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의 사이에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의 사이에서

2023-06-20 0 By 커피사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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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2022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를 오가는 우리들의 삶을 그려낸 정교한 초상화" - 마츠코는 전 일생에 걸쳐 그녀를 덮치는 삶의 〈하강〉 속에서 비틀거리며 자살까지도 생각하는 오사무의 분신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끝까지 다시 일어서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라는 두 '철학'은 결국 같은 출발지와 도착지를 가졌음을 알게 된다. 죽음과 삶, 인간에 대해서 가지는 태도라는 측면에서 두 철학관은 평행선을 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둘 모두는 '인간'에 대한 고찰의 산물이며 '인간'이 가진 여러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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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한줄평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를 오가는 우리들의 삶을 그려낸 정교한 초상화" 총평 짧은 메모 아래의 메모는 2023. 2. 28. 새벽에 이 책을 완독한 뒤 연필로 책 맨 뒷장에 휘갈겨 놓은 것임. 모든 철학이 죽음 앞에서 인간이 걸어가는 방식을 다룬다고 한다면, 모든 문학은 절망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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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를 오가는 우리들의 삶을 그려낸 정교한 초상화”


총평

짧은 메모

아래의 메모는 2023. 2. 28. 새벽에 이 책을 완독한 뒤 연필로 책 맨 뒷장에 휘갈겨 놓은 것임.

 모든 철학이 죽음 앞에서 인간이 걸어가는 방식을 다룬다고 한다면, 모든 문학은 절망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지를 다룬다 할 것이다.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회의적 태도를 극구 부정하고, 또한 거부하였다고 믿고 있었지만 이제 정확히 알겠다. 이 책의 주인공 마츠코 외에도, 모든 인간은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의 사이에 있다는 것을. 즉, 니체-오사무 변증법에서의 합(合)이 인간이고 마츠코인 것이다.

 그녀는 계속하여 전 일생에 거쳐 그녀를 덮치는 불행과 재앙 속에서도 비틀거리나 자포자기하며 한 때 자살을 생각하는 오사무의 분신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끝까지 다시 일어서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일생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몇몇 이들을 저주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지만 막상 그들에게 상처를 주려고 하지는 않는다. 오사무처럼 마음이 심약한 것인지, 그녀 나름대로의 저항인 것인지....... (니체와 다자이 중 그녀의 이러한 모습은 누구에 가까울까?)
 21살이라는 짧은 인생사에서 나는 니체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고, 오사무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오사무를 결코 나는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오사무에서 도피하기 위해 니체에 광적으로 달려들었지만 그 때마다 계속 연이어 덮쳐오는 오사무적 유혹과 모습 때문에, 공포에 압도되어 더욱 니체에 집착했으니까 말이다.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 두 '철학'은 결국 같은 출발지와 도착지를 가진 셈이었다. 죽음이나 삶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가지는 태도라는 측면에서 오사무와 니체의 철학관은 평행선을 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둘 모두는 '인간'에 대한 고찰의 산물이며 '인간'이 가진 여러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오사무에게 했던 비판에서의 실수와 정확히 같은 실수를 한 것이다. 즉 ―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고찰할 때 나 자신도 그 〈인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는 것 말이다.
 〈인간〉을 과연 나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 오사무에게서 벗어나 호기심이 아닌 니체식 긍정의 단계로....... 나는 〈초인〉으로는 아직 멀었다.

#1.

삶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상승〉과 〈하강〉. 이 두 방향 앞에서 한 인간의 모든 장면이 펼쳐진다. 대학에 합격하거나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는 인생의 〈상승〉에서 사람들은 소리지르고 웃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순간을 기뻐한다. 그러나 그와 정확히 반대되는 순간들, 즉 누군가의 죽음이나 실연, 사회 · 경제적 고난 속에서는 한숨을 쉬거나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까지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승〉과 〈하강〉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삶에서 기쁘거나 행복한 순간이라 할 수 있을 〈상승〉과 그 정반대인 삶의 고난 또는 절망인 〈하강〉 사이에서 우리들의 삶은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흘러가는 것이다.

#2.

〈상승〉과 〈하강〉이라는 두 순간 중에서 흥미로운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컨대 〈하강〉만큼 흥미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한 인간이 그를 덮치는 절망 앞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그것을 살펴볼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덮치는 일련의 전율이라던가 ‘인간됨’에 대하여 늘 생각하게 된다.

소설은 이러한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만나게 되는 모든 순간들을 그리는 대표적인 예술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모든 소설은 삶의 모든 〈하강〉을 그리는 데 있어 그 어떠한 예술보다도 가장 적극적이고 또한 극적이다.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일련의 사건들을 만나면서 모종의 위기를 겪는다. 그 위기 앞에서 소설 속 인물들은 다양한 선택지 중에 하나를 택한다. 누군가는 정면 돌파를 택하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는 회피나 은둔을 택하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이는 세상을 등지는 쪽을 택하기도 한다. 그 모든 모습이, 이야기들이 손 하나에 들릴 수 있는 인쇄물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소설이다.

#3.

사람들은 인생의 〈하강〉 앞에서 크게 두 가지 태도 중의 하나를 취하는 것 같다. 그 첫째란 다자이 오사무적 태도이고, 둘째란 니체적 태도이다.

다자이 오사무적 태도란 ‘오사무’의 정서 혹은 행위와 정확히 같은 태도를 말한다. 《인간 실격》의 저자인 다자이 오사무의 ‘정서’란 그의 작품 전반에서 짙게 느껴지는 염세주의적이거나 ‘역겨워하며 비틀거리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그의 ‘행위’란 그가 격동기의 일본 속에서 마지막 작품 《인간 실격》을 발표하고 끝내 그의 4번째 자살 시도에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정확히 반대되는 태도에 나는 니체적 태도가 있다고 믿는다. 니체적 태도는 차라투스트라의 태도라고도 할 수 있고, 혹은 초인(Übermensch)적 태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종종 나는 이 태도를 ‘어제의 나 자신을 죽이는’ 방식으로 이해하는데, 삶의 수많은 고난 앞에서 역겨워한 끝에 도피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죽이려 드는’ 그 모든 것에 맞서 싸우는 전사와 같은 태도가 바로 니체적 태도라 할만한 것이 아닐까 싶다.

#4.

