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여성성 · 가면 · 탱고

레베카: 여성성 · 가면 · 탱고

2024-07-29 0 By 커피사유
레베카
Category:
Publisher:
Published: 2018
"미스터리 · 스릴러 · 연애라는 통속적인 수식어보다는 여성성 · 가면 · 탱고라는 세 개의 열쇠로 파악할 때야 그 진가를 드러내는, 영원한 대립의 촌철살인." - 영화와 뮤지컬로 제작된 《레베카》의 진정한 메시지는 특유의 서스펜스에 주목한 나머지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 저자인 대프니 듀 모리에 여사가 당시의 사회적 물결 속에서 시대를 뛰어넘으면서도 무엇을 궤뚫어 보았으며, 이들을 어떤 탁월한 표현들로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느냐는 것이 원작의 핵심임에도 말이다.
4.0Overall Score

레베카

"미스터리 · 스릴러 · 연애라는 통속적인 수식어보다는 여성성 · 가면 · 탱고라는 세 개의 열쇠로 파악할 때야 그 진가를 드러내는, 영원한 대립의 촌철살인."

  • 깊이
    4.2
  • 가독성
    3.8
  • 독창성
    4.0

한줄평

“미스터리 · 스릴러 · 연애라는 통속적인 수식어보다는 여성성 · 가면 · 탱고라는 세 개의 열쇠로 파악할 때야 그 진가를 드러내는, 영원한 대립의 촌철살인.”


총평

짧은 메모

아래의 메모는 2024. 7. 18. 심야에 이 책을 완독한 뒤 연필로 책 맨 뒷장에 휘갈겨 놓은 것임.

 레베카(Rebecca)는 ① 여성성으로, ② 가면으로, 즉 두 개의 키워드로 읽을 수 있다.

확실한 것은 이 작품에는 탱고가 매우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장 사이의 분위기, 맨들리에 대한 주인공의 인상, 맨들리 저택 그 자체 모두 런던의 날씨는 물론이거니와 탱고의 템포처럼 어지럽고 급격하게 바뀐다.

여성성

#1.

《레베카》를 관통하는 첫 번째 키워드는 단연컨대 ‘여성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표면적 주인공에 해당하는 ‘나’가 여성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저자인 대프니 듀 모리에가 이 작품을 쓰던 당시의 시대 상황까지 함께 고려하여 서사의 주축을 이루는 두 여성의 모습을 관찰하면,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두 여성에 대한 표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레베카》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 중 주요한 두 인물로는 전 · 현 드윈터 부인(Mrs. De Winter, The late Mrs. De Winter)을 꼽을 수밖에 없다. 두 인물의 성격 · 행동은 사실상 완전히 반대된다고 할 수 있다. 후자인 현 드윈터 부인 즉 ‘나’의 경우는 소설의 표현을 있는 그대로 빌리자면 ‘여학생 같은’ 여성인 반면, 전자인 전 드윈터 부인 즉 ‘레베카’의 경우는 ‘강렬한 뱀’의 인상을 가지는 여성이다.

#2.

두 사람을 가르는 주된 차이점은 맥시밀리앙 드윈터(맥심)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지는지의 여부, 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지의 여부라고 할 수 있다. ‘나’의 경우는 작중 내내 맥심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맥심이 어떤 기분인지를 파악하려고 애를 쓴다. 그가 자신을 ‘레베카’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장면마다 ‘나’는 긴장해서 손톱을 물어뜯거나 맥심의 표정 변화에 심리적으로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며, 어떤 수를 써서라도 맥심의 마음을 돌리려고 유독 애를 쓴다. 이러한 ‘나’의 작중 행동은 맥심에 대한 사랑으로부터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전 드윈터 부인이었던 ‘레베카’의 행동을 고려할 때는 맥심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이 없는 상태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적절해 보인다. ‘레베카’의 경우는 명백하게도 ‘나’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맥심과의 연애에서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기 때문이다.

