고서를 살펴보던 시간이 점차 늘어가고, 뭔가 걸리적거리기 시작했던 중학생 시절부터 길렀던 머리카락을 어느 날 결심하고 시원하게 잘라버린 후 조금씩 다시 길어지기 시작했지만, 올라도 기껏 해봐야 매번 전교 석차가 3등씩이라는 눈꼽만치 오르는 것이 그 결과였다. 진짜 奀같게 살아야만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일까. 아니, 奀같게 살아도 안되는 것 같았다.

04. 20XX-XX-XX. 목. 19:46.

– 솔직하지 못해. 여전히.

 남들도 솔직하지 않은 세상에서, 어떻게 솔직함을 ‘저’에게만 요구하실 수 있나요, 선생님? 그건 제 잘못이 아니라고요. 모두가 솔직하게 자신의 자기소개서에 고등학교 생활에서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적는다면, 그건 보나마나 위선자와 방관자, 그리고 거짓말쟁이의 서사가 될 것이고, 대학 입학처 파쇄기나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운명을 타고난 최고의 쓰레기가 될 것이 분명하단 말입니다.

세수라도 한번 하고 오자 – 그런 생각에 나는 머리칼을 거의 뽑아버릴 뻔 했던 손에 실린 힘을 빼고, 고개를 들었다. 벌써 7시 30분이었다. 허비한 시간은 되돌릴 수 없겠지만, 어쨌든 다시 지금부터라도 집중해서 자기소개서를 쓴다면 – 어.

05. 마주치다

그것은 오늘 일어났던 일이었다.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수학3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의 일이었다. 마리는 3D 프린터를 돌린다며 계속 수학3실의 혼돈 속에 박혀 있었지만, 그 혼돈을 보고 나 자신의 찝찝한 입 안을 떠올려버린 나는 칫솔을 꺼내어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원래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곤 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그 소리’가 신경적으로 다가왔다. 수학3실의 두 칸 옆에 자리한 수학1실에서는 진학반 애들이 자소서를 쓴답시고 노트북을 펴 놓고서 타이핑을 치는데, 애들 둘만 모여도 시끄러운데 열 명 넘게 모여 있으니 당연히, 그 시끌시끌한 소리가 정말 듣기 싫은 소음으로 다가왔다. 도대체 어떤 놈들인지 얼굴이나 다시 봐 두자 싶어서, 수학1실을 지나가면서 나는 힐끔 창문으로 진학하는 애들을 흘겨보았다. 고개를 들던 K와 우연히, 정말 우연히 눈이 마주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저 살짝 피곤해 보이는 K의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갑자기 온몸에 돌고 있던 혈액이 갑자기 멈추는 듯 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서는 그대로 굳어버렸고, 발 디디고 있던 바닥이 갑자기 푹 꺼지면서 허공에서 휘적거리는 듯한 기괴한 느낌이 나를 휘감았다. 분명 그의 얼굴에는 ‘나는 피곤하다’는 메시지만 담겨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나를 어딘가 깊고, 아주 깊은 곳으로 떨어뜨렸다.

‘정예인, 정신차려. 너 여기서 K 생각 조금이라도 더 하면 안돼! 마리 앞에서 우는 꼴이 좋냐고! 제발, 정신차리자. 제발, 제발, 제발…!’

06. 20XX-XX-XX. 목. 19:58.

그녀였다.

 분명 창 밖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은 그녀였다. 아니, 그녀였을 것이 분명하다. 금방 사라져버리기는 했지만.

 그녀를 이런 식으로 다시 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 때 동아리에서 완전히 틀어진 이후로, 그녀의 얼굴을 복도에서 이따금 종종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서 피해다녔는데, 내가 무심코 뱉은 말들이 혹여나 남을 그녀에게 상처를 줄까봐 스스로 조심하자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는데. 결국은.

 내 존재만으로도 그녀는 상처를 입는 것일까.

07. 20XX-XX-XX. 목. 20:03.

“자, 진학반은 자기소개서 쓰러 올라가라, 빨리. 이동!”

