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12.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II

탐서일지 #12.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II

2024-08-28 0 By 커피사유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누군가와 나 자신을 동일하게 설정해버리고, ‘이기적이지 않았으며’, 나 자신의 차별점을 망각해버렸다는 것 ― 이런 것들에 대해 나는 내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내가 거의 종말에 처했을 때, 내가 거의 종말을 맞았다는 사실로 인해, 나는 내 삶의 그러한 근본적인 비이성성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 즉 ‘이상주의’를, 병이 나를 비로소 이성으로 인도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니체전집 15: 바그너의 경우 · 우상의 황혼 · 안티크리스트 · 이 사람을 보라 · 디오니소스 송가 · 니체 대 바그너》. 백승영 역, 책세상, 2002. p. 356.

“프리드리히 니체는 어떤 철학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도 다양하다. 그의 저서는 그 창조자가 식물인간으로 10년을 보내던 시절부터 조금씩, 세상의 수많은 이들에게 그 목소리를 전파했지만 ‘들을 귀 있는 자들’이 비로소 조금씩 사회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몇몇 사람들은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트가 그 오빠의 철학을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독일을 휩쓴 이데올로기와 연결했다는 시도를 고려하여 ‘파시즘’의 철학이라고 오해하기도 했고, 또 다른 몇몇 이들은 ‘힘에의 의지’, ‘강자’와 같은 니체의 단어 선택1그러나 이 단어 선택은 의도적이다. 철학은 ‘낯설게 보기’이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에 천착하여 역사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된 야만적인 저 전쟁들을 옹호하는 철학이라 인식했다. 그러나 들뢰즈가 오래 전에 지적했듯이 그러한 인식은 “입법자로서의 철학자는 복종적인 철학자에게 자리를 양보한다.”2질 들뢰즈, 《들뢰즈의 니체》, 박찬국 역, 철학과 현실사, 2007. p. 33라는 문장으로 대표될 역사의 결과물이다. 복수(複數)가 단수(單數)로, 동(動)이 정(正)으로 전환되는 저 좀먹음에 따라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밖에 없었던 인식인 것이다.

3년 동안 니체를 읽으면서 특유의 표현 때문에 각종 오해를 빚어낸 그에 대한 수많은 인식의 ‘전환’을 나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난 글의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탐서일지를 시작하며〉에서 언급했듯 나는 그와 결부되는 단어가 점차 ‘어려움’ – ‘극복’ – ‘솔직함’을 거쳐 ‘긍정’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목도했다. 그가 사용한 표현들이 너무나 일상적이었고 또한 동시에 너무나 흔했기 때문에 그 일상성의 토양 밑에 숨은 방대한 뿌리 ― 흙과 함께 진공도 섞여있기도 하고, 헛뿌리도 섞여있을 그 뿌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차츰 깨달아갔다. 그가 말하는 〈강자〉가 단순히 물리적인 힘이나 높은 수준의 사회 ·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좋아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제시된 〈약자〉가 그의 군림 아래에서 신음하는 유약한 자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자연히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이 아래에 나는 경남과학고등학교 36기 동기들과 진행하는 독서 모임의 두 번째 차례에서 『도덕의 계보』의 첫 번째 논문: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을 읽은 뒤에 자라난 나의 해석, 그리고 그 해석이 뿌리 박은 땅이 어떤 것인지를 보이고자 한다. 물론 나의 내면 곳곳을 오랜 시간 동안 방황하던 끝에 튀어나온 이 사상만이 유일한 ‘니체 읽기’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아니, 주장하는 것 자체가 반-니체적일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독자 여러분은 ‘선과 악’, ‘강자와 약자’라는 단어들이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바로 그 ‘의미’대로 쓰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재고해볼 수 있지 않을까. 철학은 기본적으로 ‘낯설게 보기’이다. 이 해석에게는 분명한 힘3여기서 ‘힘’은 통상적 의미의 힘이라기보다는 들뢰즈가 해석한 의미에서의 ‘힘’이다.이 있다.


