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10. 『열하일기』

탐서일지 #10. 『열하일기』

2021-09-21 0 By 커피사유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오랜만에 다시금 어떤 책을 읽고 나의 생각들을 기록해두는 장인 ‘탐서일지’를 쓰게 되었다. 이번에 다루는 도서는 다름 아닌 연암 박지원 선생의 『열하일기』인데, 꽤 유명해서 중 · 고등학교 국어 수업 도서로도 종종 일부를 다루곤 하는 이 글은 이번 서울대학교 고전 100선 읽기 2학기 수업에서의 활동의 일환으로 읽게 되었다.

『열하일기』는 2009년 발행된 돌베개 출판사의 김혈조 역의 『열하일기 1』을 읽었다. 개인적으로 조선 후기 북학(北學)과 관련된 글임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이번 기회에 상세하게 읽어 보는 것도 꽤 나쁜 경험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생각 외로 글이 굉장히 나에게는 어려웠다. 솔직하게 먼저 고해두자면, 처음에는 그래도 좀 문장들을 읽었으나 뒤로 갈수록 지루하게 느껴진 탓에 뒤쪽에는 꽤 빠른 속도로 넘겨버리고 말았다.

비록 역자가 상당한 공을 들여 최대한 온전한 뜻을 전달하고자 했고, 애매한 경우에는 주석을 달아 이를 밝혀두는 등 연암 박지원 선생의 글을 잘 전달하고자 노력한 것은 알겠으나, 불행히도 나는 기존에 내가 읽어오던 오늘날의 글에 익숙한 것인지 많은 한자어와 동양권의 고사(古事)가 등장하며, 각종 성인과 사람들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으로 방대한 내용을 수식의 성격으로 함께 담은 연암 선생의 글에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못하는 것 같다. 정말로, 읽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자 서문에서, 글이 다소 어렵더라도 독자가 그 글 속에서 나름의 의미와 해석을 확립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있었으므로, 나는 이미 잘 알려진 이 글에 대한 해석을 잠시 뒤로 하고, 그나마 내 기억 속에 남는, 조금 다시금 되새겨 볼만한 글의 부분들을 역자의 주석과 나의 가치관 및 신념, 그리고 개인적인 주관을 토대로 하여 선정하고 이에 대하여 조금 논평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이러한 논평은 이미 잘 알려진 평가들과 중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에서 역자가 달아둔 바와 같이, 『열하일기』에서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정보의 제공, 북학의 내용, 천하대세의 전망관,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간 유형에 대한 묘사와 인물 형상의 창조, 선비 곧 지식인의 역할과 처신에 관한 문제 등을 잘 다루고 있으니 이들을 집중하여 읽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아무래도 그러한 역자의 이야기란 참고는 하되 절대적으로 신봉하면 안 되는 것으로서 마땅히 대우해주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역자 김혈조는 연암 선생의 『열하일기』에 대하여 “있었던 세계 그리고 있는 세계에 대한 비판과 통찰을 통해서 있어야 할 세계를 전망하고 모색한 것이 열하일기의 진정한 주제”라고 이 책에서 표현했다. 과연 내가 알고 있는 기존의 평가가 옳은지, 혹여 그 기존의 평가에서 다루지 않았던 나 자신만의 새로운 재발견이 이 책 속에서 가능한지는 이제 내가 기억에 남았던 부분들을 아래에 열거하고, 이들을 평가하면서 확인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인용과 논평

#1. 「열하일기서(熱河日記序)」1

문장을 써서 교훈을 남긴 책 중에, 신령스럽고 밝은 일에 통달하고 사물의 법칙을 궤뚫은 책으로 『주역』이나 『춘추』보다 더 훌륭한 저술은 없을 터이다. 『주역』은 은밀하게 감추려 했고 『춘추』는 들춰내어 드러내려 했다.

은밀하게 감추는 방법은 이치를 말하는 것을 위주로 하니, 이런 방법이 발전하여 어떤 사물에 의탁하여 뜻을 전하는 우언(愚言)이 된다. 들춰내어 드러내는 방법은 실제의 사적(事跡)을 기록하는 것을 위주로 하니, 이런 방법이 변하여 정사(正史)에서 누락된 사적을 기록하는 외전(外傳)이 된다.

저서의 방법은 이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인데, 언젠가 이 문제를 시험 삼아 논의해 본 바 있었다.

『주역』의 64괘에서 말한 동물, 곧 용 · 말 · 사슴 · 돼지 · 소 · 양 · 호랑이 · 여우 · 쥐 · 꿩 · 매 · 거북이 · 붕어 등이 실제로 그 괘와 관련 있는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주역』에 나오는 사람의 경우에도, 웃는 사람, 눈물을 흘리는 사람, 우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애꾸눈, 절름발이, 볼기에 살갗이 없는 사람, 등의 살이 벌어진 사람 등이 과연 실제로 그 괘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산가지2를 뽑아서 괘를 놓고 보면 그런 형상들이 즉시 나타나고, 길흉이나 재화가 마치 북채로 북을 치듯 신속하게 응답함은 무슨 까닭인가? 은밀히 숨기는 방법으로 사실을 드러내고 까발렸기 때문일 것이다. 우언의 문장을 쓰는 사람들이 이 방법을 이용한다.

『춘추』에 기록된 242년 동안의 각종 제사, 사냥과 순수(巡狩)3, 조희와 사신, 회맹(會盟), 침략과 정벌, 포위와 침입 등은 모두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다. 그런데도 역대에 『춘추』를 주석한 좌구명(左丘明), 공양고(公羊高), 곡량적(穀梁赤), 추덕부(鄒德溥), 협씨(夾氏)4 등등은 그러한 실제 사실을 가지고도 의견이 서로 달랐다. 설명을 하는 사람도 남들이 틀렸다고 반박하면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고집하며, 지금까지도 논쟁이 그치지 않음은 무슨 이유인가? 들춰진 사실을 가지고 은밀한 뜻을 부여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외전의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이 방법을 이용한다.

연암 선생의 글은 아니지만, 역자는 연암 선생의 글을 이해하는 데 있어 꽤 올바른 시각인 것 같다고 해서 분명히 이 글을 서두에 달아두었다고 써 두었다. 골자는 겉으로는 견문록으로 보이는 글이더라도 그 속에 품은 씨, 혹은 숨긴 뼈가 있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연암 선생의 『열하일기』를 청 당시의 견문록으로 보고,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기술은 그가 보고 들은 것에 할당되어 있지만, 그러한 기술은 특정 주제들을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몇 가지 우화들을 어떤 상황과 선택적으로 결합시켜 일련의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란 명에 대한 사대주의가 지배하는 조선 조정이었으므로, 아마도 그는 화(火)를 피하기 위하여 일종의 우화적 기술 방법을 이용한 것이리라 생각된다.

#2. 도(道)는 바로 저기 강 언덕에 있네

나는 수역인 홍명복(洪命福) 군에게,

“자네, 도(道)를 아는가?”

라고 물으니, 홍군은 두 손을 마주 잡고는,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하기에 나는,

“도란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닐세. 바로 저기 강 언덕에 있네.”

라고 했다. 홍군은

“이른바 『시경』에, ‘먼저 저 언덕에 오른다’라는 말을 이르는 것입니까?”5

하고 묻는다. 나는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닐세. 압록강은 바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경계가 되는 곳이야. 그 경계란 언덕이 아니면 강물이네. 무릇 천하 인민의 떳떳한 윤리와 사물의 법칙은 마치 강물이 언덕과 서로 만나는 피차의 중간과 같은 걸세. 도라고 하는 것은 다른 데가 아니라 바로 강물과 언덕의 중간 경계에 있네.”

라고 일러 주었다. 홍군은

“무슨 말씀이신지 감히 묻습니다.”

하기에 내가,

“『서경』에, ‘인심(人心)은 오직 위태롭게 되고 도심(道心)은 오직 희미해진다’고 했네. 서양 사람들은 기하학에서 하나의 획을 분별하여 하나의 선으로 깨우치기는 했으나, 그 미약한 부분까지 논변하고 증명할 수는 없어서 ‘빛이 있고 없는 그 사이’라고 말했고, 불교에서는 그 즈음(사이)에 임하는 것을, ‘붙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았다’라고 말했다네. 그러므로 그 즈음에 잘 처신함은 오직 도를 아는 사람만이 능히 할 수 있으니, 정(鄭)나라 자산(子産)6이라는 사람이…….”

솔직히 처음 읽었을 때에는 이 부분, 즉 도(道)가 강과 언덕 사이에 있다고 하는 내용이 어떤 의미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금일의 토론에서 뒤에 이어지는 ‘서경’, ‘불교’, ‘정나라 자산’의 내용을 토대로 볼 때 중용, 즉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아니한 상태를 지시한다는 측면의 상징성으로서 이 구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는데, 나는 여기서 단초를 얻어 다음과 같은 해석이 아마도 가장 적절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압록강과 그 언덕 사이는 청과 조선의 국경 경계를 말하는 것인데, 그 사이를 지시한다는 것이란 곧 청과 조선의 사이에 있는 지점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도(道), 즉 마땅히 가야 할 방향이 거기에 있다는 것은 청과 조선 사이에 있어 교류가 일어나는 중립 지역인 이 국경 지대와 같이 청을 배척하지 아니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면서 발전해야 한다는 사상, 혹은 그의 의지가 담겨 있는 부분이다. 이런 나의 도달은 토론에서 들었던 중용의 개념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는 점에서, 아마도 옳지 않을까 싶다.

#3. 나는 깊이 반성하며

책문 밖에서 다시 책문 안을 바라보니 어염집들이 모두 대들보 다섯 개가 높이 솟았고 띠 이엉으로 지붕을 덮었다. 집의 등마루가 하늘까지 높고 대문과 창문 들이 정제되었으며, 길거리는 평평하고 곧아서 양쪽 연도(沿道)7가 마치 먹줄을 튕긴 듯 반듯하다. 담장은 벽돌로 쌓았고, 사람 타는 수레와 짐 싣는 마차가 길 가운데로 종횡무진 누비며, 진열된 살림살이 그릇은 모두 그림을 그린 도자기이다. 그 제도가 결코 촌티가 나지 않음을 볼 수 있었다.

친구 덕보(德保) 홍대용(洪大容)8이 언젠가, “그 규모는 크고, 기술은 세밀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책문은 중국 동쪽의 가장 끝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다. 길을 나아가며 유람하려니 홀연히 기가 꺾여, 문득 여기서 바로 되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온 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깊이 반성하며,

‘이게 질투하는 마음이로다. 내 평소 심성이 담박하여 무얼 부러워하거나 시샘하고 질투하는 것을 마음에서 끊어 버렸거늘, 지금 남의 국경에 한번 발을 들여놓고 본 것이라곤 만분의 일에 지나지 않은 터에 이제 다시 망령된 생각이 이렇게 솟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나의 견문이 좁은 탓이리라. 석가여래가 밝은 눈으로 이 시방세계를 두루 보신다면 평등하지 않은 것이 없을지니, 만사가 평등하다면 본래 투기나 부러움도 없을 것이로다.’

라고 생각하였다. 장복을 돌아보며,

“장복아, 네가 죽어서 중국에 다시 태어나게 해 준다면 어떻겠느냐?”

하고 물으니 장복은,

“중국은 되놈의 나라입니다. 소인은 싫사옵니다.”

라고 대답한다.

잠시 뒤 한 맹인이 어깨엔 비단주머니를 걸고 손으로는 월금(月琴)을 타며 지나간다. 이를 보고 내가 크게 깨달아,

“저 맹인의 눈이야말로 진정 평등한 눈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맹인의 눈이야말로 진정 평등한 눈이라고 연암 선생이 논한 이유는 무엇인가? 맹인의 눈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지 못하는가? 앞에서 오는 사람이 변발을 했는지 (청의 사람인지) 전족을 했는지 (명의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맹인의 눈이야말로 앞에서 오는 사람, 앞의 환경과 무관히 항상 동일한 흑(黑)을 본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평등하다. 상대가 무엇이든지 간에, 석가여래가 밝은 눈으로 시방 세계를 두루 보는 바와 같이, 연암 또한 아마도 맹인의 눈을 보면서 자신 또한 청을 맹인의 눈과 같은 시각으로, 즉 기존의 사대주의적 관점을 버리고 청 그 자체로서 바라보겠다고 다짐했으리라 생각된다.

#4. 제도가 이렇게 된 뒤라야만 비로소 이용(利用)이라 말할 수 있겠다

탁자 위에는 술잔들을 늘어놓았는데, 한 냥짜리부터 열 냥짜리까지 각각 걸맞는 그릇이 있고, 모두 놋쇠로 잔을 만들어 우러나는 색이 은과 같았다. 넉 냥의 술을 시키면 넉 냥짜리 잔에 술을 따르니, 술을 사는 사람도 다시금 양의 많고 적음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 간편한 것이 이와 같았다. 술은 모두 백소로(白燒露, 소주)인데, 술맛이 썩 좋은 것은 아니고 금방 취했다가 금방 깬다.

점포를 둘러보니 모든 것이 단정하고 반듯하게 진열되어 있고, 한 가지 일도 구차하거나 미봉으로 한 법이 없고, 한 가지 물건도 삐뚤고 난잡한 모양이 없다. 비록 소외양간, 돼지우리라도 널찍하고 곧아서 법도가 있지 않은 것이 없고, 장작더미나 거름구덩이까지도 모두 정밀하고 고와서 마치 그림과 같았다.

아하! 제도가 이렇게 된 뒤라야만 비로소 이용(利用)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용을 한 연후라야 후생(厚生)을 할 수 있고, 후생을 한 연후라야 정덕(正德)을 할 수 있겠다. 쓰임을 능히 이롭게 하지 못하고서 삶을 두텁게 하는 것은 드문 경우이다. 삶이 이미 스스로 두텁게 하기에 부족하다면 또한 어찌 자신의 덕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토론에서는 이 부분을 다룰 때에 ‘자신의 덕을 바로잡다’와 관련한 논쟁이 있었다. 문맥상의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읽고자 한다면 ‘정덕’이란 보편적인 사회 전체의 올바름을 바로잡다라는 것으로 읽게 되겠지만, 문제는 후술하는 설명에서 ‘자신의’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을 내가 지적했던 것이다. ‘자신의’라는 단어에서 지시하는 대상은 복수가 될 수 없고, 오직 발화자 자신만이 가능하다는 점을 상기하여보면, 글에서 화자인 연암 선생의 덕을 바로잡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해석하면 글에서 의미하고자 하는 바, 즉 제도를 통해 무언가 용이함을 만들고, 그를 통하여 삶을 두텁게 한 이후에 ‘정덕’이라는 의미로 추정되는 것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이 있었다. 논쟁을 거듭한 결론은 아마도 연암의 실수로, ‘자신의 덕’이라는 부분은 무시하고 읽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5. 궁벽한 변방 민가에서 세운 비석인데도

비석 두 기가 있는데 모두 푸른 돌이다. 하나는 문상어사의 선정비이고, 다른 하나는 세관(稅官) 아무개의 선정비로 모두 만주인의 네 글자 이름이고, 글을 짓고 쓴 사람도 만주인인데 문장과 글씨가 형편없다. 다만 비석을 만든 제도가 매우 아름답고 공력이나 비용이 매우 적게 들어서 비석을 만드는 모범이 될 만했다.

