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 37000ft에서의 아침

2019-09-30 0 By 커피사유

일러두기

이 글은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2019년 9월 말 미국으로 수학여행을 가던 때, 가는 편의 항공기 기내에서 쓴 글을 그대로 옮긴 것임을 서두에 밝힙니다.

고도 37000ft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나 자신이 떠나온 한국에서는, 이제 나의 반대편에 있을 한국은 밤 아홉 시가 막 다 되어가고 있다.

생각보다 잠을 많이 자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피곤하지는 않다. 하긴, 기내에서 카페인을 미친듯이 들이켰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식후에 커피 한 잔을 챙겨먹고서는 또 홍차에 커피를 먹었으니, 카페인 빨을 받아서 아마 지금 피곤하지 않은 것처럼 느끼는 것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는 그렇게까지 많은 시간을 자지는 않았다. 오늘 나는 새벽 3시 50분 경에 고등학교에서 출발했는데, 벌써 출발한지 만 하루 정도가 지났다. 물론, 나 자신이 항공기를 이용하여 지구의 반대편으로 왔기 때문에 12시간을 벌기는 했지만, 결국 그 시간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때 손해볼 것이기도 하고, 내가 오늘 또 깨어있어야 할 시간에 12시간이 추가된다는 말과 동치이다.

출발한지 대략 1시간 30분 정도 되자마자 첫 번째 기내식이 나왔었다. 내가 찾아본 KAL 093편에 관한 블로그 후기와는 다르게, 메뉴가 조금 달랐다. 나에게 선택권은 3개가 주어졌었는데, 하나는 카레 덮밥 – 내가 승무원 분의 추천으로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하여 먹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식 향료가 강한 닭 요리가 있었고(나는 그다지 향료가 강한 음식은 좋아하지 않아서 바로 Discard 했다), 서양식 소스를 사용한 대구 구이가 있었다. 솔직히, 카레 덮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배를 채우기는 분명히 좋았으나, 그렇게까지 맛있지는 않았다. 허나 함께 나온 미역국은 꽤나 괜찮았다. 바다의 맛을 태평양 상공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지금은 난기류 때문에 항공기가 좀 심하게 흔들린다. 미국 본토 대륙 위에 있는데, 이렇게나 흔들리는데 기장은 안전벨트 사인을 주지 않는 것이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더 심각해지면 안전 상의 위험이 분명히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 딱 막 그러는 참에 안전벨트 사인이 들어왔다. 난기류는 별로 즐거운 경험은 아니다. 한 몇 분 정도 흔들리는 거 정도야 용서해 줄 수 있겠으나, 몇 십분동안 흔들리는 것은 – 특히 여기 노트북 자판조차 치기 힘들 정도로 무슨 예전 70년대의 무궁화호 타는 것도 아니고, 흔들리는 것은 좀 많이 그런 것 같다.

여튼, 과거의 회상으로 돌아가서, 기내식은 그러했고, 기내식 이후에는 커피와 차 종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기내식을 줄 때 나는 트레이에 같이 딸려온, 조그마한 손잡이가 달린 간이 컵이 무엇을 위한 용도였었는지 궁금했었는데, 비로소 이 때야 그 용도를 알 수 있었다. 뜨거운 물을 승무원이 그 컵에 따라주는 용도였던 것이다.(차는 티백의 형태로 제공되었기 때문에 뜨거운 물을 부어주었고, 커피는 로스팅 된 것을 바로 부어주었다) 뭐, 나는 물론 앞에서 언급한 바가 있듯, 카페인을 너무나도 좋아하기 때문에, 커피를 부탁드렸다. 물론, 나는 원두의 맛을 최대한 느끼자는 주의로서 커피를 마시므로, 당연히 설탕과 크림은 빼달라고 부탁드렸다.(하지만 생각보다 원두의 향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는 것이 함정)

중간에 시차 적응을 하라는 것인지 항공기 기내를 어둡게 해 주었다. 명세에 보면, 보잉 777-300ER 기종이 가진, 정말 쓸모없는데 동시에 쓸모있는 기능 중 하나가 객실 내 단계적 조도 조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조금 더 편안한 느낌을 주기에 매우 좋은 것 같다. 물론, 밤샘 작업을 좋아하는 올빼미족인 나로서는 별로 좋아할만한 기능은 아니지만, 적어도 갑자기 불이 꺼지고 켜지는 것보다야, 조금 단계를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거의 비행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노트북을 이용하여 총 5편의 에세이 초안을 쓰고, 한 숨 잔 이후에(거의 1~2시간 정도, 그것도 제대로 잔 것은 아니고 눈만 붙였다) 다시 시간을 에세이를 검토하는 것으로 보냈다. 그리고 나서 조금 무료해지자, 대한항공이 자체적으로 제공하는 이 썩은 펌웨어(정말, 취미로 개발자 활동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이른바 원시적인 디자인을 가진 – 딱 볼 때, 2000년대 초반에 제작한 펌웨어를 아직도 디자인이나 기능 업데이트를 안 한 것 같다. 게으른 항공사 같으니라고) 속의 게임들 중에 뭐가 괜찮은지 살펴봤다. 2007년 즈음에 제작된 것 치고는 많기도 했다. 그래픽이 더럽게 구리기는 했지만, 핀볼 아케이드, 팩맨, 골프나 당구 게임, 체스(또 한 번 별거 아닌 인공지능에 참패했다), 그리고 기타 등등. 하지만 그것들 중에서 내가 느끼기에 가장 괜찮았던 것은, 분명히 테트리스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테트리스 빼고는 게임에 있어서 잼병이기 때문이다.

