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9. 2024. 7. 18. ~ 2024. 9. 2.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9. 2024. 7. 18. ~ 2024. 9. 2.

2024-09-06 0 By 커피사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 또는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짧게 노트에 휘갈긴 것을 그대로 옮겨두는 공간입니다.


#1,

가족 휴가를 다녀온 뒤 상경을 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지만 이제서야 쓰고 있다.

휴가 때부터 과학고등학교 독서 모임의 7월 도서인 《레베카》를 읽고 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근대 유럽이 흥미가 있기는 하나, 여성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숨이 막힐 것 같은 소위 〈선의〉로 포장된 대화로 가득한 소설은 아침 드라마 느낌이 나서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데, 이 책은 처음에는 그러한 인상을 풍기는 듯했으나 이내 책의 모든 곳에 묻어나오는 서스펜스의 향기에 빠져들면서 진가를 알아차리게 되는 작품 같다.

《레베카》를 아직 절반 정도까지 밖에 읽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읽었을 때 저자 모리에 여사가 히스테릭한 묘사를 굉장히 잘 한다는 생각이 든다. 배경이 되는 저택, 즉 맨들리 저택의 모든 곳에 레베카라는 여성이 따라다니는 것은 물론,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사물에게까지도, 대화 모든 것에도 그 R 이라는 첫 글자의 등장 이래로 묻어나오는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맨들리 저택의 입구 길 회상에서 억세다 못해 하늘 높이 치솟은 철쭉, (정원에 갇혀 환상에 머무를 바엔) 잎사귀 하나 없이 해골 뼈 마냥 휘감은 유칼립투스, “돌아가신 드윈터 부인께서는….” 그리고 모두가 기억하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레베카.

혹자는 댄버스 부인에게 작중의 ‘나’가 얻는 인상처럼 공포를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억세게 자란 철쭉, 해골처럼 솟은 유칼립투스에서 개성을 찾는다. 순종적이고 고요하며 새장 속에 있는 듯한 소극적 태도보다는 차라리 뱀 같더라도 치명적으로 아름다우며 고집있는, 교활한 쪽이 훨씬 낫지 않을까?

《레베카》의 특유의 서스펜스가 무엇인지, 왜 이 작품이 여러 차례 영화는 물론이거니와 뮤지컬로까지 각색되어 공연되었는지 조금씩 알게 되는 듯하다. 토요일까지 히치콕의 영화까지, 완독을 넘어 다 봐야 하는데, 가능할까라는 걱정도 있지만 그 앞의 은근한 독자로서의 흥미진진한 기대감이 분명히 서 있다.

#2.

오늘 연구실에서 전처리 프로그램의 결과를 기다리는 막간을 이용해서 마침내 독서회의 7월의 도서, 《레베카》를 모두 읽었다. 곧바로 준비한 서평 초고의 제목으로 처음 점찍은 것처럼, 이 작품을 읽는데 필요한 키워드, 혹은 ‘내가 주목한 키워드’는 다음의 3개였다. ① 여성성, ② 가면, ③ 탱고.

① 여성성에 대해 논하자면, 가족 휴가지에서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개인적인 습관 때문에 펼쳐본 책의 맨 뒤 역자의 말 때문에 큰 영향을 받은 결과일 것이다. 역자가 지적하듯 현대 여성 운동의 관점에서 맨들리의 안주인을 차지한 두 여자, ‘나’와 레베카는 확실히 대조된다. 표독하기는 하지만 본인이 원하는 대로 살고, 주체적인 결혼과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레베카는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며 순종적인, 재스퍼 같은 ‘나’와는 선명히 대비된다. 당대 자유를 갈망했지만 사회 관습이 허락치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런 레베카를 어릴 때부터 키워온 댄버스 부인이 그녀에게 미치거나 집착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다.