보충 자료 2: 니체가 말하는 ‘강자’와 ‘약자’

이하에는 니체가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을 논의할 때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 중 ‘강자’ 그리고 ‘약자’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글들을 니체의 저작이나 관련된 글들로부터 조금씩 발췌하여 수록하였습니다. 니체는 자기 자신을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스스로가 말한 바 있을 정도로 자신의 저작에 비유와 상징을 다수 끌어들였기에 ‘강자’ 그리고 ‘약자’를 통상적인 관념 그대로 즉 ‘힘이 세거나 강한 권력을 가진 자’와 ‘힘이 약하거나 권력을 가지지 못한자’로 단순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니체가 자신의 도덕관과 그리스도교에서 기원한 도덕관을 비교할 때마다 비판한 지점이 정확히 무엇이었는가를 상기해보면 ‘강자’ 그리고 ‘약자’의 개념은 힘 또는 권력 관계보다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 혹은 가치평가의 태도를 기준으로 하는 분류임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상술하였듯 아래의 글들은 전문이 아니라 여러 글들 중 필요한 부분만을 옮긴 것입니다. 각각의 글들에 대한 출처는 각 글귀의 마지막에 달아두었습니다. 글에 따라 원주가 달려있는 경우도 있고, 또 제가 필요에 의하여 주석을 단 경우도 있습니다. 인용한 글에 달려있는 원 주석은 【원주】로, 제 주석은 【사족】으로 표기하여 구분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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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노트 1: 제2차 독서 모임 – “주인도덕과 노예도덕, 기독교적 선과 악”

그는 언제나 자기의 사회 안에 처해 있다: 선택하면서, 용인하면서, 신뢰하면서 그는 경의를 표한다. 그는 모든 종류의 자극에 서서히 반응한다. 오랫동안의 신중함과 의욕된 긍지가 그를 그렇게 양육시켰다 ―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극을 검사해보지, 그것을 마중나가지 않는다. 그는 ‘불행’도 ‘죄’도 믿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잘 조절하며, 잊어버릴 줄도 안다 ― 그에게는 모든 것이 최대한 제공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는 충분히 강하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백승영 역, 책세상, 2020. p. 335.

I. 《도덕의 계보》, “첫 번째 논문”에 대한 정리

I.1. 니체가 생각하는 기존 ‘선과 악’ 개념의 한계 ·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란?

원한에 찬 인간은 솔직하지도 순진하지도 않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진실되지도 정직하지도 않다. 그의 영혼은 곁눈질한다. 그의 정신은 은신처, 샛길, 뒷문을 사랑한다. 그는 은폐되어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세계로 여기며 안전을 보장하고 생기를 주는 것으로 여긴다. 그는 침묵하는 법, (원한을) 잊지 않는 법, 기다리는 법, 잠정적으로 자신을 왜소한 존재로 만들고 굽히는 법을 알고 있다.

#10.
  • 니체는 근 · 현대의 지배적인 도덕관이 정의하는 ‘선과 악’은 역사적으로는 피지배계급, 정신적으로는 비겁하거나 용기가 없어 현실과 맞서지 못하고 ‘샛길’을 탐하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유약함을 가리고 오히려 이 유약함에 대해 높은 가치를 부여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관념이라고 보고 있다.
  • 니체는 이러한 ‘선과 악’은 우선 첫째로 섬세한 자기기만이라는 점을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다. 〈노예도덕〉에서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자를 악,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자를 선이라고 보는 이분법적 사고관을 도입하게 되는데, 이 때 해를 끼치는 쪽은 역사적으로 지배계급이었다는 점 그리고 해를 받는 쪽은 역사적으로 피지배계급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주지하고 있다. 문제는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으로 상승하려면 니체 입장에서는 ‘유약함’ 즉, 죽음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맞서싸울 용기가 필요한데 피지배계급은 그 용기가 없었기에 피지배계급으로 되었다는 점에 있다. 이런 측면에서 니체는 이들은 결코 지배계급으로 올라설 수 없다라고 역설적으로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니체는 피지배계급도 죽음의 공포와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충분한 긍지와 용기를 가지면 지배계급 즉 ‘강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니체는 이들 피지배계급 즉 ‘약자’들은 이러한 긍지와 용기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하여 노예 계급 혹은 지배당하는 계급으로 된 것이므로 이들은 지배계급으로 올라설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이 그러한 긍지와 용기를 가지는 순간 그들은 자신의 힘을 통하여 지배 체계를 역전시켜려고 할 것이, 즉 반란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자신들이 지배 계급으로 부상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 니체는 이러한 섬세한 자기기만을 내포하고 있는 〈노예도덕〉이 ‘강자’들, 자신에 대한 긍지 그리고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인간들을 ‘감염’시켜서 순응적이 되도록 만들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니체는 ‘강자’들의 행위에 대해서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라는 관념은 ‘선과 악’이 제시하는 잘못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은밀히 속에서 불타고 있는 복수심과 증오라는 감정이 ‘강자마음대로 약한 자가 될 수 있으며 맹금도 마음대로 어린 양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자신을 위해서 이용하고 심지어 이런 믿음을 그 어떠한 믿음보다도 열렬하게 고집한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와 함께 그들은 맹금에게 맹금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하는 권리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 (후략)

