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파록 #4. 헵타포드 언어와 인간 언어는 본질적으로 동일한가

논파록 #4. 헵타포드 언어와 인간 언어는 본질적으로 동일한가

2024-07-23 0 By 커피사유

논파록(論破錄)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지적 동반자들과 함께 어떤 주제에 대하여 토론 혹은 토의하면서 완성시켜가는 생각들을 기록해두는 공간입니다.

이번 논파록은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독서 모임에서 경남과학고등학교 40기 한 학생의 질문에 대하여 구성원 간에 나누었던 의견, 그리고 해당 모임 이후에 필자의 친구와 교환했던 의견들을 보존을 목적으로 정리하여 옮긴 것입니다.

필자의 기억에 의존하여 내용들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부자연스럽거나 부정확한 내용이 있을 수 있음을 서두에 밝힙니다. 또한, 실제로 대화가 그렇게 오갔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본고의 내용 흐름을 자연스럽게 하기 위하여 일부 내용은 각색하거나 화자를 변경하였음도 알립니다.



최초의 주장: 봉가드 문제와 ‘지능적 존재’의 언어라는 본질

봉가드 문제

봉가드 문제(BP, Bongard Problem)는 러시아의 과학자 봉가드가 그의 책 『패턴 인식(Pattern Recognition)』에서 제시했던 일반적인 유형에 대한 문제들이다. 전형적인 BP ― 그의 100개의 문제 중에서 51번 문제 ― 가 그림 119에 제시되어 있다.

그림 119. 봉가드 문제 51 [출전 : M. 봉가드, 『패턴 인식』, Rochelle Park, N. J. Hayden Books Co., Spartan Books, 1970].

이 매력적인 문제들은 ― 사람이든 기계이든 ― 패턴 인식자를 시험해보기 위해서 고안한 것이다(지능을 가진 외계 존재에게 이 문제를 던져보아도 좋겠다). 각 문제는 도형들이 들어 있는 열두 개의 상자(이후부터 줄여서 상자로 부르겠다)로 이루어졌다. 왼쪽 상자 여섯 개는 부류 I을, 오른쪽 상자 여섯 개는 부류 II를 이룬다. 상자에 다음처럼 표지를 붙일 수 있다 :

문제는 다음과 같다 : “부류 I의 상자들과 부류 II의 상자들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더글러스 호프스태터(Douglas Hofstadter), 《괴델, 에셔, 바흐(Gödel, Escher, Bach)》. 박여성 · 안병서 공역, 까치글방, 2017. pp. 890-891. “제19장. 인공지능 : 전망 ― 봉가드 문제”.

