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 · 기독교에 대한 적그리스도의 반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 · 기독교에 대한 적그리스도의 반론

2024-02-10 0 By 커피사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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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2019
"전달의 방법은 탁월했으나, 전달하고자 하는 기독교적 가치관이 품은 독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민하지 못한 레프 톨스토이" - 톨스토이는 좋은 예술 작품이란 '인류 복지에 이바지하는 좋은 가치 · 감정'들을 최대한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그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작품이라 정의했다. 그러나 기독교적 가치들, 즉 〈사랑〉 · 〈정직〉 · 〈성실〉 등이 바로 그 좋은 가치들이자 감정들이라고 주장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니체가 비판한 바 있듯, 이들 가치관과 뗄 수 없는 〈양심의 가책〉 또는 〈죄〉란 다름 아닌 〈신〉의 이름을 빌린 인간들의 소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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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한줄평 "전달의 방법은 탁월했으나, 전달하고자 하는 기독교적 가치관이 품은 독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민하지 못한 레프 톨스토이" 총평 짧은 변명 이 책은 레프 톨스토이가 쓴 여러 단편들을 묶은 단편집이다. 지하철 등에서 읽기 좋은 분량과 크기를 가지고 있어, 좌석에 앉아서 가볍게 읽어나가기 좋은 책이다. 많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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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전달의 방법은 탁월했으나, 전달하고자 하는 기독교적 가치관이 품은 독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민하지 못한 레프 톨스토이”


총평

짧은 변명

  • 이 책은 레프 톨스토이가 쓴 여러 단편들을 묶은 단편집이다. 지하철 등에서 읽기 좋은 분량과 크기를 가지고 있어, 좌석에 앉아서 가볍게 읽어나가기 좋은 책이다.
  • 많은 이들이 읽고 작품이 전달하는 가치에 ‘가슴이 따뜻해진다’고 보고하는 레프 톨스토이의 문학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에 동의하기 어렵다.
  • 이하의 총평에서 제시될 내용들은 니체의 사상을 처음 접하거나, 기독교적 관념에 오랫동안 노출된 사람들, 특히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거부감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정직〉과 〈사랑〉에 따라 글을 전개하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직설적인 인간이다.
  • 비판적으로 읽든 비판적으로 읽지 않든, 레프 톨스토이의 작품은 좋은 작품이다. (비판적으로 읽지 않으면 가슴이 따뜻해지고, 비판적으로 읽으면 감탄하거나 불쾌해하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에) 내가 ‘좋다’라고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일 뿐이다. 나는 결코 작품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1.

레프 톨스토이의 문학을 대표하는 문구를 ‘기독교적 가치’라고 요약해도 될까? 《부활》, 《전쟁과 평화》 등 러시아 문학의 대표작들을 여럿 남긴 작가의 색채는 아무래도 이 단편선 모음집에 수록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 〈촛불〉 · 〈두 노인〉 · 〈바보 이반〉 그리고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듯하다.

지난 2023학년도 2학기에 들었던 윤주한 교수의 서울대학교 〈철학으로 예술보기〉 강좌에서 들었던 내용에 의하면, 이 고집 센 러시아의 대문호에게는 자신의 문학 작품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 톨스토이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1898년의 글에서 예술 작품은 예술가가 자신이 느낀 감정을 그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매체라고 적시한 바 있는데, 그 감정은 명료해야 하며 또한 인류의 복지에 이바지하는 ‘좋은 감정’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예술 철학 하에서 예술가는 그가 만드는 예술 작품을 통하여 그 감상자들에게 ‘최상의 감정’, ‘인류에 이바지할 수 있는 감정’들을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전달하여, 인류의 복지에 공헌할 사회적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레프 톨스토이에게 있어 과연 ‘인류 복지에 이바지하는, 예술가가 마땅히 전달해야 하는 좋은 감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의 예술 철학이 위와 같다면, 톨스토이가 그의 예술 즉 문학 작품들을 통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 즉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 · 메시지가 분명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전달하기 바람직한’ 것들이었으리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는 “모든 사람은 자신을 살피는 마음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에서는 “성경에 ‘너희들은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너희들의 발을 씻어주겠다. 누구든지 우두머리가 되고 싶다면 모든 사람의 하인이 되어라’라고도 말씀하셨네.” 등과 같은 구절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톨스토이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또한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감정이란 〈사랑〉 · 〈연민〉 · 〈연대〉, 그리고 〈정직〉 · 〈성실〉 등으로 대표될 수 있는 기독교적 가치와 자세가 포함되어 있는 감정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자연히 떠오른다.

