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흐르는 시간 #2.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 – 칸자키 이오리

음악이 흐르는 시간 #2.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 – 칸자키 이오리

2020-12-16 0 By 커피사유

커피, 사유(思惟)의 음악이 흐르는 시간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선곡한 일상 속 음악들과, 그에 엮인 이야기가 흐르는 공간입니다.

아(我)와 일상, 그리고 음악. 음악이 흐르는 시간, 카페지기 커피사유입니다.

벌써 두 번째 음악이 흐르는 시간 시리즈 포스팅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시간은 뭔가 첫 번째 시간과는 다른 의미의 이야기를 전달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결론을 이끌어내지만 다른 과정을 통해 이를 보여주는 또 다른 음악이 떠올랐기에, 이번 포스트에서도 결과적으로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첫 번째 포스트에서는 여러분들께 ‘삶’이나 ‘인생’에 대한 의미를 고민하는 Viva La Vida라는 노래를 다루면서 함께했었죠. ‘죽음’으로 달려가는 ‘인생 그 자체’를 사랑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래라고, 저는 그렇게 평론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요, 오늘 다룰 두 번째 음악은 ‘삶 그 자체를 사랑하자’라는 면에서는 공통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난 첫 번째 음악에서는 ‘삶에 대한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다고 한다면,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릴 음악은 ‘삶의 의미’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두 번째 음악이 흐르는 시간, 이 시간에는 칸자키 이오리(カンザキイオリ)의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命に嫌われている。)에 담긴 의미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나누어볼까 합니다.

슬럼프와 삶

개인적으로 이 노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라는 노래는 2017년에 칸자키 이오리씨가 니코니코 동화에 투고한 VOCALOID 노래이긴 해서 나온지 3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노래이기도 합니다만, 제가 이 노래를 알게 된 것은 사실 올해 가을 즈음으로, 아직 채 1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이 노래를 처음 유튜브에서 찾아낸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 때는 바야흐로 조기졸업 시험을 치르고 난 뒤였죠. 누군가가 만약 저에게 대한민국 교육 현실 중에서 무엇이 가장 비극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아마 ‘조기졸업’ 제도라고 대답하고야 말 것 같습니다. 같은 학년에 입학한 친구들 중에, 40% 내외는 먼저 대학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을 얻지만 남은 이들은 그렇지 못하는 불평등의 시작, 그리고 성적에 따른 특권적 차등의 대표적 사례인 이 제도는, 제게 있어 더없이 소중했던, 함께 어울리고, 점심도 먹고, 고민도 나누고, 울고 기뻐하기도 했던 친구들을 앗아갔죠. 입시라는 아름다우면서도 잔혹한 목표 아래에서 피튀기듯 경쟁하는 과학고등학교였기에, 그 중간 결과라고도 할 수 있는 ‘조기졸업’을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저 혼자만 해버리게 되니까, 게다가 이제 너희는 대입을 준비해야 한다며 수업조차 ‘진학반’과 ‘진급반’으로 나누어버리면서 점차 거리가 멀어지더니, 어느새인가 복도에서 마주치면 눈을 피하는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안그래도 평소에 어려움을 개인적으로 겪는 분야 중 하나인 인간 관계가, 단지 제가 일찍 대학에 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제대로 박살이 나고 보니 과연 제 스스로가 약 1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악착같이 버텨온 것이 유의미한가에 대한 회의가 들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별로 공부 같은 것을 할 의욕도, 삶에서 노력의 결말이 이렇게 허무함을 동반하고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귀결된다면, 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죠. 한 마디로, 제게 슬럼프가 찾아왔던 겁니다. 노력의 결말의 허무함에 휘말리면서 말이죠.

그래서인지 학습에 집중을 못 하고 유튜브로 도피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온라인 수업 기간이 되어도 출석 체크만을 눌러두고 사실 진학반 공부를 하기 보다는, 유튜브를 돌아다니면서 오늘 뭔가 재미있는 영상이 없나 – 하면서 순간적인 쾌락을 쫓아가는 인간에 점차 이르게 되었죠. 하루하루의 시간은 영상과 함께 금방 가게 되었습니다만, 뭔가 정적 저 자신은 어딘가 좀먹혀 들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이 노래를 발견한 것이 바로 그런 슬럼프의 순간 속이었습니다. ‘노력’의 결과가 결국은 허망의 일종으로 귀결된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삶’에서 중요한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은 ‘노력에 대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저는 이 노래를 통해 다행히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슬럼프로부터 조금씩 벗어나면서, 이 노래를 듣고, 또 들으면서, 저는 그렇게 다시 지금의 저 자신으로 회귀할 수 있었고, 지금 여러분들에게 제 경험을 말씀해드리고 있습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실질적으로 유의미한 것은 ‘노력에 대한 결과’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노래를 듣기 전의 저는 물론, 지금의 저에게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 노래,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만큼은 적어도 하나의 대답을 제시해주는 듯 합니다.