늘 모든 소설에서 나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등장인물이 삶의 〈하강〉 앞에서 니체적 태도를 택하는지 아니면 다자이 오사무적 태도를 택하는지였다. 지금까지 읽었던 많은 소설들은 둘 중에 하나를 비교적 명확히 택하는 방식을 사용해왔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에서의 요조는 사람들의 위선적인 모습에 괴로워하며 방황하다 정신병원에 수감되고, 필경사 바틀비는 그가 하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거부하는 다자이 오사무적 태도를 취했다. 반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의 헤라클레스는 여신 헤라가 일으킨 광기로 인해 잠시 가족이 사자로 보이는 착각에 그들을 모두 죽이는 비극을 맞이하고도, 그리하여 그 죄로 인해 미케네의 왕 에우리스테우스의 노예가 되어 목숨이 위험한 온갖 궂은 일을 떠맡더라도 그 모든 것을 정면 돌파해내는 니체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주인공 마츠코의 경우는 그 방식이 뭐라 딱 결정짓기 어려운 경우였다. 마츠코는 학생의 거짓말로 인한 파멸, 살인으로 인한 파멸, 믿었던 사랑에 대한 배신으로부터의 파멸과 같은 인생에서의 연이은 파멸의 순간마다 그 순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하지만, 다시 일어서서 도전하고 또 다시 삶의 고난에 패배하는 것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거부〉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 있을 바틀비와 요조의 모습도 서사의 곳곳에 묻어 나오지만, 〈재기〉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을 헤라클레스적인 모습도 마츠코의 일생의 모든 〈하강〉기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5.

마츠코가 보여준 모습은 지금까지의 모든 다른 소설의 주인공과 다르다. 어떻게 보면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이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숙명 속에서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계속 혼란을 겪는 서사로도 보일 정도의 이 혼란스러운 병존 속에서, 마츠코는 작고 더러운 방으로 도피하기도 하지만 친구가 건네준 명함을 계기로 다시 재기하기를 꿈꾸는 여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이율배반적인 다자이 오사무적 태도와 니체적 태도의 공존 속에서 나는 가장 현실적인 인간을 본다. 요조나 바틀비, 그리고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는 고무적이거나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하기는 하지만, ‘현실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가장 현실의 인간은 삶의 고난 앞에서 도피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고난을 돌파하는 용기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에게는 니체적인 태도와 다자이 오사무적인 태도 둘 모두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츠코에게서 나는〈죽음〉을 향해 달려가며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우리들의 매 순간순간을 본다. 가장 현실적이고 그렇기에 가장 친숙하며, 가장 가까운 땀과 눈물, 그리고 환희로 가득한 삶의 모습을 마츠코는 매 순간 정확하게, 비극적이지만 그러나 가장 위대한 그녀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마츠코는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를 오가는 우리들의 삶을 그려낸 정교한 초상화인 셈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 질문에 있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만큼 가장 정교하게 그 대답을 그려낸 작품은 아마 손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기억에 남는 문구들

#1.

“쇼, 신이 정말 있다고 생각해?”

나는 걸음을 멈추고, 아스카를 쳐다봤다. 아스카도 멈췄다.

“난, 신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해.”

나는 아스카의 이마에 손을 댔다. 아스카가 내 손을 밀어냈다.

“장난치지 마, 진지한 얘기니까.”

“교회에서 신의 목소리라도 들었어?”

“아마도, 그곳에 신이 있지는 않을 거야. 예배당은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마주 앉아 마음의 소리를 듣는 장소라고 생각해. 그렇게 하면 고민했던 일에 대한 해답이 자연스럽게 머리에 떠오르거든.”

자신에게 말하는 듯한 말투였다.

상권. pp. 194-195.

#2.

“솔직한 감정을 말해줘요. 정말로 나를 사랑하고 있죠? 부인과는 헤어지고 싶은 거죠?”

오카노의 눈이 나에게 향했다. 아까까지 있던 화가 사라졌다. 그곳에 머물고 있는 빛은…… 불쌍함이었다.

“마지막이니까, 나도 정직하게 말하지. 나는 당신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 내 육체만이 목적이었네?”

“그렇게 되는군. 아니, 약간 달라. 나는 다만,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을 뿐이야. 야메카와 테츠야의 연인이었던 당신을.”

“왜…….”

“야메카와 테츠야라는 남자에 대한…… 질투심이라고나 할까?”

오카노가 스스로를 조롱하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마지막까지 그를 이길 수 없었어. 문학에 대한 정열, 재능에 있어서는 전혀 맞설 수가 없었지. 그래서 나는 문학을 포기했어. 그에게는 쓰고 있다고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포기 상태였어. 화가 났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패배였지. 그 대신 출세해서 돈을 모아 갚아주리라 생각했어. 아내와는 중매결혼이야. 장인이 여성복 회사를 경영하고 있어서, 나도 그때까지 근무하던 회사를 그만두고 그곳으로 전직했어. 아내는 무남독녀라서 언젠가는 내가 경영을 이어받겠지. 확실히 그렇게 말해주었어. 그래서 결혼한 건지도 몰라. 데릴사위가 조건이었지만, 나는 흔쾌히 승낙했지.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우리들을 위해 커다란 집도 지어주었어. 당신이 본 그 집이야. 정말로 순조로운 항해였어. 그즈음에 야메카와는 작가를 목표로 가난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어. 나는 가끔 그를 방문해서 돈을 건네준 일도 있었어. 나는 이겼다고 확신했지. 재능에서는 졌지만, 인생에서는 이겼다고. 그가 무너져가는 것을 보며 동정을 하는 여유까지 부릴 수 있었지. 그런데, 당신이 나타난 거야. 젊고, 아름답고, 머리 좋은 당신이. 그는 마음속 깊이 당신을 사랑했어. 더욱이 믿을 수 없는 것은 험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당신이었어. 나의 우월감은 날아가 버렸어. 참혹했지. 어중간한 지위와 재산에 눈이 멀어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고, 이것이 승리라고 믿고 있던 내 자신이 말이야. 당신이 그와 헤어지길 원했어. 그러면 그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데 그 전에 전철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던 거야. 그의 인생이 비참한 것이었을까? 당치도 않아. 넘치는 재능, 그것을 길동무로 젊게 죽어간 거야. 당신이라는 아름다운 여성에게 사랑을 받으며 말이지……. 내가 볼 때 그는 부러울 정도로 빛났었어. 문학에 몸을 던진 인간으로서 꽤 훌륭한 죽음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야메카와가 죽어서, 나는 영원히 그를 이길 수 없게 됐어. 내게 남아 있는 방법은, 그에 대한 열등감을 불식시킬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어. 그건 당신이 가진 그에 대한 사랑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었지.”

상권. pp. 276-278.

#3.

부엌에 들어오니 밖에서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고, 아침 햇살이 비치는 창문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제 슬슬 타마 강의 벚꽃도 꽃망울을 터뜨리겠지.

나는 앞치마를 하고 쌀통에서 쌀을 꺼내 싱크대에서 씻었다. 씻은 쌀을 전기밥솥에 넣고 스위치를 누르고 나서 냄비에 물을 담아 불에 올렸다. 물이 끓을 동안엔 도마에서 무를 썰었다. 시마즈 씨는 무를 듬뿍 넣은 된장국을 좋아했다.

어젯밤의 대화를 생각하니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프러포즈를 받은 후 나는 시마즈 씨와 우리의 미래에 대해 이야길 나누었다. 시마즈 씨는 나중에 나도 이발사나 미용사 자격증을 따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렇게 되면 나도 함께 이발을 할 수 있고, 만약에 미용사 자격증을 따면, 새롭게 여자 손님을 불러모을 수도 있다. 돈이 모이면 미용실을 별도로 차리는 것도 좋다. 그건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고, 정말 멋있는 아이디어였다. 나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다.