#2.

그러나 기독교적 가치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정직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성실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아니하고서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나 행위이고, 정직이란 거짓 없이 말하거나 행하는 것이며, 성실이란 어떤 행위를 제 시간 안에 그리고 꾸준히 하는 태도를 가리킨다고 하면 충분한 설명이 될까? 어쩌면 톨스토이는 그가 강력히 권장하는 이들 〈사랑〉 · 〈정직〉 · 〈성실〉과 같은 기독교적 가치가 추상적이라고 의심하는 독자들을 위해서 작품 안에 성경을 즐겨 인용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오래 전부터 성경을 친숙하게 접해왔으며 그 텍스트 안에 담긴 가치들에 친숙했기 때문에 성경으로 설명을 대신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이라 생각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톨스토이는 성경 《신약》에서 구절들을 다수 인용한다. 이 오래된 종교 서적을 종교적으로 접근하는 몇몇 사람들은 ‘실제 일어났다고 믿을 수 있는 일’들이 열거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독한 현실주의자인 나로서는 《신약》이란 신 또는 그 아들의 일대기라기 보다는 고도로 암호화되어 있는 텍스트에 가까워보인다. 얼마 되지 않는 물고기와 빵으로도 수천 명이 배불리 먹었다, 바다가 둘로 갈라졌다는 구절을 읽어나가다보면 성경은 실제 일어났던 일의 기술이라기보다는 그것을 과장한 기술이거나 혹은 고도의 비유를 동원한 메시지의 응축이라고 간주하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라는 직관이 강력해지곤 한다.

그러나 《신약》의 정체가 무엇이며 그것의 역사적 진위와 가치가 어떠하던지 간에,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다름 아닌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예수의 행보이다. 만약 성경이 과장 혹은 비유를 가득 담은 하나의 ‘이야기’, 즉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이야기라고 간주한다면 예수는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등장인물이요 혹은 사자가 되는데, 그 메시지들은 표면적으로는 오늘날의 〈인류애〉를 표현하는 것들이라고 간주될 수도 있으나 실은 이야기 속 ‘예수의 행위’들을 낱낱이 뜯어보는 경우 오히려 석연치 않거나 혹은 불편한 구석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3.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이 이 책의 몇몇 구절만 살펴봐도 예수가 이야기하는 소위 ‘기독교적 복음’, ‘기독교적 가치’에는 미묘한 불균형이 숨어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를테면 예수는 주로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을 ‘위했고’ 부자이며 교만한 이들에게는 ‘벌을 주었다’라는 기술, 그리고 집에 찾아온 자신을 환영하고 발을 씻어주며 향유를 부은 여인은 ‘축복’하고, 그러하지 않은 자는 ‘꾸짖었다’는 대목은 그에 대한 표준 해석으로서 사랑을 적용하기가 어려운 대목이 아닌가?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 즉 타인에게 〈사랑〉을 베푸는 이들은 〈사랑〉이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고, 교만하여 타인에게 베풀지 않는 이들은, 타인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한다고 여겨지는 이들은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 아닌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사랑은 조건 없이 타인을 위하는 마음, 타인을 인정하고 적어도 동등한 가치를 가지는 이라고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말하는 저 〈사랑〉이란 그 상대가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베풀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태도가 아니던가? 향유를 부어주지 않는 사람도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발을 씻어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즉 기독교적 규범 ·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 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과연 사랑받을 자격을 상실하는 것인가?

#4.

보다 과감한 주장도 가능하다: 과연 우리는 타인을 〈사랑〉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스스로가 〈성실〉하도록 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정직〉해야만 하는가? 보다 본질적으로 과연 거짓 · 위선 · 기만, 그리고 미워함, 불성실이 과연 우리의 마음 속에서 퇴출되어야만 하는 것들인가?

기독교적 가치관은 〈사랑〉하며 〈정직〉하고 〈성실〉한 자는 보상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자도, 〈성실〉하지 않는 자도, 〈정직〉하지 않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고통을 받을 이유가 있는가? 소위 말하는 〈양심의 가책〉을 과연 기독교의 그 ‘준엄한’ 가치관을 위반하였다는 점에 근거하여 우리가 과연 철두철미하게 느낄 필요가 있는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실〉하게 하루를 살아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지 〈거짓〉을 고했기 때문에 우리가 과연 죄인으로서 스스로를 간주하면서 ‘속죄하기 위한’ 삶을 살아나가야만 하는 것일까?

#5.