“인지 · 사고 과정, 즉 ‘봉가드 문제의 해결 솜씨’는 모든 지능이 공유할 것”이라는 가설

이 전체 프로그램1(커피사유 주) 책의 19장의 일부만을 인용하여 앞의 맥락이 생략된 관계로 이 인용부만을 읽어서는 여기서 ‘프로그램’이 무엇에 해당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므로 다음과 같이 부언해둔다: 호프스태터는 책의 제19장에서 ‘패턴 인식 문제’를 봉가드 문제를 경유하여 다루고 있다. 특히 그는 ‘패턴을 인식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 즉 패턴 인식의 알고리즘을 명시적으로 기술하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데, 따라서 이 인용문에서 등장하는 ‘프로그램’이란 ‘봉가드 문제’, 넓게는 ‘패턴 인식 문제’를 푸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을 어느 정도 맥락 속에 설정하기 위하여, 두 가지 방식을 제시하겠는데, 그 두 가지 방식에서 전체 프로그램이 인지의 다른 측면들과 관련된다. 이 프로그램이 인지의 다른 측면들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인지의 다른 측면들이 결국 이 프로그램에 의존한다. 먼저, 그 프로그램이 인지의 다른 측면들에 어떻게 의존하는지 설명해보자. 구별했던 것을 허물어뜨리고, 재기술(再記述)을 시도하고, 되짚어 가고, 층위를 전환하는 것 등이 언제 합당한 것인지 아는 데에 요구되는 직관은, 아마 사고 일반에서 많은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그 프로그램의 이런 결정적인 측면들을 위한 발견술을 정의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때로는 세상에 있는 실제 사물에 대한 경험이 상자들을 어떻게 기술할지 또는 재기술할지에 미묘한 영향을 준다. 예를 들면, BP 70을 해결하는 데에 살아 있는 나무와 친숙한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사람에게서, 이 봉가드 퍼즐들에 관련되는 하위개념망이 전체 개념망에서 쉽게 분리될 수 있을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오히려 실제 물건들(빛, 기차, 끈, 콘크리트 블록, 문자, 고무 밴드 등)을 보고 다루면서 얻은 직관들이 이 퍼즐들을 해결하는 데에 보이지는 않지만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역으로, 현실세계의 상황들에 대한 이해는 시각적 이미지 작용과 공간 직관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 분명하며, 그래서 봉가드 패턴 같은 패턴들을 표현하는 강력하고 유연한 방식을 가지는 것은 사고과정의 일반적인 효율에 기여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봉가드 문제들은 아주 세심하게 고안된 것으로 보이며, 각 문제가 단 하나의 정답만 가진다는 점에서 보편성의 특질을 가지는 것 같다. 물론 이 견해에 반박해서 우리가 “옳다”고 간주하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 속성에 깊숙이 의존하는 것이며, 다른 행성계의 생물들은 그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아무런 구체적인 증거는 없지만, 나는 봉가드 문제가 지구에 매여 있는 인간 존재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단순성 감각에 의존한다고 여전히 확신한다. 나는 앞서 빗, 기차, 고무 밴드 등과 같은 분명히 지구에만 국한된 사물들과 친숙해지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논평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그 논평은 우리의 단순성 개념이 보편적이라는 생각과 충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요한 점은 이런 개별 사물들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것들 모두가 함께 넓은 공간에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다른 문명이라도 우리들처럼 방대한 인공물과 자연물이 있으며 그리고 그것들에서 끌어내는 다양한 경험이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봉가드 문제를 해결하는 솜씨가 “순수한” 지능 ― 만약에 그런 것이 있다면 ― 의 핵심에 아주 가까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패턴이나 메시지 안에 있는 “고유의 의미”를 발견하는 능력을 연구하고 싶다면 봉가드 문제가 훌륭한 출발점이 된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서는 봉가드의 대단히 흥미로운 문제집 중에서 일부만 재현했을 뿐이다. 독자 여러분이 봉가드의 책에서 문제들 전체와 친숙해지기를 바란다(참고 문헌 참조).

더글러스 호프스태터(Douglas Hofstadter), 《괴델, 에셔, 바흐(Gödel, Escher, Bach)》. 박여성 · 안병서 공역, 까치글방, 2017. pp. 910-912. “제19장. 인공지능 : 전망 ― 다른 사고유형들과의 연결”.

헵타포드의 언어와 인간 언어는 본질적으로 동일한가

J: 하나 질문해도 되는지?

필자: 당연히.

J: 다른 건 아니고, 지난 번에 과학고등학교에 선생님 뵈러 갔다가 선생님 차를 얻어 타고 돌아오는 길에 40기 후배가 히치하이킹을 해서 함께 갔었거든. 그런데 그 친구가 나에게 던진 질문이 있는데 스스로 답변하기가 어려워서 네 생각을 물어보려고.

필자: 질문이 뭔데?

J: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읽었던 테드 창(Ted Chiang)의 《네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가 기억나는지?

필자: 어… 졸업한지 꽤 되어서 온전히 기억은 안 나지만, 적어도 헵타포드라는 외계 문명의 언어를 배우는 이야기라는 점은 기억하고 있는데.

J: 맞아. 40기의 그 후배가 36기 문학 교육 자료를 모종의 계기로 읽으면서 그 이야기를 읽은 뒤 던진 질문이야.

필자: 좋아, 그래서 질문이 뭐라고?

J: 그 친구의 질문은 다음과 같았어: “작중 등장하는 헵타포드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일까?”

필자: 아, 그거라면 그 친구에게 두 권의 책을 읽으라고 전해줘. 다음 두 권의 책 말이야. 첫째는 더글러스 호프스태터(Douglas Hofstadter)가 쓴 《괴델, 에셔, 바흐(Gödel, Escher, Bach)》의 제19장을, 둘째는 라캉과 소쉬르 ― 이들은 ‘언어’와 ‘인간 사고’ 사이의 관계를 다룬 철학자들인데 ― 의 저작들을.