작품의 전반에 걸쳐서 마치 사라지지 않는 유령 내지는 향기처럼 묻어나오는 레베카의 모습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 중 하나는 그녀에게 있어 맥심과 같은 남자들과의 관계는 마치 ‘게임’과 같았다는 댄버스 부인의 진술에 있다. 단순하게 볼 때 이러한 진술은 그녀의 소위 ‘악녀’ 이미지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여러 남성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 관계에 대해 책임감 일체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방탕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장치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개인이 자신이 어떤 인물과 관계를 맺을 것이며, 그러한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유지할 것인지는 그 사람의 자유에 달려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레베카와 같은 방식의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훼손하며 상대에게 배신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나’ 자신과 맥심이 맺는 관계와 레베카가 맥심과 맺은 관계가 뚜렷한 대립항을 이룬다는 점에 우리는 분명히 주목해야 한다. 각각의 관계로부터 우리는 각 인물들에게 ‘맥심’이란 심리적으로 어떤 존재였을지를 대략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3.

‘나’에게 있어 맥시밀리앙 드윈터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작중 ‘나’가 맥심을 바라볼 때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로부터 자신이 강아지 ‘재스퍼’를 대할 때의 태도를 연상한다는 점에서 가장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그에게 매우 의존적이다. 단순히 맥심이 런던으로 외출했을 때에 그가 사고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다소 지나친 걱정을 하는 장면 때문만이 아니라, ‘나’가 맥심 앞에서 시종일관 유지하는 행동과 태도 일체 때문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맥심을 웃게 만드는 것, 그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심적 고백이 작품의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저택 전반은 물론이거니와 영지의 모든 사람들까지 지배하는 듯한 레베카의 영향력을 두려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것을 후회한 적 없다’라고 거짓말을 하고, 그가 ‘어둡고 길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두려움과 슬픔에 휩싸여서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빈다. 작중 ‘나’의 심경은 맥심이 자신에 대해 어떤 감정과 인상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지에 따라 순식간에 뒤집어진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맥심의 표정이 온화함에서 창백한 얼굴과 함께 굳은 표정으로 바뀔 때면 작중 ‘나’의 심리도 불안함과 창백함으로 전환된다.

반면 레베카에게 있어 맥심이 어떤 인물이었을지는 자명히 ‘나’의 경우와는 정반대이다. 남성들을 모두 싫어하면서도 그들을 유혹하여 여러 관계를 즐기는 것을 일종의 ‘게임’처럼 여겼다는 댄버스 부인의 진술을 토대로 생각해볼 때, 그녀가 비록 맥심과의 관계를 지나치게 가벼이 여겼을지언정 최소한 그녀는 맥심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였다. 그녀는 맥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행한다. 맥심이 그 행동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해도, ‘계약 위반’이라고 항거해도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결국 성취하는 인물이다. 맥심의 감정과 생각은 그녀에게는 큰 고려 대상이 아닌 것이다. 맥심의 안색 그리고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지의 여부와 무관하게, 그녀는 오로지 자신만의 삶을 추구한다.

#4.

‘나’와 레베카의 이러한 차이는 작중 댄버스 부인이 레베카에 대해 보이는 광적인 집착과 숭배적인 태도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제공한다. 작중 가장 으스스하면서도 가장 흥미로운 인물인 댄버스 부인 그녀가 이미 죽은 인물인 레베카를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레베카가 사용하던 물건들과 공간들을 그대로 보존하는 섬뜩할 정도의 집착을 보이는 이유는 댄버스 부인이 레베카와 같은 삶을 동경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베카》를 읽은 수많은 독자들은 작품의 말미에서 맨들리 저택에 불을 지른 인물이 아마도 댄버스 부인일 것이라고 추측하면서도 그 동기에 대해서는 단순히 ‘나’가 전 드윈터 부인인 ‘레베카’의 자리를 온전히 차지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인 대프니 듀 모리에가 이 작품을 출간하던 당시 영국의 사회 · 문화적 환경과 여성 운동을 고려하면 이러한 시각은 반쪽에 불과하다.

