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편

2021-03-17 0 By 커피사유

오래간만에 예전에 중학교 때 함께 지내던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편으로는 고3인 친구라 걱정이 되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 친구와의 카카오톡 대화 중 몇 가지 기억해두고 싶은 대화가 조금 있어 여기에 기록해기로 했다. 어법에 맞지 않는 경우는 가독성을 위하여 약간 재구성하였고, 의미 전달에 오류가 있는 부분도 맥락을 고려하여 일부 수정하였다.

친구: 음음.
친구: 그래서 지금 꿈은 빅데이터를 활용한 다방면 시뮬레이터의 제작인가요.

나: 그런 셈이 됩니다.

친구: 배울게 상당히 많을텐데.

나: 꽤 많이 보셨구만. 아마 사유 #13′이나 사유 #1 중 하나를 보았다는 이야기거나, About 페이지를 보았겠지.

친구: 그리고 배우는걸론 안 될텐데.

나: … 자네는 Chalkboard는 안 읽었나보군.

친구: 세상만사 그 무엇보다 위에 있는 자본주의에 한해서는 전지전능하신 그 분은 어떻게 끌어오실거죠.

나: 끌어올 필요가 있겠습니까.

친구: 저거 무슨 보드야.
친구: 체크보드도 아니고.

나: Chalk – 분필.

친구: 아.

나: 즉, = 칠판.
나: 거기가 사실상 내 짧은 생각들 모음집이지.
나: 되게 위험한 생각들도 많고, 되게 이상한 생각도 많고 해서
나: SNS 같은데는 안 올리고 격리.

친구: 내 꿈은 현대과학이론의 모든 걸 아는 것.
친구: 이지만 너무나도 방대하지.

나: 꿈은 크게, 걸음은 한 발걸음부터.

친구: 너무 큰데.

나: 그건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나: 그것이 바로 lim와 같은 방법이지.
나: 결코 그 값은 될 수 없지만 다만 가까워질 수 있는.

친구: 요새 관심있는 건
친구: 난수임.

나: rand func?

친구: 양자도 잘 보면 해석 가능한 난수가 있지 않을까?
친구: 라플라스의 악마 되살리기.

나: 글쎄. 불규칙성 속 규칙성 찾기겠네.

친구: 애초에 인류가 난수를 발명할려 한게 엄청 옛날부터인데
친구: 양자 난수는 그냥 난수라고 정의한 거잖어.

나: 하지만 그게 물리학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거잖아.
나: 그러면 양자 역학부터 제대로 이해해야 할 걸.

친구: 수박에 붙어 있는 미생물 정도는 알고 있음.

나: 음.

친구: 정의부터 파동이라 난수가 아닐 수가 없지만
친구: 뉴턴 역학이 그랬던 것처럼 한없이 난수에 가까운 거일수도 있지.

나: 하이젠베르크파의 파동 함수 붕괴에 관한 해석과 관찰과 변화에 관한 관념이 뒤집히지 않는 한은 어려울 것 같은데.

친구: 근데 내가 역사를 잘 몰라서
친구: 하이젠베르크가 어쩌다가 그 결론에 도달했는지를 모름.

나: 나도 그 망할 논문을 읽어보지는 않았어.
나: 다만 그 과정이 원자론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하지.

친구: 하다보니 난수처럼 보여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상대론마냥 가정하니까 말이 되었던 건지.

나: 글쎄, 잘 모르겠어.
나: 난 양자 역학을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으니까.

친구: 내가 이해하고 있는 세계가 맞는 건지 확인해줄 사람이 필요함.

나: 내가 해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

친구: 최근 들어서는 철학이 끼어들기 시작.
친구: 쩝.

나: ㅇㅇ 철학 좋음.
나: 원래 모든 학문의 근원이 철학이니까.
나: 하지만 요즘은 생각이 조금 바뀌어서
나: 문학을 철학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하나를 고민하는 중.

친구: 분리해야하지 않나?

나: 그럴 수도.

친구: 세계는 힘의 이동이 파동으로써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게 내 결론이기는 한데
친구: 우리가 보고 느끼는 건 사실 그냥 화학작용일 뿐이라 이걸 남에게 설명하기가 참 애매함.

나: 그렇기는 하지.
나: 그래서 문학 작품 중 일부에는 ‘언어가 비효율적 도구’라는 시각이 등장하기도 하는 거고.

친구: 그럼 칩 박고 텔레파시하기가 효율적이게 되는 건가?

나: 효율만 따지면 그럴 수도 있지만
나: 오히려 그러지 않아서 좋을 수도.

친구: 인간의 감성이라는 게 과학적 시선으로 보면 적자 생존의 결과일 뿐이라
친구: 뭐랄까.

나: 거기는 반대 의견.

친구: 에.
친구: 뭐죠.

나: 얼마 전 읽은 책의 내용에 따르면, 다윈 진화론적 관점에서 ‘현재의 우위종의 모든 개체의 능력은 적자 생존의 결과다’라는 관점에는 한 가지 오류가 있는데,

친구: ㅇㅇ

나: 굳이 ‘지금 존재하는 능력’이 ‘적합한 것’일 필요가 없다는 점.

친구: 예를 들면?

나: 가장 간단한 예시로 고사리를 생각해볼까.
나: 지질 시대에 관해 알고 있으시다면 이 친구들이 양치 식물로, 고생대를 지배했다는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친구: 예.

나: 신생대 홀로를 지나고 있는 지금은 점유율이 상당히 낮죠.

친구: 그렇죠.

나: 이 친구들은 제거되었나요
나: 아직 살아 있잖아.
나: 불리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 ‘다윈진화론적 관점’에서는 ‘적자 생존’에 의하여 결과적으로 도태될 확률이 있지만,

친구: 예.

나: 그것이 지금 살아 있는 종이 가진 능력이 ‘적자생존’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주장할 근거는 안 된다는 것.

친구: 그렇군.

나: 따라서 인간의 감정이 ‘적자생존’의 결과물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음.

친구: 몇 가지는 맞지 않을까.
친구: 감정 말고 감각이라던지.

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친구: 인간은 모르는게 너무나 많아.
친구: 쩝.

나: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은 ‘멸종’을 기술하기는 쉽지만 ‘생존’을 기술하기 좋은 개념은 아닌 것 같거든.
나: ㅇㅇ 그래서 더 낭만적이지.

2021-3-16. 중학교 친구와의 KakaoTalk 대화 중 일부 발췌 및 일부 재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