또 내가 비행기에서 무엇을 했는가를 묻자면, 조금 먹기도 했다. 기내식을 먹고 에세이를 쓴답시고 노트북 자판을 두들겨 패다 보니까 약 3시간 정도가 지나 있었다. 꽤나 출출했기에, 승무원 분께 뭔가 배를 채울 만한 것을 부탁드렸더니, 친절하게 라면과 비스킷을 가져다주셨다. 음~ 상공에서 먹는 라면의 맛이라. 물론 기내이기 때문에 라면은 조금 더 오래 기다려야 제대로 익은 면을 먹을 수 있는데다가, 물도 꽤 생각보다 적었지만, 태평양 상공에서의 신라면의 맛은 꽤나 좋은 편이었다. 덕분에 배는 제대로 찼다. 입술이 좀 아리기는 했지만(매운 맛 때문에…)

그러면서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29일 밤의 9시 KBS 뉴스(불행하게도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JTBC 뉴스는 제공하지 않았다. BBC나 CNN이 있기는 했지만… 별로, 요즘 트럼프 탄핵조사 시국에 관한 뉴스를 더럽게 Huffington post에서 많이 보기도 했으니까)를 보면서, 조국 법무부 장관에 대한 광화문에서의 찬반 시위와 아프리카 돼지 열병에 관한 정부 당국의 차단 노력 등의 주요 뉴스를 살펴볼 수 있으면서도 라면을 곁들일 수 있었으니, 파라다이스가 정말 따로 없었다(물론 좌석 좁은 거 빼고, 내 양 옆에 일도 모르는 사람들 앉은 것 빼고 말이다. 물론 대한항공이 여타 다른 항공기들에 비해서는 좌석 간격이 넓은 편이다.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면 장거리를 여행하는 승객들의 불만 바로미터가 끝까지 달해서 폭발할 것이다)

조금 전에도 또 기내가 흔들렸다. 기내가 흔들리거나, 지금 내가 어디를 비행하고 있는지 등의 구체적인 정보들을 알아볼 때, 그것 이외에도 물론, 나는 인천 공항에서 출발할 때 항공기가 택싱하는 것도 다 외부 카메라를 통해 지켜볼 수 있었다. 이 보잉 777-300ER 기종의 또 다른 장점이 바로 이것인데, 외부 카메라가 비행기 헤드와 테일 부분에 붙어 있고, 그 카메라의 영상을 객실에서 나의 앞 좌석 뒤에 붙은 약 10.9인치의 LCD 모니터를 통하여 확인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항덕이므로 적어도 정말 그 모습은 재미있게 보았다.

항덕인 나를 끌어당긴 또 하나의 이 구린 펌웨어의 이상하게도 매력적인 기능은 비행 정보의 확인에 있었는데, 자그마치 HUD 조종사 시점으로서의 정보 제공을 지원한다! 이렇게 되면 Wind Direction이나 Wind Speed를 알 수 있는데다가, 딱 가운데에 좌석이 당첨된 나 자신이 창 밖을 보지도 않고 대략적으로 현 비행이 어느 시점에 도달했구나를 추적하게 해주는 참으로 고마운 기능이었다. 당연히 HUD 셋업이니까 좌측에 Airspeed 데이터 나오고(Knots 단위) 오른쪽에 Ft 단위의 고도 데이터 나오고, 자그마치 VS(버추얼 스피드)도 정확하게 표시해줬다. 이륙 때 나는 이 기능을 통하여 조종사들이 평균적인 VS를 여타 다른 일반적인 경우와 동일하게 대략 1500 정도로 설정하는 것을 확인해볼 수 있었다.

추가적으로, 롤이나 피치도 HUD 디스플레이 셋업이 기능 특성 상 확인하기 쉬웠다. 전반적인 승객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의 디자인과 성능, 지속적인 개선 부분에 있어서는 혹평을 쏟아내도 모자라겠지만, 이 HUD 기능 하나만으로도 민항덕인 나를 감동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좋았다. 강력 추천. 항덕들에게만.

그러고 보면 애초에 이 보잉 777-300ER 기종 자체가 항덕들의 성지이기도 하다. 291석 정도로 그렇게 큰 항공기가 아닌, 중형 정도의 항공기에 Twin-jet임에도 불구하고, 보잉사가 도대체 엔진과 연료 탱크의 설계에 있어서 등등,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항공기는 가성비가 너무 좋다. 쉽게 말해서, 전체 중량 대비 항속 거리가 너무 좋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 보잉 777-300ER 기종은 국내 항공사 중에서는 대한항공만이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잡학 지식 +1).

평균 순항 고도가 Flightaware Tracker에서는 약 34000ft로 나왔고 실제로 그렇게 가고 있었는데(3시간 전만 하더라도 태평양 상공에서는) 지금은 약 37000ft 정도에 있다. 내 생각으로는 항로 수정이 들어왔던가, 아니면 고도 변경 지시가 ATC로부터 있었던 모양, 혹은 Pilot들이 난기류를 피하려고 일부로 고도를 높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여튼, 여담은 여기까지 정도로 하고, 아직 약 3시간 정도를 더 가야 하기에, 말을 여기서 좀 줄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또 기체가 흔들리기 시작하기는 했지만(오늘 좀 심한 것 같기는 하다 – 전반적으로 대류권 계면 부근 – 보다는 조금 아래인 것 같기는 하지만 – 의 공기가 근래에 조금 불안정한 것 같다) 여튼, 여기서 이만 말을 줄인다.

… 그나저나, 기내식 한 번 더 있는데, 언제 주지? 아침 먹어야 하는데.

조금 후에 나왔고, 맛이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