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6. 2024. 2. 15. ~ 2024. 2. 20.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6. 2024. 2. 15. ~ 2024. 2. 20.

2024-02-21 0 By 커피사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 또는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짧게 노트에 휘갈긴 것을 그대로 옮겨두는 공간입니다.


#1.

김포공항을 통해 3일 간의 가족 제주도 여행에서 돌아왔다.

솔직하게 신나는 여행이었다기보다는 생각할 것이 많았던 여정이었다. 아마도 자세한 이야기들은 남아 있는 사진들과 기억들을 바탕으로 따로 글로써 기록하게 될 것 같지만, 몇 가지는 그나마 옮기자면 대략 다음과 같은 희한한 것들을 개인적으로 느꼈다는 것이 될 터이다.

  1. 화려하게 꾸며진 절을 보고 있자니, 큰 부처상의 중품중생인1을, 즉 오른손 엄지와 중지를 집은 부처가 실은 중지가 아니라 검지를 엄지와 맞대야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원을 비는 것이 5천원, 시주만 하면 1가지 소원은 무조건 이루어진다, 우수 공시자의 이름을 새긴 비석들과 우상들……. 불법은 번뇌를 버리고 수행할 것을 강조하지만 내가 본 절에는 번뇌와 욕(慾)들이 반대로 모이고 있었다.)
  2. 빛을 주제로 하는 미술관에서 개인적으로 스마트폰의 사진 어플리케이션의 프로 사진 기능을 이용하여 노출 시간을 길게 하여 사진을 찍었을 때, 결국은 흐리게 나온 사진들을 보면서 이제는 대체로 군대로 다 가 버린 친구들 생각 그리고 제대로 내고 있지 못한 연구 성과가 생각이 나서 주눅이 든 것은 물론, 무섭고 또한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3. 제주도로 갈 때와 그리고 제주도에서 올 때 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를 가져갔는데, 틈틈히 읽은 결과 사물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진 때라 어쩌면 내가 신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의미를 나는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무료한 일상으로 다시 돌아오더라도 사물을 무미건조한, 즉 죽은 사물이 아니라 그것의 사연과 의미, 얽힌 추억들을 한켠으로 치우지 않고서 있는 그대로 가져가고 유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제주도의 추억은 이제 어제가 되었다. 사진과 몇 가지 기념품, 그리고 나의 기억들이 남아 있다. 나는 과연 이들 기억과 추억들을 회색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내일을 살 수 있게 될까?


#2.

약간의 휴식이 주어진 뒤에야 (비록 그 휴식이 그다지 열렬히 원하는 것이라거나 일찍부터 주도적으로 계획한 것이 아닌, 단지 이끌려 간 것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이루어지거나 풀리는 때가 있는 모양이다. 실제로 제주의 3일을 보낸 뒤 문제도 많고 말썽도, 걱정도 많았던 연구실의 일들이 한번에 정리되거나 진도가 나갔으니.

물론 그 가능한 원인 중 하나에 금요일 오전마다 미국에 가정이 있는 교수님과 미팅이 있다는 점, 그 미팅에서 내가 무어라도 가져가 내가 일주일 동안 그래도 뭐라도 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는 점, 이미 한 일년 반을 끌어오고 있는 이 기나긴 여정에 빠른 종지부를 찍던지 해야 내 졸업논문과 연관이 깊은 새로운 주제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직감, 교수의 눈치 그리고 눈초리……; 그런 것들이 있다는 점, 거기 내면의 한 가운데는 물론이거니와 연구실로 향하는 건물마다, 문을 열 때마다 그리고 계단참을 오르내릴 때마다 있고, 내일을 향해 ― 내일을 위해 눈을 감고 다음의 날을 기약할 때도 눈 앞에 어른거린다는 점, 그것들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인정하되, 불안함도 함께 거기 있다는 사실 그것까지 인정하는 것이다.

최근 읽고 있는 (심지어 그 3일의 제주 여행에서도 읽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아, 윤동주가 그의 시에서 언급한 바 있지 ― 그 시인과 이 시인 모두 현실의 그 특유한 색상을, 어지러운 주변에서 어쩌할 줄 몰라 헤매던 이들이었다. 나도 그러한가?)의 《말테의 수기》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왜냐하면 솟아오르는 것 안에는 충분히 쉬고 난 힘이 들어 있는 반면, 언제나 거기 있었던 것은 너무 자주 회상하는 바람에 피로해졌기 때문이다.

