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참작의 단죄: 《토생전》

2020-11-17 0 By 커피사유

어릴 적 나는 《토생전》을 읽었었다. 그 때에는 그 이름이야 ‘토생전’이 아니고 ‘별주부전’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 구비소설은 나에게 노출되어 온 그 오래된 이력만큼 나에게 있어 다소 특별한 위치에 있다. 초등학교 때의 추억이 이 소설을 볼 때마다 떠오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방송실에서 킥킥 소리를 내며 웃어대며 친구들과 나는 ‘순우리말 더빙’을 한다고 다음날 목이 쉴 정도로, 내가 마치 성우라도 된 듯 온갖 목소리를 내면서 더빙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의 그러한 향수와는 달리 너무 나이가 들어 버렸는지 지금 내가 읽는 《토생전》은 괴상하게도 그 느낌이 다르다. 소설 속에서 지금의 나 자신의 눈에 걸려드는 것은 이제는 그러한 추억도 아니고, ‘토끼의 복수’가 선사하는 일련의 통쾌함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혼란스러운 ‘죄의 상대성’에 관한 사유(思惟)였다.

이 소설에서 어떤 ‘죄’를 짓지 않은 등장인물은 거의 없다는 점은 아마 모든 독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사실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조연도 아니고 거의 엑스트라 같은 느낌으로 등장한 문어 장군마저도 누군가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거나 해서는 안 되었을 말들을 수십 차례나 담은 것이 물론이고, 용왕을 진찰 온 의원들은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토끼를 살해할 것을 부추겼으며, 용왕은 자신이 색(色)과 주(酒)를 가까이 하여 병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을 보고 약을 가져오라고 호통치며, 별주부는 아내와의 갈등은 기본이거니와 문어 장군과는 심한 말들을 주고 받았으며, 육지에서는 토끼를 감언이설로 아주 제대로 꾀어 내서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가지 않았던가. 게다가 ‘토 선생’은 용왕과 대신들 앞에서 “간을 넣고 왔다. 못 믿겠다면 배를 갈라라.”하며 사기를 포함한 공갈과 협박을 행한 것에 다름 아니지않은가. 심지어는 별주부의 아내를 첩으로 들이라며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다. 현행법으로 심판할 수 있었다면 그 어떤 등장인물이라도 징역 6월 이상을 피하기 힘들 이들의 죄들을 한데 뭉치면, 나는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죄로 흘러넘치는 진흙 도랑에 아주 홍수가 밀려오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처럼 수많은 죄들을 가진 이들, 즉 토끼와 별주부 등의 행위를 우리는 손가락질하기 어려운가? 그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저마다의 복잡한 사정이 있기는 했더라도 제각각 범하지 않았어야 할 범죄를 저지른 생물들이다. ‘정상참작’이라는 법률 용어는 이들에 대한 변호가 될 수 있는가? 예컨대 토끼는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가 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는가?

그러나 ‘정상참작’이라는 단어는 ‘죄가 사하여 질 수 있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는 인정되나 그 죄가 범해진 상황이 행위자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정상참작’은 ‘죄가 없다’, 즉 무죄와 동치가 아니기 때문에, 손가락질하기는 어렵되 여전히 그곳에 물을 수 없는 책임과 범해진 죄는 남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이들의 죄를 ‘단죄’하여야 한다는 명제에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비슷한 상황에서 죄를 덜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이 ‘모세’와 같아 인정이 별로 없는 나 같이 차가운 사람은 ‘죄’는 어떠한 경우에도 면제될 수는 없다고 말하고, 뒤에는 적어도 그런 생각이 있어야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죄적인 의식이 내면화되기 때문에 부정적 행동을 억제할 수 있다는 변명을 붙인다.

살아있는 그 누구도 ‘죄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정상참작’은 죄의 소멸을 지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용인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