 목요일 늦은 오후라서 그런가, 유난히 상념이 많은 듯 하다. 하지만 그런 나의 상념 따위는 키보드 소리에 반드시 묻혀야 한다. 중요한 것은 대입이지, 이딴 내 망상은 확실히 아니다. 정신을 차리고 뒤에 스탠딩 책상이 하나 있으니, 어디 한번 가서 –

 U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다시 자신의 모니터로 눈길을 돌렸다. 그가 키보드에서 WASD 키를 누르자 무언가 모니터 왼쪽 아래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적어도 워드 프로세서 화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만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제일 뒷 줄에 앉은 10명 중에 6명은 – 비슷하게, WASD 키와 방향키에 그들의 손이 올라가 있었다. 그들의 화면에는 가끔 무언가가 흔들리기도 하고, 무언가가 날아가기도 하고, 무언가가 떨어지기도 하고, 무언가가 어디론가, 어디론가, 어디론가…….

 안돼.

 다시 ‘그 악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다시 나를 집어삼키려 그 입을 벌리는 심연의 눈을 애써 피하며 눈을 모니터로 돌려 이제 3번 항목 – 학교 생활 중 배려, 나눔, 협력, 갈등 관리 등을 실천한 사례를 들고, 그 과정을 통해 배우고 느낀 점을 기술해주시기 바랍니다 – 는 문항에 무엇을 다시 쓸지 고민하려 했지만, 도저히 나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주변의 일렁거림, 금방이라도 목구멍을 찢고 기어이 올라오겠다며 발악하는 메스꺼움이 나를 점차 집어삼키고 있었다.

 머리칼을 부여잡고 아무리 쥐어 뜯어도 소용이 없다. 그 때의 기억이 떠올라서는 안 된다. 그 때의 수렁으로 다시금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 1년 전의 나 자신은 이미 죽었단 말이다!

 그렇게나 버둥거리고, 그렇게나 비틀거리고, 그렇게나 꿈틀거리고, 그렇게나 애처롭게 매달리고. 독서실에서 고개 쳐박고, 방음 헤드셋 쓰고 주변 무시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말든지 ‘나만 잘 하면 돼’, ‘쟤들과 나는 달라.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라고, 어떻게든 나 자신을 한 번 구제해보겠다고 악착같이 살던, 주변 사람들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죽일 놈마냥, 조금의 나태라도 떨어진다면 채찍을 휘두르면서 미친 듯 달려가던 그 때의 그는 죽었다. 아니, 죽어야만 한다. 두 번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젠장. 이미 나는 받을 대로 다 받았단 말이다.

08. Sin I – Pride

 여느 때와 마찬가지이다.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금방 전, 어제 첨삭받은 부분을 고치고, S대 자소서 4번 항목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뒤, 다시 Ask 선생에게 보냈다. 그리고 나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 J, 이 아이템 뭐야?

– 어.. 공격력 0.4 증가랑 확률적으로 혼란 효과 눈물 발사.

– 혹시 미안한데, 이건?

– 카드나 룬 효과 2배.

– 룬은 어떻게 얻는 건데?

– 도전과제 깨야 하는데, 좀 까다롭긴 해.

– 어? U, 그 조합 먹었네? 무한텔레포트 괜찮지.

– 그러게. 오, 비밀방 가즈~아!

… 옆 친구들이랑 Aisac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J나 다른 친구들이 하는 모습을 보기만 했지만, 언제였나, 재밌어 보였기에 나도 USB로 받아 노트북에 깔아버렸다. 뭔가 처음에는 가볍게 재미삼아 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인가, 이제는 여기 자소서 쓰러 오는 게 아니라 남는 시간마다 게임하러 오는 느낌이다.

– …읏차.

– (화들짝)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 K군. 조금 전만해도 앞에서 노트북을 그의 특유의 시끄러운 타자 소리로 두들기던(이 경우는 두들겨팬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그가 어느샌가 내 뒤로 자리를 옮겨 와 있었다. 피곤한가? 조금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뭐. 달라지는 것을 별로 없으니까…….

‘홀리 맨틀 먹었다! 이제 이 도전과제는 안 맞고도 깰 수 있겠네… 하하.’

‘아니, 여기서 피똥을 맞는다고? 컨트롤 진짜…’

‘아… 이건 가불기지… Bloat X 진짜 극혐이네…….’

– GAME OVER –

♬♪~♬♩♬~ 

– 얘들아, 이제 정리하고 나오자.