저자가 이 소설을 집필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20세기 초 영국은 19세기의 ‘빅토리아 시대’1대영제국 시기,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이후부터 사망까지의 1837. 6. 20. ~ 1901. 1. 22.의 약 64년 동안의 기간을 영국에서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라고 한다.의 정숙한 여성상을 거부하고 남성과 동일한 참정권은 물론이거니와 독립적 · 지적 · 전문적이며 자유분방한 ‘신여성’에 대한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오면서 젠더 갈등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2배혜정, “20세기 초 영국 페미니즘의 다른 목소리 – 『프리우먼』의 ‘진보적’ 페미니즘”, 여성학연구. 29(2). 2019. pp. 111-116. 여성의 교육 수준이 향상되고 이들이 노동 시장에 대거 진출한 이래 영국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오늘날 ‘서프제러트(Suffragette)’로 기억되는 이 참정권 운동은 1897년 설립된 여성참정권단체전국연합(NUWSS; National Union Women’s Suffrage Societies)과 1903년에 조직된 여성사회정치연합(WSPU; 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이 주도했다. 전자의 단체가 의회 로비와 같은 평화적 수단으로 여성참정권을 쟁취하려 했던 반면, 후자의 단체인 WSPU의 경우 자유당 전당대회에 난입하여 기습 시위를 벌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문화예술품 훼손 · 방화 · 단식 투쟁 등의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운동을 전개했다.3강미경,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과 에멀린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 복현사림. 39. pp. 110-114. 30세 이상의 여성들에게까지 선거권이 확대된 1918년을 거쳐 1928년 21세 이상의 남녀 모두가 동일하게 선거권을 가지도록 영국 선거법이 개정되기까지 이 두 단체가 주도하는 여성 운동은 당대 영국 사회에서 수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5.

대프니 듀 모리에 여사가 소설을 발표한 연도는 1939년이다. 이는 영국에서 완전한 남녀 동등의 선거권이 제정된지 1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해인데, 따라서 그녀가 이러한 당대의 여성 운동의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으로 이 소설을 출간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당시 여성권 운동은 1912년까지 발간된 잡지 『프리우먼(Freewoman)』이 대표하듯 단순한 참정권 요구에서 그치지 않고 ‘신여성’을 넘어선 ‘자유여성(Freewoman)’, 즉 정치적 차원이 아닌 정신적 실체의 차원에서 진정으로 종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성을 강조하는 수준으로 나아갔다는 점을 고려하면4배혜정. op. cit. pp. 114-116. 저자가 여성의 자유에 대한 일말의 근본적인 고민없이 《레베카》를 완성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레베카라는 인물을 올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녀를 ‘나’라는 남성에게 순종적인 여성에 반대되는 인물로 해석해야 한다. 전통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상에 대한 거부, 모든 남성적인 요구와 시대상에 정면 도전, 내면으로부터 기원한 진정한 자유로부터 자신과 남성 간의 관계는 물론이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하는 ‘자유여성’에 대한 투영으로 해석할 때에야 《레베카》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댄버스 부인이 레베카에 대해서 견지하고 있는 태도와 그녀의 행동을 해석하는데 있어 특히 용이하다. 레베카라는 흥미로운 여성상을 그녀가 어릴 때부터 곁에서 함께 목격해오고 생활해온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의 용감한 전통적 여성성에 대한 정면 도전 그리고 거부를 동경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다수의 여성들이 꿈꾸지만 사회 · 문화적 요인으로 여전히 요원한 ‘정신적’ 그리고 ‘문화적’인 억압적 여성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적극적으로 실현한 인물이 바로 레베카라는 점에서 고용인이라는 신분과 여성이라는 젠더의 이중의 제약으로 묶인 부인에게 레베카가 가지는 의미란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면서 쌓인 정(情)만으로 결코 단순하게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댄버스 부인이 레베카를 어떻게든 기념하고 추억하려는 모습, 그로 인해 발생하는 오싹한 분위기는 사실 그녀 또한 ‘자유’를 갈망하고 있음을, 진정으로 자유로운 여성이 되고 싶다는 욕망의 연장으로 생각해야 한다.

#6.