③ 탱고에 대해서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들은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누에보 탱고 음악의 영향이 클 것이다. 항상 침묵 속에서 독서하는 것은 숨막히는 경험이라, 가능하면 통상 음악을 듣는 습관이 있다. 처음에는 소설의 배경이 근 · 현대 영국임을 고려하여 클래식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시도했으나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리스트의 화려한 기교는 너무 과했고, 베토벤은 너무 웅장했으며, 브람스나 차이코프스키는 너무 따뜻했고, 스트라빈스키는 너무 끔찍하게 울부짖었다. 어쩌다가 피아졸라의 탱고를 틀었을 때, 특히 러시아의 작곡가가 편곡하여 비발디의 ‘사계’를 가져다 붙인 ‘Invierno Porteno’는 정말 잘 어울렸다. 곡의 하이라이트 부분이 소설의 클라이막스에 잘 어울리는 긴장감을 조성한다는 점도 있지만, 핵심적인 이유는 생각해볼 때 탱고 음악 특유의 음조와 박자의 서스펜스에 있는 것 같다. 《레베카》에서는 모든 것이 급격히 바뀐다. 영국의 날씨마냥, 장의 장면들마다 ‘나’ 자신이 바라보는 맨들리의 인상은 행복의 계곡과 그 반대 해변의 음산함을 수시로 오간다. 전조가 있는 듯 하면서도 종종 예고 없이 밀려들어오는 것은 인상의 전환만이 아니라 사건들도, 등장인물도 그러하다. 그녀가 바라본 맥시밀리앙의 인상이 대표적이다. 자상한 남편과 차갑고 침착한 거리 사이를 오가는 그의 모습은 시시각각 변하는 맨들리의 날씨 · 정경 마냥 급격하다. 이는 사건의 진행에 따른 ‘나’의 심경 변화의 부수 결과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탱고 특유의 불규칙하면서 가끔 전조 있는 박자감에 잘 어울리지 않을 이유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② 가면이라는 키워드를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이다. 물론 중간중간 가장 무도회와 같이 자신을 ‘꾸미는’ 익살스러운 파티, 예의와 자존심을 위해 화목을 연기하는 ‘나’, 그리고 레베카와 맥심, 예의상의 무미건조한 대화 뒤의 숨막히는 진의의 싸움들. 물론 이것들이 부분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가면’의 측면에 주목하게 된 계기의 저편에는 나의 개인적 심리 상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물론 불확실한 직감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조차도 고백하건대 〈가면〉을 쓰고 있다는 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니, 예의를 차리고자 하는 그런 종류 말고, 좀 더 근본적인 것. 뭐랄까, 마치 레베카로 가득한 공간과 인물 · 사건 하에서 애써 태연히 안주인 노릇을 하는 ‘나’처럼, 나도 가장 큰, 즉 본질적인 것을 애써 가리려고 시도하다가 공포에 질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지금 나 자신의 내면에서 외치는 무언가가, 나 자신을 언젠가 바꿔놓을 듯한 그런 무언가가 있다. 어쩌면 “돌아가신 드윈터 부인께서는….”이 나 자신의 어딘가를 구속하고 있을련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불길한 전조, 배가 좌초하고 잠수부가 맥심이 가라앉힌 보트를 건저올릴 때 ‘나’의 불길함과 같은 이 전조는 도대체 어디서 근원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의 〈레베카〉도 어쩌면 선실 속 바다에 가라앉은 것일까? 〈가면〉이라는 단어를 내가 책의 중반부부터 떠올리게 된 정신분석학적 동기가 분명 어딘가에 있다.

《레베카》를 여성성 / 가면 / 탱고라는 삼단 도식 하에서 힘겹게 나는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인지 레베카인지, 이 변덕스러운 전조가 변주인지 반복인지 모르겠다. 다행이면서도 미칠 노릇이다.

#3.

펜을 들어서 다시 쓰는 건 근 한달 만이다. 솔직히 한달 내내 남모르게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학기가 끝날 때마다 반복되는 특유의 무기력증, 그것이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다. 다시 니체를 찾게 된 것은 당연한 결말이다.

경남과고 36기 동기들과 하는 〈날적이〉 독서 모임에서 8월에는 니체를 다루고 있는데, 내가 모임장을 맡아 진행하기에 각종 논문과 《이 사람을 보라》에서부터 《선악의 저편》 · 《아침놀》 등 니체의 기타 저작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있다.

