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도서관 #5. 광신주의자들과 민주주의

바벨의 도서관 #5. 광신주의자들과 민주주의

2021-12-06 0 By 커피사유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사유 #29. 바벨의 도서관」에서 영감을 받아 마련한 공간으로,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읽거나 접한 책, 글귀 중 일부를 인용, 개인적인 생각을 담은 주석을 덧붙여가며 세상을 보는 다양한 시각들을 시도하는 공간입니다.


시험 기간의 중압감으로 정말 죽을 맛이기는 하지만, 가끔은 뉴스를 보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다음 나 자신이 살아갈 5년 동안의 대한민국 사회를 결정할 대선까지 총 3달 조금 넘게 남았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양당의 후보가 지지율을 반으로 갈라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고 있지만 나는 여론조사를 당한다면 아마도 지지후보 없음으로 분류될 것이 분명하다. 두 후보 중에 어떤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나에게 유리할지 모르겠다.

그러한 과정 가운데, 오늘 (12월 6일)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대선 캠프가 마침내 오늘 발촉했으며, 그 발촉 연설문의 전문을 《한겨례》에 게재된 〈[전문] 윤석열 선대위 출범… “역겨운 위선 정권 반드시 교체”〉라는 기사를 통해 보게 되었다. 짧게 읽어본 후, 드는 직감이 하나 있었는데 아무래도 직접 이야기하기는 참 어려운 시기이기도 하여, 이와 관련되어 내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최근에 읽은 서적 중에서 한 단락을 여기에 옮기고자 한다.

한 가지 부언해두어야 하는 것은, 그 어느 대선 후보든 간에 근거 없이 주장만을 나열하면 아직 방향을 결정하지 않은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을 끼친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두 대선 후보가 모두 동일해서… 지금으로서는 솔직히 두 후보에게 모두 호감은 가지 않는다.


인용 – 카롤린 엠케, 『혐오사회』에서

독단에 빠진 광신주의자들이 의존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명확성이다. 그들에게는 하나의 ‘동질적’ 민족, 하나의 ‘참된’ 종교, 하나의 ‘본원적’ 전통, 하나의 ‘본연적’ 가족과 하나의 ‘진정한’ 문화라는 하나의 순수한 교리가 필요하다. 어떤 이의도, 어떤 모호함도, 어떠한 양립도 허용하지 않는 비밀번호와 암호가 필요하며, 그들의 가장 큰 약점도 바로 거기에 있다. 순수와 단순의 교리는 모방적 대응 전략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엄숙주의로써 엄숙주의와, 광신주의로써 광신주의자와, 증오로써 증오하는 자와 대결한다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와 법치국가의 수단을 가지고 싸우는 수밖에 없다. 자유롭고 열린 사회가 스스로를 방어하려 한다면, 그것은 늘 자유롭고 열린 상태를 유지함으로써만 가능하다. 현대의 세속적이고 다원적인 유럽은 공격을 받더라도 현대적이고 세속적이며 다원적이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종교적 광신주의자와 인종차별적 광신주의자가 동일성과 차이라는 범주로써 사회를 분열시키려 획책할 때는, 사람들 사이의 유사성을 더욱 중시하는 연대적 동맹이 필요하다. 광신주의적 이데올로기들이 투박하고 단순한 세계관을 제시한다면, 단순함과 투박함으로 그들을 능가하려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섬세하게 구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광신주의의 본질주의에 대해서도 본질주의적 가정들로 대응하려 해서는 안 된다. 증오와 멸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항상 증오와 멸시의 구조와 조건들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개개인을 악마적 존재들로 죄악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언어적 또는 비언어적으로 보이는 행동들을 비판하고 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법적으로 처리해야할 범죄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 범인을 법적으로 추적해 수사하고 가능하면 법적 판결까지 받아내야 한다. 또한 증오와 순수의 광신주의에 맞서려면 시민사회와 시민들이 나서서 배제와 포함의 기술들에, 어떤 사람은 보이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인식의 틀에, 개인을 집단을 대표하는 표본으로만 보는 시선의 체제들에 저항해야 한다. 모든 사소하고 저열한 형태의 멸시와 굴욕에 용기 있게 이의를 제기해야 할 뿐 아니라, 배제된 이들을 지원하고 연대할 수 있는 법률과 실천도 필요하다. 그밖에 다른 관점들과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인식시킬 수 있는 다른 서사들도 필요하다. 증오의 틀을 무너뜨려야만, “전에는 서로 다른 것들만 보였던 곳에서 비슷한 것들을 발견할” 때에만 공감이 생겨날 수 있다.