흥행과 자본의 논리에 지배되는 뮤지컬이나 영화에서는 희석되고야 만 이 ‘여성상’에 대한 소설의 논변은 오늘날 글보다는 영상이나 공연 예술로서 이 작품을 접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레베카》를 서스펜스와 로맨스의 중첩이라는 잘못된 서사로 이해하도록 만들고 있다. 소설이 가지는 진가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라도, 시대를 뛰어넘는 작가의 진정한 고찰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레베카》에서 드러나는 ‘여성성’에 대해 독자들은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상술하였듯 대프니 듀 모리에가 이 소설을 쓸 당시의 여성 운동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여성성’을 하나의 축으로 삼고 이 소설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부적절한 처사가 아니다.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상을 대표하는 ‘나’에 반하는 인물인 자유롭고 독립적인 레베카에 대한 작중의 기술,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댄버스 부인의 시각과 행동은 사람을 가지고 노는 레베카의 모습으로부터 자연히 태동하는 거부감 가운데에서도 그녀를 향한 마성의 매력을 구축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배경을 제공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가면

#1.

역자 이상원이 〈옮긴이의 말〉에서 지적하고 있듯 《레베카》는 영화는 물론이고 뮤지컬로까지 각색되었다. 극작가 미하엘 쿤체(Michael Kunze)가 각본 · 작사를,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Sylvester Levay)가 음악을 맡아 200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된 뮤지컬에서 주목할 만한 점 중 하나는 역자의 말을 그대로 빌려오자면 ‘겉으로는 신사 숙녀인 체해도 내면은 통속적이고 점잖지 못한 영국인을 비꼬는’5대프니 듀 모리에(Daphne du Maurier), 《레베카(Rebecca)》. 이상원 역, 현대문학. 2018. p. 597. 모습이다. 그러나 역자는 원작 특유의 겉과 속이 다른 인물들에 대한 신랄한 묘사와 그러한 기술들에 담겨 있는 적극적인 비판 의식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성’에 이어《레베카》를 이해하는데 있어 두 번째 주축이 되는 것은 바로 속과는 다른 거짓의 페르소나6‘페르소나’는 연극에서 특정한 역할을 하기 위해 배우가 쓰는 가면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이에 착안하여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사회적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타인에게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자신에게 유리한 거짓된 모습 혹은 외관 · 표면적 인격을 ‘페르소나’라는 명칭으로 가리킨다. (강유라, “융의 인격구조의 얼굴 페르소나로 본 영화 속 주인공 심리분석”. 한국콘텐츠학회 학술대회논문집. 2010(5a). 2010. pp. 500-501.)를 앞에 내세우고서 타인의 벽과 씨름하는 사람들의 모습, 즉 ‘가면’이다. 작중의 인물들은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상대가 세운 ‘벽’ 너머를 가늠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자신의 속사정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의심하고,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의식한다. 이러한 모습은 소설이 ‘나’라는 인물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특성상 ‘나’의 심리와 행위를 중심으로 가장 극명히 드러난다. 작중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나’라는 인물의 심리와 반대되는 행동들 일체는 ‘가면’이라는 키워드로 이 소설을 이해해보는 시도 또한 아주 적절함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2.