위 같은 논의는 오늘날의 사회상규 혹은 도덕 관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회가 말하는 메시지에 맞추기 위하여 우리가 인간 그 자체를 보는 시선까지 왜곡할 필요는 추호도 없다. 여기서 내가 논의하고 싶은 대상은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한다”와 같이 사람이라면 응당 따라야 한다고 고집부리는 도덕적 의무 혹은 가치관이 아니라, “사람이란 무엇인가?”하는 정체 규명 그리고 사람이 가지는 자연스러운 감정과 본성에 대한 왜곡 없는 고찰, 그리고 그 고찰에서부터 비롯한 보다 ‘건강한’ 도덕 관념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이미 이러한 정직성을 주장한 바 있다. 그는 기독교적 질서 · 가치관에서의〈양심의 가책〉이란 인간의 부정적인 모습마저 사랑할지언정 오히려 이들을 그르게 여기고 배척하도록 하는 강제성을 지닌 형벌과 다름 없다고 비판하였다. 《도덕의 계보》에서 그가 말하는 다음의 대목을 고려해보자.

그러나 죄의식, ‘양심의 가책’이라는 또 하나의 ‘저 음울한 사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 세계에 나타나게 되었는가? 이 문제와 함께 도덕 계보학자들에게로 되돌아 가보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 혹은 내가 아직 전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가? ― 그들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다섯 뼘 정도의 한갓 ‘현대적인’ 경험이 있을 뿐이며, 이러한 경험도 자신들의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런 지식도 과거를 알려는 의지도 없거니와 역사적 본능과 여기에 필요한 ‘투시력’은 더욱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도덕의 역사를 연구하려고 덤벼든다. 그들의 연구 결과가 진리와 거리가 먼 것으로 끝나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까지의 이 도덕 계보학자들이 예를 들면 ‘죄(Schuld)’라는 저 주요한 도덕개념이 빚(Schulden)이라는 극히 물질적인 개념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혹은 형벌이 의지와 자유와 부자유에 관한 어떤 전제와도 전혀 상관없이 일종의 보복으로서 발전해왔다는 사실을 짐작이라도 해보았겠는가?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박찬국 역. 아카넷. 中

#6.

〈죄〉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죄〉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가장 귀중하다고 여기는 인간이, 자신이 행한 행위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질 수 있을, 즉 긍지를 가질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죄〉를 가질 수 있는가? 〈죄〉는 결국 니체가 지적한 바처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한 복수의 개념으로서 등장한 것이 아니던가. 한 인간의 행위로 인하여 다른 이가 피해를 입거나 손해를 본 경우, 그에 상응하는 응당의 것을 지불하도록 하여 그러한 행위를 억제하기 위한 사회적 도구 · 제도로서 발달한 것. 바로 그것이 〈죄〉이자 〈형벌〉이 아니던가. 그런데 레프 톨스토이가 드러내는 저 기독교적인 〈죄〉, 그리고 그것의 반대 개념 혹은 지향점으로서 등장하는 〈가치〉들은 이러한 사실로부터 눈을 돌린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사랑〉을 베풀고, 〈정직〉하라고 하면서 〈성실〉할 것을 명령하지만 그것은 사실 그러한 행위를 바라는 사람들, 즉 저 성경을 쓰고 전파하는 자들의 욕망을 〈신〉의 거룩한 이름 하에 절대적이라고 포장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질문을 던지자. 과연 〈성경〉은 신의 거룩한 명령인가? 과연 〈예수〉의 이해할 수 없는, 때로는 자기모순적인 그 발언들이 모두 우리가 따라야만 하는, 그것에 따르지 않으면 벌을 두려워하거나 스스로를 책망해야 하는 준엄하고도 절대적인 기준이던가?

우리는 때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하며, 가끔씩 아무것도 하기 싫기 때문에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있거나 게으름을 피우기도 한다. 기독교의 가치관 하에서 이들은 모두 〈죄〉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도덕적 명령,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인간들의 욕망, 사회가 그러한 인간들로 구성되기를 바라는 이들의 소망을 달리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다른 이들의 소망과 욕망을 거스르는 것이 〈죄〉라면, 이 세상에는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살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7.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논의가 타당하다면, 즉 기독교적 〈사랑〉과 〈정직〉 · 〈성실〉의 정체가 인간의 자연한 감정이라기보다는 전적으로 성경의 집필자들과 지배자들에 의한 일종의 도덕적 강압이자 명령이라고 한다면 레프 톨스토이의 저 유명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은 반드시 수정되어야만 한다. 사람은 결코 사랑으로써 산 적이 없고 또한 사랑으로써 살 수 없다. “오직 사람은 그 자신으로서, 그리고 그 자신으로써 사는 것일 뿐이다”.