비석의 양쪽 옆은 갈아서 매끈하게 만들지 않고, 벽돌을 세워서 담장을 만들어 비의 머리가 드러나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기와로 지붕을 만들어 비석이 감실 안에 있게 되어 풍우를 방비하게 하였으니, 비각을 세워 비석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보다 훌륭하다. 비석 받침에 새겨진 거북이 모양의 비희(贔屭)라는 용의 새끼와 비문 양옆에 새겨진 짐승 모양의 패하(覇夏)9라는 용의 새끼는 털을 셀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다. 궁벽한 변방 민가에서 세운 비석인데도, 정치(精緻)하고 고아한 것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궁벽한 변방 민가에서 세운 비석임에도 공력과 비용이 적게 들고 제도가 매우 아름다워 비석을 만드는 모범이 될 만하다고 연암 선생은 청의 변방에서 감탄했다. 연암 선생은 토론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아무래도 일상 속의 사물을 세밀하고 자세하게, 그리고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아니하고 관찰하는 재주가 있었던 듯 하다. 후술하겠지만, 연암 선생은 단지 변방 민가의 비석 외에도 거름과 벽돌, 기왓장에 주목했고, 청이 명을 누르고 대세를 잡은 이유는 이러한 민생의 후생에 있다고 판단했다는 점도 놓쳐서는 물론 안 될 것이다.

#6. 중국이 이처럼 번성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천천히 걸어서 문을 나서니 번화하고 화려한 모습이, 비록 황성에 도착하더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이 이처럼 번성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좌우에 들어선 점포들이 휘황찬란하게 이어졌으며, 아로새긴 창문, 비단을 바른 문, 그림같은 기둥, 붉은 칠을 한 난간, 푸른 현판, 금빛으로 쓴 점포 간판에다 소장하고 있는 물건들이 모두 중국의 진기한 것들임을 보아서는, 변방의 궁벽한 촌구석에도 정밀하고 치밀한 감식안과 우아한 식견이 있음을 알 수 있겠다.

또 어느 집에 들어가니, 장대하고 화려함이 강영태의 집보다 오히려 더 뛰어났지만, 집을 지은 제도는 대략 같았다.

무릇 집을 짓는 제도는, 반드시 수백 보의 땅을 마련하여 가로 세로를 서로 적당하게 해서 평평하고 반듯하게 땅을 깎고는, 수평으로 땅을 측량하고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은 뒤에 축대를 쌓는다. 축대는 모두 돌로 터를 깔고 한 겹이나 혹은 두 겹, 세 겹으로 모두 벽돌로 쌓은 뒤에 다듬은 돌로 담을 만든다. 대 위에 집을 지을 때는 모두 한 일(一)자로 곧게 짓지, 굽거나 꺾어서 붙여 짓지는 않는다. 안쪽에서부터 각각 첫째 집이 내실, 둘째 집이 중당(中堂), 셋째 집이 전당(前堂), 넷째 집이 외실(外室)이 된다. 외실은 앞으로 큰길에 닿아 있어서 점방이나 시전(市廛)으로 사용한다. 중당과 전당 앞에는 그 좌우에 방이 있어서 이것을 곁방이나 행랑채로 사용한다.

대략 집 하나가 반드시 여섯, 여덟, 열, 열두 기둥으로 이루어지고, 기둥과 기둥 사이가 매우 넓어 거의 우리나라의 보통 집 두 칸쯤 된다. 나무의 길이에 따라서 하거나 또는 임의로 넓게 하거나 좁게 하지 못하고, 반드시 정해진 척도에 따라서 칸을 만든다. 대들보는 모두 다섯 개 혹은 일곱 개를 쓰고, 땅에서 용마루까지의 높이를 측량해서 처마를 그 안에 만들기 때문에, 기와 모퉁이의 물 내려가는 홈이 마치 암키와를 세워 놓은 것처럼 가파르다.

개인적으로 『열하일기』에서 주목하여 읽은 부분은 연암이 청의 어떤 당시 기술들에 주목했고, 이를 조선의 것과 비교하였을 때 무엇이 상(上)이고 하(下)인지 평가한 부분들이었다. 토론에서도 합의되었듯이, 연암 선생은 단순한 사대주의자는 아니었다. 명을 무조건적으로 사대하는 것도 아니고, 청을 사대하자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다만 연암 선생은 청이든 명이든 어느 쪽이든, 국력에 도움이 되고 민생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기술 혹은 내용이면 가리지 않고 배우고 참고하여 부국강병을 이뤄야 한다는 쪽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아무래도,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오늘날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연암 선생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 아닐까 싶다.

#7. 집은 오로지 벽돌에만 의존하여 짓는다

집은 오로지 벽돌에만 의존하여 짓는다. 벽돌이란 흙으로 구워 만든 벽돌을 말한다. 길이는 한 자, 폭은 다섯 치이고, 가지런히 포개면 네모반듯하고 두께는 두 치이다. 하나의 틀에서 찍어 내지만, 벽돌귀가 떨어진 것, 모서리가 닳아빠진 것, 몸체가 휜 것 등은 꺼려서 사용하지 않는다. 벽돌 한 장이라도 꺼리는 벽돌을 사용했다간 집 전체를 망치게 된다. 그래서 한 틀에서 찍어 낸 벽돌이라도 들쭉날쭉할까 걱정이 되어 반드시 자로 재어 보고, 이상이 있는 놈은 자귀로 깎고 숫돌로 갈아 힘써 가지런하게 만드니 만 장의 벽돌이라도 모양이 일정하다.

벽돌을 쌓는 법은 한 번은 세로로 한 번은 가로로 배열하여, 마치 주역의 감괘(坎卦)와 이괘(離卦) 모양을 저절로 이루고, 그 사이 간격은 석회를 종이처럼 얇게 하여 겨우 붙을 정도로만 때워서 봉합한 흔적이 실처럼 얇다. 석회를 반북할 때는 거친 모래를 섞지 않고 찰진 흙도 피한다. 모래가 너무 굵으면 붙지 않고 너무 찰져도 쉽게 갈라져, 반드시 검고 약간 기름기가 있는 흙을 취해서 같은 양의 회를 섞는데, 그 빛깔이 거무튀튀하여 금방 구워 낸 기와와 같다. 대개 그 성질이 너무 찰지거나 바스러지지 않음을 취하고, 그 빛깔과 바탕의 순수함을 취하려는 것이다.

또한 어저귀 줄기를 털처럼 잘게 썰어서 섞는데, 우리나라에서 흙손질하는 미장이가 흙에 말똥을 함께 개는 것과 같아서 질기면서도 터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또 오동나무 기름을 타서 우유처럼 부드럽고 매끄럽게 하는데, 아교처럼 붙어서 갈라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기와를 이는 법은 더더욱 본받을 만하다. 기와의 모양은 통대나무를 네 쪽으로 쪼갠 것 중 하나와 같은데, 흡사 두 손바닥을 합한 것과 같은 정도의 크기다. 민가에서는 원앙기와(짝기와)를 사용하지 않으며, 서까래 위에 얼기설기 나무를 엮지 않고 여러 겹의 갈대자리를 곧바고 깔고 기와를 덮으며 자리에는 진흙을 깔지 않는다. 하나는 위를 보게 하고 하나는 엎어서 서로 암수가 되게 하며, 기와와 기와의 틈새는 석회 진흙으로 때운다. 물고기 비늘처럼 층계가 지고 아교처럼 붙는다. 그래서 참새나 쥐가 뚫는 폐단이나, 위가 무겁고 아래가 허한 가옥의 문제점이 없어진다.

우리나라의 기와 이는 법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지붕에 진흙을 두텁께 갈아 위가 무겁고, 담벼락은 벽돌을 쌓지 않아서 네 기둥이 의지할 수 없기 때문에 아래가 허하다. 기왓장은 너무 무거워 지나치게 굽었고, 그렇기 때문에 본래부터 빈 구멍이 많이 생겨 부득불 진흙으로 메우지 않을 수 없다. 진흙이 무겁게 내려 누르기 때문에 진작부터 용마루가 휠까 걱정이 생긴다. 진흙이 한번 말라 버리면 기와의 바닥이 절로 뜨게 되어 비늘처럼 깔린 기와들이 뒤로 밀려나, 드디어 틈새가 벌어져 바람이 통하고 비가 새며, 새가 뚫고 쥐가 갉으며, 뱀이 똬리를 틀고 고양이가 뒤집는 근심을 막을 수 없게 된다.

요컨대, 집을 짓는 데는 벽돌을 쓰는 것이 가장 훌륭하다. 비단 담을 높이 쌓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실내외를 모두 벽돌을 깔고 넓은 뜰을 모두 벽돌로 깔아서, 눈에 보이는 것이 반듯반듯 바둑판 줄을 그어 놓은 것 같다. 집이 벽에 기대어 위는 가볍고 아래는 완전하며, 기둥은 벽 속에 들어 있어 풍우를 겪지 않는다. 당연 불이 번질 것을 겁낼 것 없고, 좀도둑을 겁낼 필요도 없다. 더군다나 참새, 쥐, 뱀, 고양이의 염려가 근절된다. 한번 정중앙의 문을 닫아걸면 절로 성벽의 보루가 되어 방 안의 물건들은 마치 궤짝 속에 감춰 둔 것과 같아진다. 이로서 볼진대, 허다하게 토목을 쓸 필요도 없고 야장장이와 미장이를 번거롭게 할 것도 없이, 기와 한번 구워 내면 집은 이미 다 완성된 셈이다.

당시 조선의 집을 짓는 법과 연암 선생이 관찰한 청의 집을 짓는 법을 벽돌과 기와를 쌓는 법을 중심으로 상세하게 기술해두었다. 일반적인 견문적 서술이 아닌, 꽤나 상세한 기술이라는 것이 상당히 주목을 끈다. 모든 주목을 끄는 상세한 기술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므로, 마땅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독자의 올바른 감상일 것이다. 이러한 상세한 기술을 통해 연암 선생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무엇인가? 나의 대답은 다음 한 마디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구본신참(舊本新參)’이라고.

#8. 조선의 옛 영토를 전쟁도 하지 않고 줄어들게 만든 격이다

아! 후세에 땅의 경계를 상세하게 알지 못하고서 한사군(漢四郡)의 땅을 모두 함부로 압록강 안으로 한정해 사실을 억지로 끌어다 합치시키고 구구하게 배분하고는, 그 안에서 패수(浿水)가 어디인지 찾으려 하였다. 압록강을 패수라 말하기도 하고, 청천강(淸川江)을 패수라 말하기도 하며, 대동강을 가리켜 패수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조선의 옛 영토를 전쟁도 하지 않고 줄어들게 만든 격이다. 이렇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평양을 어느 한 곳에 고정시켜 놓고 패수의 위치를 사정에 따라 앞으로 당기기도 하고 뒤로 물리기도 한 까닭이다. 나는 일찍부터 한사군 땅에는 비단 요동뿐 아니라 마땅히 여진(女眞) 땅도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줄 아느냐고?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는 현토, 낙랑군만 있고 진번, 임둔군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중략) …

비록 반도 안에서 삼국을 합병했으나 그 강토와 국력은 고구려의 강대함에 결코 미치지 못했건만, 후세의 앞뒤가 꽉 막힌 학자들은 평양의 옛 이름만 마음으로 그리워하여 한갓 중국의 역사 기록에만 기대고 수나라, 당나라의 옛 자취에만 흥미를 느껴 ‘이곳이 패수이다, 이곳이 평양이다’라고 한다. 이미 실제 사실과 다르고 차이 나는 것을 이루다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니, 이곳이 안시성이 되는지 봉황성이 되는지 어찌 분변할 수 있겠는가?

토론에서는 이 대목에 대한 근거 자료나 논증이 부족하다는 견해가 많았고, 또한 그러한 지적이 주를 이루었다. 물론 그러한 지적도 맞으나, 나는 토론에서 이 부분을 읽을 때 시각을 근거 자료나 논증의 부족에 집중하기보다는, 이러한 대목의 제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연암 선생의 모습으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즉, 연암 선생은 이 부분에서 조선의 옛 영토에 대한 논쟁들에서, 땅의 경계를 상세히 알지 못하고서 경계를 지은 일들이 전쟁도 하지 아니하고 조선의 옛 영토를 줄어들게 만들었다는 주장을 들며 통탄한다. 이러한 통탄은 그가 조선 그 자체를 사랑하거나 자랑스러이 여기지 아니하고서는, 즉 애국적인 마음이 없지 않고서는 발생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만약 그가 조선은 미개하다는 식의 태도를 가졌더라면, 그는 이러한 조선의 옛 영토를 전쟁을 하지 않고서도 잃은 행위에 대하여 통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연암 선생은 실로 진정한 조선의 북학자(北學者)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9. 모든 것이 일은 절반이고 공은 두 배가 되는 기술이어서 배울 만하지 않은 것이 없다

성 주위는 비록 3리에 불과하나 벽돌로 수십 겹을 쌓아 그 제도가 웅장하고 사치하며, 네 귀퉁이는 네모반듯하여 마치 말 됫박을 놓아둔 것 같다. 지금 겨우 반쯤 쌓은즉, 높이를 측량할 수는 없으나 문 위에 누각을 세우는 곳에 구름다리를 설치하고 기중기를 띄워 공사하고 있다. 그 작업이 비록 아주 거창해도 기계가 편리하여, 벽돌과 흙을 실어 나르는 것이 모두 기계가 작동하고 바퀴가 움직여 위에서 끌어올리기도 하고 저절로 밀고 가기도 하는 등 그 방법이 일정치 않다. 모든 것이 일은 절반이고 공은 두 배가 되는 기술이어서 배울 만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갈 길이 바빠서 두루 다 보기도 어렵고, 종일 꼼꼼하게 들여다본들 잠시 잠깐에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정말 안타깝기 짝이 없다.