〈가면〉이라는 키워드로 이 소설을 바라볼 때 주목할 수 있을 장면은 맥심이 살인을 애써 숨기며 고통받는 여러 장면들부터 ‘나’와 맨들리 영지 주민들 사이의 만남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수 있을 장면은 작품 분위기의 가장 중요한 반전인 ‘가장무도회’ 장면이다. 적지 않은 이들은 댄버스 부인의 계략에 말려든 ‘나’가 레베카를 생각하게 하는7조금 더 정확하게는, 레베카가 생전에 맨들리의 무도회에서 입었던 옷과 동일한 옷인. 캐롤라인 드윈터의 드레스를 입고 내려가 곤란을 당하는 점에 주목하지만, 사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그 다음에 ‘나’가 어떤 행동을 했으며 무엇을 느꼈는지다. 창피와 곤혹이라는 감정이 범람하는 가운데 비어트리스가 방문해서 위로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홀에서 안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을 맞이하러 내려가지 않으려고 한 ‘나’의 심경을 완전히 반대로 바꾸어놓은 것은 정확히 무엇이었는가? 무도회가 끝난 다음날, 즉 제18장에서 ‘나’가 고백한 바에 의하면 그 이유는 “맥심을 위해서도, 비어트리스를 위해서도, 맨덜리를 위해서도 아니었다”.8대프니 듀 모리에(Daphne du Maurier). op. cit. p. 358. ‘나’는 무도회를 찾은 사람들이 맥심과 ‘나’의 부부 관계가 원만하지 않음을, 결혼 생활이 실패한 것 같음을 알게 하지 않기 위하여 방에 계속 숨어있기 보다는 푸른 드레스를 입고 계단을 내려가 사람들 앞에서 미소로 시종일관 했다. 그 속은 실은 레베카의 그림자, 그리고 맥심이 자신을 진정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 차 두렵고 슬펐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진정한 자신의 감정과 내면을 거의 사실상 타인에게 내보이지 않는 소극적인 여성이다. 바로 이 소극성 때문에, 실은 전혀 행복하지 않은 맨덜리에서의 생활을 보내고 있음에도 그렇게 연기해야 했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조차도 견뎌내기 힘든 고통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온전하게 호소하지 못했다.

악단이 연주를 계속했다. 쌍쌍의 남녀도 계속해서 꼭두각시처럼 앞뒤로 움직이며 넓은 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피와 살을 가지고 감정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 모양을 한 허수아비, 미소 짓는 얼굴을 조각해놓은 나무토막에 불과했다. 내 옆에 서 있는 사람도 나무토막이긴 마찬가지였다. 그 얼굴은 가면이었고 미소는 꾸며낸 것에 불과했다. 두 눈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차갑고 무표정한 그 눈은 내가 들어갈 수 없는, 내가 나눠 질 수 없는 고통스러운 지옥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 몸에 손도 대지 않았다. 우리는 주인 부부로 나란히 서 있었지만 함께는 아니었다. 그는 손님들에게 깍듯한 태도를 보였다. 인사말을 건네고 농담을 던지는가 하면 미소를 짓고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이나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기계의 움직임처럼 자동적이라는 건 나밖에 모를 것이다. 우리는 연극에 출연한 배우들 같았다. 그것도 분리된 채 따로따로 연기하는 배우. 알지도 못하고 두 번 다시 보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을 위해 우리 둘은 그 서글픈 거짓 행동을 어떻게든 견뎌내야 했다.

대프니 듀 모리에(Daphne du Maurier), 《레베카(Rebecca)》. 이상원 역, 현대문학, 2018. pp. 347-348.

#3.

자신의 진정한 내면 · 생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그와는 다른 모습을 겉으로 보여주는 것으로부터 빚어지는 파국은 얼마나 비참한가? 사회적 생활을 하는 인간이라는 운명에 의하여 결정지어진 ‘가면’이 그 본성상 가져다주는 원만한 사회 관계에도 불구하고 《레베카》가 여실히 드러내는 ‘가면’과 소통의 부재는 우리에게 페르소나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한다. 물론 이러한 질문을 《레베카》만이 유별나게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몰리에르(Molière)의 《인간 혐오자(Le Misanthrope)》는 물론이고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인간실격(人間失格)》에 이르기까지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내면과 외면 사이의 간극, 그리고 그 사이의 거짓말에 대해서 끊임없이 사람들은 질문을 던져왔다.

《레베카》에서 우리가 페르소나 즉 가면이라는 오래되고 또 흔해 보이는 담론에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미스터리 · 스릴러가 동반된 연애 소설이라는 장르에 파묻혀 저자가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는 페르소나의 소외성9여기서 ‘소외’란 통상적 · 일상적 의미의 소외라기보다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가 처음 사용한 철학적 용어인 ‘소외’를 가리키는 말이다. 페르소나 즉 인간이 사회적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그 속마음과는 다르게 문화와 사회 상규에 맞추어 자신을 다르게 표현함으로써 구축되는 이미지는 분명 인간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은 우리로부터 낯설어져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에 대한 고발에 덜 주목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나’와 주교 부인의 차담에서 예의상 으레 하는 말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경우 어떻게 될까를 상상하는 장면부터 레베카가 자신과의 관계를 하나의 ‘게임’처럼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계속 ‘좋은 부부’ 사이를 연기한 맥심에 이르기까지, 모리에 여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상류 사회의 치부를 소설 속에서 효과적으로 고발함과 동시에,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독자 앞에서 낱낱이 펼쳐보임으로써 소설의 미묘한 분위기와 긴장감을 탁월하게 유지시키고 있다.

