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4. 2023. 4. 5. ~ 2023. 4. 7.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4. 2023. 4. 5. ~ 2023. 4. 7.

2023-04-08 0 By 커피사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 또는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짧게 노트에 휘갈긴 것을 그대로 옮겨두는 공간입니다.


#1.

배운다는 것은 결국 사물을 보는 방법을 달리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일찍이 알베르 카뮈가 말했듯, ‘생각’이라는 단어는 결국 대상의 다수성으로부터 대상의 일부를 추출하고, 그것에 어떤 특별함을 부여하는 독점적인 힘의 작용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는 대상을 독점함으로써만,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상에 마음으로 다가오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부여하는 과정인 해석이라는 힘의 작용으로써만 대상을 인식하고 또한 생각할 수 있다. 요컨대 사유(思惟)를 통하여 사물은 오로지 다수 속의 하나라는 위치를 점거하는 것이다. 즉, 생각은 사물을 그것이 위치한 세상 속에서 분리하여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으로 올려두는 것이다.

…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사유한다는 것은 통일하는 것이 아니며, 현상을 어떤 큰 원리의 모습으로 바꾸어 우리에게 친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유한다는 것은 보는 방법을 다시 배우고 자신의 의식이 향하는 방향을 정해 주며 개개의 이미지가 특권적인 장소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상학은 세계를 설명하기를 거부하고 단지 경험된 것에 대한 묘사나 서술에 그치고자 한다. 세상에 불변의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여러 가지 진리들이 존재할 뿐이라는 원초적 주장에 있어서 현상학은 부조리의 사상과 일치한다. 저녁 바람부터 어깨에 얹히는 이 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각기 그것 자체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 오직 의식만이 진리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빛을 던져 준다. 의식은 대상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대상을 주시할 뿐이다. 그것은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이며 베르그송의 비유를 빌리자면 단번에 어떤 영상 위에 고정되는 영사기와 같은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시나리오가 없고 밑도 끝도 이어지는 화면뿐이라는 점이다. 이 마술적인 환등 속에 나타나는 모든 영상은 하나하나가 특권을 가진다. 의식은 주목받은 대상들을 경험 속에 고정시킨다. 의식은 기적과도 같은 위력에 의해 대상들을 분리해 낸다. 이렇게 되면 대상들은 모든 판단 밖으로 벗어난다. 의식을 특징짓는 것은 바로 이 ‘지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어떤 목적성의 관념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 속에 내포된 ‘방향’의 의미로만 사용돼 오직 지형학적인 뜻밖에 없다.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시지프 신화 Le Mythe de Sisyphe》.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68-69.

#2.

사물을 보고 그것에 독점적 지위, 즉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인간의 고유한 특질이 하나 있다. 사물들 사이를 서열화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흔히 어떤 것이 더 ‘좋고’, 어떤 것이 더 ‘나쁘고’ 하는가 하는 문제가 바로 이 서열화의 문제이다. 가치 평가라고 불리는 인간의 비교 특질은 사물에 부여된 독점적 지위들을 비교하고, 그 지위 중 어느 것이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며, 어느 것이 더 낮은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인지를 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 가치 평가라는 사물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대상으로 입법하는 자는 누구인가 자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입법자가 정(停)이라는 거짓인지, 아니면 동(動)이라는 헤파이스토스인 것인지가 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3.