… (중략) …

정오가 되자 작렬하는 태양이 내리쪼여 숨이 턱턱 막혀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 진사와 나와서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갔다. 내가 정 진사에게

“성을 쌓은 제도가 어떻던가?”

하고 물으니 정 진사는,

“벽돌이 돌보단 못하죠.”

하기에 나는,

“자네가 모르고 있네. 우리나라 성 쌓는 제도가 벽돌을 쓰지 않고 돌을 쓰는 것은 좋은 방책이 아닐세. 대저 벽돌이란 하나의 틀에서 찍어 낸즉 만 개의 벽돌이라도 모양이 같으니 다시 힘들여 갈고 쪼는 공을 들일 필요도 없고, 가마 하나를 구워 놓으면 수많은 벽돌을 가만히 앉아서 얻을 수 있으니 다시 인부를 모집해 벽돌을 옮길 수고를 할 필요가 없네. 크기가 균일하고 네모반듯하여 들이는 힘은 줄고 얻는 공은 배가 되니, 가볍게 옮기고 쉽게 쌓을 수 있는 것으로 벽돌만 한 것이 없네.

지금 저 돌을 산에서 쪼개어 내려면 몇 명의 석수장이를 마땅히 써야 할 것이며, 수레로 옮기려면 몇 명의 인부를 써야 하며, 이미 옮긴 뒤에도 또 몇 명의 장인바치들을 동원해서 쪼고 다듬을 것인가? 쪼고 다듬을 공력은 또다시 며칠이나 허비할 것이며, 쌓을 때도 돌 하나를 놓는 공력에 또 몇 명의 인부를 써야 하는가? 그리고 성을 쌓자면 벼랑을 깎아서 돌을 입히게 되니, 이야말로 흙의 살에 돌의 옷을 입히는 꼴이네.

돌로 쌓은 성은 겉보기에는 준엄하고 단정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실상 위태위태하네. 돌이 들쭉날쭉 가지런하지 않으니 항상 작은 돌로 끝자락을 괴게 되고, 벼랑과 성 사이의 틈은 부스러기 자갈돌을 채워 넣고 진흙을 섞게 되니, 장마라도 한번 지나가면 속의 돌이나 진흙이 쏠려 나와 내장은 텅 비고 성벽은 배가 볼록해져, 돌 하나라도 성글어 빠지게 되면 모든 돌이 다투어 와르르 무너질 것이니, 이는 너무도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이네. 게다가 석회의 성질이란 벽돌에는 잘 붙지만 돌에는 능히 붙을 수가 없네.

내가 언젠가 차수(次修) 박제가(朴齊家)10와 성의 제도에 대해 논하고 있었는데 어떤 자가,

‘벽돌의 견고하고 굳셈이 어찌 능히 돌을 감당할 수 있으리오?’

하니 차수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벽돌이 돌보다 낫다고 하는 말이 어찌 벽돌 한 개와 돌 한 개 만을 비교하여 말하는 것이겠느냐?’

하였는데, 이 말이야말로 촌철살인의 논의였네.

요컨대 석회는 돌에 잘 붙지 않으니 석회를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더욱 터지고 갈라져 돌을 밀어내고 들떠 일어나게 되기 때문에 돌은 항상 저 혼자 떨어져 있고 석회에는 흙만 붙어 굳어 버릴 뿐이네. 벽돌을 회로 붙이면 마치 아교풀로 나무를 접합하고 붕사(硼沙, 접착제)로 쇳덩이를 이어놓은 것 같아서, 만 개의 벽돌이 엉겨 붙어 아교처럼 하나의 성을 이루게 된다네.

그럼로 벽돌 하나의 견고함은 진실로 돌만 같지 못하지만 돌 하나의 견고함은 또한 만 개의 벽돌이 아교처럼 붙은 것에는 따라갈 수 없는 걸세. 이것이 벽돌과 돌의 이롭고 해로움과 편리함을 쉽게 분변할 수 있는 까닭이네.”

라고 하였다.

벽돌과 돌을 이용한 성벽 쌓기에 대하여 정 진사와 논하고 있는 부분이다. 벽돌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는 경우 돌을 이용하여 쌓을 때 돌의 크기가 일정치 못하여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고 또한 편리하게 성벽을 쌓을 수 있으므로, 벽돌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는 것이 마땅히 더 좋다고 논하고 있다. 연암 선생은 정 진사와 같은 조선의 닫힌 시각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라면 마땅히 ‘통탄할지어이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선생이 글을 써서 이러한 정 진사와의 논의 내용과 벽돌을 이용한 성의 축조에 관련하여 상세히 논하는 내용을 기록해두었고 알렸다는 것은, 선생이 다만 실내에 앉아 통탄만 일삼는 선비는 아니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10. 이로 미루어 그들에게는 버리는 물건이 없음을 알겠다

뜰은 넓어 수백 칸이나 되었는데, 오랜 비에도 진창이 되지 않았다. 바둑돌 또는 참새 알 크기의 물에 닳은 냇가의 돌이란 본래 무용한 물건이지만, 그 모양이나 색깔이 서로 비슷한 놈을 골라서 문 앞에 이리저리 깔아서 날아가는 봉황 모양으로 만들어 진창이 되는 것을 막았으니, 이로 미루어 그들에게는 버리는 물건이 없음을 알겠다.

마찬가지로 연암 선생은 청의 사소한 부분도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꽤 노력을 기울인 모양이다. 선생의 호기심이 그 동기였을까, 아니면 청의 문물과 조선의 문물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과 그로 인한 심리적 압박감이 그 동기였을까?

#11. 먼저 가마 제도를 바꾸어서 양쪽이 모두 이롭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마을 어귀에 벽돌 가마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굽기를 다 마쳤는지 아궁이 문에 진흙을 바르고 물 수십 통을 길어다 가마의 꼭대기에 붓는다. 가마 꼭대기는 거의 구덩이 같아서 물을 부어도 넘치지 않는다. 가마 몸통이 한창 달궈져 있어 물을 먹으면 즉시 말라 버려, 물을 부어서 타지 않게 살피려는 것 같다. 다른 하나는 먼저 구워서 가마가 이미 식었는지 벽돌을 막 끄집어내고 있었다. 대체로 가마를 만든 제도가 우리나라와는 판이하게 달라서, 우리의 가마 제도가 잘못된 점을 먼저 이야기한다면 가마 제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가마는 곧게 일자로 누운 아궁이와 같아서 옳은 제도의 가마가 아니다. 애초에 가마를 만들 때 벽돌이 없으므로 나무를 받치고 진흙으로 쌓아 큰 소나무 장작을 태워서 가마를 굳힌다. 장작을 태워 굳히는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든다. 가마는 길기만 하고 불기운이 위로 올라가지 못한다. 불기운이 위로 가지 못하기 때문에 화기에 힘이 없고, 화기에 힘이 없기 대문에 소나무 장작을 때서 불길을 사납게 한다. 불길이 사납기 때문에 불의 상태가 고르지 않고, 불의 상태가 고르지 않기 때문에 불길 근처의 기와는 항상 움풍하게 파이거나 이지러지기 쉽고, 불에서 먼 놈은 기와가 익지 않을까 걱정한다.

사기그릇을 굽든 옹기를 굽든 막론하고 질그릇을 굽는 집의 가마가 모두 이 모양이고, 소나무 장작을 때는 법도 마찬가지이다. 소나무 송진의 불길은 다른 땔나무보다 더 세다. 소나무란 한번 자르면 다시 움이 트는 나무가 아니어서 소나무 산은 한번 옹기장이를 만나면 사방의 산이 모두 민둥산이 되어 깨끗해진다. 백 년을 길러 하루아침에 다 소진시키고는 다시 새처럼 이리저리 흩어져 소나무를 찾아 떠난다. 이는 가마 하나를 만드는 법이 잘못되면서 나라 안의 좋은 목재가 날마다 소진되고, 옹기장이 역시 날로 곤궁해지는 것이다.

지금 여기 중국의 가마를 살펴보면, 벽돌로 쌓고 회로 봉하여 처음부터 가마를 구워서 굳히는 비용이 들지 않으며, 크기와 높이를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 모양은 종을 엎어 놓은 것 같고, 가마도가니의 꼭대기는 연못처럼 만들어 몇 말의 물도 들어가게 하고, 옆에는 연기 빠지는 문은 네댓 개 뚫어서 불길이 위로 잘 오르게 한다. 가마 속에 벽돌을 서로 기대어 놓아서 불이 지나가는 길을 만드낟. 여기서 그 묘리(妙理)는 모두 벽돌 쌓는 데 있다. 내 손으로 하라고 해도 능히 만들 수 있겠건만 입으로 형용하기는 참으로 어렵기 짝이 없다.

정사가

“벽돌 쌓은 모양이 품(品)이라는 글자를 닮았던가?”

하고 묻기에 내가,

“그런 것 같기는 한데,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라고 말했다. 변 주부가

“그 쌓은 모양이 책갑(冊匣)을 포개 놓은 것을 닮았습디까?”

하기에 나는,

“그런 것 같기는 해도,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네.”

라고 답했다.

벽돌을 평평하게 놓지 않고 모두 모로 세워 십여 줄을 마치 방고래처럼 만들고, 다시 그 위에 엇비스듬하게 타고 오르게 배열하고 세워서 차례차례 쌓아 가마 천장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렇게 되면 큰 노루의 눈처럼 그 구멍이 자연스럽게 소통되어 화기가 위로 도달하여 서로 목과 목구멍이 되어 마치 빨아당기듯 불길을 발아서 만 개의 불 목구멍이 번갈아 삼켜 화기가 항상 맹렬하게 된다. 수숫짚이나 기장대로도 불길을 균일하게 하고 열을 고르게 할 수 있어 뒤틀려 뒤집어지거나 갈라져 터질 염려가 저절로 없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 도공들은 가마 제도를 먼저 따지지 않고 처음부터 큰 소나무 숲이 아니면 가마를 설치할 수 없다고 여긴다. 가마를 금할 수는 없지만, 소나무는 한정이 있는 물건이니 먼저 가마 제도를 바꾸어서 양쪽이 모두 이롭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11과 노가재 김창업이 모두 벽돌의 이로움을 설명하면서도 가마의 제도에 대해서는 상세히 말하지 않았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조선의 가마 제도와 청의 가마 제도를 논하면서, 조선의 가마 제도에 대하여 수정할 점을 논하고 있다. 가마의 축조 방식과 모양, 그리고 연료와 열기가 전해지는 방식 등, 상세한 기술과 함께 조선의 가마 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와 발견점은 가히 상당한 관찰력이라고 평할 수 있어 보인다. 연암 선생답다.

#12. 다만 구들 만드는 법을 본받아서 온돌에 적용하고 기름 장판을 깐다면 누가 이를 막겠는가

변계함이

“캉의 제도는 종시 괴이하여 우리나라 온돌만 못한 것 같습니다.”

라고 하기에 나는,

“못한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따져 물었다. 변군은

“넉 장의 기름 먹인 종이 장판을 깔아서 옥돌 같은 색이 나고 얼음처럼 매끄럽게 만드는 우리 온돌과 어찌 같기야 하겠습니까?”

라고 하기에 나는,

“캉이 우리 온돌방만 못하다는 것은 사실이네. 다만 구들 만드는 법을 본받아서 온돌에 적용하고 기름 장판을 깐다면 누가 이를 막겠는가? 우리의 구들 놓는 법은 여섯 가지가 잘못되었으나 아무도 따져 보는 사람이 없단 말이야. 내 이제 한번 논해 볼 터이니 자네는 잠자코 들어 보기나 하게.

진흙을 쌓아서 구들 골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을 얹어서 구들을 만든다. 돌의 크기나 두께가 본래 각기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작은 자갈돌을 포개어 네 귀퉁이를 괴어서 절름거리는 것을 막지만 구들돌이 타버리고 진흙이 말라 항시 무너지거나 떨어질까 염려하니, 이게 첫째 잘못된 점이네. 구들돌의 표면이 울퉁불퉁한 곳에는 흙으로 때우거나 진흙을 발라서 평평하게 만들기 때문에 불을 때도 골고루 따뜻해지지 않으니, 이게 둘째 잘못이네. 불길이 지나가는 고래가 높고 널찍해서 화염이 서로 닿지 못하는 것이 셋째 잘못이네. 담벼락이 성기고 얇아서 항상 틈이 생기는 것이 괴로우며, 바람이 불어 불길이 거꾸로 가고 연기가 새어 방에 가득 차는 것이 넷째 잘못이네. 불목(온돌방 아랫목의 가장 따뜻한 자리)의 아래가 번갈아 목구멍 노릇을 하지 못해 불이 멀리 넘어가지 못하고 불길이 뒤로 장작 쪽으로 밀려나는 것이 다섯째 잘못이네. 방구들을 건조시키는 공력에 반드시 장작 백 단은 들어가고 열흘 안에는 방으로 들어가기 어려운 것이 여섯재 잘못이네.

어떤가? 자네와 함께 벽돌 수십 개를 깔면 잠시 담소하는 사이에 이미 여러 칸의 온돌이 만들어져 그 위에서 눕고 자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연암 선생은 ‘청’의 좋은 문물은 받아들여 참고해 우리의 것을 개선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맥락이다. 이러한 맥락은 ‘다만 구들 만드는 법을 본받아서 온돌에 적용하고’라는 대목에서 아주 잘 두드러지는 것 같다. 연암 선생은 온돌의 유용성과 우리 민족의 것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나쁜 점은 버리고 청의 문물 중에 좋은 점을 취하여 이를 우리의 것에 적용하여 조금 더 개선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실로 실학적인 사상이다. 이러한 실학적인 사상이 당시의 후기 조선에 제대로 싹을 틔우지 못하고 흐지부지 된 것이 다만 아쉬울 따름이다.

#13. 한바탕 통곡하기 좋은 곳이로구나

산기슭이 가로막고 있어 백탑이 보이지 않기에 말을 급히 몰아 수십 보를 채 못 가서 겨우 산기슭을 벗어났는데, 안광이 어질어질하더니 홀연히 검고 동그란 물체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이제야 깨달았다. 사람이란 본래 의지하고 붙일 곳 없이 단지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이리저리 나다니는 존재라는 것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한바탕 통곡하기 좋은 곳이로구나.”

했더니 정 진사가,

“천지간에 이렇게 시야가 툭 터진 곳을 만나서는 별안간 통곡할 것을 생각하시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그렇긴 하나, 글쎄. 천고의 영웅들이 잘 울고, 미인들이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하나, 기껏 소리 없는 눈물이 두어 줄기 옷깃에 굴러 떨어진 정도에 불과하였지, 그 울음소리가 천지 사이에 울려 퍼지고 가득 차서 마치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와 같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네.