J: 그래, 알겠어. 그런데 그 두 권의 책들은 왜?

필자: 전자의 책에서는 외계 문명이든 인간 문명이든 그 인지 · 사고 방식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관찰을, 후자의 책에서는 사고 방식은 언어와 상호작용한다는 관찰을 얻을 수 있거든.

J: 그래서?

필자: 왜곡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극히 단순하게, 삼단 논법으로 생각해보면 위의 둘에서부터 “외계 문명과 인간 문명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라고 결론내릴 수 있거든.

지성과 언어의 본질: ‘패턴 인식의 문제’

J: 설명이 부족한 것 같은데.

필자: 부언하자면 이런 거야. 호프스태터의 책에서는 ‘봉가드 문제’라는 이른바 〈패턴 인식의 문제〉가 등장해. 그는 앞서 내가 말한 책의 19장에서 ‘패턴을 인식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 (또는 알고리즘)’에 대해 논하거든. 여기서 그는 적어도 인간 지능 · 인지의 문제에서 ‘패턴 찾기’와 관련된 어떤 방법론은 필연적으로 ‘패턴을 찾는 층위’를 바꾸는 과정이라던가, 개별 대상들에 대하여 기술하는 언어 양식을 변경하는데 있어 필요한 직관이 인간이 과거 경험과 인지의 축적을 통하여 얻은 사물들에 대한 직관 또는 사물들과 사물들 사이의 관계 ― 즉 ‘개념망’에 상당히 의존한다는 점을 지적해. 나아가서 그는 역으로 인간이 사물과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패턴을 인식하는 메커니즘’ 자체에도, 이를테면 그 메커니즘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공간적 직관’, ‘시각적 이미지 작용’2(커피사유 주) 이를테면, 네 군데가 옴폭 들어간 원을 보고 ‘원’을 옴폭 들어간 부분에 ‘없는’ 곡선을 채워넣어 인지하는 것 등. 등에도 영향을 받는다고 말하지. 즉, 그가 주장하는 것은 요컨대 인간 ‘인지 · 사고’에서 패턴을 인식하는 방식이란 인간의 인지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측면들에 의존하고, 정확히 그의 역 관계, 즉 인간의 인지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측면들도 패턴 인식의 방식에 의존한다는 양방 관계가 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지.

J: 아직 그 말과 네 생각과의 연결점은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필자: 호프스태터의 주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가 ‘봉가드 문제의 정답들은 인간이 ‘옳다’라고 간주하는 것에 의존하고, 이는 우리 인간의 속성에 당연히 깊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인간의 속성을 공유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외계 문명의 지성체가 있을 때에 봉가드 문제의 정답을 인간의 것과 동일하게 산출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비판점에 대하여 대답하는 부분이야. 그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긴 하지만, 인간이든 외계 지성체든지 아마도 둘 모두가 “개별 사물들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것들 모두가 함께 넓은 공간에 펼쳐져 있다”는 공통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 비판에 대해 찬성하지 않아. 그가 믿기에는 지금까지 살펴본 ‘지성체’의 여러 층위를 오가는 능력들을 톺아보건대 자신 주위를 둘러싼 환경과 사물들을 지각 · 인지하고 이들 사이의 관계 혹은 그것들 사이에서 끌어내는 다양한 경험들이 공통적으로 있을 것 같고, 따라서 이 속성을 공유하는 한 봉가드 문제의 해결 과정에서 ‘인지한 것들의 관계나 과거 경험’이 중요한 직관으로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어떤 지능이 있다면 그 지능은 봉가드 문제에 대해서 같은 대답을 내놓을 것 같다고 하지.

J: 그런데 네 이야기에 의하면, 호프스태터의 주장은 외계 생명체와 인간 지능의 ‘공통점’에 대한 이야기이지, 두 지성체의 ‘언어’의 동질성 여부에 대한 논의가 아니지 않나?

필자: 맞아. 그리고 여기서 내가 언급했던 두 번째 저작들의 골자가 작용하는 거지. 아직 정확하게 다 이해한 것은 아니고 나도 대략 들은 것들이기는 하지만, 라캉과 소쉬르 등에 의하면 인간의 사고 · 자아 등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 체계에 의해서 강력히 영향을 받고, 그 역의 관계도 성립한다고 하더라고. 생각해보면, 인간의 언어라는게 인간이 처한 현실 세계를 표상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기호들이니까 뭐. 언어와 인간의 사고 · 지성 체계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인 거지.