냄비의 물이 끓기 시작하자 가츠오부시를 넣고, 센 불에 확 끓인 후에 불을 끄고 가츠오부시를 걸러냈다. 새하얀 김과 함께 진한 국물이 올라왔다. 나는 김을 가슴 한가득 들이마셨다. 다시 불을 켜고 냄비에 무를 넣으려 할때였다.

“뭐야, 당신들!”

가게에서 시마즈 씨의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이 굳어졌다. 아직 문을 열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게다가 시마즈 씨가 큰 소리를 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가스 불을 끄고 앞치마를 두른 채 가게로 나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신 왜 그래?”

가게에는 양복 입은 남자 2명과 여자 경관 1명이 서 있었다. 3명이 함께 나를 쏘아봤다. 나는 경직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 있어!”

시마즈 씨가 돌아보며 나에게 소리를 쳤다. 얼굴은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듯 빨갰다.

“카와지리 마츠코지?”

남자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방금 물은 남자가 경찰수첩을 꺼냈다.

“1월 28일, 시가 현 오츠 시의 맨션에서 31세의 오노데라 오사무가 흉기로 살해당한 사건으로 영장이 나왔다.”

다른 형사가 종이를 한 장 보여주었다.

“뒤에도 경관을 배치했어. 단념해.”

나는 시마즈 씨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입을 벌린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형사 쪽으로 몸을 돌리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준비할 테니까, 좀 기다려주세요.”

여경관이 앞으로 나섰다. 키가 작고 피부가 하얀 편이나, 몸매는 늠름했고 장딴지는 단단해 보였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도망가지 않을게요.”

“아니, 함께 가야 합니다. 혹시나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 안 되니까요.”

나와 여경관은 서로 노려보았으나 내가 먼저 눈을 피했다.

“이봐, 대체 뭐야. 마츠코가 뭘 했다는 거야!”

시마즈 씨가 나와 형사들을 차례로 보며 외쳤다.

여경관이 시마즈 씨의 옆을 지나가려 할 때 “안 돼!” 하며 그가 막으려 했으나 2명의 형사에게 저지당했다. 여경관은 태연하게 내 팔을 잡았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전에 빨리 준비하는 게 신상에 좋을 거예요.”

여경관이 앞을 보면서 재촉했다.

“내가 자살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시마즈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먹이고 있었다.

“당신 말이야, 전국에 지명수배되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여경관이 조용히 물었다.

“하다못해 가명을 쓰겠다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어요?”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필요한 물건을 가방에 넣었다. 거울 앞에 앉아 립스틱을 발랐다. 거울 속의 여경관은 내가 립스틱을 삼키지 않을까 의심하듯이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끝났어요?”

“잠깐만요.”

나는 오늘 아침 금방 배달된 신문에서 광고를 빼냈다. 뒷면이 백지인 두꺼운 것을 골라 뽑았다. 그곳에 립스틱으로 편지를 썼다.

고마워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행복했어요. 날 잊어주세요. ― 마츠코.

하권. pp. 63-67.

#4.

나는 다다미에 앉아서 채광창을 올려다봤다.

검붉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3일 전에 스물일곱 살이 되었다. 오노데라가 최초로 내 손님이 된 것이 작년 이맘때였을 것이다. 아카기 씨가 이미 가게를 그만두고, 아야노도 센다이로 돌아간 다음이었다. 1년 사이에 아야노가 죽고, 내가 오노데라를 죽이고 교도소에 들어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꼭 그렇다고 말할 수만은 없을지도 모른다.

큐슈를 떠나기 직전, 오노시마 집에 들렀을 때 쿠미가 부둥켜안아서 무섭다고 느꼈다. 내가 이제부터 지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재판관이 말한 대로 모두가 자업자득인 것이다.

내 소식이 고향인 오노시마에도 알려졌을까? 경찰이 고향집을 방문하지 않았을까? 노리오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쿠미는? 엄마는? 재판이나 면회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전국에 지명수배되었다고 했는데, 아카기 씨도 알고 있었을까? 시마즈 씨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인범과 동거했던 일을 후회하고 있을까? 나 때문에 이발소도 못 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에게 너무나 미안한 짓을 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오노데라에게는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 생기지 않고, 오히려 오노데라가 내뱉은 말을 생각해보면 미움만이 되살아났다. 역시 나는 이상한 것일까? 자기중심적? 충동적? 지극히 좁은 대인관계? 정말로 그 말이 맞는 것일까? 나는 모자란 인간일까? 배려가 없는 인간일까? 인간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제 어찌 됐든 돌이킬 수 없지만 말이다.

하권. pp. 91-92.

#5.

다섯째 날에는 교육과에서 주관하는 신입 교육이 있었다. 강사는 나이가 많은 남성 교도관이었는데, 강의 내용은 주로 교도소의 규칙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특히 진급에 관심이 갔다.

“질문 없습니까?”

강의 후, 마지막으로 강사가 방 안을 둘러볼 때 나는 손을 들었다.

“번호와 성명을 대십시오.”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을 느끼면서 일어섰다.

“6번, 카와지리 마츠코입니다.”

“질문은 무엇입니까?”

“평가가 높으면 금방이라도 진급이 됩니까?”

“당신의 형기가 얼마죠?”

“8년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1년 정도는 있어야 할 겁니다. 3급으로 올라가는 데 빨라야 1년이란 말이죠. 그 후에 2급으로 올라가려면 또 반년은 걸리겠고 거기에서 또 1급이 되려면 2년은 각오하는 게 좋아요.”

“2급이 되면 미용사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나요?”

강사가 기쁜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요. 그 점에 대해 잠깐 보충설명을 하죠. 여기서도 미용사 훈련을 하고는 있지만, 미용학교는 카사마츠 교도소에만 있어요. 따라서 희망자는 우선 카사마츠에서 1년간 미용 실습생으로서 공부하고 졸업해야 합니다. 그후 이곳으로 돌아와 미용실에서 견습으로 1년간 실습을 하고, 국가시험을 봐서 합격하면 미용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사가 말을 끊고 엄숙한 눈초리로 방 안을 둘러봤다.

“미용 실습생이 되기 위해서는 심사를 받고, 소장님의 허가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초범일 것, 그리고 성실하며 규칙 위반을 하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카사마츠 미용학교에 가는 것도 1년에 2, 3명뿐입니다. 알겠습니까? 그만큼 험난한 길이라는 겁니다.”

강사의 얼굴이 누그러졌다.

