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춤 #9. 플라톤, . ‘시인추방론’

잠시, 멈춤 #9. 플라톤, <국가>. ‘시인추방론’

2021-03-10 0 By 커피사유

잠시, 멈춤 시리즈는 필자가 읽은 글 중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일부, 혹은 전부 인용하는 등, 이 카페에 모아 두는 포스트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로 포스팅되는 모든 글의 경우, 필자가 쓴 글이 아님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포스팅에 사용되는 모든 글의 출처는 포스트의 맨 하단에 표시합니다.

“이 점을 생각해보게. 본래 실컷 울고불고하며 비탄하고 싶은 욕구가 있으면서도 우리 자신이 불행을 당했을 때는 억압되어 이런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던 그 부분이 바로 시인들에 의해 충족되어 즐거워하는 부분이라고 말일세. 한편 우리의 본성상 가장 훌륭한 부분은 이성과 습관에 의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터라 비탄하는 부분에 대한 감시를 늦춰버리네. 그것이 지켜보는 것은 남의 고통이고, 선량한 인간으로 자처하는 누군가가 어울리지 않게 슬퍼할 때 그를 칭찬하거나 동정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전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네. 오히려 우리는 거기에서 얻는 즐거움을 이익이라고 생각하기에, 시(詩) 전체를 경멸함으로써 즐거움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네. 그도 그럴 것이, 남의 것을 즐기면 그중 일부는 필연적으로 자기 것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니까.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연민의 정을 느끼는 부분을 남의 불행 속에서 가꾸어주고 강하게 만들어준다면, 정작 우리 자신이 불행을 당했을 때 이 부분을 억제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네.”

“지당한 말씀이에요” 하고 그가 말했네.

“우스꽝스러운 것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자네가 몸소 행한다면 부끄러워할 익살을 희극 공연장이나 사적인 모임에서 듣고 아주 큰 즐거움을 느끼고는 나쁜 것이라고 싫어하지 않는다면, 자네의 행동은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에서 보이던 행동과 똑같은 것이네. 자네는 이번에도 광대라는 평을 들을까 두려워서 자네 안에 억제하고 있던 부분, 즉 익살을 부려보고 싶은 부분을 늦춘 것이라는 말일세. 그리고 만약 자네가 극장에서 이 부분의 기를 되살려준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생활에서도 자꾸만 희극배우가 되어갈 것이네.”

“물론이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

“또한 시적 모방은 애욕과 분노, 우리가 우리의 모든 행동에 수반된다고 주장하는 혼 안의 욕구와 고통과 즐거움과 관련해서도 우리에게 똑같이 작용하네. 그런 것들은 시들어 없어져야 하는데도 시는 물을 주어 가꾸고 있으며, 우리가 사악하고 비참해지는 대신 선량하고 행복해지려면 우리가 그런 것들을 지배해야 하는데도 오히려 시는 그런 것들을 우리의 지배자로 만드니 말일세.”

“선생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네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따라서 글라우콘, 자네가 호메로스야말로 헬라스의 스승이었으니 제반 인간사를 경영하고 교육하는 데서 이 시인의 말을 들춰 배워야 하며, 자신의 삶을 이 시인을 따라 정돈하여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호메로스의 찬미자들을 만난다면, 그들도 나름대로 가장 훌륭한 자들이니 친절하고 공손하게 대해주어야 하고 호메로스가 가장 시인다운 시인이며 비극 시인 중 제1인자라는 것도 인정해주어야 하네. 그러나 자네는 시 가운데 신에게 바치는 찬가와 훌륭한 인간에게 바치는 송가(頌歌)만이 우리 나라에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도 알아야 하네. 자네가 서정시나 서사시를 통해 감미로운 무사 여신을 받아들인다면, 자네 나라에서는 쾌락과 고통이 관습과 만인에 의해 언제나 최선의 것으로 간주되던 원칙을 대신하여 군림할 것이네.”

“지당한 말씀이에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우리는 시에 관해 시는 그런 성질이 있는 만큼 우리가 그때 시를 우리 나라에서 추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회고해봤는데, 이상으로 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변호한 것으로 해두세. 그렇지만 우리가 시한테 완고하고 세련되지 못했다는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해, 철학과 시는 옛날부터 사이가 나빴다는 사실을 시에게 말해주기로 하세. ‘주인을 향해 깽깽 짖어대는 개’라든가, ‘어리석은 자들의 쓸데없는 잡담으로 우쭐대는 자’라든가, ‘지나치게 영리한 자들의 떼거리’라든가, ‘어쩌다 거지가 되고 말았는지 섬세하게 사색하는 자들’이라든가 그 밖의 수많은 험담이 철학과 시 사이의 오랜 대립을 입증해주니 말일세. 그럼에도 우리는 이렇게 말해두기로 하세. ‘만약 즐거움을 목적으로 삼는 시적 모방이, 훌륭하게 다스려지고 있는 국가에 자기가 필요하다는 증거를 댈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의 귀국을 환영하겠다. 우리도 시의 매력에 끌리는 것을 의식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배반하는 것은 불경한 짓이다.’ 여보게, 자네도 시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특히 호메로스를 통해서 시를 보게 되면 말일세.”

“아주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시도 서정시나 그 밖의 다른 운율로 자기변호를 한 뒤에 귀국하는 것이 옳겠지?”

“물론이지요.”

“자신은 시인이 아니지만 시인의 친구인 시의 옹호자에게도 시는 즐거움을 줄 뿐만 아니라 정체와 인간 생활에도 유익하다는 것을 시를 위해 산문으로 증명할 기회를 주되 그들의 말을 호의적으로 경청하도록 하세. 시가 즐거움을 줄 뿐 아니라 유익하기도 하다는 점이 밝혀지면 우리에게도 이익이 될 테니까.”

“왜 이익이 되지 않겠어요?”

“하지만 여보게, 그러지 못하면 마치 누군가를 사랑하던 사람이 그 사랑이 무익하다고 생각될 때는 아무리 괴롭더라도 사랑을 단념하듯, 우리 역시 괴롭더라도 시를 단념할 것이네. 우리는 이런 훌륭한 정체에서 교육받은 덕분에 모방적인 시를 사랑하게 된 만큼, 그런 시가 가장 훌륭하고 가장 진실한 것으로 밝혀지면 기뻐할 것이네. 그러나 시가 자기변호를 하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는 대중이 시에 대해 품고 있는 유치한 사랑에 빠지지 않기 위해 시를 들을 때마다 우리 자신을 향하여 지금의 이 주장을 주문(呪文)처럼 되뇔 것이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시를 진리를 파악하는 진지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시를 듣는 자는 누구나 자기 내부에 있는 정체(政體)를 염려하여 시를 경계하고 시에 관한 우리의 주장을 믿어야 한다고 말일세.”

“전적으로 동의해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여보게 글라우콘, 인간이 선량해지느냐 사악해지느냐 하는 것은 중대한 싸움이며 보기보다 훨씬 중대하네. 따라서 우리는 명예나 돈이나 권력이나 무엇보다 시에 홀려 정의나 그 밖의 다른 미덕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네.”

플라톤, <국가>. 제10장. ‘시인추방론’ 中 일부 발췌 / 플라톤의 국가·정체, 박종현 역, 서광사 (2005).