정(停)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강력하다. 정(停)에 대하여 붙은 저 수많은 이름들만을 보아도 이 사실은 자명하다. 신, 절대성, 유일성, 우상, 목적, 목표, 도덕, 당위, 의무… 이것들 모두가 과연 정(停)에 대한 별칭들이라는 점을 고려하자. 그러나 정(停)이 입법자가 되는 순간, 정(停)은 필연적으로 동(動)을 피고인으로 세우는 재판의 재판장이 된다. 정(停)을 입법자로 세운 인간은 자신을 변호하려고 한다. 삶의 고통에 대하여 자신의 운명을 정당화해줄, 자신의 삶을, 자신을 설명해줄 어떤 ‘예언서’를 찾아다니게 된다. 그러나 그런 ‘예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 그의 운명을 ‘정당화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순간 우리는 순식간에 정(停)의 포로가 되어 그의 말 한마디에 사물이 좌지우지되는 신세로 전락한다. 그러나 그러한 정(停)도 우리가 사물에 대해 부여한 독점적 지위에서 근원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그의 폭정은 우리가 그의 근원을, 그의 계보를 명백히 드러냄에 따라 자연스럽게 추방되어야 할 것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우상을 파괴해야 한다.” … 정말 그러하다. 모든 우상은 파괴되어야 하고, 올바른 의지를 우리는 입법자로서 세워야 한다. 우상은 그것이 우상인 한, 그것이 삶을 재단하는 한, 그것이 동(動)을 죄인으로 만드는 정(停)인, 자신의 계보학적 기원을 망각한 정(情)인 한, ‘긍정을 위한 부정’으로써 부정되어야 한다.

니체는 자기 철학의 목적을 허무주의와 그것의 형태들로부터 사유를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그것은 새로운 사유 방식, 사유가 의존하고 있는 원리 속에서의 전복, 계보학적 원리 자체의 재건, 〈전환 transmutation〉을 함축한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원한과 가책의 관점에서 사유하길 계속해 왔다. 우리는 금욕적 이상 이외의 다른 이상이 없다. 우리는 삶을 심판하기 위해서, 그것을 죄가 있고, 책임이 있으며, 잘못이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삶에 인식을 대립시켰다. 우리는 의지를 나쁜 것, 원초적 모순으로 어리둥절해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교정하고, 그것을 속박하고, 그것을 제한해야 하며, 게다가 그것을 부정하고 제거해야만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값을 치룰 때만 좋은 것이었다. 의지의 본질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때, 자기 자신의 발견으로 신음하지 않는 철학은 없으며, 두려움에 떠는 점쟁이로서 미래에 대한 흉조와 동시에 과거 속에서의 악의 원천을 보지 못한 철학은 없다. 쇼펜하우어는 이 낡은 입장을 극단적인 결과들로까지 밀고 나갔다. 그는 의지의 도형장과 익시옹의 바퀴를 말한다. 니체는 의지의 발견으로 신음하지 않으며, 그것을 회피하려고도 그것의 결과를 제한하려고도 하지 않는 유일한 자이다. 〈새로운 사유 방식〉은 긍정적인 사유, 삶과 삶 속에서의 의지를 긍정하는 사유, 결국 모든 부정적인 것을 추방하는 사유를 의미한다. 그것은 미래와 과거의 결백을 믿는 것, 영원회귀를 믿는 것이다. 현존은 유죄로 간주되지 않으며, 의지 자체도 현존의 죄가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즉 그것은 니체가 즐거운 소식 joyeux messag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의지, 그것은 해방된 자와 즐거운 소식 전달자가 자신을 일컫는 바이다.〉…

질 들뢰즈 (Gilles Deleuze). 《니체와 철학 Nietzshce et la philosophie》. 이경신 역. 민음사. 2001. pp. 79-80.

#4.

대상을 사유하는 것이 만약 카뮈의 견해대로 사물에 독점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대상에 대한 이해 혹은 사유는 반드시 그 독점적 지위가 무엇인지 명시되어야만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흔히 무언가를 정확히 이해했다거나 생각한다는 것은 따라서 나 자신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으면, 즉 나에게 있어 그 사물이 어떤 방식으로 이해되었는가를 어떠한 식으로든 기술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행위가 될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나만의 언어로 표현하기’ 식의 공부법은 사실 핵심을 이미 궤뚫고 있었던 것이다.

즉, 무언가를 배울 때에는, 대상에 대해 다른 해석이나 다른 가치 평가를 부여하는 계기를 가지고자 할 때에는, 그 해석이나 가치 평가의 정체를 자신의 언어로 명확히 기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상이 인식되어 인간 그 자신의 것이 될 때, 그 사물에 부여되는 독점적 지위는 오로지 자신만의 언어로만 기술될 수 있으니까.