사람들은 단지 인간의 칠정(七情) 중에서 오로지 슬픔만이 울음을 유발한다고 알고 있지, 칠정이 모두 울음을 자아내는 줄은 모르고 있네. 기쁨이 극에 달하면 울움이 날 만하고, 분노가 극에 치밀면 울음이 날 만하며, 즐거움이 극에 이르면 울음이 날 만하고, 사랑이 극에 달하면 울음이 날 만하며, 미움이 극에 달하면 울음이 날 만하고, 욕심이 극에 달해도 울임이 날 만한 걸세. 막히고 억눌린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 버리는 데에는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이 있네.

통곡 소리는 천지간에 우레와 같아 지극한 감정에서 터져 나오고, 터져 나온 소리는 사리에 절실할 것이니 웃음소리와 뭐가 다르겠는가? 사람들이 태어나서 사정이나 형편이 이런 지극한 경우를 겪어 보지 못하고 칠정을 교묘하게 배치하여 슬픔에서 울음이 나온다고 짝을 밪추어 놓았다네. 그리하여 초상이 나서야 비로소 억지로 ‘아이고’ 하는 등의 소리를 질러대지.

그러나 정말 칠정에 느껴서 나오는 지극하고 진실한 통곡 소리는 천지 사이에 억누르고 참고 억제하여 감히 아무 장소에서나 터져 나오지 못하는 법이네. 한나라 때 가의(賈誼)12는 적당한 통곡의 자리를 얻지 못해 울음을 참다가 견뎌내지 못하고 갑자기 한나라 궁실인 선실(宣室)13을 향해 한바탕 길게 울부짖었으니, 어찌 사람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정 진사는,

“지금 여기 울기 좋은 장소가 저토록 넓으니, 나 또한 그대를 좇아 한바탕 울어야 마땅하겠는데, 칠정 가운데 어느 정에 감동받아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기에 나는,

“그건 갓난아이에게 물어보시게. 갓난아이가 처음 태어나 칠정 중 어느 정에 감동하여 우는지? 갓난아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해와 달을 보고, 그 다음에 부모와 앞에 꽉 찬 친척들을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이런 기쁨과 즐거움은 늙을 때까지 두 번 다시 없을 터이니, 슬퍼하거나 화를 낼 이치가 없을 것이고 응당 즐거워하고 웃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도리어 한없이 울어대고 분노와 한이 가슴에 꽉 찬 듯이 행동을 한단 말이야. 이를 두고, 신성하게 태어나거나 어리석고 평범하게 태어나거나 사람은 모두 죽게 되어 있고, 살아서는 허물과 걱정 근심을 백방으로 겪게 되므로, 갓난아이는 자신이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먼저 울어서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갓난아이의 본마음을 참으로 이해하지 못해서 하는 말이네.

갓난아이가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 캄캄하고 막히고 좁은 곳에서 웅크리고 부대끼다가 갑자기 넓은 곳으로 빠져나와 손과 발을 펴서 기지개를 켜고 마음과 생각이 확 트이게 되니, 어찌 참소리를 질러 억눌렀던 정을 다 크게 씻어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갓난아이의 거짓과 조작이 없는 참소리를 응당 본받는다면, 금강산 비로봉에 올라 동해를 바라봄에 한바탕 울 적당한 장소가 될 것이고, 황해도 장연(長淵)의 금모래사장에 가도 한바탕 울 장소가 될 것이네. 지금 요동 들판에 임해서 여기부터 산해관(山海關)까지 일천이백 리가 도무지 사방에 한 점의 산이라고는 없이, 하늘 끝과 땅끝이 마치 아교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하고 고금의 비와 구름만이 창창하니, 여기가 바로 한바탕 울어 볼 장소가 아니겠는가?”

토론에서 국어국문학과, 중어중문학과 학생 분들께서 인상 깊었던 대목이라고 들었던 부분이 바로 여기였다. 연암 선생이 지적한 대로,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도 흔히 ‘울음’이라는 행위를 유발하는 감정은 주로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울음’을 유발하는 감정은 사실 다양하다. 선생의 말대로, ‘분노’, ‘기쁨’, ‘욕심’ 등과 같은 다양한 감정이 극에 달하였을 때에도 ‘울음’이 터져 나오지 않던가. 한편 통곡을 하기 위해서, ‘울음’을 하기 위해서 마땅한 장소가 필요로 한다는 것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끔 한다. 왜 우리는 ‘울음’이라는 행위를 타인 앞에서 그저 바로 행할 수 없는 것인가? 왜 ‘울음’이라는 행위에는 그에 걸맞는, 탁 트이고 막힘이 없는 장소가 필요한 것인가? 그러한 장소가 있을 때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원리인가, 아니면 이것은 어떤 사회학적 혹은 심리학적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 속성의 것인가?

#14. 화룡은 아주 악독한 놈이랍니다

“용에는 선한 놈과 악한 놈 둘이 있는데, 그중 화룡은 아주 악동한 놈이랍니다. 건륭 8년 계해년(1743) 3월, 산해관 밖 여양(閭陽)이란 지방의 들판 가운데 용 한 마리가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구름도 없는데 천둥소리가 나고, 비도 오지 않는데 번개가 치더니 산해관 밖 늦봄의 날씨가 갑자기 염천의 6월 날씨로 변했답니다. 용이 떨어진 근처 백 리 안은 모두 큰 용광로 세상이 되어 사람이나 가축이 부지기수로 죽었고, 상인들도 돌아다니지 못했으며, 집에 있는 사람도 옷을 다 벗고 손에서 부채를 멈출 수가 없었답니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산해관 안에 있던 얼음 보관창고의 얼음 수천 수레를 산해관 밖으로 실어내 격정을 덜려고 했습니다. 용이 있던 근처의 수목과 토석은 다른 데 비해서 곱절이나 타 버리고 우물과 샘은 모두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용이 누운지 열흘이 되어 홀연히 큰 천둥소리와 함께 바람이 불고 콩알만 한 비를 뿌려, 대릉하(大陵河) 지방에서는 비가 오는 중에도 집에 불이 절로 났지만, 사람이나 가죽은 상하거나 해를 입지 않았답니다.

… (중략) …

용이 떠난 뒤에 바람 불던 날씨는 맑게 개어 다시 3월의 날씨로 되돌아왔답니다. 용이 누웠던 곳에는 물이 고여 수십 길의 맑은 못이 되었고, 못 근방의 나무와 풀은 모두 타 버렸답니다. 몸뚱이가 반만 남은 소와 말들이 많았는데 털과 뼈는 타서 삭았고, 불에 탄 크고 작은 고기들이 쌓여 언덕을 이루었는데, 썩는 냄새가 진동하여 근처에 얼씬할 수가 없었더랍니다.

개인적으로, 기상학과 관련된 내용들에 관심이 있고 또 공부하고 있다 보니, 이러한 좀 허무맹랑한 소리가 섞여 있고 다소 미신적인 내용도 많이 포함되어 있지만, 여튼 국지적 지역에서의 이상적인 고온 기상 현상은 좀 이목을 끌었다. 쓸데없는 내용을 배제하고 아마도 사실일 것 같은 내용만 고르자면, 1743년 3월에 여양이라는 지방에서 맑은 날에 천둥과 번개가 있은 이후, 늦봄의 날씨가 갑자기 기온이 상승하여 6월의 여름 날씨로 변하여 많은 더위에 관한 피해를 냈고, 얼마 뒤에 다시 3월의 날씨로 되돌아왔다는 것인데, 도대체 그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기단과 대기 요소들이 작용했기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인지 다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알 길은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15. 이후론 처음 보는 사물이 있으면 비록 잠자거나 먹을 때라도 반드시 고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아까 몽고 사람이 약대(낙타) 두 필을 끌고 지나가더이다.”

하기에 내가 야단을 치며,

“어째서 고하지 않았더냐?”

하니 창대가 나서서,

“그때 천둥처럼 코를 골고 주무시느라 아무리 불러도 대꾸를 안 하시니 어찌하란 말입니까? 소인들도 처음 보는 것이라 그게 무엇인지는 몰랐습니다마는, 속으로 약대려니 그저 짐작만 했습니다.”

하기에 내가,

“그래, 모습이 어떻게 생겼더냐?”

하니 창대가,

“그 실상을 형용하기가 쉽지 않사옵니다. 말이라고 보면 발굽이 두 쪽이고 꼬리는 소와 같으며, 소라고 하기에는 머리에 두 뿔이 없고 얼굴은 양처럼 생겼고, 양이라고 하기에는 털이 곱슬곱슬하지 않고 등에 두 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머리를 드는 모양은 거위 같고 눈을 뜬 모양은 장님 같았습니다.”

라고 한다. 내가

“과시 약대가 틀림없다. 크기는 어느 정도이더냐?”

하고 물으니 한 길 되는 무너진 담을 가리키며,

“크기가 저 정도쯤 됩니다.”

라고 하기에, 이후론 처음 보는 사물이 있으면 비록 잠자거나 먹을 때라도 반드시 고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연암 선생은 호기심이 많고 직접 많은 것을 체험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듣는 것으로, 서책을 통하여 얻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선생은 직접 체득함으로써 내용들, 새로운 것들, 새로운 세상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이 연암 선생에게서 내가 배울 점이라 생각되는데, 이러한 점은 여기 말고 다음 인용 구문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것 같다.

#16. 자신이 직접 체험하지 않고 한갓 남이 말하는 내용만 듣고 의존하는 사람과는 함께 학문을 이야기할 수 없다

자신이 직접 체험하지 않고 한갓 남이 말하는 내용만 듣고 의존하는 사람과는 함께 학문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하물며 평생을 두고 마음을 쓰고 헤아려도 도달할 수 없는 학문의 세계임에랴! 그런 사람들에게, 공자가 태산(泰山)에 올라서 천하를 작게 여겼다고 말하면 마음속으로는 정말 그랬을까 하고 부정하면서도 입으로는 ‘그랬겠지’ 하고 응답할 것이다. 또 그런 사람들에게, 석가는 시방세계(十方世界)를 평등하게 보았다고 말하면 꿈같은 망언을 한다고 배척할 것이며, 서양 사람들은 큰 배를 타고 멀리 지구 밖을 돌아다녔다고 말하면 괴상한 거짓말을 한다고 도리어 말하는 사람을 꾸짖을 것이다. 이런 지경이니, 나는 이제 누구와 함께 천지 사이의 크나큰 구경거리를 이야기하겠는가?

‘자신이 직접 체험하지 않고 한갓 남이 말하는 내용만 듣고 의존하는 사람과는 함께 학문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선생의 말은 참으로 옳다. ‘남이 말하는 내용’에만 의존하는 경우 새로운 창작물, 진정으로 현실을 반영하는 학문이 탄생할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연암 선생의 학문에 대한 가치관과 나의 학문에 대한 가치관은 일치하는 것 같은데, 학문의 목적은 ‘인간에게 유용해야 함’에 있다. 물론 나의 가치관에서의 ‘유용성’이란 단기적인 것만이 아닌 장기적인 부분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정의되어, 기후 변화와 같은 문제들에도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학문은 ‘유용함’이 제1순위로 있어야 하고, 유용하지 않은 경우 그 학설 혹은 학문, 이론은 폐기되거나 마땅히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에 있다.

#17. 정말 장관은 깨진 기와 조각에 있었고, 정말 장관은 냄새 나는 똥거름에 있었다고

천하를 통치하는 사람은 진실로 인민에게 이롭고 국가를 두텁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비록 그 법이 오랑캐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 더구나 삼대(하 · 은 · 주) 이래 성스럽고 현명한 제왕들의 법도와 역대 국가들이 가졌던 옛것이고 떳떳한 것임에랴! 옛날 성인이 『춘추』를 지은 본뜻은 존화양이를 위함이었지만, 그렇다고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혔음을 분하게 여겨 중국의 존승할 만한 사실조차 모조리 내치라고 했단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람들이 참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려면, 중국의 남겨진 법제를 모조리 배워서 우리의 어리석고 고루하며 거친 습속부터 바꾸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밭 갈고 누에 치고 질그릇 굽고 쇠 녹이는 풀무질에서부터 공업을 고루 보급하고 장사의 혜택을 넓게 하는 데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배우지 못할 것이 없다. 다른 사람이 열 가지를 배우면 우리는 백 가지를 배워 먼저 우리 인민들을 이롭게 해야 한다. 우리 인민들이 몽둥이를 쥐고서도 저들의 굳은 갑옷과 날카로운 병장기와 대적할 만한 뒤라야, 비로소 중국에는 볼만한 것이 없다고 장담해야 옳을 것이리라.

나는 삼류 선비이다. 나는 중국의 장관을 이렇게 말하리라.

“정말 장관은 깨진 조각에 있었고, 정말 장관은 냄새 나는 똥거름에 있었다고. 대저 깨진 기와 조각은 천하 사람들이 버리는 물건이다. 그러나 민간에서 담을 쌓을 때, 어깨 높이 이상은 쪼개진 기왓장을 두 장씩 마주 놓아 물결무늬를 만들고, 네 쪽을 안으로 합하여 동그라미 무늬를 만들며, 네 쪽을 밖으로 등을 대어 붙여 옛날 동전의 구멍 모양을 만든다. 기와 조각들이 서로 맞물려 만들어진 구멍의 영롱한 빛이 안팎으로 마주 비친다. 깨진 기와 조각을 내버리지 않아, 천하의 문채가 여기 있게 되었다.

동리 집들의 문전 뜰은, 가난하여 벽돌을 깔 수 없으면 여러 빛깔의 유리기와 조각과 냇가의 둥글고 반들반들한 조약돌을 얼기설기 서로 맞추어 꽃 · 나무 · 새 · 짐승 문양을 만드니, 비가 오더라도 땅이 질척거릴 걱정이 없다. 자갈과 조약돌을 내버리지 않아, 천하의 훌륭한 그림이 모두 여기에 있다.

똥오줌이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물건이다. 그러나 이것이 밭에 거름으로 쓰일 때는 금싸라기처럼 아끼게 된다. 길에는 버린 재가 없고, 말똥을 줍는 자는 오쟁이를 둘러매고 말꼬리를 따라다닌다. 이렇게 모은 똥을 거름창고에다 쌓아 두는데, 혹은 네모반듯하게 혹은 여덟 혹은 여섯 모가 나게 혹은 누각 모양으로 만든다. 똥거름을 쌓아 올린 맵시를 보아 천하의 문물제도는 벌써 여기에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기와 조각, 조약돌이 장관이라고. 똥거름이 장관이라고.’ 하필이면 성곽과 연못, 궁실과 누각, 점포와 사찰, 목축과 광막한 벌판, 수림의 기묘하고 환상적인 풍광만을 장관이라고 말할 것이랴!