    맹금이 맹금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가지게 하는 것. 그것이 문제이다. 맹금이 맹금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문제가 있기는 한가? 맹금이 토끼를 잡아 먹는 것, 맹금이 먹이 활동을 하는 것, 맹금이 자기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위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부여하는 것을 니체는 ‘선과 악’ 개념의 고질적이고도 가장 악독한 문제라고 보고 있다. 니체가 지적하듯 ‘책임을 지게 하는 권리’는 그 책임을 지게 될 주체가 그런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을 때에 그 행위를 목격한 자가 지는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강한 자’들이든 ‘약한 자’들이든 그들은 모두 생물로서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고, 자신의 강화 혹은 고양을 지향하는 이 의지는 그들의 ‘자유’와는 무관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각에서 ‘힘에의 의지’에 따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강자’들의 행위는 그들의 본성 즉 생리에 의한 것이지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맹금이 토끼를 잡아먹지 않을 수가 있기는 한가? … 본성상 그럴 수 없다. 맹금은 토끼를 잡아먹음으로써 자신을 지속한다. 어떠한 의미에서 ‘책임을 지게 하는 권리의 획득’은 약자들이 강자에 대해 가하는 공격인 셈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니체는 “우리는 약자들의 공격으로부터 강자들을 지켜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니체는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현실도피적이라는 점 즉 데카당이라는 점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니체가 보기에는 ‘약자’들은 ‘선과 악’이라는 기독교적 가치 평가 기준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피지배를 정당화하고, 최후의 승리복수를 소망한다. 어떤 측면에서 이는 복수하지 못함에서 기원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약자’들은 니체가 보기에는 자신의 ‘힘’ 즉 부조리 · 현실에 맞설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당당히 현실을 마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이들은 ‘복수심’을 ‘사랑’이라는 단어 그리고 ‘신앙’이라는 단어로 포장하여 은근히 가치의 전도, 그리고 지배의 전도를 꾀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스교도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설교들을 생각해보라!) 이러한 ‘선과 악’이라는 관념은 ‘약자’들로 하여금 현실로부터 도망쳐서 자기 자신의 압제를 합리화하고 다만 최후의 승리만을 소망하게 함으로써, 맞서 싸울 힘을 거세한다는 점을 니체는 강력하게 비판한다. 니체는 용감하고 당당한 인간상(= 강자, 귀족)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러한 인간을 병들게 하여 제거하는 것이 바로 니체가 보기에 ‘그리스교도적 도덕’의 독성인 것이다. 단지 소망하고 의존하는 인간, 맞서기 보다는 단지 구원을 바라는 인간을 니체는 격렬하게 거부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든다고 비판한 것이다.
I.2. 니체가 말하는 ‘주인도덕’ 그리고 ‘노예도덕’이란?