J: 그래서?

필자: 재미있는 건,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떤 언어를 ‘해석’하는 과정은, 즉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언어를 사용하여 말하거나, 읽고 쓰는 행위는 모두 생각해보면 모두 일종의 ‘봉가드 문제’와 유사한 점이 있다는 거야. 왜냐하면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문장들을 정해진 기호를 사용하여 쓰면서도, 그 기호들로부터 ‘의미’를 읽어내는 작업을 동시에 행하잖아?

J: 그렇지?

필자: ‘봉가드 문제’가 패턴 인식의 문제였던 것처럼, 나는 언어 사용과 관련된 일체도 패턴 인식의 문제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패턴을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보이는 것, 즉 지각되는 것에서부터 사고하는 층위를 옮겨다니거나 그것의 기술을 달리 하면서 뭔가를 찾아나가는 것이거든. 봉가드 문제가 이러한 일을 한다는 점은 자명해 보이니 언어 사용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짧게 논하자면, 예를 들어서 우리가 “나는 밥을 먹었다.”와 같은 단순한 문장 하나만을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쓰거나 읽는다고 할 때 우리는 모두 ‘나’, ‘밥’, ‘먹다’와 같은 단순 개념들을 먼저 생각할 것이고, 이들이 결합되어 있는 ‘-는’, ‘-을’과 같은 접미사나 ‘-었-‘과 같은 시제를 지시하는 문법 요소들을 종합하여 단순히 문자 그대로의 “나는 밥을 먹었다.”라는 검은 글씨가 아닌, 그리고 또한 ‘나’, ‘밥’, ‘먹다’와 같은 단순 개념들이 둥둥 떠다니는 층위보다도 더 높은 어떤 층위에서 이들 개념들이 결합된 이미지, 즉 ‘내가 밥을 먹었음’의 이미지를 떠올린단 말이지.

J: 여기까지는 동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필자: 그렇다면 우리가 “나는 밥을 먹었다”라고 하는 문자 그대로가 우리가 일차적으로 ‘지각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정확히 우리가 이 문장을 보았을 때 하는 일이 ‘봉가드 문제’를 보았을 때 우리가 하는 일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

J: 그런 것 같네.

필자: 그러니 ‘봉가드 문제’에 대하여 인간과 외계 문명이 같은 답을 내놓는다면, ‘언어 해석’의 문제에 대해서도 인간과 외계 문명이 같은 답, 혹은 적어도 ‘같은 과정’을 거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J: 그런가?

필자: 난 적어도 그렇게 믿어. 소쉬르와 라캉을 내가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인간의 사고 · 지성과 언어 체계가 상호 간의 높은 연관성을 논한 그들의 주장은 내가 보기에는 사실 그 언어 체계 혹은 언어와 관련된 제반의 활동 자체가 인간의 ‘패턴 인식’이라는 지성의 본질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속성에 강력히 의존하여 구축될 수밖에 없다는 고찰에 의거할 때 지극히 당연한 결론임은 물론이거니와, 따라서 호프스태터의 주장에 의할 때는 외계 지성체의 경우도 유사한 ‘패턴 인식’을 기대할 수 있으니 내가 보기에는 헵타포드의 언어든 인간의 언어든 그 본질은 같다는 것이지.


반론들: 라캉 · 소쉬르와 헵타포드 언어의 ‘시간성’

라캉과 소쉬르: ‘언어’와 ‘사고’의 관계

필자: (이전까지의 논의를 선생님께 설명한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이 제가 헵타포드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주장하는 이유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선생님: 그렇군.

필자: 즉 제 주장을 요약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은 셈입니다. “인간이든 헵타포드든 모두 개별 사물들이 공간에 걸쳐 퍼져 있는 같은 물리적 환경에 노출되어 있으므로, ‘패턴 인식’에 해당하는 언어 작용도 결국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행한다.”

선생님: 그러나 네 주장에서 적어도 둘째 근거 지우기는 라캉이나 소쉬르의 주장을 너무 ‘대략적으로’ 이해할 때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음.

필자: 무슨 말씀이신지요?

