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총서 #6. ‘비디오 게임’과 ‘예술’은 양립 불가능한가?

연구총서 #6. ‘비디오 게임’과 ‘예술’은 양립 불가능한가?

2023-12-27 0 By 커피사유

연구총서 시리즈는 커피사유가 작성한 레포트 · 연구 기록 · 소논문 등 학술적인 글들을 모아놓은 공간으로, 세상과 스스로에 대한 분석을 여러 방면에서 시도하는 공간입니다.

이 글은 2023학년도 2학기, 필자가 수강한 서울대학교 윤주한 교수님의 〈철학으로 예술 보기〉 수업의 과제로 작성된 기말 보고서임을 밝혀둡니다.



I. 서론

“비디오 게임1은 예술인가?” 이 질문은 스마트폰, 컴퓨터, 태블릿 PC 등 사람들이 여러 전자장비를 통하여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것이 하나의 대중 문화로 자리잡은 1990년대 이후부터 끊임없이 제기된 질문이다. 많은 게이머들은 비디오 게임에는 전통적으로 예술로 인정받고 있는 미술(영상), 음악, 문학(서사) 등이 종합적으로 포함되어 있으므로 게임은 ‘종합 예술’로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윤주한 · 이다민 (2022)2이 지적하였듯 “부분들의 속성이 전체의 속성을 완전히 결정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예술들의 집합체로 볼 수 있는 비디오 게임이 반드시 ‘예술’로 분류될 수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비디오 게임이 예술성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반대 측의 초기 논증에서는 ‘게임과 예술의 차이점’에 주목한다. 비디오 게임들은 경쟁에서의 ‘승리’라는 목적을 가진다는 점에서 스포츠에 가까울 뿐이지 예술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 평론가 로저 에버트(Roger Ebert)3나 예술과는 달리 비디오 게임은 한 사람의 일생에 대한 시각을 보여주지 않음을 근거로 든 조나탄 존스(Jonathan Jones)4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다민 (2023)5이 지적한 대로 이러한 게임과 예술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열거 · 비교하여 비디오 게임의 예술성을 입증 · 반박하려는 것은 비디오 게임이 기존 예술과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가지는 예술적 국면들을 제대로 조명하지 못함은 물론, 비디오 게임이 기존 예술과 공유하거나 차별화되는 여러 국면들 중 일부에만 집중하고 나머지 국면들은 무시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비디오 게임의 예술성에 대한 후기 논쟁은 이러한 비판에 착안하여, 옹호 측과 비판 측 모두가 ‘게임으로서의 특성’이 비디오 게임의 예술 지위에 기여하는 것이 가능한지 아닌지를 판정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비판 측에서 가장 대표적인 논변은 브록 러프(Brock Rough)가 제시한 ‘양립불가능성 논변(The Incompatibility Argument)’이다. 그는 어떤 대상이 게임이면서 동시에 예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증은 철학자 버나드 슈츠(Bernard Suits)의 ‘게임에 대한 정의’의 예술은 ‘이해되는 것’이 목적이며 그 방법은 ‘감상되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슈츠의 게임이면서 동시에 예술인 대상 X를 가정하였을 때 X가 예술이라는 사실로부터 슈츠의 게임에 대한 정의를 구성하는 3가지 조건이 만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러프의 양립불가능성 논변은 그가 전제한 ‘슈츠의 게임 정의’가 비디오 게임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점, 그의 예술에 대한 정의에서 핵심적 요소로 언급되는 ‘그 목적은 감상되기 위한 것이다’에 위배되면서 예술인 반례들이 있다는 점에서 그 논증을 구성하는 전제들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컴퓨터 게임’의 예술성에 대한 논의에서 타당성을 가진다고 보기 어렵다. 본고에서는 러프의 양립불가능성 논증을 살펴보고, 이 논증이 가지는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러프의 양립불가능성 논변’은 ‘컴퓨터 게임은 예술성을 가질 수 없다’에 대한 논리적인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보이고자 한다.