2022년도 2학기의 강좌에서 이해한 니체는 새발의 피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들뢰즈가 말하는 ‘생성’과 ‘극복’, ‘입법자’로서의 철학을 말하는 〈니체〉가 과연 무엇인지 이제야 비로소 감이 오는 것이다. 금일 군에 간 친구로부터 온 전화에서도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중요한 것은 (알베르 카뮈 식으로 하면) 〈부조리〉를 직시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추가로 논한다면 과거를 금방 잊고 미래를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는, 오직 현재의 인간, 그리하여 가장 긍정적인 의욕하는 · 싸우는 · 강한 · 매력적인 인간이 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문제이자 나의 치료책일 것이다. 니힐리즘 속에서 방황하는 나는 여전히 〈의미〉를 묻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나는 과거와 미래에 묶여서 현재를 긍정하지 않는다. 과학 교육의 영향으로 나는 너무도 오래 ‘근본’을 사유하는 체계에 익숙해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 그 변화를 긍정해야 한다. 내가 과거에 “변화하는 것이 곧 살아있는 것”이라고 정의할 때 나는 여전히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에 갇혀 있었다. 욕망을 미래의 이름으로 억압하고 재단하려 했지, 그것을 받아들이고 승화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위대한 정오를 준비해야 한다. 그림자가 사라지길, 그리하여 당당하고 긍지 높은, 〈입법자〉로서 태양을 마주하는 인간이 되고 싶다. (‘-고 싶다’는 술어적 표현이 여기서 매우 중요하다) 내가 의욕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되돌아보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가 그것을 다시 되돌아보아야 한다. 삶을 살아가는 동물적 · 생리적 특유의 건강함과 여유를 잃어서는 안 된다. 쫓기는듯 할 때 그 원인이 ‘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각해야 한다. 능동적 주체로서의 나, 사유하는 나, 철학하는 자로서의 나.

#4.

니체의 『도덕의 계보』의 세 번째 논문을 읽은 후유증에서 아직 못 벗어나고 있다. 니체는 진리의 절대성도 의심의 대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투쟁하는 생성 / 소멸의 세계이기에 그는 〈과학〉을 비롯한 학문 일반에는 금욕주의적 성격이 있다고, 보다 정확히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긍정하지 못하고 삶 · 현상에서 의지(Depend)할만한 일정한 것을, 신 · 절대를 찾기 위한 과정 바로 그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나에게는 다이너마이트가 되었고, 이제 나는 이 대학의 문 아래로 들어오며 대학의 모토대로 “Veritas Lux Mea” 라 생각하던 나 자신의 사상이 “Veritas Morbus Mea” 로 귀결되고 있음을 느낀다.

Lux 라는 생각 때문에 어쩌면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나는 비겁하게도 현실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도피한 결과로 학문에 천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내 안에서 가장 자주 떠오르는 질문이 “삶에는 무슨 의미가 있나?” 또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라는 문장임을 자각한다. 연구 활동이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교수와의 관계가 틀어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점을 거짓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이 만성적인 멜랑콜리를 가속화하고 있으며 고립을 심화시킨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쩌면 내 지금까지의 여정 일반이 도피, 그러나 무엇으로부터의 도피? 인정받지 못함으로부터의 도피, 실내화를 도둑맞아 6시간 이상을 찾아다녀야 했던 초등학교 때의 따돌림으로부터의 도피, 즉 인간으로부터의 도피일수도 있겠다는 의심에 이른 듯 하다. 이전에 진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것, 이를테면 중학교 때 천착한 법과 도덕, 그리고 과학적 방법들이 나를 참으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왕좌에서 끌어내려지고 재고의 대상이 된 지금, 나는 이율배반적인 두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첫째로 나는 공허함을 느낀다. 무너진 건물과 시간들을 보며 느끼는 특유의 상실감, 수포로 돌아갔다는 사실, 놓친 것이 너무 많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자각할 때 자연히 떠오르는 절망감 ― 그런 부정적인 감각들을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한편으로 나는 나의 사상이 이전에는 도달하지 못했던 영역들을 탐색하고 있으며 기존의 또는 우상이 파괴된 자리에 내가 무엇이든 쌓아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느껴지는 〈창조의 의지(Willing)〉를 느낀다. 교수와의 갈등과 건강적인 문제 ― 특히 정신적 위기와 모순들 ― 그것들이 분명히 심히 고통스럽고 또한 그 여파가 이어지고 있으며 여전히 미래에 대한 나의 기우들에서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나는 내가 학문의 여정을 게을리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오를 준비하고 비약하기 위한 것으로서의 필수적인 열병을 앓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통념에게는 참으로 모욕적인 언사이겠지만, 나는 대학의 수많은 강의들로부터 내가 배운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지난 방학의 니체 철학과 독서 모임들에서 배웠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나는 이 대학이 자랑스럽지 않다. 오히려 너무 늦게 이러한 자각을 하게 된 것이 슬프다. 정치가 극단화되고 타협과 토론의 장이 사라진다고들 하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겉돌던 나 자신이 이제 그들로부터 거리를 둠에 따라 ― 즉 고독해짐에 따라 나는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되었으며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명제의 참-본성, 의욕하는 인간에 대한 나의 과거의 재단(Cutting, Limiting), “뛰어나야 한다”라는 나의 강박, 강제된 나의 미래 설계를 자각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실질적이고 사회적인 손해를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지금 내가 어쩌면 내 인생을 바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제기를 마주했다는 사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직감 앞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심연우물 아래를 들여다보고 있다. 심연도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겠지만1여기서 나는 다음의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

첫째. 《선악의 저편》에서 니체가 말한 그 유명한 구절: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 또한 네 속을 들여다볼 것이므로. Wer mit Ungeheuern kämpft, mag zusehen, dass er nicht dabei zum Ungeheuer wird. Und wenn du lange in einen Abgrund blickst, blickt der Abgrund auch in dich hinein.