광신주의와 인종주의의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에 대해서도 저항해야 한다. 이는 스스로도 똑같이 과격해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혐오와 증오, 그리고 폭력으로써 저들이 꿈꾸는 내전 시나리오(또는 종말의 시나리오)에 힘을 실어주라는 말도 아니다. 그보다는 증오와 폭력으로서 분출된 불만이 애초에 발생한 장소와 구조를 찾아 경제적, 사회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말이다. 광신주의가 발붙이기 전에 미리 예방하고자 한다면, 유사종교적 교리 혹은 민족주의적 교리가 어떤 경제적, 사회적 불확실성을 가짜 확실성으로 덮어 가리는지 밝혀내는 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광신주의를 예방하려는 사람이라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낱 이데올로기에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만큼 하찮게 여기는지도 물어야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순수하지 않은 것과 다른 것을 옹호하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순수함과 단순함의 페티시즘에 사로잡힌 증오하는 자와 광신주의자가 가장 거슬려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계몽된 의심과 아이러니의 문화가 필요하다. 그것이 엄숙주의적 광신주의자와 인종주의적 독단론자가 가장 못마땅해하는 사유의 풍토이기 때문이다. 순수하지 않은 것에 대한 옹호는 공허한 약속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유럽 사회가 다원적이어야 한다고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포용적 공존에 필요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투자에도 진지하게 나서야 한다. 왜일까? 왜 다원성이 가치 있다는 것일까? 그저 하나의 교리를 또 하나의 교리로 대체하는 것은 아닐까? 문화적 다양성이나 종교적 다양성이 자신들의 행동이나 신념을 제한할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다원성이란 어떤 의미일까?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복수複數로 존재하는 한, 다시 말해 우리가 이 세계에서 살며 움직이고 행동하는 한, 유의미한 것은 오직 우리가 서로 이야기로 나눌 수 있고 또한 혼자만의 대화로도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것, 즉 말하기를 통해서 의미가 생겨나는 일뿐이다.” 아렌트에게 다원성은 무엇보다 피해갈 수 없는 경험적 사실이다. 그 누구도 개별적으로 고립된 채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많은 수로서, 복수로서 이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현대의 다원성은 다른 모든 것이 맞추어 가야할 어떤 원-모형, 미리 주어진 어떤 표준이 복제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렌트가 보기에 인간의 조건과 인간 행동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모두가 같은 존재, 즉 사람들이지만, 이 사람들 중 누구도 한때 살았거나 지금 살고 있거나 앞으로 살게 될 다른 어떤 사람과도 똑같지는 않은, 아주 기묘한 방식으로 같은 존재인” 그러한 다원성이다. 이 서술은 흔히 통용되는 동일성과 차이라는 관념의 모순을 아주 우아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고유한 개인으로서의 유일무이성도 중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복수는 정지된 상태의 우리, 즉 강제적으로 동질화된 덩어리가 아니다. 한나 아렌트의 논의에서 복수란 다양한 개인의 특수성들로 이루어진 복수다. 모두가 서로 닮았지만 아무도 다른 누구와도 똑같지는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복수성의 ‘기묘하고’ 매혹적인 조건이자 가능성이다. 정화한다는 명목으로 개별적인 사람들의 유일무이성을 제거하는 결과만 낳는 모든 표준화는 그런 복수성의 개념에 어긋난다.

장 뤽 낭시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부터 모든 개별 존재는 유이무이하며, 따라서 다른 모두와 함께, 다른 모두의 안에서 모두가 다 유일무이하다.” 이에 따르면 단수는 이기적인 개별자가 아니다. 그리고 복수도 단순히 ‘나의 추가나 병존이’ 아니다. 개인성은 서로 함께하는 관계, 서로에 대한 관계 안에서만 인식될 수 있고 실현될 수 있다. 누구나 혼자서는 독특한 것이 아니라 단지 혼자일 뿐이다. 자신의 소망과 욕구를 비춰 보여줄 수도 있고 접게 할 수도 있는 사회적 공존이 필요한 것이다. 스스로를 단색의 통일체로만 이해하는 ‘우리’에게는 다양성도 개인성도 없다. 다시 말해서, 그 안에서 다양한 삶의 설계들이 동등하게 존재할 수 있는 조건과 구조를 만들어내는 문화적, 종교적 다양성과 비균질적 사회와 세속적 국가는 개인의 신념을 제한하는 것이 아리나 오히려 널리 펼치게 하고 무엇보다 우선해서 보호한다. 한 사회 내의 복수성은 개인이나 집단에게서 자유를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보다 먼저 그 자유를 보장한다.

카롤린 엠케(Carolin Emcke), 《혐오사회》, 서울: 다산북스, 2017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