II. 브록 러프의 양립불가능성 논변

II.1. 버나드 슈츠(Bernard Suits)의 게임 정의

러프는 버나드 슈츠(Bernard Suits)의 다음과 같은 ‘게임’ 정의를 인용하여 자신의 논의에서의 ‘게임’을 정의한다.6

X는 다음을 만족하면, 그리고 오직 그러한 경우에만 게임(Game)이다.
(1) X는 어떤 목표(전유희적 목표, Prelusory goals)를 달성하기 위한 사건 · 행위의 연속이다.
(2) X는 해당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아닌, 비효율적인 방법(유희적 수단, Lusory means)들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칙(구성 규칙, Constitutive rules)들을 가지고 있다.
(3) X의 참여자들은 구성 규칙들이 비효율적임에도 불구하고, 이 규칙을 수용하는 태도(유희적 태도, Lusory attitude)를 가진다.

슈츠의 정의에서 게임의 ‘전유희적 목표’란 게임에서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말하며, 유희적(lusory)의 의미는 게임에서 전유희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선택된 비효율적인 방법들에 따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위를 하는 것을 용납하는 태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러프가 든 예시처럼 ‘골프 게임’을 생각해보면 위 정의가 ‘게임’에 대한 우리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확인해볼 수 있다. 골프 게임에서 사람들은 ‘컵에 공을 넣어 승리’하기 위해, 그냥 골프공을 들고 걸어가 홀컵에 공을 직접 넣지 않는다. 그 대신에, 사람들은 몇 마일 정도 떨어진 곳부터 골프채를 휘둘러 공을 쳐서 홀컵에 공을 가깝게 하거나 넣는다. 그 어떤 사람들도 공을 직접 넣는 대신 이런 방식으로 골프 게임을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재기하지 않는다. 이 예시에 슈츠의 ‘게임 정의’를 적용한다면, 골프 게임의 ‘전유희적 목표’는 ‘승리하는 것’,  ‘구성 규칙’은 ‘공을 홀컵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 골프채로 쳐서 넣을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구성 규칙이 비효율적임에도 골프 게임의 참여자들은 이 규칙을 모두 수용하므로, 참여자들은 모두 ‘유희적 태도’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II.2. 브록 러프의 예술에 대한 필요 조건

러프는 예술에 대한 여러 이론적인 정의들이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인식(Recognize)’에 주목한다. 그는 제롤드 레빈슨(Jerrold Levinson)나 로버트 스테커(Robert Stecker) 그리고 피터 라마르크(Peter Lamarque) 등의 예술 정의에서 어떤 대상을 일상품이 아닌 ‘예술’로 만들어주는 것의 정수는 그것을 감상자가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였는지에 크게 좌우된다는 것에 있음이 공통된다고 지적하면서, 비록 예술에 대한 필요충분적 정의는 어렵더라도 적어도 예술 작품(Artwork)은 감상(appreciated)되어야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때 예술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그와 연관된 모든 특징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예술에 대한 필요 조건을 제시한다.

이러한 러프의 예술에 대한 필요 조건, 즉 어떤 대상이 예술이면 적어도 그 목적은 그것이 이해되는 것이며, 이 때 감상자는 대상과 연관된 모든 특징에 집중한다는 조건은 미술, 음악과 같은 오늘날 ‘예술’로 널리 인정되는 대상을 잘 설명한다. 이를테면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6번 비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은 작곡가의 생애부터 악곡의 구조, 각 주요 선율의 분위기와 음의 고저 등 가능한 모든 ‘관련된 특징’들에 주목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러프의 예술 필요 조건은 예술로 인정되는 대상들을 잘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II.3. 러프의 양립불가능성 논변의 3가지 근거