모든 고귀한 도덕이 자신에 대한 의기양양한 긍정에서 자라 나오는 반면에, 노예도덕은 애초부터 ‘외부적인 것’, ‘다른’ 것,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한다.

#10.
  • 니체의 ‘주인도덕’, 즉 ‘좋음(고귀함)’ 과 ‘나쁨(저열함)’을 술어로 하는 가치평가는 당당한 인간, 용감한 인간, 현실과 맞서싸우는 인간의 가치관이다. ‘주인도덕’은 긍정에서부터 출발하는 도덕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주인도덕’에서는 우선 좋음을 먼저 제시한다. 자신에게 이로운 것, 자신과 맞는 것을 먼저 제시하고 그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나쁨이 제시된다. 여기서 긍정은 자기 자신이 주도하는 것, 즉 외부의 강압에 의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가치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므로 (‘강자’는 지배 계급에 속하므로 자신이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 도덕 그리고 가치가 지배 계급의 통치 수단이자 전유물이라는 시각은 니체가 처음은 아니다. 미셸 푸코 등 근 · 현대 철학자들이 대체로 이런 시각을 가졌다.) 니체의 ‘주인도덕’은 전형적인 ‘주인’의 도덕이다. 왜냐하면 그 ‘도덕’을 만든 주체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 반대로 ‘노예도덕’, 즉 ‘선함’과 ‘악함’을 술어로 하는 가치평가는 니체의 입장에서는 비열한 인간, 용기 없는 인간, 현실과 맞서싸우기보다는 은밀한 복수를 택하는 인간의 가치관이다. ‘노예도덕’은 부정에서부터 출발하는 도덕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노예도덕’에서는 우선 자신에게 고통을 안기고 탄압을 안기는 외부의 대상, ‘자신이 아닌 것’을 일단 먼저 악함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반대, 즉 고통을 받는 자기 자신을 선함으로 대립시킨다. 니체가 보기에는 여기서 은밀하고도 정말 천재적인 가치의 조작이 일어나고 있는데, 왜냐하면 고통 받음이라는 오래된 ‘나쁨’의 술식을 그 고통을 견디면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이라는 술식으로 완전히 가치를 뒤집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의 ‘노예도덕’은 전형적인 ‘노예’의 도덕인데, 왜냐하면 그 ‘도덕’을 만든 배경은 노예가 ‘주인’ 즉 지배계급이 정한 질서 그리고 가치에 반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I.3. 니체의 ‘주인도덕’에서 ‘강자’와 ‘약자’란?
  • 니체의 ‘주인도덕’에서 ‘강자’와 ‘약자’는 통상적인 의미 그대로 ‘힘을 가진 자’와 ‘힘을 가지지 않은 자’ 혹은 ‘지배하는 자’ 대 ‘지배받는 자’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과거 니체를 오독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해석 때문에 니체 사상은 ‘파시즘’과 통하는 구석이 있다거나 전쟁과 정복에 대한 예찬이라며 크게 비판했던 역사가 있다.
  • 니체의 철학은 전반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지배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사람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아야 한다. 니체 철학이 ‘투쟁’과 ‘전쟁’을 말할 때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투쟁이라기보다는 어떻게 한 인간이 세계가 그에게 가져다주는 고통과 부조리에 맞서 싸울 것인가에 대한 논의라고 바라보는 것이 적절하다.