“너무 절망적인 이야기만 한 것 같은데, 희망적인 이야기도 하나 하겠습니다. 우리 교도소의 미용실에는 일반인 손님들이 많습니다. 왜일까요? 값이 싼 데다가 미용사의 기술이 뛰어나기 때문이죠. 이곳에서 자격을 취득하고 출소해서 자신의 가게를 차린 사람도 많습니다. 이곳은 아무래도 교도소라서 제한이 많지만, 본인의 의지 여하에 따라서는 많은 일이 가능합니다. 이 정도 설명이면 되겠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자리에 흥분한 채 앉았다. 교도소에서 미용사 자격을 딸 수 있다고는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꿈을 꾸지 않을 수 없었다. 시마즈 씨와 둘이서 이발소를 꾸려나간다면 미용사 자격을 가진 나는 여성 손님까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가게를 확대하거나, 미용실 분점까지 내고 둘이서 힘을 합쳐서 행복을 쌓아가면…….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네. 네 형기를 생각해. 가석방을 받는다 해도 5년이나 6년은 걸릴 텐데. 시마즈 씨가 그렇게 기다릴 리가 없지. 그러기는커녕, 너와 산 나날을 후회하고 있을 거라고. 아니라고? 그렇다면 왜 면회를 오지 않는 거지? 도쿄에서 멀기 때문에? 정말로 사랑했다면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지. 어차피 넌 시마즈 씨와 두달간 함께 살았을 뿐인, 스쳐 지나가는 여자였던 거야.

나는 그렇게 울부짖는 이성을 틀어막았다.

꿈이라도 좋아. 환상이라도 좋아. 밑바닥까지 떨어진 곳에서 발견한 오직 한 가닥의 빛이요, 희망인 것이다. 그 희망에 매달리자. 그 이후는 생각하지 말자. 다른 일은 생각하지 말자.

하권. pp. 94-97.

#6.

나는 마츠코 고모가 외진 곳에서 고독하게 살았고, 생의 마지막에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불쌍한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츠코 고모 자신이 살인자라니…….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살인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다. 초라한 집에서 살해당한 것도 고모가 저지른 살인과 뭔가 관계가 있는 것일까?

마츠코 고모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더욱 좋지 않은 모습을 들추어내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츠코 고모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마음이 왠지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교도소에서는 성실하고 조신했지. 다만 교도관을 의식했는지 철저하리만큼 규칙을 지켰어. 더운 날 제초작업 같은 것도 정말 열심히 했지. 다른 사람들은 교도관의 눈을 피해 적당히 쉬엄쉬엄 했는데, 마츠코만은 아니었어. 하긴 그런 우등생을 싫어하는 족속들이 어디에나 있듯이 가끔은 해코지하는 수감자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마츠코는 묵묵히 견뎌내더라고. 내가 기억하기로는 싸움을 하거나 규칙을 위반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왜 그래? 갑자기 조용해졌네.”

“설마 마츠코 고모가 사람을 죽였다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충격이었어?”

“네…….”

“하긴 살인은 나쁜 거지. 그렇지만 쇼 군, 마츠코에 대해 알고 싶어서 여기 온 거지? 이해해주고 싶어서 그런거 아니야? 그러면 왜 그녀가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지만 살인은 살인이죠. 그리고 도대체 마츠코 고모는…….”

“그럼,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겠다는 거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쇼 군, 혹시 마츠코가 청렴하게 살다 간 수녀님이라도 되는 줄 알고 있었어?”

“…….”

“마츠코는 한낱 인간에 불과해. 섹스를 하기도 하고 똥을 싸기도 하는 인간.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상처를 주기도 하지. 쇼 군도 거짓말도 하고, 가끔은 가볍게 법도 어기잖아?”

“그렇지만 살인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혹시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어?”

“…….”

“마츠코가 살인을 저지른 건 사실이야. 하지만 힘없는 여자가 남자를 죽인 데에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법이야. 알아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마츠코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는 건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게다가 이렇게 나까지 끌어들였으니,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지는 마. 여기까지 왔으니, 이번 일을 철저하게 조사해서 그녀의 삶을 나름대로 이해해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와무라 사장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마츠코가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또르르.

그때 마츠코 고모의 유골함에서 들렸던 희미한 소리가 귓속에서 되살아났다. 마치 마츠코 고모의 혼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호소하는 것 같았다.

하권. pp. 80-82.

#7.

도쿄 역에 도착해 신칸센에서 내려서 추오 선으로 갈아타고 미타카로 갔다. 그때와 같이 타마 강 상수를 따라 걸었다. 수로에는 여전히 물이 없었으나 길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었다.

다리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기 시작했다. 내 발은 시마즈 씨의 이발소로 향했다.

예전 도로변에는 논과 밭뿐이었지만 이제는 주택이나 상점, 빌딩도 지어져 있었다. 도로 폭도 넓어졌고 황색의 중앙선도 그어져 있었다. 당시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8년 전의 내 기억은 거의 의미가 없었다.

길을 잘못 찾은 것일까, 생각하며 걷고 있을 때 이발소의 회전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심장이 쿵쾅대는 것을 느끼면서 가까이 다가갔다. ‘헤어살롱 시마즈’라는 글씨가 보였다. 틀림없었다. 시마즈 씨의 이발소가 새롭게 개장한 것이다. 그러나 내 기억과는 어딘가가 달랐다. 그래, 가게의 위치가 달라져 있었다. 그 순간 내 기억과 눈앞의 광경이 겹쳐졌다. 옛날 ‘시마즈 이발소’가 있던 자리에는 이제 매우 밝은 분위기의 가게가 세워져 있었다. 넓은 주차장에 24시간 영업이라는 선전 문구가 걸려 있었는데, 처음으로 보는 스타일의 가게였다. 할머니가 혼자서 가게를 보고 있던 담배 가게는 고깃집으로 변했다. 단층 주택이 있던 곳에는 이층집이 들어섞고,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던 공터는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헤어살롱 시마즈의 건너편에 섰다. 도로 너머에 있는 가게 안의 모습이 유리를 통해 보였다. 의자는 3개. 손님은 제일 앞쪽의 의자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 한 사람뿐이었다. 머리를 자르고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시마즈씨. 그리운 마음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변하지 않았네. 아니, 약간은 야위었지만 그만큼 날렵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끔 입을 움직이며 웃었고 진지한 눈으로 손님의 머리를 매만졌다. 손님도 기분이 좋은 듯 싱글대며 거울을 보고 있었다. 시마즈 씨의 가위질은 신선했다. 미용사가 된 나는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한 마디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 미용사 자격증을 땄어.

그것만이라도 말해주고 싶었다. 그대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후회할 것이다. 차갑게 문전박대를 당해도 좋다. 만나자. 만나야 한다.

도로를 건너려고 발을 내디디는 순간 시마즈 씨가 가게 안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나는 발을 멈췄다.

가게 안에는 시마즈 씨처럼 하얀 작업복을 입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몸집이 작고 귀여운 여자. 나와 비슷한 나이일까? 그녀는 웃는 얼굴로 시마즈 씨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 여자의 뒤에서 시마즈 씨와 꼭 닮은 작은 남자아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이는 여자의 허리에 매달려, 시마즈 씨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님도 남자아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가게 안의 웃음소리가 내가 있는 곳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나는 등을 돌려 미타카 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권. pp. 150-152.

#8.