 어느샌가 간식 시간 종이 울렸다. 더 이상 노트북을 못 쓴다는 이야기이다. 아직 이거 다 못 깼는데…….

 그래도 나가기는 해야 하니까 아쉬움을 뒤로 하고서 노트북을 끄고서 마우스 선을 빙빙 감고 있던 중, 분명히 종소리가 울렸는데도 아직까지도 자소서에 매달려 있는 K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이제 자소서를 쓰기 시작한지는 10일 가량 되었는데, K는 벌써 첨삭을 5번이나 받았었나…….

– 안녕, K.

– 어, 그래 안녕, U.

– 엄청 열심히 하네. 왜 그렇게까지 해?

– 뭐, 어쨌든 간에 학생의 본분은 공부잖아. 끝내고 빨리 내신 공부나 하러 내려가야지.

– 그래도 우리 할 필요 없지 않…

– 야, K, U, 빨리 나와. 문 잠궈야 해.

 밖에서 문을 잠궈야 한다고 재촉하는 당번 J 덕에 내 말이 중간에 끊겨 버렸다. 그나저나 K, 저 대단한 녀석.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나 진짜?

09. 울음

 어두운 복도를 빠르게 뛰어간 나는, 수학3실 문 앞에 도착하니까 무의식적으로 몸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 얼굴이 왠지 화끈거리고, 숨이 찼다. 문을 열기도 힘들 듯 했다. 다행히도 마리가 내가 뛰어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문을 열어 들어오게 했다.

 마리는 마리 다웠다. 한참 3D 모델링을 구상하고 있었다. 정교한 구조물을 만든다고 뭔가 너튜브에서 많이 배우고 있다고 했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책상에 엎드리고 싶다, 절실히.

– 고라니 기절했나? 우리 노가리 깔래? 너무 피곤해서 못 까나?

 얼마 지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반대편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마리가 어느샌가 내 옆으로 와서는 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내가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시든 꽃 한 송이처럼 엎드려져 팔에 눈을 그저 묻고만 있는 것이 사실상 유일했다.

– 저기, 예인아?

 마리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기다렸던 것일까? 갑자기 ‘수도꼭지’가 열려버렸다.

– 예인아, 정예인! 무슨 일 때문에 그래?

–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 부담 가지지 말고 무슨 일인지 말해봐. 괜찮아.

– 아니야, 그냥 말 안하게 해주면 안돼? 지금은 말해주기엔 너무 힘들어.

– 뭐… 그래. 그러면 모른 척 하고 있을 테니까 마음 추스르고 진정되었으면 그때 다시 말해. 얘가 갑자기 왜 우냐.

 조용히 원래 자리로 돌아간 마리는, 내가 우울하다는 지랄을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책상에 엎드리더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나 때문에 충격을 많이 받지는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걱정된다. 그래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는 사실은 그나마 위안이 되기는 한다.

– 그냥 내가 말해주는 게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

– 이제 마음이 안정된거야?

– 마음이 아직도 奀같으니까 그러는 거잖아.

 마리는 바로 나의 옆에 있던 작은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 너, 내가 K 싫어하는 거 알지.

– 어. 근데?

– 좀 전에 내가 걔랑 눈만 마주쳤는데 이상하게 뭔가 괴로운 거야. 성적은 나보다 더 높으면서 자기는 한참 멀었다고 하는 게 너무 꼴보기 싫었던 것 같기도 하고…

– K가 너 앞에서 기만을 했던 게 있었네. 근데?

– 작년에 내가 저 새끼와 같은 동아리 애였는데, 같이 활동할 때 저 새끼 혼자 독서실에서 공부했던 놈이라니까. 아무것도 아닌 일개였던 내가 저 새끼 때문에 공부도 못 하고 동아리를 해야 해서…

 ‘수도꼭지’가 제대로 고장난 덕에 나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마리는 위로차 그의 손으로 나의 등을 토닥거리고 또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내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 그러니까 지금까지 너가 K 한 명 때문에, 걔가 안고 가야 할 짐을 거의 다 너가 짊어 지고 갔던 거네. 진짜 서러웠겠다. 너 말 들어보니까 K 진짜 나쁜 새끼네. 괜찮아. 우리 둘 밖에 없으니까 울고 싶으면 펑펑 울어도 돼. 그리고 내년에는 그 자식 없으니까 그때까지만이라도 참아.”