The Official Anthem for Depression.
– 절망에 관한 공식적인 성가.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 Youtube 영상의 덧글 중 하나.

굼굼니 여왕의 전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프랑스의 작가가 그의 등단작으로 발표한 ‘개미’라는 그 유명한 소설에서 말한, ‘굼굼니 여왕의 전설’이라는 대목입니다. 앞, 뒤의 내용은 이 대목을 이해하는데 중요치 않아서 생략해버리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대목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 가지만 일러둔다면, 이 글에서 등장하는 ~호의 호칭은 개미 한 마리를 부르는 호칭이며, ‘손가락’들이라는 것은 개미 입장에서 본 ‘인간’을 지칭하는 호칭이라는 점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왕조에 굼굼니라는 여왕이 있었는데, 그 여왕은 마음의 병에 걸린채 산란실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여왕은 세 가지 문제 때문에 속을 끓이면서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 세 가지 문제란 이런 것이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일까?
살아가면서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행복의 비결은 무엇일까?

여왕은 자기 자매들, 백성들과 그 문제를 가지고 토론했다.

풍부한 정신을 가졌다는 연방의 모든 개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지만 만족할만한 해답이 없었다. 개미들은 여왕이 병이 났으며 여왕이 골몰해 있는 문제들은 결코 겨레의 생존에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아무도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않자 여왕은 점점 쇠약해졌다. 온 겨레가 근심하기 시작했다. 유일한 산란자인 여왕을 잃는다면 큰일이었다. 그래서 온 도시의 개미들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그 추상적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가장 중요한 일은? 행복의 비결은?

모든 개미들이 대답을 내놓았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먹을 때이다. 왜냐하면 먹이를 먹으면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종족을 유지하고 도시를 방어할 병정개미들을 늘리기 위해서 번식을 하는 것이다. 행복의 비결은 열기다. 왜냐하면 열기는 화학적인 만족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 대답 중 어느 것도 굼굼니 여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여왕은 도시를 떠나 혼자서 위대한 바깥 세계로 나갔다.

바깥 세계에서 여왕은 살아남기 위해서 처절하게 싸워야만 했다. 사흘 후 여왕이 돌아와 보니 도시는 온통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여왕은 자기의 해답을 가지고 돌아왔다. 깨달음은 야만적인 개미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격투를 벌이던 와중에 왔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현재에서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에 몰두하지 않는 자는 미래도 놓치게 된다.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것과 맞서는 것이다. 만일 여왕이 자기를 죽이려는 병정개미를 처치하지 못했다면 여왕이 죽었을 것이다. 행복의 비결은 전투가 끝난 다음에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살아서 땅 위를 걷는다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것들이다.

현재의 순간을 즐기는 것.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일에 몰두하는 것.
땅 위를 걷는 것.

그것이 굼굼니 여왕이 남긴 삶의 위대한 세 가지 비결이다.”

해당 내용의 전체 단락 원문은 2020-03-18에 포스팅한 ‘굼굼니 여왕의 전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개미”. 베르나르 베르베르 저.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2013). 제2권 중

이 이야기를 읽고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떠오르셨나요? 제가 처음 이 이야기를 읽고 떠오른 것은 생각이 아니라, 어떤 ‘느낌’이었습니다. 형언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굳이 비슷한 것을 찾아보자면 뭔가 소름이 돋으면서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진다고 하는, 마치 늦은 겨울 오후에 들이키는 따뜻한 차 한 잔과 같다고나 할까요.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가 말해주는 의미도 이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가사의 특징상 다소 냉소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위 ‘굼굼니 여왕의 전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그런 느낌, 그러한 따뜻한 느낌을 우리에게 넌저시 건넨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느낌’을 우리가 만약에 언어로써 굳이 기술하게 된다면, 이것은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死にたいなんて言うなよ。
“죽고 싶다고 말하지 마.

諦めないで生きろよ。」
포기하지 말고 살아.”

そんな歌が正しいなんて馬鹿げてるよな。
그런 노래를 맞다고 하다니, 말 같지도 않네.