“확실히 몸을 파는 일은 힘든 일이었지만, 가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어. 오고토가 아니고 하가타에 있던 때로 말이야.”

메구미의 눈이 왜, 라고 묻고 있다.

“그때는 나를 위선적으로 꾸밀 필요가 없었거든.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나는 그때 가장 솔직한 삶을 살았던 것 같아.”

메구미가 입술을 움츠렸다. 눈동자가 순간 예리한 빛을 발산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권. pp. 174-175.

#9.

1983년 5월.

그날 나는 영업시간 후의 기술 공부에 참여하지 않고 혼자서 집에 가는 중이었다.

미용실 빌딩을 나가자 축제라도 하는 듯 거리 전체가 떠들썩했다. 양복 차림의 샐러리맨은 불그레한 얼굴로 웃고 유행하는 브랜드 옷으로 몸을 감싼 젊은 여성들은 나야말로 긴자의 주역이라고 뽐내듯이 거리를 활보했다.

어떻게 저렇게 티 없이 웃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렇게 자신 있게 행동할 수 있을까? 대체 뭐가 그렇게 즐거울까?

나는 나와 아무 관련도 없는 광경에 가벼운 어지러움을 느껴 멈춰 섰다.

내가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니다. 내가 안주할 수 있는 곳은 어딘가 따로 있다. 꼭 있을 거야. 없을 리가 없어…….

하권. pp. 188-189.

#10.

나는 류를 집으로 데려와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전부 이야기했다.

수학여행 답사 때에 타도코로 교장에게 겁탈당할 뻔했던 일. 그것이 불씨가 되어 도난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학교를 떠난 일. 테츠야와의 동거와 그의 자살. 테츠야의 친구인 오카노와의 불륜관계와 파국. 창녀가 된 일. 오노데라와 오고토로 옮겨 마약에 손을 대게 된 일. 오노데라를 죽여버리게 된 일. 자살하기 위해 찾아갔던 타마 강 상수에서 이발사인 시마즈와 알게 되어 함께 살았던 일. 그리고 시마즈로부터 프러포즈 받은 직후에 체포되었던 일. 교도소에서 미용사 자격을 따고 출소 후에 시마즈의 가게를 찾아갔으나, 시마즈는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었기 때문에 만나지 않고 돌아온 일. 긴자의 아카네에 취직해서 1년이 지난 일까지.

류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없이 듣고 있었다.

“알겠지. 나는 여러 이름 모를 남자들과 몸을 부대끼며 살았고, 살인까지 저질러서, 결국 뭐 하나 이루어놓은 것이 없어. 남은 건 미용사 자격증뿐이야. 학교에 있을 때와는 달라.”

류가 무릎 위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 교장이 선생님에게 그런 짓을 했다니……. 저는 결과적으로 그놈을 기쁘게 해준 것뿐이네요. 죽일 놈!”

“류, 그 일은 이제 됐어.”

“안 됩니다! 알고 계세요? 그는 그 후 지방의회 의원이 되었어요. 교육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말이죠. 제가 소년원에 있을 때 시찰하러 온 적도 있어요!”

“제발 부탁이니까, 그렇게 큰 소리 내지 마.”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기 다시 온 것은 더 중요한 용건이 있어서 아니야?”

류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자세를 바로 하고 등을 세웠다. 눈을 내리뜨고 거친 호흡을 내쉬면서 1분 정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는가 싶더니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얼굴을 들었다.

“전 지금도 선생님이 좋습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차갑게 대답했다. 류가 어깨를 떨어뜨리며 눈을 내리떴다.

“류,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이야기해.”

류가 눈을 들고 힘주어 말했다.

“저와…… 자주세요.”

“자달라니 무슨 말이야?”

“그…… 선생님을 안게 해주세요.”

“옛날에 동경하던 여교사를 갖고 싶다, 이거야?”

나는 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한 번 섹스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이라는 거네.”

류가 머리를 좌우로 격렬하게 흔들었다.

“아녜요. 그런 말이 아니에요. 저는 진지합니다.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사랑한다는 말 그렇게 쉽게 하는 거 아니야.”

“쉽다니…….”

“한 번의 섹스라면 해주겠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 말아줘.”

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입에 올릴 겁니다.”

류는 낮은 톤으로 말했다.

“저는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그런 말 하지 마.”

“진심입니다.”

“류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 너는 선생님의 목숨을 달라고 하고 있는 거야. 여자에게 구애한다는 건 바로 그런 거야.”

“그 정도로 각오되어 있습니다.”

나는 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선생님이야말로 제 기분을 오해하고 있어요. 선생님은 저에게 있어 일생에 하나뿐인 사랑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저는 저의 목숨이라도…….”

“미쳤구나.”

나는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난 이제 아줌마 나이야.”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몇백 명의 남자에게 몸을 팔아온 지저분한 창녀에다, 살인까지 저지른 여자야.”

“살인자든 창녀든 상관없어요.”

“이런 나를 사랑할 수 있어?”

“네.”

“정말로?”

“더 이상 거짓말은 안 합니다.”

류의 눈이 촉촉해지고 얼굴은 붉어졌다. 마치 중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도대체 뭘까, 가슴속에 떠오른 이 따뜻한 빛은.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이 빛은 뭘까? 이 꽉 조여드는 듯한 달콤한 설렘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 확실한 느낌은.

“후회할 텐데.”

“안 합니다.”

가슴으로부터 말이 흘러넘쳐 나왔으나 막을 수가 없었고 막고 싶지도 않았다.

“안아도 좋아. 하지만, 부탁 2개만 들어줘.”

“말해보세요.”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마츠코라고 해.”

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

“이제부터 쭉 나와 함께 있어 줘야 해.”

“그럼요. 계속 함께할 겁니다.”

“믿을 거야. 정말로 믿어도 되지?”

“네. 저는 쭉 선생님…… 마츠코와 함께 있을 거야.”

내 몸 안에서 저항할 수 없는 충동이 폭발했다. 나는 류의 가슴에 뛰어들었다. 가슴에 볼을 비비며 등을 팔로 감싸고 눈을 감았다. 류의 심장 고동 소리가 들렸다.

“좀 더 꽉 안아줘.”

류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따스함이 전신에 깊이 배어들었다. 마음을 덮고 있던 껍질에 균열이 생겼다. 그 껍질이 흐물흐물 부서지기 시작했다. 감정이 거리낌 없이 껍질을 깨고 흘러나왔다.

“내가 좋아?”

“좋아.”

“사랑해?”

“사랑해.”

“쭉 곁에 있어 줘.”

“쭉 곁에 있을 거야.”

“약속했어.”

“약속해.”

“약속 깨면 나, 죽을 거야.”

“깨지 않을게. 난 마츠코를 사랑해.”

“류…….”

“응?”

“다시 한 번 말해줘.”

하권. pp. 199-204.

#11.

나는 상자를 들어 올렸다. 뚜껑을 열어보니 여러 가지의 케이크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상자째 쓰레기통에 버렸다. 뒤를 돌아보니 류가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웃음을 지었다.