선생님: 라캉이나 소쉬르는 ‘언어’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에 특히 주목했거든. 물론 네 말대로 큰 측면에서 볼 때는 인간의 사고나 정신 체계가 그 언어 체계의 수립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있겠지만, 라캉과 소쉬르는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인간의 내면의 발달 과정에서 ‘언어의 세계’ 즉 ‘기호의 세계(?)’가 가지는 영향력이 절대적이라고 봤어.

필자: 제가 라캉과 소쉬르의 견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선생님: 완전히는 아니고. 큰 측면에서는 맞지만 구체적으로 볼 때는 아니라는 거지. 라캉과 소쉬르가 주장한 것은 ‘언어가 구성하는 기호로 가득 찬 세계’, 즉 실제의 것은 아니지만 실제의 것을 표상하는 세계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다는 것이지 그 역에 대해서는 별로 주장한 바가 없어.

필자: 그렇군요.

헵타포드 언어의 ‘시간성’

선생님: 네 주장은 또한 ‘헵타포드 언어’가 테드 창의 소설에서 ‘인간의 언어’와 어떻게 다른지를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들림.

필자: 그런가요? 읽은 지 꽤 오래 되어서 제가 정확히 기억이 안 납니다.

선생님: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헵타포드 언어는 ‘시간성’의 측면에서 특별한 언어지. 헵타포드들은 그들의 언어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동시에 볼 수 있거든.

필자: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하지만, 아마 헵타포드들의 언어는 ‘변분법’, 그러니까 시간에 따라 입자의 운동 상태를 기술하는 뉴턴 역학의 관점이 아니라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최적화’, 즉 라그랑지안을 최소로 하는 경로로 운동한다고 봄으로써 시간에 따라 기술하지는 않는 라그랑지안 역학에 기원을 두었던 것 같은데요.

선생님: 아마 그럴 거야. 여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이란, 인간의 언어는 네가 언급한 ‘뉴턴 역학’과 같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기술하지. 사건의 인과 관계들, 논리적 순서와 같은 기술들은 모두 시간선에서 사건들이 전후 중 어디에 있냐에 따라 판정되는 것이기도 하고.

필자: 그렇지요.

선생님: 반면 헵타포드들의 언어는 그래, ‘라그랑지안 역학’이랬나? 그 역학과 같이 시간의 흐름에 따른 각각의 상태보다는 전반적인 상황이 주어졌을 때 사건들을 모두 동시에 제시하는 형태이지. 그러니까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의 언어’와 ‘헵타포드의 언어’는 아주 다른 셈.

필자: 물론 선생님의 지적에 동의합니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언어와 헵타포드의 언어가 ‘본질적으로 같느냐 다르냐’에 있다는 점을 다시 말씀드려야만 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 무슨 말이지?

필자: 선생님께서는 인간과 헵타포드 언어의 차이점 중에서 ‘시간성에 기술이 따르는지’의 여부를 지적하심으로써 두 언어는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질문의 요(要)란 구체적인 측면에서 두 언어가 같은지 다른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이 애매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 동질적인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선생님: 물론 네 주장대로 좀 더 ‘높은’ 층위에서, 그러니까 보다 추상적인 층위에서 본다면 모든 지능을 가진 생물들이 만들어낸 언어란 결국 같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가 호프스태터의 주장을 인용한 점에 대해서도 내 비판이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필자: 그렇습니까?

호프스태터의 ‘외계 생명체와 인간의 패턴 찾기의 동일 가정’의 한계: 시간성

선생님: 내가 보기에 호프스태터가 그 도서의 대목에서 기대하는 바는 지극히 인간적인 기대, 인간적인 가정임.

필자: 어떤 의미에서 ‘인간적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건지요?

선생님: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호프스태터가 그렇게 믿는 주요한 이유란 외계 지능 생물이든 인간이든 모두 “복수 개의 사물이 넓은 공간에 펼쳐져 있는 사실”에 있는 거라는 점을 봐야 한다는 거지. 그런데 내가 조금 전에 말했듯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의 헵타포드들은 과거 · 현재 · 미래를 동시에 보는, 그러니까 시간선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사건들을 동시에 기술하는 언어 체계를 가진단 말이지.

필자: 그렇죠.

선생님: 그런데 도서에 등장하는 ‘봉가드 문제’는 여러 시간에 걸친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주어진 시각에, ‘복수 개의 사물이 넓은 공간에 펼쳐져 있음’. 그러니까 시간이 아닌 공간에서의 ‘패턴 인식 문제’를 다루고 있지.