톨스토이는 기독교적 가치들이 ‘인류의 복지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그에게는 유감스럽게도, 나로서는 기독교적 가치들은 니체의 주장대로 인류를 병들게 하는데 이바지하는 것만 같다. 톨스토이의 저작들은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있어서는 아주 탁월했지만, 그것이 전달하는 정수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이 아무래도 부족한 듯 하다.


기억에 남는 문구들

#1.

그러자 천사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온몸이 빛으로 둘러싸였으므로 눈으로는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천사는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천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런 것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살피는 마음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어머니에게는 자기 아이의 생명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또 부자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지 못했따. 하물며 어떠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무언가가 산 자가 신을 장화일지, 죽은 사람에게 신기는 슬리퍼일지를 알지 못한다.

내가 인간이 되고 나서 무사히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내 자신의 일을 여러 가지로 걱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나가던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사랑이 있어 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나를 사랑해주었기 때문이다. 또 두 아이들이 잘 자란 것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생활을 염려해주고 걱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한 여인에게 진실한 사랑이 있어 그 아이들을 불쌍히 여겨 사랑해준 덕분이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까닭은 각각 자기 스스로의 일을 염려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그들이 잘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번에는 한 가지 일을 더 깨달았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이 뿔뿔이 떨어져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 각자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제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들이 하나로 뭉쳐 사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모든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또 만인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계시하신 것이다.

이제야말로 나는 깨달았다. 모두가 자신을 걱정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 사실은 오직 사랑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 속에 사는 자는 하느님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pp. 62-64.

#2.

마르틴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만 자려고 했으나 그래도 쉽사리 책을 놓을 수가 없어서 다시 제7장을 읽었다. 로마 군대 백부장 이야기부터 어느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야기, 세례 요한이 두 제자에게 말한 대목, 부유한 바리새인이 예수를 자기 집에 초청한 이야기까지 읽었다. 그리고 죄 많은 여자가 그리스도의 발에 향유를 바르고, 그 위에 눈물을 뿌리니 그리스도가 그 죄를 용서하셨다는 이야기도 읽었다. 이렇게 43절을 읽고 나서 다시 다음 구절을 읽었다.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씀하시되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내 발을 닦아주었다. 너는 내 얼굴에 입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줄곧 내 발에 입 맞추고 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라주었다.

마르틴은 생각했다.

‘발 씻을 물을 주지 않고, 입을 맞추지 않고,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

마르틴은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내가 그 바리새인과 같았단 모양이야. 오로지 내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었어. 차를 마시고 싶다든지 따듯하고 깨끗한 옷을 걸치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손님을 위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어. 오직 내 생각만 하느라 손님의 일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지.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서 손님은 누군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시다.’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pp. 74-75.

#3.

“자, 한 잔 더 마시고 기운을 내게. 내가 생각하기에 예수께서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시며 모든 인간을 만나보셨겠지만 특히 우리처럼 신분이 낮은 인간들을 오히려 따뜻하게 대해주셨을 것이 분명해.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격려하셨고, 제자도 대개 우리 같은 죄 많은 사람들 중에서 택하셨지. 마음이 교만한 자는 오히려 아래로 떨어지고, 마음이 가난한 자는 위로 올라간다고 말씀하셨어. 성경에 ‘너희들은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너희들의 발을 씻어주겠다. 누구든지 우두머리가 되고 싶다면 모든 사람의 하인이 되어라’라고도 말씀하셨네. 또한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하며 인정이 있는 자는 행복할지니라고도 말씀하고 계시네.”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pp. 80-81.

#4.

예핌은 잠자리에 들었으나 문득 마음속에 의심이 생겼다.

‘저 순례자는 돈을 도둑맞은 게 아닐 거야. 처음부터 돈이 없었어. 왜냐하면 돈을 희사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나에게만 내라고 하면서 자기는 한 푼도 내지 않았어. 그런 데다가 내게서 1루블까지 빌려갔지!’

그러나 예핌은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을 스스로 꾸짖었다.

‘내가 왜 사람을 의심하는지 모르겠군. 남을 의심하는 것은 죄악이지. 다시는 이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고 생각한 순간 그 순례자가 돈에만 눈독 들이던 모습, 지갑을 도둑맞았다고 떠들어대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 사람은 정말로 가진 돈이 없었어.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연극을 하는 거야.’

〈두 노인〉 pp.134-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