주로 장관이라고 하면 보고 겪은 자연 환경이나 건축물을 이야기하는 일반적 통념과는 달리, 연암 선생은 청의 장관이 ‘깨진 기와 조각’과 ‘냄새 나는 똥거름’에 있다는 역설적인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이 역설적인 주장은 선생이 이상한 선비임을 지시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진정으로 국가를 생각하고 민생의 후생을 생각하는 가장 올곧은 도(道)에 도달한 선비였다는 평가를 근거지우는 요소로 작용한다. 선생의 대의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대목이 바로 이 대목이 아닐까 감히 평해본다.

#18. 수레 제도(車制)

사람이 타는 수레를 태평차(太平車)라고 한다. 수레바퀴의 높이가 사람의 팔꿈치에 닿을 정도이고, 바퀴의 살 서른 개로 하나의 바퀴통이 되며, 대추나무를 둥글게 하여 바퀴테를 만들고 바퀴 겉에 쇳조각이나 쇠못을 둥글게 박는다. 위에는 세 명 정도 들어갈 둥근 수레덮개의 방을 만들고, 푸른 베 혹은 공단이나 우단으로 장막을 치며 더러는 연노랑의 주렴을 드리우기도 하는데, 은단추로 열고 닫게 되어 있다. 좌우에는 유리를 붙여 창을 냈다. 방의 앞에는 가로로 널빤지를 설치하여 말 모는 사람이 앉을 수 있게 했고, 방 뒤에도 시종들이 앉을 수 있도록 했다. 나귀 한 마리가 끌고 가며, 먼 길을 갈 경우는 말과 노새의 숫자를 더 늘린다.

짐을 싣는 수레를 대차(大車)라고 한다. 바퀴 높이가 태평차보다 약간 낮으며 바퀴살이 입(卄)자 모양으로 생겼고 8백 근 정도의 짐을 실어 말 두 필이 끌게 하며, 8백 근이 더 되면 물건의 무게를 헤아려 말을 더 붙인다. 짐을 실은 위에는 삿자리로 거룻배 모양의 방을 만들어 앉고 누울 수 있게 했다. 대체로 말 여섯 필이 끄는데 수레 아래는 왕방울을 달고 말의 목에도 작은 방울 수백 개를 달아 뎅그랑 하는 소리가 밤중에도 경계를 하도록 했다. 태평차는 바퀴 자체가 회전하고 대차는 바퀴굴대가 회전하는데, 두 바퀴가 매우 동그랗기 때문에 능히 균일하게 회전하고 빨리 달릴 수 있다.

수레와 말을 메는 끌채에는 튼튼한 말이나 건장한 노새를 택하여 묶되, 가로로 된 멍에를 사용하지 않고 작은 나무로 된 안장을 쓰며, 다시 가죽끈으로 끌채 끝을 번갈아 묶어서 멍에를 한다. 나머지 말들도 모두 쇠가죽으로 가슴걸이와 뱃대끈을 만들고 끈으로 묶어서 당기게 한다. 짐이 무거우면 멍에를 바퀴 밖으로 나오게 하여 높이가 몇 길이나 되게 묶으며, 끄는 말도 늘려 십여 필이나 되게 한다. 대차를 모는 사람을 ‘칸처더(看車的)’14라고 부르는데, 짐 위에 높이 앉아서 손에 채찍을 쥔다. 채찍 끝에는 길이가 두 길이나 되는 가죽끈을 묶어서 허공에 휘두르고, 힘을 제대로 쓰지 않는 말의 귀나 옆구리를 친다. 채찍질이 손에 익어 교묘하게 말을 칠 뿐 아니라, 채찍 소리가 우레를 치듯 진동한다.

바퀴가 하나 달린 독륜차(獨輪車)는 뒤에서 한 사람이 끌채를 겨드랑이에 끼고 민다. 수레 한가운데에 바퀴를 달았는데 바퀴의 반이 수레 위에 솟아 나오게 했고, 좌우에 상자를 만들어 짐을 싣되 짐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바퀴가 닿는 곳은 북을 반으로 자른 형상이며, 바퀴를 감싸서 바퀴와 물건이 서로 닿지 않도록 했다. 겨드랑이와 끌채 아래에는 작은 방망이가 쌍으로 드리워져 있어, 수레가 가면 끌채와 함께 들리고 수레가 멈추면 바퀴와 함께 정지하게 되어서, 지탱하는 것이 기울거나 엎어지지 않게 만든다.

길가에서 떡이나 과일, 참외를 파는 사람들은 모두 독륜차를 사용하며, 이는 밭에 거름을 주는 데도 아주 편리하다. 언젠가 보니 촌 여자 둘이서 각기 아이 하나씩을 안고 양쪽 상자에 앉아 있었으며, 물을 싣는 경우에는 좌우에 각각 대여섯 통을 싣기도 했다. 짐이 무겁거나 혹은 언덕을 오를 경우는 한 사람이 끈을 묶어 앞에서 끌기도 하며, 어떤 경우는 두세 명이 끌기도 하는데 마치 선부(船夫)들이 닻줄로 배를 끄는 모양과 같았다.

대저 수레라는 것은 하늘에서 나와15 땅에서 운행을 하니, 육로에서 사용하는 배이고 돌아다닐 수 있는 집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에서 크게 쓰이는 것으로 수레만 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주례(周禮)』에서 임금의 재산을 물으면 수레의 보유 숫자로 답했던 것이다.16 수레는 짐을 싣거나 사람을 태우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투에 쓰는 융차(戎車), 작업에 쓰는 역차(役車), 물을 실어 나르는 수차(水車), 대포를 싣는 포차(砲車) 등 그 쓰임새에 따라 수천수백 가지인데, 지금 여기서 창졸간에 모두 이야기할 수는 없다. 사람이 타는 수레와 짐을 싣는 수레는 민생과 관계되어 먼저 힘써야 할 것이므로, 시급히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전에 담헌 홍대용, 성재(聖載) 이광려(李匡呂)17와 함께 수레 제도에 대해 강론한 바 있다. 수레 제도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궤(軌), 즉 바퀴와 바퀴 사이의 간격이 같도록 통일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른바 바퀴 간격을 같게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수레의 축과 양쪽 바퀴 사이의 간격을 말하는 것이다. 두 바퀴의 간격이 정해진 법식을 어기지 않는다면 모든 수레의 바큇자국이 통일될 것이다.

『중용』에서 말하는 이른바 수레바퀴의 간격이 같다는 뜻의 ‘거동궤(車同軌)’가 바로 이것이다. 두 바퀴의 간격을 제멋대로 넓게 하거나 좁게 한다면 길의 바큇자국이 어떻게 한 가지 틀에 들어갈 수 있으랴!

지금 길을 따라 천 리 길을 오면서 매일같이 수많은 수레를 보건만, 앞의 수레나 뒤의 수레가 동일하게 하나의 바큇자국을 따라간다. 그러므로 미리 짜지 않고도 같게 되는 것을 일러 한 수레바퀴의 자국이라는 뜻의 ‘일철(一轍)’이라 말하고, 뒤에 오는 사람이 앞에 가는 사람의 행적을 일러 ‘전철(前轍)’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도성의 문턱에 바퀴가 닿는 곳에는 움푹하게 홈통이 생기는데, 『맹자』에서 말하는 ‘성문의 수레바퀴 자국’이 바로 이것이다.18

우리나라는 일찍이 수레가 없었고, 아직 바퀴가 완전히 둥글지 않으며 바큇자국이 하나의 궤에 들지 않으니, 이는 수레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리나라는 고을이 험준해서 수레를 사용할 수 없다.”

고 말하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국가에서 수레를 사용하지 않으니 길이 닦이지 않았을 뿐이다. 수레가 다니게 된다면 길은 절로 뚫리게 마련이니, 어찌 길거리가 좁다거나 고갯마루가 높음을 걱정하랴? 『중용』에서 말한 ‘수레와 배가 이르는 곳,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19이란 바로, 아무리 멀더라도 수레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중국에는 장안에서 촉 땅으로 들어가는 길에 아홉 굽이의 험한 길인 검각(劒閣)과 산서성 태행산(太行山)의 양의 창자 같은 꼬불꼬불 험한 길이 있지만, 모두들 말을 채찍질하여 수레를 몰고 지나간다. 이 때문에 섬서, 사천, 강소, 광동, 복건, 광서 지방 같은 먼 곳이라도 큰 장사꾼들과 식솔을 이끌고 부임하는 관리들이 수레바퀴를 서로 부딪쳐 가기를 마치 자신의 마당을 밟고 가듯 하는데, 수레가 내는 굉음이 마치 구름도 없는 백주 대낮에 뇌성벽력 소리 같다.

지금 우리가 지나왔던 마천령(磨天嶺)과 청석령(靑石嶺)의 고개, 장항(獐項)20과 마전(馬轉)21의 비탈길이 어찌 우리나라보다 덜하였던가? 그 바위가 가로막고 험준함은 모두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거늘, 그렇다고 중국 사람들이 수레를 없애고 통행하지 않던가?

중국의 풍부한 재화와 물건이 어느 한곳에 막혀 있지 않고 사방에 흩어져 옮겨 다닐 수 있는 까닭은 모두 수레를 사용하는 이점 때문이다. 지금 당장의 효과를 따져 보더라도, 우리 사신 일행이 모든 폐단을 없애고 우리가 만든 수레에 우리 물건을 싣고 곧바고 북경까지 닿는다면 편리할 터인데,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단 말인가?

영남 지방 아이들은 새우젓을 모르고, 관동 사람들은 산사나무(아가위) 열매를 절여서 간장을 대신하고, 서북 사람들은 감과 귤을 구분 못 하고, 바닷가 사람들은 생선 창자를 밭의 거름으로 쓰고 있다. 어쩌다가 한번 이것이 서울에 오면 한 움큼에 한 닢 값이니, 어찌 그리 귀하게 되는 것인가?

육진(六鎭) 지방의 마포(麻布), 관서 지방의 명주, 삼남 지방의 닥종이, 황해도 해서 지방의 솜과 쇠, 충남 내포(內浦)의 소금과 생선 등은 모두 민생 일용품에서 뺄 수 없는 물건이다. 충북 청산(靑山) · 보은(報恩)의 수천 그루의 대추, 황해도 황주(黃州) · 봉산(鳳山)의 수천 그루의 배, 전남 흥양(興陽, 고흥) · 남해의 수천 그루의 귤 · 유자, 충남 임천(林川) · 한산(韓山)의 수천 그루의 모시, 관동 지방의 수천 통의 벌꿀 등은 모두 사람들이 날마다 필요한 물건들로서 서로 바꾸어 써서 도움을 주는 것이니, 누가 싫다 할 것인가?

그러나 이 지방에서는 천한 것이 저 지방에서는 귀하고, 이름만 들었을 뿐 물건을 볼 수 없는 까닭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이는 곧 가져올 힘이 없는 까닭이다. 사방 수천 리밖에 되지 않는 좁은 강토에서 백성의 살림살이가 이토록 가난한 까닭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국내에 수레가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시 물어보자. 수레는 왜 못 다니는가. 한마디로 선비와 벼슬아치들의 죄이다.

사대부들이 평생 읽는다는 글은 『주례』라는 성인의 저술인데, 거기에 나오는 거인(車人)이니 윤인(輪人)이니 여인(輿人)이니 주인(輈人)이니 하는 용어를 말하고 있지만 그저 입으로만 외울 뿐이요, 정작 수레를 만드는 법이 어떠한지 수레를 부리는 기술이 어떠한지 하는 연구는 없다. 이는 소위 건성을 읽는 풍월일 뿐이니, 학문에야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오호라! 한심하고도 기막힐 일이다.

황제(黃帝)가 맨 처음 수레를 만들었다고 하여 이름까지 헌원씨(軒轅氏)라고 불린 이후, 천백 년을 거치면서 성인들이 머리를 짜서 생각하고, 눈이 뚫어져라 보고 갖은 손재주를 다해 왔고, 또 공수(工倕)22 같은 이름난 장인을 몇 차례나 거쳐 왔다. 또 전국시대 위(衛)나라 상앙(商鞅)23과 진(秦)나라 이사(李斯)24를 거쳐 제도가 통일되었고, 실로 조정에서 장려하는 학자들이 몇백 명씩이나 숙달되도록 연구하고 요긴하게 실천했으니, 그들이 어찌 부질없이 그런 일을 했겠는가? 수레란 정말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용의 물건이고, 국가의 경영에서 중요한 도구이다.

지금 내가 매일 보면서 깜짝 놀랄 만한 것과 기뻐할 만한 것은 수레 제도를 미루어 만사를 모두 징험할 수 있겠다. 그리고 수천 년 이래 성인들이 무엇을 고심했던가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밭에 물을 주는 수레를 용미차(龍尾車), 용골차(龍骨車), 항승차(恒升車), 옥형차(玉衡車)라고 하고, 불을 끄는 수레는 굽은 관으로 물을 빨아 당겨 멀리 쏘아대는 홍흡(虹吸)과 학음(鶴飮)의 제도가 있으며, 전쟁에 사용하는 수레로는 포차(砲車), 충차(衝車), 화차(火車) 등이 있는데, 서양인이 지은 『기기도(奇器圖)』25와 강희제가 만든 『경직도』에 모두 실려 있다.

그 설명은 『천공개물(天工開物)』26과 『농정전서(農政全書)』에 실려 있으니, 관심이 있는 사람이 취하여 세밀하게 고찰한다면 가난하여 죽고 싶다고 하는 우리나라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내가 본 것 중에서, 불을 끄는 수레의 제도를 대략 기록하여 귀국한 뒤 우리나라에 알려야겠다. 북진묘에서 달빛을 타고 신광녕으로 돌아올 때, 성 밖의 민가에서 저녁에 실화(失火)로 불이 났는데, 길 가운데 있던 수차 세 대가 막 불을 끄고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나는 수레를 잠시 멈추게 한 뒤에 우선 이름부터 물었다. 수총차(水銃車)라고 하기에, 만든 제도를 살펴보았다.

네 바퀴로 된 수레 위에 나무로 만든 큰 물통을 한 개 설치하고 물통 안에는 대형 구리그릇을 두었다. 구리그릇 안에는 구리대롱 두 개를 두었고, 구리대롱 중간에 새 목처럼 생긴 물총을 세웠다. 물총에는 다리 두 개가 있어 좌우의 양쪽 구리대롱과 서로 통하도록 되어 있다. 구리대롱 아래에는 짧은 다리가 있고 바닥에는 보이지 않는 문이 있어 구리 조각으로 문짝을 만들었는데, 물이 들어오고 나감에 따라 열리고 닫히게 되어 있다.