#3.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고 있다.

솔직하게 일에 크게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잠도 그다지 잘 못잔다. 중요한 일을 목전에 두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곧 다가올 수 · 목 · 금 중 미국에서 귀국하신 교수님께 보여드려야 할 결과를 어떻게든 내야 한다는 강박에 알게 모르게 시달리는 것 같다.

하도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는 내면의 욕구 · 아우성이 울렸기에 금일은 일찍 퇴근해서 서울대입구역의 모 돈가츠 집(그리 자주 가지는 않지만 ― 워낙 내가 대학 밖으로는 안 나가는 별종이기도 하고.)에서 외식하고, 스타벅스 리저브 커피도 한 잔 들이켰다.

지난 번 군대에서 잠깐 휴가를 길게 나온 의대 친구를 만나서 철학적 · 사회적 이야기들을 길게 한 뒤로 오랜만(한 1달 즈음 되었나?)에 간 것이고, 그 때 마셨던 멕시코 우아두스코 에스파샬은 없어서 엘살바도르 산 라몬으로 마셨는데, 향을 즐기고 싶다고 리저브로 주문한 것이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결국 즐길 수가 없었다. 물론 당장 내일까지 제출 마감인 장학회 신규 학기 장학금 지원 서류 중에서, 지난 학기 학업평가서에 뭐라고 대체 변명을 적어야 할지 막막했던 것도 있었지만, 정면으로 당면한 일을 돌파하지 못하고 빙빙 돌아가는 스스로가 뭔가 참 아이러니하다고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직시하는 것이다〉라고 스스로 되뇌이기를 몇 번이던가. 스스로의 신념처럼 주장하는 것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나는 얼마나 한심한 것인가.

그러나 잠시 인간은 지칠 수 있더라도 계속 나아가는 동물이 아니던가. 허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쓰인 그 유명한 말처럼.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패배할 수는 없어.

#4.

어쩌면 내가 지나치게 많은 걱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귀국하신 교수님께서 갑자기 연구실 일동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하셨다. 개인적으로는 수 · 목 · 금 중 하루에 미팅하자는 교수님의 말씀이 있었기에 안 그래도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그게 오늘로 당겨졌다는 말과 다름 없는 소식에 청천벽력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물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학부생에게 무얼 바라겠냐만은, 또 연구 활동이라는 것은 여러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이 마찬가지로 여러 생각지도 못한 곳들에서 터져나오는 것을 스스로 극복하는 일의 연속이라 항상 계획했던 것보다 종종 늦어진다는 점을 알면서도, 또 교수님께서 일부러 나를 푸쉬2하고 계신다는 사실 그 일체를 짐작하면서도 나는 시간에 쫓기는 듯 했다.

물론 기숙사로 돌아온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솔직히 시간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지금까지 유단히도 애를 쓴 것 같다. 그러나 교수님과의 저녁 식사가 다그침을 당하는 자리라기보다는 격려와 의견 교환, 교수님의 진심 어린 조언들(아버지의 그 삶의 조언 같은 바이브의 그런 이야기들!)과 실패담들을 들을 수 있는 자리였다는 것이 밝혀지고 나니, 숨이 막힐 듯했던 강박을 이제 조금 내려놓을 수 있게 된 듯 하다.

솔직히 부끄럽기도 하다. 스스로의 신념과 열정이 아니라, 단지 교수와의 관계가 악화될 것 그리고 그로 인하여 혹여 내가 불이익을 얻지는 않을까 한 마음이 어딘가 자리했었고, 그 때문에 심하게도 강박적으로 매사에 임하여 일이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내일은 숨막히는 듯했던 연구실의 일상이 조금은 더 나아보이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교수님의 조언대로, 조금 여유를 가지는 것도 나에게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주석 및 참고문헌

  1. 불교에서, 불교 계율을 지키며 열심히 수행하면 극락에 갈 것이라는 메시지를 지시하는 부처 손의 모양을 일컬음.
  2. 더 열심히 임하도록, 더 한계까지 밀어붙이도록 의도적으로 심리적으로 몰아붙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