“메구미가 나 때문에 화난 것 같네.”

류의 얼굴이 창백해져 마치 얼음 같았다.

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에 그 사람, 교도소에서 사귄 친구인데, 교도소에서는 남자 같아서 굉장히 인기였어. 웃기지?”

“나는 틀려먹었어.”

“뭐가?”

“그 여자가 말한 대로야. 나는 역시 마츠코와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였어. 나는….., 나는 안 돼.”

순간 류의 얼굴에 테츠야의 얼굴이 겹쳤다. 나는 류의 팔에 매달렸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 나는 좀 맞아도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아. 그러니까 쭉 함께 있어 줘. 더 이상 혼자서 마음대로 가버리지 마.”

류가 날 쳐다봤다.

“내가 마츠코를 몇 번이나 때렸지?”

“세지 않았어, 그런 거.”

“날 때려줘. 마츠코가 분이 풀릴 때까지 말이야. 부탁이야.”

류가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부탁이야, 마츠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을 들어 올려 류의 왼쪽 뺨을 힘껏 때렸다. 또 왼손을 올려 오른뺨을 때렸다.

“더 때려, 마츠코!”

양뺨을 차례로 때렸다.

살을 때리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류의 뺨이 빨개지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넘쳤다. 나는 손을 멈췄다. 숨이 차고 손바닥이 찌릿찌릿했다. 류가 눈을 감은 채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콧물이 흘렀다.

나는 류의 머리를 가슴에 안고서 머리에 볼을 비볐다.

“류, 약속했잖아. 나와 함께 있겠다고.”

류가 내 가슴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마약을 끊고 야쿠자도 그만둬야 해. 친구가 없어져도, 돈을 못 벌어도, 둘이 함께라면 살아갈 수 있어.”

류가 내 몸에서 떨어져서 무릎을 꿇은 채, 내 눈을 올려다봤다.

“그래, 알았어. 마약도, 야쿠자도 그만둘게. 마츠코와 함께 새출발할 거야. 하지만 시간이 필요해. 조금만 기다려줘. 꼭 약속 지킬게.”

류가 지갑에서 마약이 들어 있는 작은 봉지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버려. 이게 갖고 있는 전부야.”

나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이건 류가 스스로 버려야 돼.”

류가 봉지를 노려봤다. 얼굴이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졌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괜찮아. 하지만 꼭 스스로 버려야 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시작하게 될 거야.”

류가 봉지를 지갑에 다시 넣으며 눈물을 흘렸다.

“한심하네. 왜 못 버리는 거야. 간단한 일인데 말이야. 나는 내가 중독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약물 중독자를 너무 많이 봐서, 나는 아직 그렇게 심하지 않다고 안심했는데, 이제 이게 없으면…….”

마약의 무서움을 이제야 깨닫고, 마음속으로부터 두려워하고 있는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괜찮아. 틀림없이 스스로 버리게 될 거야. 나는 류를 믿어.”

류가 눈을 꽉 감았다.

하권. pp. 234-237.

#12.

불법행위에 비정한 짓을 하는 야쿠자가 왜 그깟 말로 눈물을 흘리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마츠코 선생님만은 깨끗한 존재로 남아 있기를 바랐습니다. 나 자신이 더러워졌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차를 몰면서 생각했습니다. 마츠코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게 된 계기를 만든 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라고 말이죠. 몸 파는 일을 하게 된 것도, 살인을 저질러서 교도소에 가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전부 내 탓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내가 선생님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욱 마츠코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을 확인하자 그대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차를 유턴해서 마츠코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츠코는 나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마츠코가 학교를 떠나게 된 경위부터 그 후의 인생까지 모두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마츠코의 얘기를 듣고, 옛날 제2중학교의 교장이었던 타도코로 후미오가 그녀를 강간하려다가 미수로 끝난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떠나게 된 것이 타도코로 교장과의 불화에서 기인했던 것이죠. 전부 내 탓만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죄의식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츠코 선생님에게 비열한 짓을 한 타도코로 교장을 하필이면 내가 도와주게 된 결과가 되었기 때문에 뒤늦게 후회하며 마음 아파했습니다. 당사자인 마츠코는 과거의 일이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말이죠.

하권. pp. 258-259.

#13.

집에 돌아와도 기다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친구도 없었다. 그러나 쓸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선명한 꿈이 있었다.

자전거로 5분 거리에 류가 있다. 이제 류가 나올 때까지 3년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야말로 둘이서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

류가 출소하면 목욕탕이 있는 좀 더 넓은 집으로 옮기려고 생각하고 있다. 가능하면 도쿄를 떠나서 북쪽으로 가고 싶었다. 그날을 위하여 조금씩 저금도 했다. 나는 모든 생활의 목표를 류가 나오는 3년 후에 맞춰두고 있었다.

하권. pp. 276-277.

#14.

오전 7시, 나는 교도소 밖으로 걸어나왔습니다.

그러나 사회로 돌아왔다기보다 내팽개쳐졌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수중에 돈은 체포 당시에 가지고 있던 5만 3천 엔과 봉투 붙이기를 해서 번 6천 엔, 합쳐서 5만 9천 엔뿐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당분간 잘 곳과 먹을 것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문 앞에 서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여하튼 역까지 걷기로 하고 걷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얼굴을 들었습니다. 발이 멈춰졌습니다.

그곳에 마츠코가 서 있었습니다.

다정한 미소로 나를 맞으러 나와주었던 것입니다. 그때 마츠코의 성스럽고 엄숙하기까지 했던 아름다움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할 만했습니다. 마츠코가 가까이 오자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확실히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공포였습니다.

그래요, 나는 무섭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하권. pp. 288-289.

#15.

쇼 씨가 주운 그 성경은 후츄 교도소에 있을 때 받은 것입니다. 교도소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종교 교육이 있는데요. 독거방에 있는 죄수는 참가할 수 없지만 대신 희망자에게 성경을 줍니다. 그때는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받아서 주변에 놓아두었습니다. 가끔 심심하면 읽어보는 정도였고 읽어도 마음이 움직이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츄 교도소에서 출소한 후 마츠코로부터 도망치고, 후쿠오카로 돌아가서 타도코로 씨를 죽일 때까지 내 짐속에 계속 그 성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정신적으로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을 때 우연히 그 성경을 열어봤었다면 적어도 타도코로 씨를 죽이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타도코로 씨에게는 스물한 살짜리 손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교도소까지 나를 면회 왔습니다. 아주 귀여운 여성이었습니다. 그녀가 나를 정면으로 보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이 죽인 제 할아버지는 어쩌면 옛날에 당신에게 나쁜 짓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서는 부모 대신 저를 키워주신 다정하고, 매우 소중한 할아버지였어요.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고, 존경받을 만한, 훌륭한 할아버지입니다.”

나는 귀를 막고 싶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도 않았죠. 하지만 그 여성은 그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를 바보 취급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그 범인한테 와서 욕을 한다면 모를까 용서를 한다니…….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여성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돌아갔습니다. 나에게는 다만 괘씸하다는 생각과 황당함만이 남았습니다.