필자: 그 점에도 동의합니다.

선생님: 네 주장에서 근거가 되는 것 중의 하나인 호프스태터의 믿음은 따라서 외계 지성체와 인간의 ‘공간적 동질성’에 근거하여, ‘공간적’인 패턴 인식 문제에 대해서는 같은 과정 혹은 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

필자: 아,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호프스태터의 견해는 ‘봉가드 문제’가 시간성이 고려된 패턴 인식 문제가 아니므로, 오로지 ‘공간적’인 측면에서만 유효하다고 보시는 건가요?

선생님: 그런 거지.

‘패턴 인식 문제’의 시공간성

필자: 그렇다면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선생님: 뭐지?

필자: 이를테면 ‘시간적인 측면’을 고려한 패턴 인식 문제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편의를 위해 이를 뭐… ‘봉가드-프라임’ 문제라고 불러보죠. 이 ‘봉가드-프라임’ 문제는 ‘봉가드’ 문제와 비슷하지만, 여러 시각에 걸쳐 나타나는 사건들 사이의 패턴들을 인식하는 문제라는 점이 다릅니다. 즉, ‘봉가드 문제’에 시간성을 부여한 패턴 인식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선생님: 그런데?

필자: 제 질문은, 이 ‘봉가드-프라임’ 문제의 경우도, 즉 시간에 걸쳐서 나타나는 사건에서의 패턴들을 지각하거나 인식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과연 호프스태터가 지적한 것처럼 기존의 인지의 여러 측면들에서 얻은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 즉 ‘개념망’이 그 지각 과정에 영향을 주고, 그 역 관계도 성립하는 것이 전혀 들어맞지 않을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봉가드-프라임’ 문제의 간단한 예시로 깜빡이는 신호등의 점멸 패턴을 확인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겠죠. 첫 번째 신호등은 미국식 가로 3색 신호등으로, 두 번째 신호등은 영국식 세로 3색 신호등으로 해서, 두 신호등 모두 1초 간격으로 적색-적색-황색-녹색의 4색 패턴을 계속 반복한다고 하면 나쁘지 않은 예시가 될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도 헵타포드와 인간 모두가 정확히 동일한 ‘패턴’을 찾아낼 것이라고, 혹은 ‘패턴’을 찾는 과정이 본질적으로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음, 글쎄. 나는 ‘플롯’이야말로 어쩌면 시간에 걸쳐서 나타나는 사건에서의 패턴 찾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이야기가 있을 때 우리 인간들은 시간 순서에 맞추어서 사건들을 배열하고, 그 이후에서야 배열된 사건 사이의 인과 관계 등을 따져서 ‘의미’를 찾아내지. 그런데 헵타포드 언어의 경우에서는 시간 순서에 맞추어 사건을 배열하기보다는 동시에 모든 사건들을 시간과 무관히 늘어놓고 ‘의미’를 찾아내잖니.

필자: 물론 ‘패턴’을 찾는 거시적인 방법은 그렇게 다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헵타포드의 경우에도 가장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내기’와 관련된 과정, 즉 기호를 조작하여 층위를 넘나들고 새로운 기술을 시도하면서 공통성을 찾아내는 과정은 동일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헵타포드의 언어가 시간적 선후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체계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헵타보드와 인간 모두는 시간에 따라서 사건들이 공간 안에서 일어나며 따라서 그 사건에서 사물들이 서로 간의 관계를 가지게 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운명에 처해 있다는 점입니다.

선생님: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필자: 음, 요약하자면 비록 헵타포드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와는 달리 ‘시간적 선후’의 개념을 그 언어 체계에서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헵타포드와 인간 모두는 같은 ‘시공간’, 즉 같은 물리적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에 있는 지성체이므로 구축한 개념망이 유사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고, 재기술이나 층위의 전환 등도 유사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조금 더 추상적인 층위에서 말씀드리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선생님: 아하, 조금 더 논의를 해 봐야겠군.


마무리: ‘본질적 동질성’이 발생하는 층위

소통 가능성과 ‘동일성의 가능성’

필자: (지금까지의 논의 내용을 설명한다) … 그래서 여기까지 선생님과 논의한 이후에, 책의 진도를 나갈 수밖에 없어서 논의를 뒤로 미뤘어.