実際自分は死んでもよくて周りが死んだら悲しくて
실제로 나 자신은 죽어도 좋은데, 주변 사람이 죽는건 슬퍼서

「それが嫌だから」っていうエゴなんです。
“그게 싫으니까” 라고 말하는 이기주의입니다.

他人が生きてもどうでもよくて
타인이 살아가도 어떻게 되어도 좋아서

誰かを嫌うこともファッションで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조차 유행이라

それでも「平和に生きよう」
그럼에도 “평화롭게 살자”

なんて素敵なことでしょう。
어쩜 이렇게 근사한 일인가요.

画面の先では誰かが死んで
화면 건너에선 누군가가 죽고

それを嘆いて誰かが歌って
그것을 한탄하며, 누군가가 노래하고

それに感化された少年が
그것에 감화된 소년이

ナイフを持って走った。
나이프를 가지고 달려간다.

僕らは命に嫌われている。
우리들은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

価値観もエゴも押し付けていつも誰かを殺したい歌を
가치관도 자아도 억누르고 언제나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노래를

簡単に電波で流した。
간단히 전파로 흘려보냈어.

僕らは命に嫌われている。
우리들은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

軽々しく死にたいだとか
쉽게 죽고 싶다고 말하며

軽々しく命を見てる僕らは命に嫌われている。
가볍게 생명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

お金がないので今日も一日中惰眠を謳歌する
돈이 없기에, 오늘도 하루 종일 게으르게 잠만을 구가해

生きる意味なんて見出せず、
살아갈 의미따위 찾아내지 못하고,

無駄を自覚して息をする。
쓸데없음을 자각해선 숨을 쉬어.

「寂しい」なんて言葉でこの傷が表せていいものか
「외롭다」는 말로, 이 상처를 드러내도 괜찮은걸까

そんな意地ばかり抱え今日も一人ベッドに眠る
그런 의지만을 감싸안고, 오늘도 혼자 침대에서 잠들어.

少年だった僕たちはいつか青年に変わってく。
소년이었던 우리들은 언젠가 청년으로 변해 가.

年老いていつか枯れ葉のように誰にも知られず朽ちていく。
나이를 먹고는, 언젠가 마른 잎사귀마냥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썩어가.

不死身の身体を手に入れて、一生死なずに生きていく。
불사신의 몸을 손에 넣어서, 평생 죽지 않고 살아가.

そんなSFを妄想してる
그런 SF 소설을 망상해.

自分が死んでもどうでもよくて
자신은 죽든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데

それでも周りに生きて欲しくて
그럼에도 주변 사람들은 살아가기를 바라서

矛盾を抱えて生きてくなんて怒られてしまう。
모순을 끌어안고 살아간다니, 혼나고 말겠지.

「正しいものは正しくいなさい。」
“올바른 것은 올바른 그대로 있으세요.”

「死にたくないなら生きていなさい。」
“죽고 싶지 않다면 살아가세요.”

悲しくなるならそれでもいいなら
슬퍼지고 만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다면

ずっと一人で笑えよ。
계속 혼자서 웃어.

僕らは命に嫌われている。
우리들은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

幸福の意味すらわからず、
행복의 의미조차도 알지 못하고,

産まれた環境ばかり憎んで
태어난 환경만을 원망하며

簡単に過去ばかり呪う。
간단하게 과거만을 저주해.

僕らは命に嫌われている。
우리들은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

さよならばかりが好きすぎて
작별하는 것만 너무나 좋아해서

本当の別れなど知らない
진실된 헤어짐을 모르는

僕らは命に嫌われている。
우리는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

幸福も別れも愛情も友情も
행복도, 헤어짐도, 애정도, 우정도

滑稽な夢の戯れで全部カネで買える代物。
우스꽝스러운 꿈의 장난이어서, 전부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이야.

明日死んでしまうかもしれない。
내일 죽어버릴지도 몰라.

すべて無駄になるかもしれない。
전부 쓸데없는 일이 될지도 몰라.

朝も夜も春も秋も
아침도, 밤에도, 봄에도, 가을에도

変わらず誰かがどこかで死ぬ。
변함없이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죽어.

夢も明日も何もいらない。
꿈도, 내일도, 무엇도 필요없어.

君が生きていたならそれでいい。
네가 살아있다면, 그걸로 됐어.

そうだ。本当はそういうことが歌いたい。
그래. 사실은 그런 것이 노래하고 싶어.

命に嫌われている。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

結局いつかは死んでいく。
결국 언젠가는 죽어가.