    • 이러한 니체의 착상은 니체의 후기 사상인 ‘운명애’ 사상과 ‘초인’과 관련된 지식이 있어야지 가늠할 수 있다.
  • 이 맥락에서 니체가 말하는 ‘강자’는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당당한 인간,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을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긍정)하는 인간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니체는 ‘강자’들은 바로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동반할 수 있는 전쟁에서도 용감하게 나섰으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해결책을 찾아냄으로써 대체로 승리를 쟁취, 따라서 ‘지배 계급’으로 올라섰음을 지적하고 있다. 니체가 강조하는 것은 이들이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 하는 그 태도에 있지 이들이 승리하여 ‘지배하고 있다는 것’에 있지 않다. 니체가 ‘지배 계급’을 논할 때 그것은 결과이지 출발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니체가 말하는 ‘약자’는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 싸우려 하지 않는 비겁한 인간, 그러면서도 은밀한 복수를 꾀하는 인간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강자’와 비슷하게 역사적인 관점에서 니체는 이들 ‘약자’들은 바로 이러했기 때문에 ‘강자’들과는 달리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항복하여 피지배계급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 개인적으로는 니체가 말하는 ‘강자’는 ‘인생의 하강에서도 상승을 보는 사람’, ‘약자’는 ‘인생의 상승에서도 하강을 보는 사람’으로 요약하는 편이다. 물론 이러한 정의는 ‘강자’에 대한 측면을 잘 포착하기는 했지만 ‘약자’에 대한 측면은 니체가 강조한 것과는 조금 다른 포착점을 보이고 있다. 니체는 현실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 도망치는 데카당이라는 측면에서 ‘약자’를 강조하고 있는데, 나의 용어에서 ‘약자’란 비관적인 데카당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 것과 현실에 대해 비관적이라는 두 술어는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는 것이 반드시 비관적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비관적이라고 하더라도 직시할 수는 있다. 중요한 점은 맞서 싸우느냐 아니냐에 있다.
  •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의 동명의 저작이 있지만, 여기서는 그 저작을 직접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을 수는 있다) 에서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Sisyphos)를 비유로 든다고 한다면, 바위가 다시 굴러 떨어져서 다시 한 번 그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일이 ‘무의미 · 무가치’한 것으로 판명된다고 할지라도 다시 한 번 기꺼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자가 니체가 볼 때의 ‘강자’이고, 바위를 밀어 올리지 않는 자가 니체가 볼 때의 ‘약자’인 셈이다. 니체는 ‘약자’는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 바위를 다시 밀어올리기보다는 바위를 밀어올리지 않는 것을 정당화 혹은 밀어올리지 않는 행위를 긍정적인 것으로 거짓말할 만한 새로운 가치관을 창조한다고 비유했을 것이다.