양쪽 구리대롱 입구에는 구리판으로 된 덮개가 있어 둘레를 꽉 끼게 만들었다. 구리대롱과 구리판의 정중앙에는 쇠기둥을 꿰고 나무를 얹어서 구리판을 누르기도 하고 들기도 하게 되어 있어, 구리판이 들어오고 나가고 올라가고 내려가는 모든 것이 얹은 나무에 따라서 움직였다.

그리고 물을 구리판 안에 붓고 몇 사람이 나무시렁(페달)을 번갈아 밟으면 구리대롱과 구리판이 한 번씩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대체로 물을 빨아들이는 신비한 이치가 구리판에 달려 있다. 구리판이 구리대롱까지 솟아오르면 대롱 밑의 보이지 않는 문이 재빠르게 절로 열리면서 바깥의 물을 흡입하고, 구리판이 내려가 대롱 안으로 들어가면 대롱 밑의 보이지 않는 문이 볼록해지며 저절로 닫힌다.

그리하여 대롱 속의 물이 팽창하여 어디 갈 곳이 없게 되어 물총 다리로부터 새 목처럼 생긴 곳으로 물이 옮겨 가 세차게 위를 치게 된다. 곧바로 위로 뿜으면 십여 길이나 물이 올라가고, 옆으로 뿜으면 삼사십 걸음 정도 뻗어 나간다. 그 제도가 피리를 부는 원리와 같은데, 물을 길어서 나무 물통에 계속 붓는 것이 다를 뿐이다.

옆에 있는 다른 두 수차는 제도가 약간 다르다. 더욱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잠깐 사이에 상세히 살펴볼 수 없었다. 그러나 물을 빨아 당기고 뿜는 원리는 대동소이하다.

곡식을 찧거나 빻는 전마(轉磨)는 커다란 톱니바퀴를 이층으로 포개어 쇠로 된 축으로 꿰어서 방 안에 세우고 기계를 설치하여 돌린다. 톱니바퀴는 마치 자명종의 톱니와 같아 서로 들쭉날쭉하여 이가 딱 맞물린다. 방의 네 귀퉁이에도 이층으로 된 맷돌판을 설치하는데, 맷돌판의 가장자리도 들쭉날쭉하게 되어 큰 톱니바퀴의 이와 서로 맞물리게 된다. 큰 톱니바퀴가 한 번 돌면 맷돌판 여덟 개가 다투어 돌면서 잠깐 사이에 가루가 눈처럼 쌓인다. 이 원리는 시계의 톱니와 닮았다. 연도의 민가에서는 모두 맷돌 하나와 나귀 한 마리를 가지고 있으며, 곡식을 찧는 데는 흔히 늘 연자방아를 사용하는데 당나귀가 끌어 절구실을 대신한다.

가루를 칠 때는 밀폐된 방에 바퀴 셋 달린 흔들이차를 설치하는데 바퀴가 앞에는 둘, 뒤에는 하나가 되게 한다. 흔들이차 위에 기둥 넷을 세우고 아래위층에 몇 말 정도 들어갈 크기의 큰 체를 간들간들하게 두고, 위의 체는 가루를 붙고 밑의 체는 비워서 위 체의 가루를 받아 더욱 곱고 보드랍게 되도록 하였다. 흔들이차 앞에는 막대기 하나를 똑바로 걸치는데, 한쪽 끝은 흔들이차를 붙잡고 다른 한쪽 끝은 방 밖으로 뚫고 나가게 하여, 집 밖에 기둥 하나를 세워 그 나무와 잇는다. 기둥 밑에는 땅을 파고 큰 목판을 설치하여 기둥의 뿌리를 받치게 하고, 목판의 바닥 정중앙에는 말뚝을 만들어 뜨게 하는데마치 대장간의 풀무와 같다. 목판 위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그 발을 까딱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목판의 양쪽 끝이 서로 아래위로 오르내리고, 목판의 기둥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그러면 기둥 끝에 가로지른 나무가 세차게 들이밀고 내밀고 하여서 방 안의 수레가 앞으로 한 번, 뒤로 한 번 움직이게 된다.

방 안의 네 벽에는 십 층으로 시렁을 설치하고 그 위에 그릇을 두어서 날리는 가루를 받는다. 집 밖의 의자에 앉은 사람은 책을 보거나 글씨를 쓰기도 하고, 손님과 마주하여 담소를 주고받아도 안 될 것이 없다. 다만 등 뒤에서 나는 삐거덕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지, 무엇이 그런 소리를 내게 하는지는 모른다. 발놀림은 아주 미약하지만, 거두는 효과는 매우 크다. 윌나라 부녀자들이 몇 말의 가루를 한번 치면 금방 머리카락과 눈썹에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손과 팔뚝이 뻣뻣하고 말랑거리게 되니, 애쓰는 것과 편안함 그리고 얻어지는 효과가 중국의 이것과 비교해보면 과연 어떠한가?

누에고치를 켜는 수레인 소차(繅車)는 더욱 기묘해서 마땅히 본받아야 한다. 큰 톱니바퀴로 만드는 것은 맷돌을 돌리는 법과 동일하다. 소차의 양 끝에도 톱니바퀴를 만들어 들쭉날쭉하게 이가 맞물려 쉴 새 없이 돌아가게 한다.

소차는 몇 아름 되는 큰 얼레이다. 누에고치를 수십 보 밖에서 삶고, 중간에 수십 층의 시렁을 설치하여 점차로 높고 낮은 형세가 되게 만든다. 시렁마다 그 끝에는 쇳조각을 세우고 바늘귀 같은 아주 작은 구멍을 뚫는다. 그 구멍에 실을 끼워 기계가 움직이고 바퀴를 돌게 한다. 바퀴가 돌면 얼레가 돌아가게 되어 톱니가 서로 맞물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로 천천히 실을 뽑아내는데, 실끼리 서로 부딪치거나 맞닿는 일 없이 자연스럽게 돌아가므로 가는 실과 거친 실이 같이 나올 염려는 없다.

솥에서 삶긴 고치가 나와 얼레에 들어갈 즈음에 두루 쇠 구멍을 지나가게 되므로, 실에 붙었던 털이나 까끄라기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 얼레에 들어가기 전에 실의 바탕은 이미 건조되어 깨끗하고 투명하여 빛이 나서, 다시 수고스럽게 잿물에 빨 필요 없이 바로 베틀에 올려 실로 사용해도 된다.

우리나라에서 고치를 켜는 법은 오직 손으로 당겨서 홀치는 것만 알지, 수레를 사용할 줄은 모른다. 명주실이 사람의 손을 타므로 이미 실로서 천연적이고 자연스런 품새가 없어지고, 실을 빼는 속도가 일정치 않아 실끼리 부딪치거나 맞닿을 때면 실과 고치가 안정되지 못 하고 제멋대로 날뛰고 함께 나아가 고치판에 쌓이기도 한다. 실끼리 서로 엉겨 실의 갈피가 없어지고, 엉겨 붙고 말라 덩어리가 져서 실의 광택을 잃으며, 부스러기가 틀어막고 알맹이가 뚤뚤 감겨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여 실을 잣는 사람이 거친 실을 골라내고 가는 것만 챙기다 보니 입과 손가락이 함께 고생을 한다. 소차를 사용하는 것에 비교한다면 그 효과나 속도가 어떠하겠는가?

청에서 본 다양한 수레의 모습을 선생이 논하는 부분이다. 조선 후기의 청은 서양과 다양한 교류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톱니바퀴 등과 같은 서양의 어떤 기술들을 다수 차용한 모습이 선생의 기술에서 관찰된다. 비록 선생은 매우 상세한 연구 혹은 관찰을 할 시간을 가지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수차의 원리를 파악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수레와 관련된 도량형의 통일과 이로 인한 물자의 이동 증진, 그리고 이어지는 부국강병에 대한 선생의 논의도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조선에는 사공농상에서 사를 최상으로 여기고 공, 농, 상의 영역은 상대적으로 저평가하는 추세가 짙었다. 정조 때, 즉 조선 후기에 와서는 상업적 영역에 대한 평가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역사적 시점 부근에 위치한 인물이 바로 연암 선생이었다는 점도 기억해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19. 백이, 숙채가 사람 죽이네

어제 백이 · 숙제 사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 고사리와 닭고기를 쪄서 내왔다. 맛이 매우 좋은 데다가 연도에 오며 입맛을 잃은 지 오래된 터라, 홀연히 맛있는 음식을 만나 흔쾌히 입맛이 당겨 실컷 포식했다. 그러나 그것이 예전부터 내려오던 관례인 줄은 몰랐다.

길에서 갑작스런 비바람을 만나 몸 밖은 춥고 속은 막혀서 먹은 것이 소화가 되질 않고 그만 체하여 가슴에 얹혔다. 트림이라도 한번 하면 고사리 냄새가 목을 찌른다. 생강차를 마셔 보았지만 속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내가

“지금은 가을철인데, 시절에 맞지 않게 어디에서 고사리를 구했답니까?”

하고 물으니 좌우에서,

“백이 · 숙제 사당에서 점심을 먹는 것이 내려오는 관례이며, 사시사철 어느 때나 반드시 고사리 음식을 낸답니다. 주방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마른 고사리를 미리 가지고 와서 국을 끓여 일행에게 제공하는 것이 하나의 전통입니다. 십수년 전에 건량청(乾糧廳)27에서 고사리를 잊어버리고 가지고 오질 앉아, 여기에 도착해서 고사리 음식을 내놓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건량관이 서장관에게 곤장을 얻어맞고 냇가에 가서 통곡을 하며 ‘백이 숙제야, 백이 숙제야. 나하고 무슨 원수가 졌느냐? 나하고 무슨 원수가 졌느냐?’라고 했답니다. 소인의 생각으로는 고사리 요리는 고기 요리보다 못하며, 듣자하니 백이와 숙제도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 죽었다고 하니, 고사리란 정말 사람을 죽이는 독한 음식입니다.”

라고 하여 모두 크게 웃었다.

태휘(太輝)란 자는 노 참봉(노이점)의 말을 부리는 사람이다. 연행이 초행인 데다가 사람됨이 경망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일행이 조장(棗庄)을 지나갈 때 대추나무가 바람에 꺾여 담 위에 거꾸로 드리워져 있었는데, 태휘란 자가 풋대추를 따서 먹다가 복통을 만나 급한 설사가 그치지 않았다. 바야흐로 뱃속은 비고 목이 타서 애를 먹고 있다가 고사리 독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듣고는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며,

“백이, 숙채(熟菜, 삶은 고사리나물)가 사람 잡네. 백이, 숙채가 사람 죽이네.”

라고 소리를 질렀다. 숙제(叔齊)와 숙채(熟菜)가 서로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었으니, 한집에 있던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웃었다.

서대문 근처에 살 때였다. 숭정으로 연호를 쓰기 시작한 후 137년이 되는 갑신년(1764) 3월 19일은 바로 명나라 의종 열황제가 종묘사직을 위해 자결한 날이다. 시골의 글방선생이 같은 동리에 사는 사람과 학동 수십명을 데리고 한양의 서쪽 송씨가 세를 들어 사는 집을 찾아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선생의 유상(遺像)에 절을 하고, 효종 임금이 우암에게 청나라를 치러 갈 때에 입으라고 하사한 담비가죽 옷을 어루만지게 하였다. 비분강개함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줄줄 흘리는 자까지 있었는데, 돌아오다가 성 밑에 이르러서는 분하여 팔짓으로 감자를 먹이고 벼르며 서쪽을 보고 ‘되놈’ 하고 외쳤다.

글방선생은 여수(旅酬)28를 위해 고사리 요리를 내놓았다. 당시 나라에서 술을 금했기 때문에 술 대신 꿀물을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 동이에 그득 담았다. 도자기 동이네는 명나라 성화(成化, 1465 ~ 1487) 연간에 만들었다는 뜻의 ‘대명성화년제(大明成化年製)’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음복술을 마시는 자들은 반드시 도자기 동이 가운데를 굽어보아야 했는데, 춘추의리를 잊지 않기 위함이다. 드디어 서로 시를 한 수씩 지었다.

한 동자가 시를 짓기를,

무왕이 은나라를 치다가 실패하여 죽었다면
천 년 역사에 주(紂)임금의 역적이 되었으리라.
강태공 여망(呂望)은 백이를 부축하여 살려 보냈는데
어찌하여 역적을 비호했다 하지 않는가?
오늘날 춘추의리로 따져 보자면
되놈이라고 욕하는 사람이야말로 되놈에겐 역적이라네.

라고 하니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글방선생이 놀라 멍하니 한참 있다가,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춘추』를 읽히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춘추의리를 분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괴상망측한 이야기를 하는 거야. 경치에 관한 시나 짓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또 한 동자가 시를 짓기를,

고사리를 캐어 본들 정말 배를 불릴 수는 없으니
백이는 끝내 굶주려 죽을 수밖에.
꿀물의 달기는 술보다 더 하니
이 꿀물을 마시고 죽는다면 원통하리라.

라고 하자 선생은 눈살을 찌뿌리며,

“또 괴상망측한 소리를 하는구나.”

라고 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그런 일이 있은지 벌써 17년이나 지났고, 당시 노인들도 다 돌아가셨건만 또다시 백이 · 숙제의 고사리 때문에 이런 분답을 떨게 되고, 이국의 등불 아래에서 옛날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결국 잠을 설치게 되었다.

분명히 ‘씨가 있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이든지 말든지 간에, 당시 조선 조정에서 팽배한 분위기였던 ‘명에 대한 사대주의’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충절과 고집의 상징 ‘백이와 숙제’에 대하여, 이들이 ‘사람을 죽인다’라는 표현과 이들에 대한 ‘비판’ 혹은 소위 말하는 ‘돌려까기’가 반복적으로 이 부분들에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은, 이것이 모두 단지 하나의 일화 혹은 이야기라는 연암의 말과는 달리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의미는 아마도 명백해 보인다. ‘사대주의’를 비판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사대주의적 조선 조정의 사고가 실로 청의 좋은 문물을 참고하여 조선의 것을 개선하는 작업을 방해하므로, 부국강병으로 이어지지도 못하고 있는데 명을 위하여 청에 복수해야 한다는 논의나 하고 있으니, 연암 선생에게 조선 조정의 행태는 어떤 모습으로 보였을까!