君だって僕だっていつかは枯れ葉のように朽ちてく。
너도 나도 언젠간 마른 풀잎이라도 된 듯 썩어가.

それでも僕らは必死に生きて
그럼에도 우리들은 필사적으로 살아가서,

命を必死に抱えて生きて
생명을 필사적으로 끌어안고서 살아서,

殺してあがいて笑って抱えて
죽이고, 발버둥치며, 웃고, 끌어안아서,

生きて、生きて、生きて、生きて、生きろ。
살아가서, 살아가서, 살아가서, 살아서, 살아줘!

命に嫌われている。(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 – 칸자키 이오리, 가사.

‘삶’에 대해 우리가 어떤 회의를 느끼고 있을 때, 우리는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삶’의 진짜 의미는 무엇인지,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태어났는지에 관하여. 하지만 우리가 수없이 그러한 순간을 겪으면서 얻었던 결론은, 기억하다시피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순간적으로는 어떤 의미, 이를테면 ‘다른 사람’, ‘내가 믿는 어떤 가치’를 이유로 내세워 며칠, 몇 주, 몇 달, 몇 년을 버텨오기도 했지만, 그 종말에 이르러서 우리가 도달한 귀착지는 ‘무(無)’의 영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노래,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굼굼니 여왕의 전설은 우리에게, 그러한 ‘삶의 의미’를 다른 어떤 것에서 찾는 시도가 이상한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는 듯 합니다. 마치, 이들은 ‘삶의 의미’는 바로 ‘삶을 살아가는 당신’ 그 본연에 있다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노래 가사처럼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몸으로 마른 풀잎이라도 된 듯, 죽음을 향하여 하루하루 썩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생각할수도, 도래하지 않을수도 있을 꿈과 내일을 이야기하면서, 때론 누군가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죽이고 싶다고 말하면서, 행복, 헤어짐, 애정, 우정 그 모든 우리가 믿어오는, 혹은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이 어느새인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삶의 귀착지가 ‘무(無)’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면서, 우리는 애써 그 결론을 내리는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삶의 유한성이 우리 자신에게 가져오는 그 공포와 모순 자체를 우리가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래가 말하듯, 그 모든 것 중 그 무엇도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살아있다는 그 사실 딱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너도, 나도 언젠간 마른 풀잎이라도 된 듯 썩어들어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들은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생명을 필사적으로 끌어안고서 살아갑니다. 누군가를 죽이고, 벗어나려 발버둥치고, 때론 웃고, 누군가를 끌어안으면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고, 살아가고, 살아갈 것이니 말입니다.

그게 ‘삶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고찰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책벌레였습니다.

보충: 이번 노래는 유튜브에 여러가지 괜찮은 버전이 많아서 전부 올려봅니다. 3가지 선택이 가능할 듯 싶습니다. ‘절규’의 정서를 담은 버전, ‘위로’의 정서를 담은 버전, ‘약간 차가운 버전’ 3가지가 있습니다. 다만, 모든 버전의 불러진 언어가 조금 다르고, 가사도 번역되는 과정에서 의미 상 약간의 차이가 만들어졌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가사들도 결국 ‘삶’에 대해, 앞서 논의했던 결론으로 귀착되기 때문에, 같은 의미와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 번째 버전은 일본의 유명한 우타이테인 ‘마후마후(Mafumafu)’씨가 부른 일본어 원문 버전입니다. 개인적으로 ‘절규’의 정서를 담았다고 생각하는데, 마치 진짜 슬럼프에 빠진 어떤 한 남자 아이가 ‘살려달라’라고 부르짓는 듯한 감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마후마후 –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

두 번째 버전은 ‘영어’로 불러졌습니다. 영미권에서는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가 ‘Hated by life itself’로 번역되었는데, ‘Oktavia’라는 유저가 그 특유의 따뜻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부른 버전이 가장 인기가 많고, 저 또한 가장 좋아하는 버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있는 유튜브 영상은 그 유저분이 올리신 원본 영상은 아니고, 이 음악을 이용해서 여러 그림을 그리시는 분들이 뮤직 비디오를 만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여러분들께서 그림까지 함께 보신다면, 그 절정에 이르렀을 때 뭔가 한 가지를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아 달아 둡니다.

Hated by life itself – Pearlous, Original English song by Oktavia.

세 번째 버전은 우리나라 분이신 성우 ‘이경태’ 분께서 부르신 버전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차분하고 침착하면서도, 동시에 약간 차갑고 시린 느낌을 준다고 생각해서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버전입니다.

성우 이경태 TV – 생명에게 미움받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