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대한 우리의 판결과 고독: 《더 헌트》

2020-11-15 0 By 커피사유

“타인에 대한 우리의 판결은 생각보다 잘 뒤집어지지는 않나 보다.” 내가 영화 《더 헌트》와 신형철의 이에 대한 평론을 본 뒤에 내린 결론이다.

솔직하게 놓고 말하자면, 《더 헌트》를 처음 보았을 때 내가 처음으로 느꼈던 것은 주인공 루카스에 대한 연민이나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 클라라에 대한 분개심보다는 왜인지 모를 ‘낯섬’이었다. ‘낯섬’이라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 괴상한 감정이 어디로부터 근원하였는가를 살펴보려면 영화의 처음 장면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은 루카스와 그의 토박이 친구들이 함께 강으로 뛰어드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신형철도 지적했듯, 그들은 어릴 적부터 함께 그 지역, 그 동네에서 지내온 막연한 사이었기에, 그 얼음장 같은 물에 빠져서도 함께 웃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화목하고 바람직해 보일 수 없는 장면은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희한하게도 ‘낯섬’이라는 추상이 머릿속에 떠오르게 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나는 바로 이 괴상한 시각에서 영화를 본 것이다.

도대체 나는 왜 영화의 첫 장면을 보면서 낯설다는 생각을 했을까? 지금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결론은 아무래도 하나인 듯하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대입’이라고 불리우는 정말 더럽게도 아름다운 목표 하에 경쟁을 하고 (또는 당하고) 있으니,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리고 아무리 선생들이 되풀이해도 옆에 있는 아이들은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로 인식하는 시각이 형성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나였으니, 나는 영화를 보던 당시에도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잃어버렸던 중학교 때의 ‘친구’에 대한 향수를 느낀 것이 아닐까.

영화에서는 루카스가 성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오해받는다. 루카스가 그의 무죄를 증명해줄 것이라고 믿으며 참고 인내한 결과 법률은 그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를 믿지 못하고 끝내는 그들 스스로가 루카스에게 판결을 내리고 형을 집행하려 한다. 시간도 소용이 없었다. 영화 최후반부에 그가 사냥을 나갔을 때, 그를 향해 위험천만하게 날아왔던 총알 한 발은 아직 종결되지 못한 ‘단죄’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신형철은 진실은 그 자체가 스스로를 마침내 드러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논하며 이 부분을 다루었지만, 나는 왜인지 모르게 이 말미의 ‘단죄’라는 것은 나에게는 스스로와 주변의 누군가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씁쓸함 혹은 쓸쓸함, 또는 그 비스무레한 경험으로 다가왔다고 생각했다가 이윽고 무언가를 깨닫고는 더욱 그 감정이 고조되는 것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타인’을 ‘경쟁의 구도’에서 바라보면서, 주변인들을 끝없이 단죄했다. 그들의 독서실에서의 나태하다고 생각되는 행위들과,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그칠 줄 모르는 (적어도 나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방정맞게 들리는 그들의 웃음 소리와 우우우-하는 함성과 고함 소리. 그런 모든 것들에 시달리는 동안 나는 은근슬쩍 스스로를 그들보다 높은 지위에 올려두면서 정신 승리를 위한 자기 합리화를 행했던 것이다. 자기 변명과 합리화를 방패로 삼아, 그러한 잘못된 ‘단죄’를 방패로 삼아서 나는 스스로의 상처와 답답함, 억울함을 그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내가 볼 때 이 영화에서 집중되어야 할 것은 ‘클라라의 잘못’이나 ‘루카스의 억울한 고통’이 아니다. 얼마 전 문학 시간에 토론 주제는 전자인 ‘클라라의 잘못’ 쪽으로 흘러갔던 것 같지만, 이 영화를 보고 던졌어야 했던 올바른 질문이란 아무리 다시 생각을 해 보아도 ‘타인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단죄’에 관한 것이어야 했다. ‘클라라의 잘못’이나 ‘루카스의 억울한 고통’이 극도로 심화되었던 것은 그 발단이 비록 ‘클라라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거짓말’에 있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루카스’의 주변인들이 내린 공론화되어버린 ‘단죄’의 연장선에 있지 않던가.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는 그 ‘단죄’의 연장선에 스스로가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타인에 대한 오해, 타인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한 너무 섣부른 결론과 형벌, 그리고 죄에 대한 너무 이른 심판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신도 아니면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혹은 주변에서 어떤 일을 목격했을 때 모든 것은 확실하다며 자신의 견해에 위험한 확신을 품고서 누군가에게 죄와 벌을 부여하고 그를 이윽고 단죄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 ‘단죄’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