L: 그렇군. 그런데 그 《네 인생의 이야기》 말이야. 나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필자: 어, 그 ‘헵타포드’가 등장하는 이야기야. 그들의 언어는 과거 · 미래 · 현재를 동시에 볼 수 있고…….

L: 잠깐, 그 ‘헵타포드’라는 외계인은 영화 《콘텍트》에 나오는 그거 아니야?

필자: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그랬던 것 같긴 해. 여튼, 그 외계인으로 테드 창이 자기의 단편 소설을 썼다는 거지.

L: 그런데 그 질문 말이야, 애시당초에 외계인과 우리 인간이 소통을 할 수 없는 거라면 쓸모가 없지 않아?

필자: 무슨 말이야?

L: 그러니까 영화에서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언어학자가 나서서 해석을 하잖아. 그게 해석이 된다는 것은 적어도 인간이든 헵타포드든 적어도 뭐 물리학과 관련된 여러 제반 지식이라던가 아니면 수학적 질서라던가 그런 걸 공유한다는 것일 거고. 소수(Prime Number)라던가…….

필자: 그런 거긴 한데, 네 입장이 정확히 뭔지를 모르겠는데.

L: 내 말은, 두 언어 사이에 ‘소통 가능성’이 확립되면 적어도 두 언어 사이에 일종의 ‘동일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거지.

필자: 그렇다면 질문에 대한 네 견해는 ‘동일하다’ 쪽인 건가?

L: 꼭 그렇다고도 할 수는 없지. 동일한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을 수 있다는 거지. 하지만 요는 애시당초에 상호의 화자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두 언어가 있다면 두 언어는 다르다고 봐야 할 것이라는 점이지. 그런데 적어도 영화나 소설에서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인간이 해석하는데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이고.

소통 가능성과 ‘본질적인 동일성’

필자: 그렇다고 해도 ‘동일하다’에 동의하지 않는게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를테면 영어를 사용하는 화자와 우리말을 사용하는 화자 두 명이 있어. 당연히 문법도, 단어도 모두 다르지. 그래도 들으면 대략 몸짓 동원해가면서 알아는 들을 수 있단 말이야. 게다가 두 사람은 동일한 지구의 인간이고 같은 물리 법칙이 지배하는 땅 위에서 살고 있단 말이지. 그렇다면 두 사람이 구체적인 기표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같은 ‘표상’, 즉 개념은 공유하고 있다고 합리적으로 볼 수 있지 않나? 즉, 두 사람의 사고 과정이 다르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L: 글쎄, 예전에 National Geographic 다큐멘터리에서 본 것 같은데,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영어를 사용하는 화자랑 우리말을 사용하는 화자랑 ‘사고 과정’이 다르다고 했던 것 같음.

필자: 그게 무슨 말인데?

L: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붉은 신호등이 있습니다.’라는 상황을 ‘영어로’ 표현하라고 했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문장의 순서 그대로 ‘There is a red light.’라고 말한단 말이지.

필자: 그리고?

L: 그런데 영미권 화자들에게 그 상황에 대한 표현을 요구하면,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Stopped’를 사용해서 멈추었다는 개념을 포함해서 표현한다고 하더라고.

필자: 그런데 그건 영어를 사용하는 화자와 우리말을 사용하는 화자가 서로 다른 사고 과정을 거친다는 걸 지지하는 근거가 아닌 것 같은데.

L: 왜지? 같은 상황 자체를 ‘같은 언어’로 표현했는데, ‘기존 언어’에 의하여 사고 과정이 달라진 나머지 그 결과물이 달라진 것이 아니고?

필자: 그건 번역의 문제잖아. 이를테면 영미권 화자들이 ‘Stopped’를 사용해서 그 상황을 표현하는 것은 그렇게 해온 경우가 많은 문화와 관례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거지. 만약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런 관례를 안다고 했을 때에도 그렇게 표현했을 걸?

L: 그러니까 그러한 문화와 관례에 대한 앎의 결여로 인하여 사고 자체가 달라진 게 아니고?