#4.

〈가면〉이라는 키워드로 이 작품을 이해하고자 할 때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소득은 ‘댄버스 부인’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이다. 역설적이지만 〈여성성〉이라는 키워드가 부인의 심리적 측면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제공하는 반면, 〈가면〉은 미적 측면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제공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인의 생김새가 얼마나 매력적인지와 같은 표면상의 미적 측면이 아니다.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작품 속에서 ‘댄버스 부인’을 작중의 성격과 행위를 하도록 설정하였을 때 얻게 되는 예술적 효과가 무엇인가에 있다.

《레베카》가 독자에게 댄버스 부인이 기괴하고 으스스한 저택의 분위기에 어울린다고 호소할 수 있는 배경은 다름아닌 그녀의 이중성이다. 그녀가 레베카를 거의 숭배했다는 점, 그리하여 죽은 레베카의 자리를 차지하는 ‘나’에 대하여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원인을 이해한 이후더라도 그녀가 레베카의 서쪽 침실을 보여주면서 보여준 표정과 행동의 극적인 전환은 소름을 불러일으키기에 여전히 충분하다. 앞서 〈여성성〉에 대한 논의에서는 이러한 이중성을 ‘여성의 자유’를 동경한 그녀의 무의식과 연관지었지만 〈가면〉이라는 새로운 흐름 하에서는 댄버스 부인의 이러한 모습을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상이한 내면과 외면의 모습, 즉 이중적인 인간의 구조를 그대로 표상하는 장면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레베카가 ‘자유여성’의 상징이라고 해석할 때 부인의 내면에서는 ‘자유로운 여성’을 갈망하면서도 겉으로는 고용인이라는 신분, ‘나’에 대한 악감정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자유로운 여성’을 있는 그대로 허락하지 않은 사회 규범 때문에 레베카와의 강력한 유대감은 물론이거니와 그녀를 향한 강한 존경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용인스러운’ 무표정을 유지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현대인의 표상 또한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5.

알프레드 히치콕이 원 소설을 영화화한 《레베카(Rebecca)》 (1940)의 경우 댄버스 부인을 항상 차가운 표정과 날카로운 눈길을 가진 인물로 그려내고 있다. 이같이 부인을 묘사한 것은 여성에 관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짓밟아버린 처사라는 점에서도 모진 비판을 피하기 힘들지만, 동시에 시대적 배경을 뛰어넘어 저자가 고발하고 있는 인간의 이중성과 그로부터 기원하는 고뇌에 대한 탁월한 표현들마저 불태워버린 폭압이라는 비판까지 받아야 마땅하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레베카》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분명히 〈가면〉이기 때문이다.

《레베카》의 작품 곳곳에서 묻어나는 향기에는 ‘레베카’의 흰진달래향 만이 아닌, 우리가 평소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분명히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여러 종류의 가면들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고발 특유의 매캐한 향기도 섞여 있다. 소설은 인간 군상이 벌이는 여러 사건들을 살며시 들어올려 책 속으로 옮겨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그대로 투영하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는 점에서, 《레베카》는 그 기본을 가장 충실히 지키고 있는 작품 중 하나라고 생각해도 그렇게까지 무리는 아닐 것이다.

탱고

#1.
Astor Piazolla – Las Cuatro Estaciones Portenas. III. Invierno Porteno (Arrangement by Leonid Desyatnikov, by Les Violons du Roy & Jean-Marie Zeitouni, 2006)

《레베카》와 어울릴 수 있을 색다른 대상을 하나 찾자면, 아르헨티나의 민속 음악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아스트로 피아졸라(Astor Piazolla) 이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간 〈탱고(Tango)〉가 아닐까 싶다.