II. 중심 논제에 대한 의견

제2차 독서 모임에서 다루게 되는 중심 논제는 다음과 같다.

  • V.1.2. ― 니체가 분석한 ‘도덕의 계보’가 옳다는 점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즉 전통 기독교적 도덕관의 ‘사악한’ 기원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이 도덕 관념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이 나쁜 것들만 있을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오늘날의 도덕 관념에 장점이 있지는 않을까요?
  • V.1.3. ― 전통적인 도덕관이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진다면, 그 장점과 단점 중 어느 것이 더 클까요? 전통적인 도덕관과 니체의 주장, 즉 ‘노예 도덕’과 ‘주인 도덕’ 중에서 우리가 만약 단 하나의 도덕관을 택해야 한다면 어떤 도덕관을 택하는 것이 옳을까요?
II.1. 중심 논제 V.1.2.에 대한 의견
  • [주장] 우리에게 익숙한 오늘날의 도덕 관념은 단점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장점의 혜택보다 단점의 해악이 더욱 크다.
    • 기독교적 도덕 관념의 장점은 이 관념이 ‘사회적 약자’가 자기 자신의 지위를 요구하는데 있어 투쟁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가치관으로 확립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만약 이 관념이 없었다고 한다면 사실은 구조주의적 문제인 가난과 실업 등은 아마도 초기 자유방임자본주의처럼 노동자 그 자체에게 문제가 있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었을 것 같다. (이 경우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향상되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아니면… 음.) 이 연장선에서 오늘날 기독교적 도덕 관념은 니체가 걱정했던 ‘차이’의 말살보다는 ‘차이’에 대한 인정 투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측면도 분명히 있어 보인다. 이를테면 ‘동성애’에 대한 인정 투쟁이라던가, ‘자신의 성별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에 대한 담론이라던가.
  • 근거
    • 1) 기독교적 ‘평등’은 오늘날 다수를 합리화하는 가치로 사용되는 측면이 강하다.
      • 이를테면 오늘날 ‘기회의 평등’과 관련된 문제들은 다수가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가치로 사용하는 측면이 강하다. 대표적으로는 입시와 관련된 문제들이 있다. ‘고교 평준화’ 그리고 ‘수능’으로 인한 완전히 평등한 기회 부여가 대표적이다.
      • 이를테면 뛰어난 학생이 있을 때, 개성이 있는 학생이 있을 때 그 학생의 전형적인 기질과 개성을 실현시킬 기회를 ‘평등’을 이유로 박탈하거나 제대로 살려주지 못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 ‘평등’은 시각에 따라서는 ‘약자’를 ‘강자’로 올려줄 수 있도록 하는 핵심 가치로 파악될 수도 있지만, 이는 뒤집어서 볼 때 ‘강자’를 ‘약자’로 만드는 가치라고 볼 수도 있다. ‘획일화’와 ‘평등’은 생각보다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평등’은 잘못 사용되는 경우 ‘차이’를 필연적으로 부정하게 된다. ‘차이’를 긍정하는 순간 두 대상은 이미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안전망이 ‘평등’이라는 가치로부터 출발하였고 또한 발명되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평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너무 많은 ‘평준화’ 혹은 ‘개성의 억압’이 이루어졌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예술성이 강하여 미술가를 꿈꾸는 학생에게 국어와 수학 그리고 사탐으로 얼룩진 ‘수능’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평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우리는 ‘차이’를 부정하면서 개인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건강한 기회들을 박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2) 기독교적 ‘연민 또는 사랑 (= 타자를 ‘위함’)’은 니체가 지적한 바처럼 세련된 자기방어를 내포하고 있고, 또한 약자를 실질적으로 돕기 보다는 돕지 않고 있다.
      • 이를테면 장학금 사업을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장학금 사업의 경우 자신이 장학금을 지급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재단을 설립하여 큰 행사를 열고 기자들을 부른다. (e.g. 관정이종환장학회) 그런데 타인을 위하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하다면 도대체 그것을 왜 관련이 없는 제3자에게까지 알리려고 하는가? ― 진심으로 타인을 위하는 것이라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서 타인에게 ‘선사’하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선물’ 견해) 그러므로 니체가 일찍 지적한 바 있는 것처럼 ‘연민’ 또는 ‘사랑’, ‘타인을 위함’이라는 행위에는 사실 ‘자기 자신의 음흉한 이기적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자신이 이렇게 선한 사람입니다’를 자랑하고 싶은 목적 때문이라면 오히려 대놓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덜 비열해보일 것 같다.
      • 아프리카 등 후진국 · 개발도상국에 대한 과도 지원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최근에는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이들 사람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하여 우물을 파거나 병원 인프라 등을 지원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우물들이 관리되지 못하고 방치되고 있으며, 병원 인프라 등은 폐허가 된 경우도 많다. 단순한 ‘연민’ 의식 때문에 이들의 문제를 빠르게 해결해주기 위하여 무언가를 ‘제공해준다’는 사상에는 나는 저들과 같은 빈곤 등의 상황에 처해있지 않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은근한 ‘시혜적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이들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단기간에 인프라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진단하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 경우에 따라서는 따끔하게 충고하는 것이 아니던가?