#20. 호질(虎叱)

범은 슬기롭고 성스러우며, 문무를 겸하고, 자애롭고 효성스러우며, 지혜롭고 어질며, 웅장하고 용맹하여 천하무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원숭이의 일종인 비위(狒胃)란 동물은 범을 잡아먹고, 죽우(竹牛)라는 야생 소도 범을 잡아먹으며, 박(駁)이라는 말도 범을 잡아먹고, 오색사자(五色獅子)도 큰 나무의 구멍에서 범을 잡아먹으며, 백마처럼 생긴 자백(玆白)이란 짐승도 범을 잡아먹고, 개처럼 생긴 날쥐인 표견(䶂犬)도 범을 잡아먹으며, 족제비 몸에 승냥이 대가리를 한 황요(黃腰)란 놈은 범이나 표범의 심장을 꺼내어 먹고, 뼈가 없는 바다 동물인 활(猾)이란 놈도 범이나 표범에게 삼켜졌다가 뱃속에서 범과 표범의 간을 먹으며, 범처럼 생겼지만 크기가 더 크고 꼬리가 긴 추이(酋耳)란 놈은 범을 만나면 갈가리 찢어서 씹어 먹고, 범이 맹용(猛㺎)이란 놈을 만나면 눈을 감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한다.29 그런데 사람은 맹용을 겁내지 않고 범은 두려워하니, 범의 위엄은 그 얼마나 대단한가?

범이 개를 잡아먹으면 취하고, 사람을 잡아먹으면 귀신이 붙는다. 범이 첫 번째 사람을 잡아먹으면 그 사람의 혼백이 범의 심부름을 하는 창귀(倀鬼)인 굴각(屈閣)이 되어 범의 겨드랑이에 붙어살면서 범을 부엌으로 인도해 솥의 귀를 핥게 한다. 그러면 집주인은 갑자기 배가 고파져서 한밤중이라도 밥을 하라고 아내를 부엌으로 보내게 된다.

범이 두 번째 사람을 잡아먹으면 죽은 이의 혼백이 이올(彝兀)이라는 창귀가 되어 범의 볼에 붙어서 높은 곳에 올라가 사냥꾼이 있는지 살피고, 만약 골짜기에 함정이나 덫이 있으면 먼저 가서 함정을 파헤치고 그 틀을 풀어 버린다.

범이 세 번째 사람을 잡아먹으면 죽은 이의 혼백이 육혼이라는 창귀가 되어 범의 턱에 붙어서는 죽은 사람 친구들의 이름을 불러내어 잡아먹게 한다.

범이 이 세 창귀를 엄숙하게 불러 모으고는,

“날이 저물어 가는데 어디에서 먹을 것을 구할꼬?”

하니 굴각이란 창귀가 나서서,

“제가 이미 점을 쳐 보니 뿔 달린 짐승도 아니고 깃털 달린 날짐승도 아닌 것이, 머리가 검은 동물로 눈 위에 남긴 발자국이 두 발 달린 짐승의 왼발 오른발이 교대로 성글게 나 있으며, 꼬리가 뒤통수에 붙은 것을 보아서는 제 궁둥이도 못 가리는 짐승입니다.”

라고 하자 이올이 나선다.

“동문 쪽에 먹을 게 있습니다. 그 이름을 의원이라고 하는데 갖가지 한약재인 풀을 머금고 있어 피부와 살이 향기롭습니다. 서문 쪽에도 먹을거리가 있습니다. 그 이름을 무당이라고 하는데 온갖 귀신에게 아양을 떨고 날마다 목욕을 해서 고기가 깨끗합니다. 이 두 고기 중에서 하나를 골라 잡수시지요.”

범이 수염을 치켜세우며 낯빛이 변해,

“의원의 의(醫)라는 글자는 의심한다는 의(疑) 자이다. 자기 스스로도 의심이 나는 풀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시험을 해 보다가 해마다 죽이는 사람이 항상 수만 명이다. 무당의 무(巫) 자는 속인다는 무(誣) 자이다. 귀신을 속이고 인민들을 미혹시켜 해마다 죽이는 사람이 항상 수만 명이다.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뼈에 사무치고 변해서 무서운 독으로 변했으니, 그 독을 먹을 수는 없도다.”

라고 했다. 그러자 육혼이 나선다.

“살덩어리가 숲에 있으니 그야말로 육림(肉林)입니다. 인자한 간과 의로운 쓸개를 가지고 있으며, 충성을 끌어안고 고결함을 품었습니다. 머리에는 음악을 이고 발은 예를 실천하며, 입으로는 제자백가의 말을 암송하고, 마음으로는 만물의 이치를 통달했답니다. 그 이름은 큰 덕을 가진 선비라는 뜻의 ‘석덕지유(碩德之儒)’라고 하는데, 등살이 푸짐하고 몸통이 오동통하며 다섯 가지 맛을 고루 갖추고 있습지요.”

범은 그제야 만족한 듯 눈썹을 치뜨고 침을 흘리며 하늘을 향해 웃는다. 범이

“짐은 그게 어떤 것인지 더 듣고 하노라.”

하니 세 창귀가 번갈아 범에게 추천한다.

“음(陰) 하나와 양(陽) 하나를 일러서 도(道)라고 하는데, 선비는 도를 궤뚫고 있습니다. 오행(五行, 쇠, 나무, 물, 불, 흙)이 서로 태어나게 하고, 육기(六氣, 추위, 더위, 건조함, 습기, 바람, 비)가 서로 퍼지는데, 선비는 이것을 이끌고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 치고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답니다.”

라고 한다. 범은 발끈하며 얼굴색이 변하여 불쾌해하면서,

“음양이란 것은 기(氣) 하나가 왔다 갔다 변화하는 것이거늘, 이것을 둘로 나누어 놓았으니, 선비란 것의 고깃덩이는 잡스러울 것이다. 오행이란 본래 제각기 정해진 자리가 있어 서로 낳고 낳게 하는 상생관계가 아니거늘, 지금 억지로 어미와 자식의 관계로 만들고 있다. 심지어는 짠맛 신맛에까지 오행을 분배하고 있으니, 선비라는 고기는 그 맛이 순수하진 못할 게야. 육기란 서로 펴고 이끌어 줄 필요 없이 저절로 잘 돌아가는 것이거늘, 그런데도 지금 함부로 육기끼리 도와주고 보충한다 일컬으며 자신의 공로를 치켜세우게 하였으니, 그 선비 고기라는 게 딱딱하여 얹히게 만들고, 순조롭게 소화되지 않는 음식이지 않겠느냐?”

라고 하였다.

정(鄭)나라의 어떤 고을에 벼슬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선비가 있었으니, 이름을 북곽(北郭) 선생이라고 부른다. 나이 마흔에 자신의 손으로 교정한 책이 만 권이고, 아홉 가지 유교 경전을 부연 설명하여 다시 책으로 지은 것이 일만 오천 권이나 된다. 천자는 그 의리를 가상하게 여기고, 제후는 그 명성을 사모하였다.

같은 읍의 동쪽에는 일찍 과부가 된 미모의 여자가 있는데, 동리자(東里子)라고 부른다. 천자가 그 절개를 가상하게 여기고, 제후가 그의 현숙함을 사모하여 그가 사는 읍 둘레 몇 리를 동리자 과부가 사는 마을이라는 뜻의 ‘동리과부지려(東里寡婦之閭)’라고 봉하였다. 동리자는 수절을 잘한다지만 사실 자식 다섯이 각기 성씨가 달랐다.

다섯 아들이 서로 하는 말이,

“냇물 북쪽에는 닭 우는 소리가 나고, 냇물 남쪽에는 별이 반짝이는데 우리 집 방에서는 사람 소리가 나니, 어쩌면 북곽 선생의 목소리를 저토록 닮았더냐?”

하고는 형제들이 번갈아 방문 틈으로 방 안을 훔쳐보았다. 어머니 동리자가 북곽 선생에게,

“오랫동안 선생님의 덕을 사모해 왔더니, 오늘 밤에는 선생님의 책 읽는 소리를 듣고 싶사옵니다.”

하고 청한다. 북곽 선생은 옷깃을 여미고 똑바로 앉아서 시를 짓기를,

“원앙새는 병풍에 있고
반딧불은 반짝반짝 빛나네.
각기 다른 가마솥, 세밭솥을
누가 저리 본떠 만들었나.

이 시는 다른 사물을 빌려 자신의 뜻을 나타내는 흥(興)이라는 수법의 시이지요.”

라고 하였다.

다섯 아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예법에 과부가 사는 대문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거늘, 북곽 선생은 어진 선비이니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야.”

“내 들으니 이 고을 성문이 무너져, 여우가 거기에 산다더라.”

“내가 알기로 여우가 천 년을 묵으면 능히 요술을 부려 사람 모양으로 둔갑한다던데, 이게 북곽 선생으로 둔갑한 거야.”

하더니 서로 꾀를 내서,

“내가 알기로 여우의 갓을 얻으면 일확천금의 부자가 될 수 있고, 여우의 신발을 얻으면 대낮에도 능히 자신의 그림자를 감출 수 있으며, 여우의 꼬리를 얻으면 잘 홀려서 남을 기쁘게 만들 수 있다 하니, 어찌 저놈의 여우를 잡아 죽여서 나누어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다섯 아들이 함께 포위하고 여우를 잡기 위해 들이쳤다.

북곽 선생이 소스라치게 놀라 달아나는데, 혹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볼까 겁을 먹고는 한 다리를 목에 걸어 귀신 춤을 추고 귀신 웃음소리를 내었다. 문을 박차고 달아나다가 그만 들판의 움 속에 빠졌는데, 그 안에는 똥이 그득 차 있었다. 겨우 버둥거리며 붙잡고 나와 머리를 내밀고 살펴보니 이번엔 범이 앞길을 막고 떡 버티고 서 있다. 범이 얼굴을 찌푸리며 구역질을 하고, 코를 가리고 머리를 돌리면서 한숨을 쉬며,

“선비, 어이구. 지독한 냄새로다.”

하였다. 북곽 선생은 머리를 조아리고 엉금엉금 기어서 앞으로 나가 세 번 절하고 꿇어앉아 머리를 들며,

“범님의 덕이야말로 참으로 지극합니다. 군자들은 범의 빠른 변화를 본받고30, 제왕은 범의 걸음걸이를 배우며31, 사람의 자제들은 범의 효성을 본받고32, 장수들은 범의 위엄을 취합니다.33 범의 이름은 신령한 용과 함께 나란하여,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릅니다.34 인간 세상의 천한 사람이 감히 범님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하니 범이 호통을 치며,

“가까이 오지도 마라. 내 일찌기 들으매 선비 유(儒) 자는 아첨 유(諛) 자로 통한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네가 평소에는 천하의 나쁜 이름이란 이름은 모두 끌어모아다가 함부로 우리 범에게 덮어씌우더니,35 이제 사정이 급해지니까 면전에서 낯 간지러운 아첨을 하는구나. 그래 누가 네 말을 곧이듣겠느냐?

대처 천하에 이치는 하나뿐이다! 범의 성품이 악하다면 사람의 성품 역시 악할 것이요, 사람의 성품이 선하다면 범의 성품 역시 선할 것이다. 네가 말하는 천만 마디 말이 오륜을 벗어나지 않고, 남을 훈계하고 권면할 때는 으레 예의염치(禮義廉恥)를 들추어대지만, 도성의 거리에는 형벌을 받아 코 떨어진 놈, 발뒤꿈치 없는 놈, 이마에 문신을 하고 돌아다니는 놈들이 있으니, 이들은 모두 오륜을 지키지 못한 망나니가 아니더냐.

형벌을 주는 도구인 포승줄과 먹실, 도끼와 톱을 날마다 쓰기에 바빠 겨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죄악을 막지 못하고 있도다. 그러나 우리 범의 세계에는 이런 형벌이란 것이 본디부터 없다. 이로써 본다면 범의 성품이 또한 사람의 성품보다 어질지 않느냐?

우리 범은 풀이나 과일 따위를 입에 대지 않고, 벌레나 생선 같은 것을 먹지 않으며, 누룩 국물(술) 같은 어긋나고 어지러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고, 새끼 가진 짐승이나 알 품은 짐승이나 하찮은 것들은 차마 건드리지 않는다.

산에 들면 노루나 사슴 따위를 사냥하고 들에 나가면 마소를 잡아먹되, 아직까지 구복(口腹)이나 끼닛거리 때문에 남에게 비굴해지거나 음식 따위로 남과 다투어 본 적이 없다. 이러하니 우리 범의 도덕이 어찌 분명하고 바르고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 범이 산에 있는 노루나 사슴을 잡아먹을 때는 너희 인간들은 우리를 그리 미워하지 않다가도, 우리가 말이나 소를 잡아먹으면 너희들은 범을 원수라고 말한다. 이는 노루나 사슴은 사람에게 은공을 베풀지 않지만, 마소는 너희들이 부려먹어 은덕을 본다고 해서 그런 것 아니냐?

그렇지만 너희 인간들은 마소 대접을 어떻게 하느냐? 사람을 태우고 부려먹는 고생과, 심부름하고 주인을 따르던 정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마소를 잡아 푸줏간이 비좁도록 채워 놓고 뿔과 갈기도 남기지 않을뿐더러, 이것도 부족하여 내 양식인 노루와 사슴에까지 손을 뻗쳐, 우리가 산에서도 배를 못 불리고 들에서도 끼니조차 거르게 만들었다. 하늘이 법을 공평하게 처리한다면 너희가 죽어서 나의 밥이 되어야 하겠느냐, 너희들을 놓아주어야 하겠느냐?

대저 제 것 아닌 물건에 손을 대는 놈을 일러 도적놈이라 하고, 살아 있는 것을 잔인하게 대하고 사물에 해를 끼치는 놈을 화적놈이라고 하느니라. 네놈들은 밤낮을 쏘다니며 분주하게 팔뚝을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뜨고 남의 것을 훔치고 낚아채려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심한 놈은 돈을 형님이라고 부르고,36 장수가 되겠다고 제 아내조차 죽이는 판인데37 삼강오륜을 더 이야기할 나위가 있겠느냐?

어디 그뿐인가. 메뚜기의 식량을 가로채고, 누에의 옷을 빼앗고, 벌 떼를 쫓아내고 꿀을 도적질하고, 더 심한 놈은 개미 새끼로 젓갈을 담아 제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까지 하니,38 잔인하고 혹독하며 경박한 행동을 하는 것이 너희 인간보다 심한 것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너희 인간들이 이치를 말하고 성(性)을 논할 때 걸핏하면 하늘을 들먹거리지만, 하늘이 명한 입장에서 본다면 범이나 사람이나 다같이 만물 중 하나이다. 천지가 만물을 낳는 인(仁)의 관점에서 본다면, 범이나 메뚜기나 누에나 벌이나 개미나 사람이나 모두 함께 살게 마련이지, 서로 해치고 어그러질 관계가 아니다. 또 선과 악으로 구별한다면 공공연히 벌과 개미집을 터는 놈이야말로 천지의 큰 도적놈이 아니겠느냐. 제 마음대로 메뚜기와 누에의 밑천을 훔치는 놈이야말로 인의(仁義)를 해치는 큰 화적놈이 아니고 무엇이냐.

