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의 사이에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의 사이에서

2023-06-20 0 By 커피사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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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r:
Published: 2022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를 오가는 우리들의 삶을 그려낸 정교한 초상화" - 마츠코는 전 일생에 걸쳐 그녀를 덮치는 삶의 〈하강〉 속에서 비틀거리며 자살까지도 생각하는 오사무의 분신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끝까지 다시 일어서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라는 두 '철학'은 결국 같은 출발지와 도착지를 가졌음을 알게 된다. 죽음과 삶, 인간에 대해서 가지는 태도라는 측면에서 두 철학관은 평행선을 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둘 모두는 '인간'에 대한 고찰의 산물이며 '인간'이 가진 여러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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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한줄평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를 오가는 우리들의 삶을 그려낸 정교한 초상화" 총평 짧은 메모 아래의 메모는 2023. 2. 28. 새벽에 이 책을 완독한 뒤 연필로 책 맨 뒷장에 휘갈겨 놓은 것임. 모든 철학이 죽음 앞에서 인간이 걸어가는 방식을 다룬다고 한다면, 모든 문학은 절망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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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한줄평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를 오가는 우리들의 삶을 그려낸 정교한 초상화”


총평

짧은 메모

아래의 메모는 2023. 2. 28. 새벽에 이 책을 완독한 뒤 연필로 책 맨 뒷장에 휘갈겨 놓은 것임.

 모든 철학이 죽음 앞에서 인간이 걸어가는 방식을 다룬다고 한다면, 모든 문학은 절망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지를 다룬다 할 것이다.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회의적 태도를 극구 부정하고, 또한 거부하였다고 믿고 있었지만 이제 정확히 알겠다. 이 책의 주인공 마츠코 외에도, 모든 인간은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의 사이에 있다는 것을. 즉, 니체-오사무 변증법에서의 합(合)이 인간이고 마츠코인 것이다.

 그녀는 계속하여 전 일생에 거쳐 그녀를 덮치는 불행과 재앙 속에서도 비틀거리나 자포자기하며 한 때 자살을 생각하는 오사무의 분신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끝까지 다시 일어서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일생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몇몇 이들을 저주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지만 막상 그들에게 상처를 주려고 하지는 않는다. 오사무처럼 마음이 심약한 것인지, 그녀 나름대로의 저항인 것인지....... (니체와 다자이 중 그녀의 이러한 모습은 누구에 가까울까?)
 21살이라는 짧은 인생사에서 나는 니체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고, 오사무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오사무를 결코 나는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오사무에서 도피하기 위해 니체에 광적으로 달려들었지만 그 때마다 계속 연이어 덮쳐오는 오사무적 유혹과 모습 때문에, 공포에 압도되어 더욱 니체에 집착했으니까 말이다.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 두 '철학'은 결국 같은 출발지와 도착지를 가진 셈이었다. 죽음이나 삶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가지는 태도라는 측면에서 오사무와 니체의 철학관은 평행선을 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둘 모두는 '인간'에 대한 고찰의 산물이며 '인간'이 가진 여러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오사무에게 했던 비판에서의 실수와 정확히 같은 실수를 한 것이다. 즉 ―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고찰할 때 나 자신도 그 〈인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는 것 말이다.
 〈인간〉을 과연 나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 오사무에게서 벗어나 호기심이 아닌 니체식 긍정의 단계로....... 나는 〈초인〉으로는 아직 멀었다.

#1.

삶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상승〉과 〈하강〉. 이 두 방향 앞에서 한 인간의 모든 장면이 펼쳐진다. 대학에 합격하거나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는 인생의 〈상승〉에서 사람들은 소리지르고 웃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순간을 기뻐한다. 그러나 그와 정확히 반대되는 순간들, 즉 누군가의 죽음이나 실연, 사회 · 경제적 고난 속에서는 한숨을 쉬거나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까지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승〉과 〈하강〉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삶에서 기쁘거나 행복한 순간이라 할 수 있을 〈상승〉과 그 정반대인 삶의 고난 또는 절망인 〈하강〉 사이에서 우리들의 삶은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흘러가는 것이다.

#2.

〈상승〉과 〈하강〉이라는 두 순간 중에서 흥미로운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컨대 〈하강〉만큼 흥미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한 인간이 그를 덮치는 절망 앞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그것을 살펴볼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덮치는 일련의 전율이라던가 ‘인간됨’에 대하여 늘 생각하게 된다.

