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인간’의 ‘적’

2022-04-28 Off By 커피사유

고귀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무의식적 본능들의 기능이 완전히 확실하게 작동하는 것, 혹은 위험이나 적을 향해서 용감하게 돌진하는 것과 같은 어떤 어리석음, 혹은 그 어떤 시대에도 고귀한 영혼이 서로를 인지하는 표지가 된 저 분노, 사랑, 외경, 감사 그리고 복수심의 열광적인 분출이다. 고귀한 인간에게 원한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즉각적인 반작용의 방식으로 수행되고 이러한 반작용과 함께 소진되어버리기 때문에 그것은 해독을 끼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약하고 무력한 자들에게서는 원한이 생길 수 밖에 없는 무수한 경우에도 귀족적 인간은 원한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자신의 적, 자신의 재난, 자신의 비행 자체도 오랫동안 심각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 – 이것이야말로 조형하고 형성하며 치유하고 파악하는 힘을 넘칠 정도로 가지고 있는 강하고 완전한 인간들의 표지이다(현대에서 이에 대한 좋은 예는 미라보1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행한 모욕과 비열한 행위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그것들을 이미 잊어버렸기 때문에 남을 용서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라면 마음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 많은 벌레를 단 한 번에 흔들어 털어버린다. 이 지상에서 정녕 적에 대한 사랑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오직 그러한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고귀한 인간은 자신의 적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외경심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외경심이야말로 바로 사랑에 이르는 가교이다. … 그는 실로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영예를 위해서 자신의 적을 필요로 한다. 그는 경멸할 점이 전혀 없고 존경할 점이 매우 많은 자만을 자신의 적으로 삼는다! 이에 반해 원한이 찬 인간이 생각하는 적을 상상해보라. 바로 여기에서 그는 창조적인 작업을 행한다. 그는 우선 ‘사악한 적’, 즉 ‘악인’을 생각해내고, 이것을 기본개념으로 하여 그다음에 그것과 대조되는 상으로서 ‘선인’이라는 것을 생각해내면서 이 선인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첫 번째 논문: ‘선과 악’, ‘좋음과 나쁨”, 박찬국 역. 아카넷. (2000). pp. 63-64.

주석 및 참고문헌

  1. 미라보(Honore Gabriel Victor Riqueti, Comte de Mirabeau, 1749~1791)는 프랑스 혁명 당시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문필가이다. 입헌군주제를 옹호한 온건파에 속했으며 프랑스 혁명이 급진화되기 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