둘째. 게임 《OMORI》에서 도입된 다음과 같은 연출적 장치: 「OMORI에서는 주인공이 기억하지 않고자 하는, 주인공의 죄책감과 자발적인 고립의 원인이 되는 그 기억 일체가 들어 있는 공간을 우물을 통해 내려갈 수 있는 심해라는 공간을 통해 연출해내고 있다.」
이제 푸코처럼 정상과 비정상을 질문하며 다원성과 병렬성으로 세계를 지각하기 시작한 나는 삶 그리고 과학에 대한 나의 해석을 다시 일으켜 세울 필요를 느낀다.

나에 대한 압제를 인식함에 따라, 나는 전대미문의 질문 앞에서 흥분한 나머지 일종의 광기에 내가 휩싸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나는 나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해부해 볼〉 필요를 느낀다. 그 동안 나를 구성한다고 믿었던 신념들이 재고의 대상이 됨에 따라 이제 나는 심연 속으로 던져진 것이다.

무섭다. “고통에 대한 의미는 없다” ― 바로 그 사실이 내 눈 앞에 있는 것이다. 인정하기 싫다. 여전히 내 본능은 기댈 나무를 요구한다. 허깨비로 아른거리는 것이라도 좋으니 내가 버틸 수 있도록 하는 그 무엇이라도 좋으니 있기를, 거기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삶에서 가장 병든, 내 건강이 최악으로 치닫는 이 상황 속에서도 가장 건강함을, 그리고 강해지기를 ― 진정으로 강해지기를! ― 의욕하는 동인(動因)이 속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카뮈 식으로 말하면 나는 마침내 부조리 앞에 서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고 니체 식으로 말하면 위버멘쉬(Übermensch)로 가는 위대한 정오앞에 서 있기 시작한 것이다. 개강일인 오늘의 태양이 떠오를 때, 내가 눈을 감고 일시적인 죽음을 통과한 뒤 다시 깨어났을 때 나는 절망을 보는 인간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부정적으로 이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희망을 가지지 않는 법을 나는 배울 필요가 있다. 고통을 긍정하는 법,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한 모르핀을 그만 주사하는 방법을 나는 배울 필요가 있다.

떠오르는 아침놀 위로 나는 내가 그 어느 때보다도 고독하고 고통스러우리라는 것 바로 그 운명을 본다. 그러나 더는 도망치지 않고 싶다. 이제 족하다! 이제 부조리와의 대결, 무의미와의 대결지탱해나가고 싶다. 죽음의 그림자가 내 정신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지금, 나는 역설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Will)를 느낀다.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나 뿐이다. 이제 환부를 제대로 치료할 위대한 때가 도래한 것이다. 나는 다시 질문할 것이며 비틀거리더라도 나아갈 것이다. 나는 배우고 쓸 것이며 의심하고 사유할 것이다. 대학에서 그리고 이 사회에서 내가 가장 가진 귀중한 것이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나는 철학자 ― 오직 입법자로서의 철학자 ― 의 ‘사자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안다. 남은 것은 용맹하게 대항하는 일, 맞서 싸우는 일이다!


Astor Piazzolla – Libertango (by Astor Piazzolla Quintet, 1974)

주석 및 참고문헌

  • 1
    여기서 나는 다음의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

    첫째. 《선악의 저편》에서 니체가 말한 그 유명한 구절: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 또한 네 속을 들여다볼 것이므로. Wer mit Ungeheuern kämpft, mag zusehen, dass er nicht dabei zum Ungeheuer wird. Und wenn du lange in einen Abgrund blickst, blickt der Abgrund auch in dich hinein.

    둘째. 게임 《OMORI》에서 도입된 다음과 같은 연출적 장치: 「OMORI에서는 주인공이 기억하지 않고자 하는, 주인공의 죄책감과 자발적인 고립의 원인이 되는 그 기억 일체가 들어 있는 공간을 우물을 통해 내려갈 수 있는 심해라는 공간을 통해 연출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