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실종, 토론의 실종

2023-04-10 0 By 커피사유
MBC 100분 토론 1000회 특집: 토론하면 좋은 친구 (홍준표 대구시장, 유시민 작가)

솔직히 처음에는 잠깐만 보려고 했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끄기가 어려웠다.

물론 그 이유 중 하나는 유머가 넘치는 두 논객의 오랫동안 검증되어 온 토론의 흥미진진함이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방송 중에 등장한 다음의 여론조사 결과였다.

MBC 100분 토론 1000회 특집 中 캡쳐: “정치권에서 제대로 토론이 이뤄지고 있다고 보는지?”에 대한 여론 조사 결과

1000명의 시민에게 “현실 정치에서 토론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고 보십니까?”라고 물은 결과, 토론이 전혀 안 되고 있다는 응답이 전체 응답자의 83.4%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방송 중간에 발표되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나 또한 위 여론조사의 질문이 나에게 제시되었을 때, 〈아니다〉라고 답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물론 정치에 대해 그렇게까지 내가 높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학기 중에는 배우고 익히느라고 정신이 없기 때문에, 식사 시간 때나 잠깐씩 한겨례나 중앙일보와 같은 신문사 홈페이지에서 뉴스를 조금씩 볼 뿐이다. 현 정치와 사회 흐름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최근 우리나라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듯한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정치에 대한 정의가 그 현실 속에서의 대응물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정치는 사회 갈등의 조정이며 우리 사회가 처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절차와 합의를 거치는 과정이다. 그러나 최근 국회나 행정부에 대하여 보도되는 여러 정보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토론은 실종되었으며 이제 어떻게 나 자신이 살아갈 사회의 주요한 결정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보도되는 것은 야당 대표의 검찰 수사, 그리고 여당의 난맥상과 대통령의 실언, 그리고 외교에 대한 비판들 뿐이다. 모든 칼럼이 야당과 여당의 비타협성, 그리고 극심해진 정치 갈등을 토로한다. 지난 대선 이후, 이제 정치는 실종되었으며 오직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일만이 현존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이 가능해진다: (1) 실종된 정치, 실종된 토론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현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 이들은 여당과 대통령이 이 ‘토론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반대로, 현 정부를 지지하는 이들은 180석의 의석을 가지고 있는 거대 야당과 그 야당 대표를 둘러싼 법적 공방 속에 그 책임이 있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나는 문제가 있어 보이는 쪽의 반대를 지지했고 또한 선거 때 그 진영에 표를 던졌다며 책임은 내가 지지하지 않는 진영에 있다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쪽으로 표를 던지지 않았다는 행위〉를 근거삼아 우리 자신은 사회가 선출한 정치 권력이 일으키는 문제들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 번째 질문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그렇다면 실종된 정치, 실종된 토론을 복구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첫 질문에 대한 책임의 소재와는 별개로, 정권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우리는 정권이 올바른 방향을 향하도록 교정할 의무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정권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결국 시민 전체의 총의이며, 정치의 실패를 그대로 방치하기에는 정부와 국가 정책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중대하기 때문이다. 즉, 토론을 사회로 돌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자가 우리 자신이며, 또한 돌려놓아야 할 강력한 필요가 있는 유일한 자도 우리 자신이다.

우리들은 정치란 상호 공격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본질을 가지고 있음을 물론 이해하고 있다. 정치인들도 자기 나름대로의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한 계산이 있을 것이고, 그 계산에 따라 주요 지지층들을 공략하여 현재와 같은 공격들을 공개적으로 감안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생존을 위한 정치 공학이 우리의 삶 속에 자리하는 문제들, 공론화되어야 하며 토론되어야 하고, 논의되어야 하며, 합의되어야 할 문제들을 덮어버리는 순간 그것은 이제 심각한 위협이 된다. 갈등이 조정의 단계가 아닌, 사회 전체의 반목과 전면적인 전쟁의 단계로 진입하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의 삶에 많은 편의와 보호를 제공하고 있는 공동체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따라서 이 현존하는 명백한 위협 앞에서 정권과 정치인들을 향하여, 여당이든 야당이든 가릴 것 없이 명확하게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토론을 하라고, 대화를 하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윽박지르지 말고, 현재하는 명백하고 위협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절차를 밟으라고. 각 세력들은 물론 다른 세력이 대화를 거부한다고, 토론을 거부한다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의미 없는 구호일 뿐이다. 토론과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그들이지, 유권자들, 우리 자신이 아니다. 토론과 대화를 원하며, 문제의 해결을 원하는 우리들은 갈등할 수는 있어도 여전히 현존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논의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으며, 때로는 양보할수도 있고 의견을 물을 수도 있는데, 왜 정치는 그러지 못하는가?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정권과 정치 세력이 할 수 없다는 주장은 일리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구호는 하나의 선동일 수밖에 없다. 대화하지 않는 정권, 대화하지 않는 정치 세력, 따라서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그 어떠한 형태의 정치도 스스로가 존재해야 할 정당성을 대표성 이외의, 즉 시민들이 위임한 결정권의 올바른 행사 이외의 어떠한 것으로부터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한 구호만에 의존할 뿐이며 해결책을 찾지 않는 것이 우리의 정당이고 우리의 정권이라면 우리는 온 힘을 다하여 이를 거부하고 또한 항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권이, 정치 세력들이 대화를 하기를 원하는 우리들의 목소리가 그들 곁에 크게 들릴 수 있도록 외치는 것이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과 대화를 할 수 없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도록, 유권자들이 그 의사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것이다. 정치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지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이 너무 힘들고 또한 바쁘더라도 시민의 정치 참여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속적인 정권의 작동에 대한 확인, 그리고 글과 시민 운동 등 여러 경로를 통한 일상적인 정치 참여야말로 현재 한국 사회의 정치 실패를 정면돌파할 유일한 해결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