우리 범이 지금까지 표범을 잡아먹지 않은 까닭은 제 동류에게는 차마 손을 대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노루나 사슴을 잡아먹는 숫자는 사람이 잡아먹는 수효만큼 많지 않고, 우리가 마소를 잡아먹는 숫자도 사람만큼은 많지 않으며, 우리가 사람을 잡아먹는 숫자도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 숫자만큼은 안 된다.

그런데 지난 해 섬서성 관중(關中) 지방에 큰 가뭄이 들었을 적에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은 수효가 수만 명이요, 몇 해 전에 산동(山東)에서 큰 홍수가 났을 때도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은 수효가 수만 명이었다.

비록 그렇기는 하여도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은 숫자가 많기로 어디 춘추시대만큼 많은 적이 또 언제 있었던가. 춘추시대에는 덕을 세우겠다고 싸운 전쟁이 열일곱 번이요, 원수 값는다고 일으킨 전쟁이 서른 번이니, 피가 천 리 사이에 흐르고 널브러진 시신이 백만이나 되었다.

그러나 범의 세계에서는 홍수나 가뭄을 모르기 때문에 하늘을 원망할 리 없고, 덕이고 원수고 다 잊어버리고 사는지라 남과 어긋나는 일이 없다. 하늘의 운명을 알아서 순종하며 살기 때문에 무당이나 의원의 간교함에 넘어갈 턱이 없고, 타고난 성품에 따라 저 생긴 대로 살다 보니 세속의 이해관계에 병들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 범이 슬기롭고 성스럽게 되는 까닭이다.

우리 몸의 얼룩얼룩한 반점만 가지고 보더라도 천하에 그 문채(文彩)를 자랑할 만하며, 한 치 한 자의 병장기를 빌리지 않고 다만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만 가지고도 무용(武勇)을 천하에 빛낼 수 있다. 범의 형상을 그린 제기(祭器)를 가지고는 효성을 세상에 널리 펴고 있다.39 하루에 한 차례의 사냥으로 까마귀, 솔개미, 땅강아지, 개미 떼까지 남은 고기로 나누어 먹이니, 우리의 어진 행실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남에게 헐뜯음을 당한 사람을 잡아먹지 않고, 병자나 불구자를 잡아먹지 않으며, 상주(喪主)를 잡아먹지 않으니 그 이로운 행실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너희 인간들이 먹이를 잡는 도구야말로 진정 어질지 못한 것이렷다. 덫과 함정을 놓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새그물, 노루그물, 후릿그물, 반두그물, 촘촘한 그물, 삼태그물까지 만들었으니 최초로 그물을 뜨기 시작한 놈이야말로 세상에 처음 화를 끼친 놈일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뾰족창, 넓적창, 긴창, 삼지창, 도끼, 환도, 비수, 쇠꼬챙이가 또 있지 않나. 한 방만 떠뜨리면 소리는 산악을 무너뜨리고 불길을 번쩍번쩍 토하면서 벼락보다도 더 무서운 화포까지 있다.

그래도 제 마음대로 포학을 부리기에는 부족하다 하여, 이번에는 부드러운 털을 입으로 빨고 아교풀로 붙여 붓이라는 뾰족한 물건을 만드니, 그 모양은 대추씨 같고 길이는 한 치도 안 된다. 이것을 오징어 먹물 같은 시커먼 물에 듬뿍 찍어서는 가로 찌르고 모로 찌르면 굽은 놈은 갈고리 창 같고, 날이 난 놈은 식도 같고, 뾰족한 놈은 검(劍) 같고, 갈라진 놈은 가지창 같고, 곧은 놈은 화살 같고, 둥긋레한 놈은 활같이 생겨먹었으니, 이놈의 병장기를 한번 휘두르면 온갖 귀신들이 한밤에 통곡하게 된다. 참혹하게 서로를 잡아먹기를 누가 너희 인간들보다 더 심하게 할 것이냐!”

하였다.

북곽 선생은 자리를 옮겨 엎드리고 엉거주춤 절을 두 번 하고는 머리를 거듭 조아리며,

“옛글에 이르기를, ‘비록 악한 사람이라도 목욕재계하면 하느님도 섬길 수 있다’40라고 했으니, 인간 세상의 천한 사람에게 범님의 가르침을 감히 받들겠습니다.”

하고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들어 보나, 오래도록 범의 분부가 없었다. 두렵기도 황송하기도 하여 손을 맞잡고 머리를 조아리며 우러러 살펴보니, 날이 밝았고 범은 이미 가 버렸다.

아침에 김을 매러 가는 농부가 있어서,

“북곽 선생께서 어찌하여 이른 아침부터 들판에 절을 하고 계십니까?”

하고 물으니 북곽 선생은,

“내가 『시경』에 있는 말을 들었으니,
하늘이 높다 이르지만
감히 등을 굽히지 않을 수 없고
땅이 두텁다 이르디만
살금살금 걷지 않을 수 없네.

하였다네.”

라며 대꾸했다.

그 유명한 호질이다. 양반을 돌려서 비판한 부분이 눈에 종종 보이지만, 나는 이야기 속의 범이 인간을 두루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더 눈여겨 보고 싶다. 연암 선생은 조선 후기라는 시기에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자연에 대하여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간이 과거 수백 년 간 행해온 일들, 지나친 산업화의 가속과 화석 연료의 사용, 폐기물의 부적절한 처리와 방출이 자연에 대하여 돌이키기 힘든 수많은 파괴 혹은 오염이라는 결과로 귀결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연과 인간의 공존과 같이 기존의 인간 우선, 혹은 인간 우월 주위에서 탈피하여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는 시각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연암 선생은 호질에서 이미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인간은 그 스스로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는 자연물에게 일련의 감사를 표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들을 학대 혹은 더욱 파괴하는 행보를 보인다는 것을 지적했다. 실로 놀라운 통찰력이 아닐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의 지적은 이런 환경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더욱 날카롭게 들리는데, 유념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닫는 말

조선 후기, 연암 박지원 선생이 청을 견문하고 이 『열하일기』를 저술한 당시 조정에서는 명에 대한 사대주의 의식으로 진정으로 중요한 부국강병, 그리고 그 부국강병에 필요한 각종 기술들과 사상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안타깝게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 연암 선생의 이 글 곧곧에서 묻어나오는 안타까움과 절박한 설득, 외침에서 계속 보인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지만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연암 박지원 선생이 청에 대하여 가진 태도를 네 글자로 요약한다면 아마도 언급한 바 있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비단 이 태도는 연암 선생의 태도로만 한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된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하지만 먼저 당장에 특정하자면 나 스스로가 마땅히 가져야 하는 태도일 것이다. 바로 이러기에 연암 선생의 논설과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연암 선생이 고민한 내용을 오늘날의 우리도 마땅히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주석 및 참고문헌

  1. (원문 주) 박영철본 『연암집』에는 이 서문이 없고, 『열하일기』 필사본의 한 종류인 연암산방본(燕巖山房本)에만 유일하게 실려 있다. 최근 발견된 유득공의 문집 『영재서종』에 이 서문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글의 작자를 유득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연암의 글은 아니지만, 『열하일기』의 전체 내용을 잘 파악하고 쓴 서문이라고 생각하여 여기에 수록하였다.
  2. (원문 주) 산가지는 수효를 셈하거나 점을 칠 때 사용하는 막대기.
  3. (커피사유 주) 사용된 한자로 바서는 돌로 사냥하는 것이므로, ‘돌팔매’ 정도인 듯.
  4. (원문 주) 좌구명, 공양고, 곡량적은 춘추시대의 학자로 소위 춘추삼전을 지은 인물이고, 추덕부는 명나라 학자로 『춘추광해(春秋匡解)』를 지은 사람이다. 협씨는 미상이다.
  5. (원문 주) 『시경』 대아(大雅)의 「황의(皇矣)」 편에 나오는 말이다.
  6. (원문 주) 자산은 춘추시대 정나라 대부 공손교(公孫僑)의 자(字)이다. 그는 사십여 년간 국정에 참여하여, 정도와 중용의 도로 나라를 다스렸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도 나라를 지킨 자산을 가리켜 공자는 혜인(惠人)이라고 평가했다.
  7. (커피사유 주) 한자를 토대로 보건대 도로 변에 물의 흐름을 위해 파 놓은 도랑이나 홈을 가리키는 것 같다.
  8. (원문 주) 홍대용(1731 ~ 1783)의 본관은 남양이고,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 · 홍지(弘之)이다. 1765년 서장관으로 임명된 숙부 홍억(洪檍)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북경에 다녀온 뒤, 『연기(燕記)』라는 연행기를 남겼다. 어머니를 위해 한글 연행록인 『을병연행록』을 지었다. 이외에 문집 『담헌서(湛軒書)』가 있다.
  9. (원문 주) 비희와 패하는 용의 아홉 마리 새끼의 하나이다. 자세한 설명은 뒤의 ‘동란섭필’ 편에 상세히 나온다.
  10. (원문 주) 박제가(1750 ~ 1805)는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로 본관은 밀양이다. 자는 차수(次修) · 재선(在先) · 수기(修基), 호는 초정(楚亭) · 정유표 · 위항도인(葦杭道人)이다. 1778년에는 사은사 체재공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 · 반정균 등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하고, 1790년 5월 건륭제의 팔순절에 정사 황인점을 따라 두번째 연행길을 떠났다. 저서로 『초정집』과 『북학의(北學議)』가 있다.
  11. (원문 주) 이항복(1566 ~ 1618)의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이다. 뒤에 오성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오성 이항보으로 불렸다. 저서에 『백사집』과 『북천일록(北遷日錄)』이 있다.
  12. (원문 주) 가의(BC 200 ~ BC 168)는 전한(前漢) 때의 정치가이며 문인이다. 당시 정세를 분석하여 통곡할 일과 눈물지을 일, 한숨 쉴 일 등을 조목조목 따져서 올린 이름난 상소문이 있다. 가생(賈生)이라 불렀다.
  13. (원문 주) 선실은 한나라 장안의 궁전인 미앙궁(未央宮)의 정실(正室)로, 문제가 가의에게 귀신에 관해 질문을 한 곳이다.
  14. (원문 주) 간처더의 오자이다.
  15. (원문 주) 하늘의 스물여덟 별자리의 하나인 진(軫)이라는 별이 수레를 담당한다는 말이 있다.
  16. (원문 주) 이때의 수레는 전쟁에 쓰는 전차를 의미하는데, 천자는 만 대의 수레를 가지고 제후는 천 대의 수레를 가지고 있어야 천자와 제후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17. (원문 주) 이광려(1720 ~ 1783)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소론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자는 성재(聖載), 호는 월암(月巖) 도는 칠탄(七灘)이다. 문집에 『이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
  18. (원문 주) 『맹자』 「진심장(盡心章)」 하편에 나오는 말이다.
  19. (원문 주) 『중용』 31장에 나오는 말이다. “성인의 명성은 미개한 지역까지 뻗어 나가서 배와 수레가 가는 곳, 인력이 통하는 곳, 하늘이 덮고 있는 곳, 땅이 살고 있는 곳, 해와 달이 비치는 곳,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에 이르기까지 무릇 혈기를 지닌 사람은 모두 성인을 높이고 받는다”는 말이 있다.
  20. (원문 주) 통원보 팔도하(八渡河) 위에 있다.
  21. (원문 주) 구련성과 금석산 중간에 있는 고개 이름. 마전판(馬轉坂)이라고도 한다.
  22. (원문 주) 공수는 황제(黃帝) 때의 유명한 장인바치.
  23. (원문 주) 상앙(? ~ BC 338)은 위나라 출신으로 진(秦)나라에 가서 법치주의 정치를 폈던 인물이다. 『상군서(商君書)』라는 저서를 남겼다.
  24. (원문 주) 이사(? ~ BC 208)는 진 시황 때 재상을 지낸 정치가로, 법가주의를 신봉하여 진나라의 정치를 일신하였다.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분서갱유를 단행했다. 뒷날 진 시황의 아들 호해와 환관 조고에 의해 처형되었다.
  25. (원문 주) Joannes Terrenz(테렌츠, 1576 ~ 1630, 한자명 등옥함)가 지은 『원서기기도설록최(遠西奇器圖說錄最)』를 말한다.
  26. (원문 주) 명나라 말기의 학자 송응성(宋應星, 1587 ~ 1648)이 지은 산업 기술에 관한 저술이다.
  27. (원문 주) 건량청은 마른 식품 자재를 관장하는 기관.
  28. (원문 주) 여수는 의식이 끝난 뒤에 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술잔을 돌려가며 마시는 예.
  29. (원문 주) 여기 범을 잡아 먹는 여러 가지 동물과 그 이야기는 왕사정의 『향조필기(香祖筆記)』에 그대로 나온다.
  30. (원문 주) 『주역』 「혁괘(革卦)」에 표변(豹變)이란 말이 나온다.
  31. (원문 주) 송나라 태조가 범의 걸음걸이를 모방했다.
  32. (원문 주) 『서경』 「익직(益稷)」의 주석에 이(彜)라는 제기에 호랑이를 새기는 까닭은 호랑이의 효성을 본받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33. (원문 주) 장수의 관직 이름에 호(虎) 자를 많이 사용했다.
  34. (원문 주)『주역』 「건괘(乾卦)」의 문언(文言)에 이런 말이 있다.
  35. 범을 가리키는 용어로 뜻이 좋지 않은 것에는 여충(廬蟲), 대충(大蟲), 대묘(大猫), 산묘(山猫), 노충(老蟲), 노묘(老猫), 황맹(黃猛), 맹수(猛獸), 모충조(毛蟲祖) 등이 있다.
  36. (원문 주) 돈의 모양이 겉은 둥글고 속은 모가 졌기 때문에 공방(孔方)이라 하는데, 돈을 공방형(孔方兄) 혹은 가형(家兄)이라 부른다. 「전신론(錢神論)」.
  37. (원문 주) 전국시대의 명장 오기(吳起)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아내를 베어 죽였다.
  38. (원문 주) 『얘기』 「내칙(內則)」 편에 나온다.
  39. (원문 주) 『주례(周禮)』에 범의 형상을 그린 호이(虎彜)라는 제기가 있다.
  40. (원문 주) 『맹자』 「이루장(離婁章」 하편에 나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