 마리는 내 얼굴을 소매로 닦아주었다.

– 그동안 걔 때문에 얼마나 서러웠는데. 나 버리고 생고생이나 시키고. 그래서 공부도 못하고. 저 새끼만 없었어도 정말…….

– 사실 작년에 너 동아리 활동 하는거 잠깐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왜 너 혼자만 있었는지 이해가 안 갔거든. 근데 그동안 너 혼자서 고생했다니까 내가 더 짠하다.

10. K

 K는 학교 친구들에게도 그렇고 선생님께도 그렇고 모범생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자식이다. 학교 규칙을 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선생님이 시키는 것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하는 독하고도 이상한 놈이다. 당연하겠지만, K는 선생님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나는 그가 왜인지 모르게 불편하면서도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바람을 불어 넣으면 풍선이 커지듯이, K에 대한 악감정은 나날이 갈수록 커지기만 했다. 그러던 끝에, 결국 오늘, 내 마음속 풍선은 터져버렸던 것이었다.

11. 20XX-XX-XX. 목. 20:13.

– 학교 생활 중 배려, 나눔, 협력, 갈등 관리 등을 실천한 사례를 들고, 그 과정을 통해 배우고 느낀 점을 기술해주시기 바랍니다. 1000자 이내. 1000자 이내, 1000자 이내…… 라고 이 인간아!

 모두 그만 좀 해! 내가 무슨 죄인이라도 돼? 그렇게 악착같이 매달려오면서 기대하고 있던 1년 후의 미래가 꼭 이래야만 했어?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유죄-라고 꼭 판결을 내리고,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접근금지명령을 내리고, 눈을 피하면서 잊혀지겠지-하면 다 되는 거야?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내가 잘못을 뭘 한건데, 도대체? 그냥 나는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한 것밖에 없다고!

 하지만 이런 나의 절규 따위, 결국은 다시 키보드 소리에 묻혀야만 한다. 아무도 관심이 없다. 모두가 이미 가면을 쓰고, 거짓으로 웃고, 거짓으로 말하고, 거짓으로 두드리고 있는 키보드가 내 눈 앞에서 그 증명을 발하는데, 도대체 그 누가 솔직하게 자기 자신의 자기소개서를 쓸 수 있단 말인가. 집어치워.

– 솔직하지 못해, 여전히.

 … 젠장. 그만 좀 하자.

12. 暗想(암상)

 12시가 되었고, 나는 혼자 조용히 기숙사로 들어갔다. 울어버린 뒤로는 정말 조용히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조용히 잠옷으로 갈아입고, 조용히 세수하고, 조용히 양치하고, 조용히 약 먹고, 조용히 침대에 눕고. 좋아, 이제 제발 자는 것까지만이라도 조용히 하자.

 그런데 갑자기 떠오른 마리 생각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나를 토닥여주고, 쓰다듬어 주고, 눈물도 닦아주었던 그 친구, 아니 그 남자가 이상하게도 떠올랐다. 왜인지 모르게 조금씩 무언가 뜨거워졌다. 결국, 나는 또 한 번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서 울고야 말았다. 룸메이트가 환경 보호를 위한 분리수거 캠페인이었나 – 하여튼 그런 어떤 캠페인 덕에, 자기가 라벨지를 떼어 놓았던 생수 한 병을 슬쩍 머리맡으로 밀어 넣었다.

– 예인아, 무슨 일 있는거야?

– 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 갑자기 우니까 조금 당황스럽네……. 뭐, 그래도 힘내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테니까.

 페트병 표면에 물방울 같은 것이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내려오는 물방울의 자취가 나의 얼굴에 흘러내렸던 한 방울의 눈물 자국 같았다.

 점호가 끝나고 모든 방에 불이 꺼진 후, 이불 속에 숨어서 작은 수첩에 조그만 글을 적었다.

‘오늘 내가 U 그 새끼 때문에 내내 울었다. 눈이 퉁퉁 부을 만큼 짯다. 결국 나 때문에 R&E도 제대로 못했다. 나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될란지 모르겠다. 진짜 살기 奀같다.’

 문이 갑자기 열려 급하게 수첩을 감추었다. 룸메이트였다. 화장실에서 뒤늦게 씻다가 이제야 돌아온 그는 조용히 자기 침대에 돌아 누웠다. 다행이다.