#5.

나는 이미 일전에 〈과학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같은 이유로, 나는 〈수학자〉라던가 〈심리학자〉라던가, 이와 같은 〈학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나는 오직 〈철학자〉가 되기를 원할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철학〉은 통상적 의미에서 사용되는 그 〈철학〉, 즉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지극히 독일적인 〈철학〉이 아니다. 독일적인 〈철학〉은 동(動) 이전일 수 없는 정(停)으로서 동(動)을, 삶을 재단하는 철학이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다.” 나는 삶을 가치 평가의 최우선에 올려두며, 나의 삶을 긍정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학문에는, 인간 이해의 산물에는 이미 너무 많은 절대 정신이 곳곳에 가득하지만 나는 그 동(動)으로부터의 계보를 기억하면서 여전히 생성을 긍정할 수 있다.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들, 그러니까 내가 느끼고 내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 이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매 순간 나에게 닥쳐오는 이 모순, 이 부조리를 똑바로 응시하기 위하여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오직 이 의미에서 사용되는 〈철학〉, 즉 생을 재단하지 않는 해석과 가치 평가를 부여하는 〈철학〉으로서만 나는 〈철학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6.

사람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기에 맞서기보다는, 흔히 다른 어떤 의지할 것 혹은 자신을 정당화할 것을 찾는 것에 더 익숙했다. 그러나 이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운명에, 자신을 향해 닥쳐오는 세상의 부조리함에, 자신이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무지와 무능으로부터 회피하는 것이란 따라서 비겁한 것이다.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리고 주어진 조건과 시간 하에서 항상 최상의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반복되는 그 전쟁에 기꺼이 뛰어들어 쉴새없이 찌르고 베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의 자신을 내일로 정당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일의 자신으로 오늘을 재단하는 것은 결국 오늘도, 내일도, 살아있는 동안 영원토록 반복될 부조리의 더없고 강력한 인식을 계속해서 내일의 나 자신으로 미룰 뿐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맞서 싸우는 것이다……. 회피하는 것이 아닌, 맞서 싸우는 바로 그것!

정복자들은 행동이 그 자체로 무용하다는 것을 안다. 유익한 행동이란 단 하나밖에 없다. 즉, 인간과 대지를 다시 만드는 행위가 그것이다. 나는 결코 인간들을 다시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마치 그럴 수 있는 것처럼’ 해야 한다. 왜냐하면 투쟁의 길이 나로 하여금 육체와 마주치게 하기 때문이다. 비록 욕된 것일지라도 육체는 나의 유일한 확신이다. 나는 오직 육체로만 살 수 있다. 피조물의 세계가 나의 조국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부조리하고 보람 없는 노력을 선택한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투쟁의 편에 선 것이다. 시대가 그런 선택에 응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지금까지는 정복자의 위대함이란 지리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정복한 영토의 넓이를 보고 측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이 말의 뜻이 달라져 더 이상 승전 장군을 가리키지 않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위대함은 진영을 바꾸었다. 그것은 항거(抗拒)와 내일 없는 희생 속에 있다. 이 경우 역시 패배 취미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당연히 승리가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오직 한 가지일 뿐이니 그것은 바로 영원한 승리다. 그것은 나로서는 절대로 거두지 못할 승리다. 그것이 바로 내가 부딪치고 매달리는 부분이다. 현대의 정복자들의 시조인 프로메테우스의 혁명을 위시하여 혁명이란 무릇 신들에게 항거하여 성취되는 것이다. 그것은 주어진 운명에 항거하는 인간의 권리 주장이다. 그러니까 가난한 자의 권리 주장은 하나의 구실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오직 그 정신을 그것의 역사적 행위 속에서만 파악할 수 있고 바로 그 점에서 나는 그 정신에 동조한다. 그렇다고 내가 그것에 안주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본질적인 모순과 맞서서 나는 나의 인간적 모순을 지탱한다. 나는 나의 통찰을 부정하는 것의 한복판에 나의 통찰을 확립시킨다. 나는 인간을 짓누르는 것 앞에서 인간을 찬미하고 그때 나의 자유, 나의 반항, 나의 열정은 그 긴장, 그 통찰, 그리고 그 기상천외의 반복 속에서 한 덩어리가 된다.