    • 3) 기독교적 선/악 도덕관에서 뿌리를 둔 현대 ‘민주주의 / 사회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는 절대적인 선으로 간주되면서 정치적 극단 갈등 / 순응 등을 낳으면서 사회를 오히려 건강하지 않게 만들었다.
      • 먼저 구분해야 할 것은 여기서 내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정치 체제가 아닌 ‘이데올로기’라는 점이다. 즉,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모두 전제하고 있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나아가, 평등해야 한다)’ 그리고 ‘이 가치관은 옳다’에 대하여, 그리고 이 전제가 정치에 적용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나는 비판하는 것이다.
      두 가치관 즉 ‘평등해야 한다’ 그리고 ‘이 가치관은 옳다’는 나와 다른 자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인정을 거세시킨 것으로 보인다. 평등해야 한다는 것은 자신과 다른 이가 동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자기 자신이 옳다’라는 고집적인 관념과 결합하면서 해악이 발생한다. 이를테면 ‘민주주의’를 특정 국가에 강요하는 것, ‘사회주의’를 특정 국가에 강요하는 것 등이 문제가 된다. 또, 자신의 정치적 사상을 특정인이나 집단에게 강요하고, 통하지 않는다면 이들을 ‘적으로 선언한 뒤에’ 공격하는 것도 큰 문제가 된다.
      • 특정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강요한 것에서 비롯된 비극은 미소 냉전시기의 메카시즘이나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비극만 봐도 충분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데올로기적 광분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사회적 권리를 잃고 공격받거나 목숨을 잃었던 역사가 생기게 되었다.
      •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 폐해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극단적인 정치 대립에서부터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이 무조건 옳다는 착각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견해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타협’은 곧 패배를 지시하는 것이 되며, 승리는 곧 ‘관철’이 된다. 그 결과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정치의 마비, 사회의 마비에 가까워보인다. 오늘날 우리 정치에서 벌어지고 있는 입법부-행정부의 극한 대립 그리고 그 결과 도외시되고 있는 중요한 법안 그리고 정책적 결정 등은 오히려 나 자신의 생활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들(e.g. 연금 문제, 교육 문제, 노동권 문제)을 도외시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어 보인다.
II.2. 중심 논제 V.1.3.에 대한 의견
  • [주장] 노예도덕이 가지는 장점의 혜택보다 단점의 해악이 더욱 크므로, 주인도덕을 선택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
  • 근거
    • 1) 주인도덕은 사람들이 삶의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것을 포기하기보다는 삶의 굴곡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것을 효과적으로 장려한다.
      • 노예도덕, 즉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도덕관은 자칫 ‘평등’, ‘사랑’이라는 가치 하에서 ‘다른 누군가가’ 우리 자기 자신이 처한 고통을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은근한 심정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이를테면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나는 노예도덕적 심정의 연장선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필요한 것,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맞서 싸우기 힘들어하는 것 같다. 즉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마치 ‘지금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 당장은 인내하고 다만 나중에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소망하는, 니체가 지적한 기독교적 사상의 폐해와 유사한 것이 우리의 내면에 있는 것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정 정치인이나 인물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지 않고, 내가 의욕하고 내가 맞서 싸우는 것을 강조하는 주인도덕은 이러한 측면에서 의욕하지 않고, 맞서 싸우려고 하지 않는 오늘날의 민주 시민에게 필요한 강한 자아를 긍정한다는 점에서 튀지 말라라고 요구하는 전통적인 도덕에 비해 훨씬 건강하다고 생각된다.
    • 2) 주인도덕이 가지는 사상의 ‘경쟁적’ 성격이 노예도덕이 가지는 사상의 ‘절대적’ 성격을 공격하기 때문에 ‘다양성’의 측면에서 오히려 주인도덕이 더욱 적절하다.
      • 노예도덕은 니체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그 사상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자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선’, 그렇지 않은 것은 ‘악’으로 보면서 타자를 악마화하는 것,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자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다만 퇴출의 대상으로 여기는 도덕관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된다. 주인도덕은 건강한 개인의 다양한 개성 그리고 그 개성을 자유로이 발휘하면서, 독특한 인물들이 자기 자신의 사상을 관철하기 위해 서로의 사상을 공격하고 또한 방어하는 건설적 경쟁을 자연히 지향하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일률적인 맹신의 뿌리가 되는 것으로 보이는 노예도덕보다는 상호의 차이를 인정하고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벌이는 주인도덕이 오히려 오늘날의 건강한 민주 사회를 위해 역으로 필요한 가치 평가가 아닐까 싶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그러나 이 단어 선택은 의도적이다. 철학은 ‘낯설게 보기’이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 2
    질 들뢰즈, 《들뢰즈의 니체》, 박찬국 역, 철학과 현실사, 2007. p. 33
  • 3
    여기서 ‘힘’은 통상적 의미의 힘이라기보다는 들뢰즈가 해석한 의미에서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