필자: 사고가 달라졌다기 보다는, 사고에 사용하는 재료의 개수나 종류가 달라진 거지. 대략 이런 거야. 이를테면 네 전공과 내 전공이 다르니까, 네 전공에 관해서는 네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관련해서 떠올릴 것이고, 역으로 내 전공에 관해서는 내가 더 많은 것을 떠올리겠지. 그렇다면 우리 둘 모두에게 각자의 전공에 대한 질문 하나씩, 총 2개의 질문을 동시에 두 사람에게 제시한다고 생각해보자고. 그렇다면 방금 말한 대로 너는 네 전공 질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떠올릴 것이고, 나는 내 전공 질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거란 말이야.

L: 그래서?

필자: 사람마다, 즉 개개인이 겪어온 경험이나 문화권에 따라서 개인이 아는 바, 즉 개인이 그 개념망에 구축하고 있는 개별 요소들의 실태나 그 범주, 그 개수는 달라진다는 거야. 그런데 그게 내가 구사하는 언어와 네가 구사하는 언어가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데 주요한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거지. 네가 든 예시가 그렇다는 거야. 내 예시에서 내가 한국어를 모르고 영어로만 말할 수 있다고 가정한 상황과 네가 든 예시랑 뭐가 다르냐?

‘동질성’의 층위의 문제

L: 여전히 헷갈리는게, 원래 질문에서 ‘동질성’이 도대체 어느 동질성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

필자: 질문은 ‘본질적인 동질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것이지.

L: 아니, 그러니까 그 ‘본질적인 동질성’이 도대체 뭐냐는 말이라니까.

필자: 뭐, 내 표현대로 이야기하자면 서로 다른 두 지성체가 언어를 통해 사고하는 과정에서의 동질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

L: 그러니까 그 동질성이 본질적인거냐 하는 말이지.

필자: 아, 그러니까 네 이야기는 헵타포드의 언어와 인간 언어가 동일한가를 비교할 때, 그 ‘층위’가 어디인지를 모르겠다는 이야기인 거야?

L: 그렇다고 할 수 있을 듯. 아까 네가 이야기한 선생님의 견해와 내 견해, 네 견해가 계속 엇갈리는 것도 이 문제에서 ‘본질적인 동일성’을 판정하는데 각자가 기준으로 삼는 층위가 달라서 그런 것 같은데.

필자: 그렇군. 그렇다면 너는 ‘소통 가능성’과 그 주변, 그러니까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두 언어의 화자가 같거나 비슷한 문장을 완성하는지의 여부를 보는 층위에서 동일성을 판정하는 거고, 선생님은 언어에서 ‘시간성’이라는 측면에 주목하셔서 동일성을 판정하시는 거고, 나는 지성체의 언어에서의 ‘패턴 인식’과 관련된 과정 중에서도 처한 환경에서 얻은 개념에 근거하여 인지하고 기호를 조작하는 층위에서 동일성을 판정하고 있는 것이네.

L: 그런 듯.

필자: 맞네. 결국은 층위의 문제야, 층위의 문제. 네가 지적했듯이. 호프스태터가 그렇게나 이야기한 ‘층위’의 문제.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같아지기도 하고 달라지기도 하는 것. ‘본질적인 동일성’을 어디서 판정하느냐가 문제군.

L: 그러니까.

필자: 그렇다면 원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열린 셈이군. 어느 층위에서 질문한 것인지를 모르겠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나, 너, 그리고 선생님이라는 세 사람이 전제한 층위에서의 제각각의 답은 다름대로 근거들이 있으니. 뭐,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려나.

주석 및 참고문헌

  • 1
    (커피사유 주) 책의 19장의 일부만을 인용하여 앞의 맥락이 생략된 관계로 이 인용부만을 읽어서는 여기서 ‘프로그램’이 무엇에 해당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므로 다음과 같이 부언해둔다: 호프스태터는 책의 제19장에서 ‘패턴 인식 문제’를 봉가드 문제를 경유하여 다루고 있다. 특히 그는 ‘패턴을 인식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 즉 패턴 인식의 알고리즘을 명시적으로 기술하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데, 따라서 이 인용문에서 등장하는 ‘프로그램’이란 ‘봉가드 문제’, 넓게는 ‘패턴 인식 문제’를 푸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2
    (커피사유 주) 이를테면, 네 군데가 옴폭 들어간 원을 보고 ‘원’을 옴폭 들어간 부분에 ‘없는’ 곡선을 채워넣어 인지하는 것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