러프는 소개한 슈츠의 ‘게임 정의’, 그리고 예술에 대한 정의라는 배경 위에서 자신의 게임-예술의 양립불가능성 논변을 제시한다. 그는 이 논변을 위하여 슈츠의 게임에 해당하면서 동시에 예술인 어떤 대상 X을 상정하는데, 3가지 문제점들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러한 대상은 존재할 수 없어 어떤 대상이 ‘(슈츠의) 게임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예술성’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첫째로 그는 X가 게임일 때 가지는 목적은 X 자신과 분리될 수 있지만, X가 예술일 때 가지는 목적, 즉 그것은 ‘감상됨으로써 이해되어야 함’이라는 목적은 분리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게임이면서 동시에 예술인 대상 X는 슈츠의 게임 정의에 따라 그 유희적 수단과 분리될 수 있는 전유희적 목표를 가지는데, X는 예술이기도 하므로 그 전유희적 목표는 ‘X를 이해하는 것’이 된다. X가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것과 결부된 모든 특징들에 주목하는 수단, 즉 ‘감상’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 수단은 목적과 분리되지 않는다. 작품을 감상한다는 수단, 즉 작품의 모든 특징들에 주목하는 것이 곧 그 작품을 감상한다는 목적 자체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즉 X는 예술이기 때문에 ‘이해되는 것’이라는 목적과 분리될 수 없는 ‘감상’이라는 수단을 가지지만, 동시에 게임이기도 하므로 슈츠의 게임 정의에 의하여 그 전유희적 목표가 그 수단과 분리될 수 있어야 하는 내적 모순을 가진다. 따라서 이러한 X, 게임이면서 동시에 예술인 대상은 존재할 수 없다.

둘째로 러프는 X가 게임이기 위해서는 비효율적인 수단들을 포함해야 하지만, X가 예술이기 위해서는 이 수단들이 결코 비효율적일 수 없음도 지적한다. 예술은 ‘이해된다’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것과 관련된 특징들에 주목하는 것을 요구하는데, 이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오직 그 모든 특징들에 주목하는 방법만이 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더 효율적인 방법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예술인 대상 X는 비효율적인 수단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X는 게임이므로, 구성 규칙 즉 비효율적인 수단을 가져야 한다. 이는 모순이므로 X는 예술이면서 동시에 게임일 수 없다.

셋째로 그는 X가 게임이기 위해 요구되는 사람의 태도는 X가 예술이기 위해 요구되는 사람의 태도와 다름을 보인다. 그는 우리가 대상을 어떤 때에는 ‘게임’으로 인식하고, 다른 때에는 ‘예술’로 인식하더라도 동시에 어떤 대상이 게임이면서 예술이라고 인식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게임의 경우 ‘비효율적인 규칙들을 수용하는’ 유희적 태도를 그 참여자들이 가져야 하는 반면, 예술의 경우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특징’에 대한 주목이라는 태도를 감상자들이 가져야 한다. 그런데 어떤 것을 ‘게임으로서’ 수용한다는 태도는 대상 또는 대상에 대한 특징을 곰곰이 따지는 비판적 태도와는 거리가 먼 반면, ‘예술로서’ 감상하는 태도는 대상에 대한 특징을 곰곰이 따져야 하는 비판적 태도에 가깝다. 어떤 대상을 보면서 그것과 관련된 특징을 따지면서 동시에 따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게임’이 요구하는 태도와 ‘예술’이 요구하는 태도는 배타적이다. 서로 배타적인 태도를 동시에 가지면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이 불가능한 태도를 요구하는 게임이면서 동시에 예술인 대상 X는 존재할 수 없다.


III. 브록 러프의 양립불가능론에 대한 비판

이상에서 소개한 ‘게임 – 예술의 양립불가능성’에 대한 러프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비디오 게임이 러프의 논증이 전제하는 슈츠의 ‘게임 정의’를 만족한다면 러프의 논증은 비디오 게임은 결코 예술로 볼 수 없다는 ‘비디오 게임의 예술성’에 대한 강력한 반대 논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양립불가능론은 다음과 같은 점들에서 올바르지 않다. 첫째, 러프가 전제하는 ‘슈츠의 게임 정의’는 비디오 게임까지 포함하는 게임 일반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적 정의가 아니다. 비디오 게임은 ‘슈츠의 게임 정의’를 만족하지 않는 게임이기 때문에 러프의 논증은 비디오 게임에 적용될 수 없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 러프 자신이 논문에서 게임이 아닌 예술이라고 주장한 11-bit Studio의 〈This War of Mine〉(2014)이 있다.7