소설은 이러한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만나게 되는 모든 순간들을 그리는 대표적인 예술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모든 소설은 삶의 모든 〈하강〉을 그리는 데 있어 그 어떠한 예술보다도 가장 적극적이고 또한 극적이다.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일련의 사건들을 만나면서 모종의 위기를 겪는다. 그 위기 앞에서 소설 속 인물들은 다양한 선택지 중에 하나를 택한다. 누군가는 정면 돌파를 택하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는 회피나 은둔을 택하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이는 세상을 등지는 쪽을 택하기도 한다. 그 모든 모습이, 이야기들이 손 하나에 들릴 수 있는 인쇄물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소설이다.

#3.

사람들은 인생의 〈하강〉 앞에서 크게 두 가지 태도 중의 하나를 취하는 것 같다. 그 첫째란 다자이 오사무적 태도이고, 둘째란 니체적 태도이다.

다자이 오사무적 태도란 ‘오사무’의 정서 혹은 행위와 정확히 같은 태도를 말한다. 《인간 실격》의 저자인 다자이 오사무의 ‘정서’란 그의 작품 전반에서 짙게 느껴지는 염세주의적이거나 ‘역겨워하며 비틀거리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그의 ‘행위’란 그가 격동기의 일본 속에서 마지막 작품 《인간 실격》을 발표하고 끝내 그의 4번째 자살 시도에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정확히 반대되는 태도에 나는 니체적 태도가 있다고 믿는다. 니체적 태도는 차라투스트라의 태도라고도 할 수 있고, 혹은 초인(Übermensch)적 태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종종 나는 이 태도를 ‘어제의 나 자신을 죽이는’ 방식으로 이해하는데, 삶의 수많은 고난 앞에서 역겨워한 끝에 도피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죽이려 드는’ 그 모든 것에 맞서 싸우는 전사와 같은 태도가 바로 니체적 태도라 할만한 것이 아닐까 싶다.

#4.

늘 모든 소설에서 나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등장인물이 삶의 〈하강〉 앞에서 니체적 태도를 택하는지 아니면 다자이 오사무적 태도를 택하는지였다. 지금까지 읽었던 많은 소설들은 둘 중에 하나를 비교적 명확히 택하는 방식을 사용해왔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에서의 요조는 사람들의 위선적인 모습에 괴로워하며 방황하다 정신병원에 수감되고, 필경사 바틀비는 그가 하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거부하는 다자이 오사무적 태도를 취했다. 반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의 헤라클레스는 여신 헤라가 일으킨 광기로 인해 잠시 가족이 사자로 보이는 착각에 그들을 모두 죽이는 비극을 맞이하고도, 그리하여 그 죄로 인해 미케네의 왕 에우리스테우스의 노예가 되어 목숨이 위험한 온갖 궂은 일을 떠맡더라도 그 모든 것을 정면 돌파해내는 니체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주인공 마츠코의 경우는 그 방식이 뭐라 딱 결정짓기 어려운 경우였다. 마츠코는 학생의 거짓말로 인한 파멸, 살인으로 인한 파멸, 믿었던 사랑에 대한 배신으로부터의 파멸과 같은 인생에서의 연이은 파멸의 순간마다 그 순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하지만, 다시 일어서서 도전하고 또 다시 삶의 고난에 패배하는 것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거부〉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 있을 바틀비와 요조의 모습도 서사의 곳곳에 묻어 나오지만, 〈재기〉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을 헤라클레스적인 모습도 마츠코의 일생의 모든 〈하강〉기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5.

마츠코가 보여준 모습은 지금까지의 모든 다른 소설의 주인공과 다르다. 어떻게 보면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이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숙명 속에서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계속 혼란을 겪는 서사로도 보일 정도의 이 혼란스러운 병존 속에서, 마츠코는 작고 더러운 방으로 도피하기도 하지만 친구가 건네준 명함을 계기로 다시 재기하기를 꿈꾸는 여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이율배반적인 다자이 오사무적 태도와 니체적 태도의 공존 속에서 나는 가장 현실적인 인간을 본다. 요조나 바틀비, 그리고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는 고무적이거나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하기는 하지만, ‘현실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가장 현실의 인간은 삶의 고난 앞에서 도피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고난을 돌파하는 용기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에게는 니체적인 태도와 다자이 오사무적인 태도 둘 모두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츠코에게서 나는〈죽음〉을 향해 달려가며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우리들의 매 순간순간을 본다. 가장 현실적이고 그렇기에 가장 친숙하며, 가장 가까운 땀과 눈물, 그리고 환희로 가득한 삶의 모습을 마츠코는 매 순간 정확하게, 비극적이지만 그러나 가장 위대한 그녀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마츠코는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를 오가는 우리들의 삶을 그려낸 정교한 초상화인 셈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 질문에 있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만큼 가장 정교하게 그 대답을 그려낸 작품은 아마 손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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