그렇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목적이다. 그의 하나밖에 없는 목적이다. 그가 무엇인가가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바로 삶 속에서다. 이제 나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안다. 정복자들은 이따금 승리하는 것과 극복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신들은 잘 안다. 인간은 저마다 어느 순간 자기가 어떤 신과 동등하다고 느낀 적이 있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섬광 같은 한순간 인간 정신의 놀라운 위대함을 느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정복자들이란 끊임없이 그러한 절정에서, 그런 위대함을 뚜렷하게 의식하며 살아감을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힘을 느끼는 사람들일 뿐이다. 이는 산술의 문제, 즉 많고 적음의 문제다. 정복자들은 가장 많은 것을 할 수 있따. 그러나 그들은, 인간이 원할 때 인간 자신 이상의 것을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인간적 용광로의 아궁이를 결코 떠나지 않은 채 혁명의 혼 속의 가장 뜨거운 곳으로 깊이 들어간다.

그들은 그곳에서 훼손된 피조물들을 발견하지만 그들이 사랑하고 찬양하는 유일한 가치, 즉 인간과 인간의 침묵을 만난다. 그것은 그들의 헐벗음인 동시에 그들의 부(富)다.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사치가 있을 뿐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관계의 사치다.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이 세계 안에서 인간적인, 오직 인간적인 것에 불과한 것은 무엇이든 보다 뜨거운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을 어찌 깨닫지 못하겠는가. 긴장된 얼굴들, 위협받는 동지애, 인간들 상호 간의 지극히 강하고 수줍은 우정,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부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언젠가 소멸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그의 능력과 한계, 즉 그의 효력을 가장 깊이 느끼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부 가운데서다. 어떤 사람들은 천재를 말했다. 그러나 천재는 너무 성급한 표현이다. 그보다 내게는 지성이라는 표현이 나아 보인다. 이때 지성은 멋진 것이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지성은 이 사막을 밝혀 지배한다. 지성은 자신의 굴욕적 상황을 알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그것은 이 몸과 동시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함을 안다는 것, 바로 여기에 그의 자유가 있다.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시지프 신화 Le Mythe de Sisyphe》.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134-136.

#7.

〈어제의 나 자신에 대한 살해〉. 이 구(句)보다 사는 것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사는 것에서 찾을 수 있는 인간의 위대함이란 무엇인지를 보다 극명히 드러내줄 수 있는 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루하루 나 자신의 무능과 무지를 명확히 인식하면서, 따라서 그 무능과 무지로부터 벗어나고픈 강력한 추동 ― 즉 합리에의 의지 내지 향수 ― 에 따라 최선을 다하여 배우고 익히며 또한 수많은 〈해석〉과 〈가치 평가〉를 시도하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지는 세상 속에서, 나는 사물을 나름대로의 언어로 기술할 수 있는 독점적 영역을 부여하고 그것들을 엮어낸다.

학문은 이제 더 이상 다른 어떤 이보다 더 나아진다던가, 〈능력〉의 배양이라던가 하는 문제와 관련될 수 없다. 그 문제들의 근원에는 삶을 재단하고 정당화되어야 하는 것으로 만드는 당위의 사상, 이데올로기가 있다. “더 성실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진술이 된다. 그것은 자본주의 혹은 도덕이라는 기성이 요구할 뿐인 공(空)이다. 유일하게 있는 질문이란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뿐이다. 살아있는 것을 나는 ‘어제의 것을 죽이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나는 매일 태양이 떠오름에 따라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고, 해가 지고 잠자리에 나의 몸을 뉘일 때, 그리하여 나의 눈이 감길 때마다 죽는 것이다. 위대한 자정에 나는 어제의 나를 죽이고, 새로운 오늘의 나 자신이 탄생하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