이 게임은 “전쟁 중 민간인 생존자들이 살아남는 생존 게임”으로, 플레이어는 “매일 밤마다 생존자 중 한 명을 밖으로 내보내어 다른 건물의 잔해나 자재를 뒤져 물자를 찾아내거나, 다른 생존자나 정부군 등을 공격하여 상대적으로 풍족한 물자들을 얻는 것 중 선택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비디오 게임은 그 자체와 분리되는 ‘승리’와 같은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전쟁 중 민간인의 삶을 그려내면서 플레이어에게 생존과 도덕 사이의 어려운 선택들을 제시함으로써 도덕적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그 목적에 가까워 보인다. 〈This War of Mine〉은 게임의 규칙이나 상황들에 대한 유희적 태도보다는, 이입 · 주목 등 ‘러프’의 예술에 알맞는 태도를 요구한다. 러프는 이 작품은 게임이 아닌 예술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반직관적이다. 이 작품은 디지털 매체 속에서 일종의 ‘가상 세계’를 구현하고 있고, 이 가상 세계와 플레이어 사이의 상호작용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어떤 대상이 게임인지 아닌지를 판정함에 있어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상호작용성’을 만족하기 때문에 게임이 아니라고 보기 어렵다.

둘째, ‘슈츠의 게임 정의’가 비디오 게임까지 포괄할 수 있도록 수정된다고 하더라도, 러프의 논증에서 ‘게임 플레이어에게 요구되는 태도’와 ‘예술 감상자에게 요구되는 태도’가 양립 불가능하다는 점은 게임과 예술이 양립불가능하다는 주장의 근거로서는 부적절하다. 러프는 어떤 대상이 ‘예술이기 위한 태도’와 ‘게임이기 위한 태도’를 우리가 동시에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예술이면서 동시에 게임인 대상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 논증은 어떤 때에는 예술로 지각될 수 있으면서 다른 때에는 게임으로서 지각될 수 있는 대상의 존재까지는 부정하지 못한다. 게임이 예술성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논증하려면 ‘게임으로 인지될 수 있는 대상’은 결코 ‘예술로서 인지될 수 없음’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러프의 논증은 ‘게임으로서 인지되고 있는 대상은 예술로서 동시에 인지될 수 없다’만을 논증했을 뿐, 이미 과거에 ‘게임으로 인지된 대상’이 ‘예술로서 인지될 수 없다’를 논증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게임이 예술성을 가질 수 없음을 완벽하게 보인 논증이 아니다.


IV. 결론

지금까지 ‘게임과 예술은 양립불가능한가?’라는 논제에 대한 반대 측에서 주요 논증으로 제시하는 브록 러프의 ‘게임-예술 양립불가능론’과 그 난점에 대하여 논하였다. 러프는 전유희적 목표, 유희적 수단, 유희적 태도로 정의되는 버나드 슈츠의 ‘게임 정의’를 만족하는 게임은 ‘감상되는 것이 목적’인 예술과는 양립할 수 없음을 주장했다. 러프의 근거는 세 가지였다. 첫째, 게임은 목적과 수단의 구별이 가능하지만 예술은 그렇지 않다. 둘째, 게임은 비효율적인 수단을 포함하는지만 예술은 그렇지 않다. 셋째, 게임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태도는 예술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태도와 다르며, 어떤 사람도 이 상반되는 두 태도를 동시에 가질 수 없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러프의 논증은 전제하는 ‘슈츠의 게임 정의’가 비디오 게임까지 포함하는 게임 일반에 대한 필요충분적 정의가 아니며, 게임이기 위한 태도와 예술이기 위해 요구되는 태도를 동시에 가질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게임-예술의 양립불가능성을 이끌어낼 수 없으므로 러프의 논증을 비디오 게임과 예술의 양립불가능성에 대한 논증으로 사용하는 것은 건전하지 않음을 보였다.