그 여성의 말을 다시 떠올린 것은 코쿠라 교도소로 옮긴 후 3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취침 전의 자유시간에 그 성경에 손을 뻗은 것입니다. 3년간 한 번도 열어보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 밤에 우연히 성경을 읽게 되었죠. 굳이 구원받고 싶다든가 하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아무 페이지나 펴본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그 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의미는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 부분에서 눈이 떨어지질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 글자만이 커다랗게 보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녹슬어 멈춰 있던 마음이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점점 마음이 무언가에 빨려들듯이 움직이는 것을 나 자신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서둘러 성경을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짧은 자유시간을 이용해 며칠에 걸쳐서 한 자 한 자씩 마지막까지 읽었습니다. 모르는 곳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읽었습니다. 이번엔 약간 아는 것 같았습니다만 아직도 모르는 곳투성이였습니다.

나는 알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알고 싶은데 잘 모르겠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어서 안타까움과 초조함이 더욱 커졌습니다.

코구라 교도소에는 종교활동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목사님께서 와주십니다. 여기서는 단체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도 참가 자격이 있었습니다. 바로 참가 희망서를 제출했지만 모집은 6개월에 한 번뿐이었기 때문에 몇 달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사이에 성경을 다시 읽었습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부분에는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

종교활동이 시작되자 나는 쌓아놓았던 질문을 차례차례 했습니다. 목사님은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해주셨습니다.

내가 제일 알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하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였습니다. 목사님은 잠시 생각한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누군가를 마음속으로 미워한 적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지금 그 사람들을 위하여 마음속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까?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건…….”

“할 수 있습니까?”

“아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

“인간의 마음은 약한 것입니다. 미워해야 할 적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그렇지요?”

“……네.”

“하지만 하나님의 힘을 빌리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적을 사랑한다거나, 마약을 끊는다거나, 도박을 끊는다거나 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모두 하나님의 힘을 빌리면 가능해집니다.”

“저 같은 나쁜 놈에게도 힘을 빌려주시는 겁니까? 저는 그럴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거절당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가치 없는 인간이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소중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저도 사랑해주신다는 말씀인가요? 이런 저라도 소중한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거짓말이야!”

나는 무의식중에 일어났습니다. 즉각 간수들이 뛰어왔습니다. 그들은 나를 밖으로 끌어내려 했습니다.

“기다리세요!”

목사가 근엄한 목소리로 간수들을 제지했습니다. 간수들이 서로 얼굴을 보며 손을 놓았습니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습니까?”

목사님이 상냥하게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나는 봇물이 터지듯이 호소했습니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어왔는지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이렇게 나쁜 일을 해왔다. 살인까지 했다. 이런 내가 소중할 리 없다. 아무리 하나님이라 해도 이런 인간을 사랑할 리 없다고 말입니다. 나는 목이 쉴 정도로 외쳐댔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지금 괴로워하고 있군요.”

“네…….”

“당신이 정말 나쁜 사람이라면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소중한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당신을 사랑스러운 존재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나는 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당신은 정말 사회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해왔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용서해주셨습니다. 그 증거로 당신은 당신이 해온 짓을 마음으로부터 후회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넘쳐날 정도로 받고 있습니다. 그것을 느껴주십시오.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이제 당신 주변 사람에게 그 사랑을 나누어주세요. 당신이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을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용서하십시오.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 모두를.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마음을 사랑으로 채워 사랑을 더욱 주위에 퍼뜨려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면 이 세상은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깨달았습니다.

타도로코 씨의 손녀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미워해야 할 나를 용서했고, 마츠코에게도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나를 용서하고 사랑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죠.

“어떤 때라도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당신을 지켜봐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눈물이 흘러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정신을 차리자 함께 참가하고 있던 다른 수감자들도 모두 울고 있었습니다.

하권. pp. 302-309.

#16.

마츠코 고모의 인생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비극, 불행과 같이 흔한 단어들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었다. 애초의 시작은 교사 2년차 때 수학여행지에서의 도난 사건이었다. 아니, 그 전에 당시 교장에게 겁탈당할 뻔한 사건도 있었다. 그런 사건들이 없었다면 마츠코 고모는 평온한 인생을 살았을지도 몰랐다. 고향을 떠나는 일도 없었을지 몰랐다. 어린 나와 놀아주었을지도 몰랐다. 함께 쿠미 고모의 간병을 하고, 그 사이에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여 자식도 낳고, 가끔 놀러오면 내가 그 아이들과 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아직 마츠코 고모의 인생이 빗나가기 시작했던 나이도 되지 않았다. 마츠코 고모의 인생을 다른 사람의 것처럼 생각해왔으나, 앞으로 나에게 똑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사와무라 씨가 말한 것처럼 어떤 계기로 살인을 하게 되는 일도 있을 수 있고, 살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살아 있는 이상 예상도 하지 못했던 사건이 많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도 마츠코 고모처럼 시간이 지나면 늙어가고 언젠가는 틀림없이 죽게 된다는 사실뿐이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그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 것일까?

아마도 나는 아직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츠코 고모의 진짜 슬픔도, 인생도.

하권. pp. 330-331.

#17.

“하지만 아스카와 의사라, 왠지 어울리지 않아. 근데 왜 의사가 되려고 생각한 거야? 혹시 엄마와 관계있는 거야?”

아스카가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엄마는 관계없어. 프레데릭 그랜트 밴팅이라는 사람 알아?”

“프레데……. 몰라. 그게 누구야?”

“캐나다의 의학자인데, 1921년에 의학도였던 C. H. 베스트와 힘을 합쳐서 단 두 달 만에 인슐린 추출에 성공한 사람이야.”

“인슐린이라면 당뇨병 치료에 쓰이는…….”

“그래. 밴팅이 추출한 인슐린 표본이 당뇨병으로 죽어가던 열네 살의 소년에게 투여돼서 그 소년의 생명을 구한 것이 8개월 후였는데, 당뇨병은 그때까지 죽음의 병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정말 획기적인 일이었지. 2년 후에는 그 업적으로 노벨의학상을 받았어. 그런데 그 후 제2차 세계 대전에 출정해서 비행기 사고로 죽었어. 겨우 마흔아홉 살이었대.”

“그러고 보니 생물 참고서에서 그런 이야기를 읽은 듯한 기억이 있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아스카가 의사가 되려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지?”

“밴팅과 베스트라는 단 2명의 인간이 발견한 인슐린은 노인부터 젊은 사람까지 몇억 명의 당뇨병 환자를 구해왔고, 지금도 계속 살려내고 있는 거야. 발견자가 죽은 후에도 말이야.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래, 그건 그렇네…….”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선생님이 밴팅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어. 그때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세상에 기여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깊이 생각했어. 밴팅처럼 자신이 살았다는 증거를 세상에 남기고 싶다고 말이야.”

하권. pp. 338-339.

#18.

