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0. 시작하며

여명 #0. 시작하며

2024-02-04 0 By 커피사유

여명(餘銘)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남긴 것들을 새겨두기 위한 공간입니다.


여명(餘銘):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Note.

여명(餘銘)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스스로의 여정을 되짚으면서 재발견하거나 남기게 되는 것들을 모아두고 또한 마음에 새겨두기 위해 마련된 공간입니다. 따라서 관련된 기존 시리즈 중 오늘의 질문, 회상 시리즈는 이 시리즈가 새롭게 연재됨에 따라, 연재가 중단됨을 알립니다.

새벽, 남은 것들을 새기는 공간


솔직하게 고백하자. 오랫동안 헤맸다. 대학(大學)의 관문 아래에서 보낸 세 번째 연도. 두 번째 학기에서 큰 타격을 입었던 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요컨대 핵심은 내가 거둔 결실에 스스로가 만족하지 못한 것에 있었다. 못할 것이 뭐가 있겠냐며 호기롭게, 컴퓨터공학과 대기과학, 동시에 물리학이라는 사실상의 3전공을 수강하다가 결국은 버티지 못한 것이다. 대학에서 처음으로 수강을 중도에 포기하기에 이어서, 4.0의 방어선까지 지켜내지 못했다. 특히 처음으로 C를 맞은 것은 뼈아픈 치명타였다.

이 실패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나는 본질적인 문제는 나의 근면성실하지 못함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다른 원인을 찾기에 급급했다. 공부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교수와 나 자신의 스타일이 잘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애써 변명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원하는 바로 그 모습 그 환경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법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마땅히 덤벼오는 세상에 맞서 싸워야 함에도 나는 투쟁심을 잃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바로 그 꺼져가는 나의 대-세계(對-世界)로의 불꽃, 바로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고 내가 잃어버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현실을 부정하는데만 집중했던 것이다.

지금 와서 무엇을 탓할수도 없고, 지나간 시간을 후회해본들 바뀌는 것은 없다. 학문의 고지를 향해 어떻게든 한 발자국식 걸어 올라가려는 이 여정에서 잠시 비틀거리더라도 걸음은 멈출 수 없다. 의미를 잃은 것 같더라도, 멀리서 보이는 듯했던 그 창 하나가 아물거리다가 눈 앞에서 사라지는 듯 해도, 내가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 그것들은 변하지 않는다. 세계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다시 움직일 때인 것이다.

스스로의 근면성실함, 박소해의 〈늘 단정히〉에 등장하는 구절처럼 “내가 할 수 있는 내면의 빛과 소박한 기품”을 다시 한 번 일으켜세울 때가 되었다. 나는 이미 대학에서 보낸 지난 여러 해 동안 내가 학업적인 성공은 물론이거니와 인격적 · 정신적인 성장을 이룬 때가 과연 언제인지 돌이켜본 바가 있었다. 글을 쓰는 것, 그것이 결여된 때에 나는 항상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리곤 했다. 아마도 그 이유란 타인에게 행위로써 어떠한 유약함이라도 보이고 싶지 아니한 나 자신이라는 인간은, 글과 같은 자기-고백적 수단이 아니고서는 스스로를 타이르거나 돌이켜보지 못하는 종류의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글을 다시 쓰기로 한 것, 오랫동안 멈추었던 펜을 다시 한 번 들어올리고자 하는 나의 의지는 바로 여기에서 연유했다.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다시 한 번 일어서도록 다독이는 작업을 재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음 한 학기 동안 나는 아무래도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 나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되돌아보는데 시간을 더 투자하기 위하여, 너무 빡빡한 학업 일정을 지양했다. 나 자신의 안에 남아 있는 것들, 외침과 명령, 그리고 결의와 의지를 전면적으로 검토하는 바로 이 작업이 이제 곧 대학 학부생으로서의 졸업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는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철학하는 그 명민한 정신, 사유하는 그 신중한 정신, 의심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하고자 하는 바로 그 대학(大學)의 정신을 나는 이번 여명(餘銘) 시리즈를 통해 다시 한 번 새기고자 한다. 마음을 돌이켜보고 다시 한 번 펜을 들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것들을 하나씩 다시 한 번 곱씹어보고 새길 때, 어쩌면 내가 잃어버린 듯한 바로 그것,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되찾게될지도 모르므로.

“의심은 멈추지 않아야 한다(Questioning Never Stops)”.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철학함의 명민함, 사유하는 신중함, 그리하여 민감한 정신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