서론에서 논의되었듯, 비디오 게임이 현대 사회의 하나의 대중 문화로 자리잡은 이래, ‘비디오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논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이 물음에 답변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이를테면 ‘게임’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적 물음들에 먼저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러프 그 자신도 논문에서 밝히듯, ‘게임’이나 ‘예술’을 정의하려는 철학적 시도들은 여전히 성공적이지 못하다.8그러나 이 물음에 대한 철학적 논증의 과정이 쉽지 않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비디오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를 가리는 것은 중요하다. 이는 게임을 부정적인 시각과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대립 속에서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를 가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비디오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가 비디오 게임이 가질 수 있는 가치에 대한 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윤주한 · 이다민이 지적한 대로, 비디오 게임은 여전히 철학과 미학에서 아직 본격적인 논의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비디오 게임을 둘러싼 여러 사회적 논쟁들에서는 비디오 게임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요구하고 있으며,9  이러한 철학적 해명을 위해서는 비디오 게임이 예술적 성격을 가질 수 있는지 아닌지 답하지 않을 수 없다. 본고는 단지 이에 대한 철학적 논의 중 하나인 브록 러프의 ‘게임-예술 양립 불가능성’ 논증과 이에 대한 비판만을 다루었지만, 비디오 게임과 예술은 과연 양립불가능한 것인지, 만일 그렇다면 비디오 게임은 ‘예술적 가치’가 아닌 다른 가치를 가질 수 있을지, 반대로 양립가능하다면 비디오 게임이 가치는 예술적 가치란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계속되어야만 할 것이다.


참고 문헌

  1. 윤주한 · 이다민. “컴퓨터 게임의 철학을 위하여.” 미학 88.4. (2022): 147-186.
  2. Roger Ebert. “Video games can never be art.” RogerEbert.com. (2010). Accessed on 2023. 11. 30. https://www.rogerebert.com/roger-ebert/video-games-can-never-be-art
  3. Jonathan Jones. “Sorry MoMA, video games are not art.” TheGuardian.com. (2012). Accessed on 2023. 11. 28. https://theguardian.com/artanddesign/jonathanjonesblog/2012/nov/30/moma-video-games-art
  4. 이다민. “게임은 예술인가? : 게임 예술 논쟁의 현재와 미래.” 미학 89.2. (2023): 89-123.
  5. Brock Rough. “The Incompatibility of Games and Artworks.” Journal of the Philosophy of Games. 1.1. (2017): 1-21.

주석 및 참고문헌

  1. 선행 연구에 따라서는 이다민 (2023), 윤주한 · 이다민 (2022)과 같이 전자적 시각 매체를 통하여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을 ‘컴퓨터 게임’으로 칭하는 경우도 있고, 홍선표 (2015)와 같이 ‘비디오 게임’으로 칭하는 경우도 있다. 본고에서는 홍선표를 따라 ‘비디오 게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2. 윤주한 · 이다민. “컴퓨터 게임의 철학을 위하여.” 미학 88.4. (2022): 159-160.
  3. Roger Ebert. “Video games can never be art.” RogerEbert.com. (2010). Accessed on 2023. 11. 30. https://www.rogerebert.com/roger-ebert/video-games-can-never-be-art
  4. Jonathan Jones. “Sorry MoMA, video games are not art.” TheGuardian.com. (2012). Accessed on 2023. 11. 28. https://theguardian.com/artanddesign/jonathanjonesblog/2012/nov/30/moma-video-games-art
  5. 이다민. “게임은 예술인가? : 게임 예술 논쟁의 현재와 미래.” 미학 89.2. (2023): 100-104.
  6. Brock Rough. “The Incompatibility of Games and Artworks.” Journal of the Philosophy of Games. 1.1. (2017): 5-8.
  7. Brock Rough. op. cit.: 3-4.
  8. Brock Rough. op. cit.: 5-6, 8-10.
  9. 윤주한, 이다민. op. cit.: 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