나는 차량통제용 바리케이드 사이를 지나 공원으로 들어갔다. 공원 중앙에 심어놓은 나무를 둘러싸고 둥근 벤치가 놓여 있었다. 마침 그늘이 져 있어서, 나는 그곳에 앉았다. 손에는 아직 메구미의 명함이 쥐어져 있었다. 땀이 배어나왔다.

“뭐가 마츠야. 바보 취급을 하면서…….”

양손으로 명함을 구겨서 땅 위에 내팽개치고는 일어서서 발로 밟았다.

누가 너한테 신세 질 줄 알아?

나는 다시 한 번 명함을 비벼 밟고는 걷기 시작했다.

집 가까이에 또 하나의 편의점이 있었다. 그곳에서 캔 맥주와 안주, 컵라면, 과자, 빵을 마구마구 샀다.

집에 돌아와서 입고 있던 옷을 전부 벗고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세탁해두었던 속옷을 입고, 사 가지고 온 캔 맥주를 따서 한 번에 마셔버렸다. 큰 소리로 트림을 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방에 대자로 누웠다.

눈을 뜨니 방이 어두웠다. 불을 켜고 시계를 봤다. 저녁 8시 15분. 크림빵을 먹은 후에 세숫대야와 수건을 가지고 대중목욕탕에 갔다. 넓고 여유로운 탕에 1시간 이상 들어가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위스키를 컵에 따랐다. 입에까지 가지고 갔으나 마시지 않고 내려놓았다. 호박색의 액체가 항의하듯 흔들렸다. 그걸 보면서 나는 메구미가 내뱉은 말을 다시 생각해봤다. 그러나 바로 얼굴을 저었다.

“안 돼.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해보지 않으면 모르잖아?

나는 양손을 펴서 눈앞의 허공으로 올렸다.

찰칵.

스위치 켜는 소리가 머리 뒤에서 들렸다.

로트를 마는 시늉을 해봤다. 가위를 잡는 시늉도 해봤다. 핀 파마, 스트로크 커트, 층을 내고 마지막에는 핑거블로. 손을 움직이면서 생각나는 대로 기술을 재현해보며 몰두했다. 손가락이 즐거워했다. 지난 십수 년간 멈춰있던 피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의식이 선명해졌다. 봉인되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재능이 되살아났다. 할 수 있어. 기억하고 있어.

정신을 차리자 2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 사이에 상상 속에서 완성한 머리 모양은 10가지 이상이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하자.”

다시 한 번 해보자. 밑져야 본전이지 않은가. 할 만큼 해보자.

“메구미에게 사과해야 되는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메구미의 명함을 버렸다. 그것이 없으면 연락처를 알 수 없다. 나는 집을 뛰쳐나가 센주아사히 공원으로 뛰었다. 아침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마음이 설레는 밤은 류의 출소 이후 처음이었다.

공원에 가까이 가자 까악까악 하는 교성이 들려왔다. 공원에서 젊은이들이 불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5, 6명 정도다. 가로등은 공원 정중앙에 하나밖에 없었다.

메구미의 명함을 버린 곳이 어디쯤이지? 아마도 나무 아래의 벤치였는데. 나는 어림집작으로 공원 안을 뛰어다녔다. 본 적이 있는 벤치가 있어서 지면을 샅샅이 뒤졌다. 확실히 이 근처에서 발로 밟았었는데. 하지만 명함 비슷한 물건은 떨어져 있지 않았다. 메구미의 명함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이거 노숙자 아니야?”

“비누 냄새가 나는데.”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얼굴을 들었다. 불꽃놀이를 하던 젊은이들이 눈앞에 서 있었다. 십 대 여자애들도 섞여 있었다.

“뭐야, 이거. 내가 쓰는 비누 냄새잖아?”

나는 주춤거리며 일어섰다.

“저기, 너희들, 이 근처에 명함 떨어져 있는 거 못 봤니? 꾸깃꾸깃 구겨져 있는…….”

명치에 뭔가가 파고들자 숨이 멈췄다. 나는 땅속에 처박혔다. 위에서 뜨거운 것이 역류해왔다. 입 안에 시큼한 크림빵의 맛이 퍼졌다. 아이들이 발로 나를 굴려서 나는 하늘을 보게 되었다. 들뜬 것 같은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더러워, 토했어.”

“잘됐어. 건방지잖아. 내가 쓰는 비누를 쓰다니.”

“우리가 처벌해주자고.”

괴물 같은 눈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눈을 떠보니 나는 어두운 공간에 있었다. 벽에 손을 대고 일어섰다. 그러나 허리에 힘이 빠져 도로 주저앉았다. 딱딱한 무엇인가가 엉덩이에 닿았다. 충격으로 배가 아파서 신음이 나왔다. 기침을 하자 가래가 튀어나왔다. 엉덩이 밑의 딱딱한 물건을 손으로 만져보니 변기인 듯했다. 다시 한 번 일어서서 눈앞의 벽을 누르자 쉽게 열렸다. 나는 비틀대면서 밖으로 나왔다. 미적지근한 공기가 폐로 들어왔다.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그 빛이 황록색으로 보였다. 인기척은 없었다.

생각이 났다. 이곳은 공원이다. 메구미의 명함을 찾아야지. 그런 생각을 한 순간 배 속에서 뜨거운 액체가 올라왔다. 나는 신음하면서 그것을 땅에 뱉어냈다. 입 안이 얼얼하게 아팠다. 손으로 입언저리를 닦았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내리뜨고서 호흡을 가지런히 한 후, 발을 내디뎠다. 걸을 수 있었다.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공원을 나서서 아스팔트를 힘껏 밟으며 골목길을 걸어 나아갔다. 다른 건 생각하지 않고 다만 앞으로 계속 걸었다. 발이 돌에 걸려 넘어져서 얼굴이 땅바닥에 박혀 모래를 씹으며 일어섰다. 전신주에 손을 대고 침을 뱉었다. 걸어야 돼.

다시 발을 내디뎠다. 쉬면서, 쉬면서 계속 걸었다. 앞만 보고 넘어지려는 몸을 지탱했다. 굉장히 오랜 시간이 흐른 끝에 히카리 아파트까지 돌아왔다. 집 앞에 서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열쇠가 없었다.

공원에서 떨어뜨렸나…….

뒤를 돌아보자 눈물이 흘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잡이를 잡아서 돌려보니 문이 열려 있었다. 잠그는 걸 잊었나 보다. 볼을 찡그리며 웃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형광등을 켰다. 모든 것이 황록색으로 보였다.

구토가 나서 싱크대로 뛰어갔다. 입을 벌렸지만 신음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배 속이 부패된 듯했다. 손발이 무거워져왔다. 심장만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코 안에 단내가 퍼져왔다. 심장 고동이 더욱 빨라졌다.

컵에 수돗물을 받았다. 입까지 가져갔지만 마시지 않고 싱크대에 버렸다. 눈앞이 어두워지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다시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 사이엔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엎드린 채 일어서려고 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꺼풀도,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았다. 추워졌다. 다시 눈앞이 어두워졌다.

하권. pp. 354-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