13. Sin II – Sloth

– J, 이 아이템은?

– 이제 직접 먹어 봐. 알려주는 것보다 직접 먹고 아는 게 좋으니까.

– 그래, 알았어.

 오늘도 어김없이 Aisac을 한다. 점심 시간부터 달렸으니 4시간 째 하는 것이 된다. 그 전까지 J에게 많이 물어봤지만, 이제는 너도 되었다는 것인지 J에게서 설명해 주는 것이 좀 귀찮다는 것이 전해지는 듯 하다.

– 어, 야야 Ask 뜬다! 

– (후다닥) * n

 Ask 선생은 1년 반 동안 내 지도교사를 해 주신 선생이다. 내가 화학 영재학급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여튼 이래저래 많이 챙겨 주시고, 자소서도 함께 봐 주시고 있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 얘들아, 이거 먹고 열심히 써라~~

– 네!!~~ / 네….

 Ask 선생은 자유시간이랑 Twix를 건네주셨지만, 나는 받는 걸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 U, 잘 쓰고 있나?

– 네, 3일 전에 피드백 받은 거 수정해서 어제 보냈습니다.

– 어, 그래? 그럼 가서 같이 한번 보자.

* * *

– 음.. U. 남성중창단- 이거는 3번에 들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여기서는 노력한 부분보다 협력에 관한 내용이 더 들어가 있는 것 같아서.

– 네. 그렇게 할게요.

– 아, 그러면 2번을 어떻게 하지……. 혹시 미리 생각해둔 거 있나?

–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 그래. 좀 더 생각해서 써 오고. 그럼 3번에 이 부분은…….

– 근데 이미 3번이 어느 정도 되어 있어서, 그건 그냥 지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

 그 어색한 침묵을 수습한다고, 도대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소서 한 페이지 분량이 깨끗하게 닦여 있었던 것만 기억이 난다. 처음 쓰고 나서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Ask 선생에게 한 번 다녀 오니 이제는 모두 수정해야 할 내용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한심하다, 정말.

‘아.. 이것만 깨고 써야지.’ 

‘…….’

– 야, 뒤에!

– 어? U…

– 안녕하세요, Ask 선생님.

– 할 게 많을 텐데 이러고 있네?

– 아, 죄송합니다.

– 그래. 열심히 써.

 그래, 언젠간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알고 있지만, 그렇게만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계속 게임을 하면서, 점점 내가 뭘 해야 할지도, 뭘 하고 있는지도 잊고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견디기 힘들어지고 있다.

14. 노래

지갑속이 비어있는 오늘도
하루종일 나태함을 또 이어나가며
살아가는 의미조차 찾지 못하고
그런 나를 보며 다시 한숨을 쉬고

외로워-라는 이 문장에
마음속의 상처를 표현해도 괜찮은걸까
이 고민만을 가슴속에 품은 채
또 하루의 밤에 이별을 고해

소년이었던 우리들 모두
아무도 모르는새 어른이 되어가고
세월이 흘러 비틀어진 낙엽 잎처럼
아무도 모르는채 썩어들어가

불사신의 몸뚱이를 손에 넣어서
일평생을 죽지 않고 살아나가는
소설 속의 이야기를 망상하고 있어

나 자신은 죽어도 아무래도 좋은데
주변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모순을 안고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겠지 

올바르고 싶다면 올바르게 있으세요
죽고 싶지 않다면 영원히 살아계세요
가능하지 않겠지만 가능하다 믿는다면
혼자 미친듯 웃어봐라

우리들은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
행복의 진짜 의미조차 모른채
자신의 신세만을 한탄하면서
간단하게 과거에 저주를 내려

우리들은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
안녕이란 말이 당연해져서
진짜 이별이라는 걸 모르는
우리들은 생명에게 미움을 받고 있어

덧붙이는 말

최상단에 말씀드린대로, 이 掌편소설은 필자 혼자서 단독 창작한 것이 아닌, 2人의 공동 창작자와 함께 기술한 것을 필자가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필자가 수정하기 전의 원문은 다음 링크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원문

또한, 이 소설을 보시고, 어떤 생각이 펼쳐지려 할 때, 다음의 비하인드도 한 번 들려서 보시기 바랍니다: 비하인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