《레베카》는 영국 소설이고 대프니 듀 모리에 여사가 소설을 쓰던 당시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접점은 없었으므로 탱고가 소설과 가지는 접점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만 같다. 그러나 위 음악이 이 소설을 대표하는 음악이라고 해도 크게 손색이 없다는 감각만큼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이상, 지구 정 반대편에 있는 두 나라의 서로 다른 작품들에게서 왜 기묘한 동질성이 느껴지는지 살펴보기 위해 역사적 층위가 아닌 다른 관점에서 각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우선 〈탱고〉부터 살펴보자. 항구 도시였던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가10조금 더 정확하게는, 사창가.에서 시작한 아르헨티나의 영혼과도 다름없을 이 음악은 동명의 춤을 반주하기 위한 음악으로 출발했다. 탱고 춤 동작을 살펴보노라면 그 몸짓마다 강세가 있으면서도 형언하기 어려운 우아함과 섬세함이 몸의 끝 부분마다 묻어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춤을 반주하기 위한 음악까지도 춤의 특징이 그대로 묻어 있다.

서은희가 지적했듯, 탱고는 가난한 이민자들 사이에서 출발한 음악이라는 그 정신적 기원과 정열적인 탱고 춤을 반주하는 것에서 시작했다는 예술적 기원 때문에 ‘서러움’과 ‘긴장감’ 사이에 있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11서은희. “[공연비평] 여름 한가운데의 탱고 ― 「아디오스, 피아졸라」”, 트랜스라틴. 34. 2016. pp. 93-102. 특히 ‘긴장감’은 탱고 특유의 박자감에서 기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강세가 일반적인 규칙을 벗어난 곳에 떨어지면서 춤에서 남녀가 서로의 몸을 당기고 밀듯 박자에서도 밀고 당김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선율이 계속되는가 하더라도 이내 갑작스러운 전조와 함께 분위기가 전환된다던가 거친 선율이 몰아치는가 하더라도 어느 샌가 평온한 주제로 돌아가는 급작스러운 분위기의 전환은 탱고 음악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3.

그런데 분위기의 급작스러운 전환이라는 특징은 《레베카》에서도 주요한 특징이다. 작중 서사에 따라 ‘나’가 맨덜리 저택 또는 맥심에 대하여 가지는 인상이 급격하게 전환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전자인 맨덜리 저택에 대해서는 ‘나’가 레베카의 영향력을 얼마나 느끼는 가에 따라 그림엽서에서 본 철쭉이 만개하는 행복의 숲과 같은 이미지와 파도 소리가 세차게 밀려오고 안개로 뿌연 해변의 집과 같은 이미지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후자인 맥심에 대해서는 다정하고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갑작스러운 사건 이후마다 심연 저 밑의 딱딱하고 차가우며 공허한 표정을 발견하곤 한다. 완전히 반대되는 두 기류가 소설 내에서 페이지가 넘어감에 따라 때로는 미묘한 전조 이후에, 때로는 아예 전조 없이 전환되고 있음은 충분히 사려 깊은 독자라면 누구나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전환과 관련해서는 작의 주된 배경이 되는 맨덜리 저택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가 가지는 맨덜리 저택에 대한 인상의 전환과는 별개로, 저택 자체는 또한 상반된 두 개의 분위기가 공존하는 기이한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나’의 공간인 동쪽 침실과 ‘레베카’의 공간인 서쪽 침실의 대립을 생각해보자. 동쪽 침실은 레베카가 죽은 바다가 보이지 않을 뿐더러 소리도 들리지 않는 오로지 새로운 안주인인 ‘나’의 생으로 가득한 공간이지만, 서쪽 침실은 파도 소리가 세차게 울려퍼지며 댄버스 부인의 손길 아래에서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가구들이 죽은 ‘레베카’의 영향력을 암시하는 으스스한 공간이 아니던가? 산책로를 따라갔을 때에 숲속 빈터의 갈림길에서 어느 쪽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오는 풍경도 생각해보자. 왼쪽 길을 택하면 진달래와 철쭉 향기 그리고 평화로이 흐르는 개울물과 새들의 지저귐이 있는 행복의 계곡이 나오는 반면, 오른쪽 길을 택하면 앙상한 유칼립투스와 가시덩굴, 도랑을 따라 흘러내려가는 흙빛 가득한 진탕 그리고 기분 나쁜 고요함으로 가득한 그러나 무엇보다도 레베카가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 있는 작은 만이 나온다. 침실 그리고 산책로의 서로 다른 두 분위기의 대립과 같이 맨덜리 저택의 곳곳이 급작스러운 공간의 전환으로 가득 차 있다.

#4.

이러한 급박한 서사의 전환, 분위기 뒤집기는 《레베카》라는 작품을 읽어나가는 독자로 하여금 안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언제나 ‘레베카’의 그림자가 조여올 수 있음을 암시하는 하나의 심리적 장치라는 점에서 탁월한 서술력의 필연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환’이 소설의 서사 뿐만이 아니라 인물에 대한 인상과 묘사, 그리고 배경 공간 그 전반 즉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모두 파악한 독자라면 그 누구든지 탁월한 서술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왜 이 작품이 바다 건너 아르헨티나의 음악과 매우 잘 어울리는 듯한 직감을 주는지 그 본질적인 원인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제시한 탱고 음악의 경우 원 탱고 음악인 아스트로 피아졸라(Astor Piazolla)가 남반구에 위치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겨울 모습을 그린 곡에, 러시아의 한 음악가가 북반구의 여름을 그린 비발디의 여름 선율을 함께 입혀 편곡한 곡이라는 것을 밝히는 일이다. 서로 다른 반구의 서로 다른 계절로부터 《레베카》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두 여성 사이의 서로 다른 운명을 찾는 일이 이제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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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및 참고문헌

  • 1
    대영제국 시기,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이후부터 사망까지의 1837. 6. 20. ~ 1901. 1. 22.의 약 64년 동안의 기간을 영국에서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라고 한다.
  • 2
    배혜정, “20세기 초 영국 페미니즘의 다른 목소리 – 『프리우먼』의 ‘진보적’ 페미니즘”, 여성학연구. 29(2). 2019. pp. 111-116.
  • 3
    강미경,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과 에멀린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 복현사림. 39. pp. 110-114.
  • 4
    배혜정. op. cit. pp. 114-116.
  • 5
    대프니 듀 모리에(Daphne du Maurier), 《레베카(Rebecca)》. 이상원 역, 현대문학. 2018. p. 597.
  • 6
    ‘페르소나’는 연극에서 특정한 역할을 하기 위해 배우가 쓰는 가면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이에 착안하여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사회적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타인에게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자신에게 유리한 거짓된 모습 혹은 외관 · 표면적 인격을 ‘페르소나’라는 명칭으로 가리킨다. (강유라, “융의 인격구조의 얼굴 페르소나로 본 영화 속 주인공 심리분석”. 한국콘텐츠학회 학술대회논문집. 2010(5a). 2010. pp. 500-501.)
  • 7
    조금 더 정확하게는, 레베카가 생전에 맨들리의 무도회에서 입었던 옷과 동일한 옷인.
  • 8
    대프니 듀 모리에(Daphne du Maurier). op. cit. p. 358.
  • 9
    여기서 ‘소외’란 통상적 · 일상적 의미의 소외라기보다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가 처음 사용한 철학적 용어인 ‘소외’를 가리키는 말이다. 페르소나 즉 인간이 사회적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그 속마음과는 다르게 문화와 사회 상규에 맞추어 자신을 다르게 표현함으로써 구축되는 이미지는 분명 인간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은 우리로부터 낯설어져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 10
    조금 더 정확하게는, 사창가.
  • 11
    서은희. “[공연비평] 여름 한가운데의 탱고 ― 「아디오스, 피아졸라」”, 트랜스라틴. 34. 2016. pp. 93-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